1980년의 첫 주말 아침 나는 흥분해 있었다. 소매치기 출신의 세계 챔피언, 소매치기 전과가 드러나 한국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구치소 안에서 샌드백을 치며 권투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세계 챔피언이 된 뒤 누구도 예상 못할 3차 방어를 해 내며 한국 권투사의 금자탑을 세운 김성준이 일본 원정 방어전에서 나까지마 시게오라는 일본 선수에게 그야말로 맥없이 타이틀을 내 주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지인 가운데 당시 세계 챔피언들의 후원자들이 계셨던 관계로 나는 3명씩이나 되던 당시 세계 챔피언,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의 사인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챔피언은 김성준이었다. 링 위에서 펼치는 그의 필사적인 ‘전쟁’을 육안으로 지켜봤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소매치기 전적 등으로 웅변되는 그의 라이프스토리를 당시 TBC 다큐멘터리였던 <인간만세>를 통해 그 극적인 생이 주는 감동에 눈물도 흘려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고난을 뚫고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른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다. 당시 권투 중계를 도맡아 하던 박병학 아나운서의 회고를 들어 보자.
김성준의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허겁지겁 체육관으로 달려오던 박병학 아나운서는 갑자기 호주머니가 허전한 느낌을 받는다. 당시만 해도 인파가 붐비면 어김없이 똬리를 틀고 있던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털린 것이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어쨌든 중계를 해야 했고 15라운드를 줄기차게 떠든 후 한숨 돌리고 있는데 중계석 책상 한 구석에 놓인 지갑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어 이건 내 건데?”
지갑을 실례했던 소매치기 누군가가 박병학의 중계석 책상에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다. 추측컨대 소매치기는 작업에 성공한 이후 지갑의 임자가 방송사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행여 김성준의 전직과 연관하여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살금살금 중계팀으로 기어들어 책상 위에 지갑을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 소매치기에게 김성준은 어떤 존재였을까. 지갑을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려 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마음은 얼마나 살가왔을까.
그런데 그런 대상이 그것도 1980년 정초부터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며 구차한 과거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초대 세계챔피언 김기수부터 유제두, 홍수환 등 쟁쟁한 이름들도 해내지 못한 3차방어의 금자탑을 쌓았던 김성준의 패배에 분노하며 나는 그 사인을 찢어발기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권투팬이었던 아버지는 “역시 한국 놈들은 안되는 거야.” 하면서 탄식하셨다. 챔피언이 되면 “배때기에 기름이 찰 수 밖에 없고” 이른바 ‘롱런’ 같은 건 해당 사항이 없다는 탄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바뀌었고 ‘한국 놈들’도 아버지의 사고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프로복싱계에서는 대학생 복서 박찬희가 그 주축이었다. 박찬희는 멕시코의 강타자들을 연이어 침몰시키면서 3차 방어에 성공했고 김성준이 타이틀을 잃은 한 달 뒤 필리핀 선수까지 무찌르고 4차 방어를 달성한 것이다.
항상 머리에 태극 마크를 한 머리띠를 두르고 경기장에 입장했던 박찬희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쓸고 다녔던 김성준과는 조금 달랐다. 집안 형편도 나쁘지 않았고 아마튜어 선수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아 아시안 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두루 밟은 뒤 프로에 입문했던 선수였던 것이다. 소매치기 혐의 때문에 한국 챔피언의 자리에서 영창으로 직행했던 김성준, 대학생 복서로 기네스 북에도 오른 박찬희, 아마튜어의 화려한 전적은 커녕 유치장 안에서 “권투할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를 부르짖던 김성준과 올림픽 금메달을 아깝게 놓치고 프로로 돌아 단 11전만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쥔 박찬희. 그 묘한 대조가 80년의 벽두에 드리우고 있었다.
나야 꼬마 권투팬으로서 챔피언들의 몰락과 영광에 일희일비를 거듭할 뿐이었지만 1980년벽두는 여러 사람들에게 정중동(靜中動)의 시기였다. 그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이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갈지, 하다못해 비상계엄은 언제까지 갈지조차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른 안개 속 겨울이었다는 뜻이다. 그 안개를 뚫고 세상으로 나온 두 사람의 조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1980년의 앞머리에 대한 기억 더듬기를 마감해 보자.
우선 조영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65학번으로 입학하자마자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주목을 받은 걸출한 신입생이었던 그는 사법고시 준비를 위한 대학원 공부 중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라는 비극을 접하게 되고 그 인생 경로를 바꾸게 된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 수배자로 6년을 보냈고 수배 기간 동안 80년대를 통틀어 수십만 대학생을 울린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온몸으로 써내린 그가 1980년 1월 옥인동 대공분실에 스스로 출두한다.
1979년 12월 유신 체제의 결정판이라 할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됐고 그에 따라 옥중의 재야 인사들이 석방됐으며 해직 교수들의 복직과 제적 학생들의 복교가 운위되던 즈음이었다. 한때 나라를 뒤흔들었던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잔여 형기도 면제되는 분위기에서 조영래는 수배 해제를 받았고 몇 달 뒤 사법연수원에 입소하게 된다. 이후 1990년 돌아가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하늘이 무너져도 그 정의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전설적인 변호사 조영래의 첫발이었다.
1980년 1월 나는 또 한 명의 유명해질 조씨를 만나게 된다. 물론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고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이지만. 동네 전파사에는 좀 변태같은 노총각이 있었다. 생긴 건 멀끔하게 생겨서 동네 아가씨들에게 꽤 인기도 있었지만 어린 아이들 붙잡고 별 이상한 얘기를 다 늘어놓는 바람에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었다.
어느 날 등화관제 훈련 (온 동네 전깃불을 다 꺼야 하는 민방위 훈련)을 하던 날, 동네 장난꾸러기들과 함께 온 동네를 누비며 “불꺼! 불꺼!”를 부르짖고 다니던 나는 열려 있던 전파사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에게 전파사 형은 느그들 이 노래 들어 봤나? 하면서 카세트 테이프를 찾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무슨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인데 너무 좋아서 녹음해 두고 듣는다고 했다. 라디오 드라마 제목이 희한했다. “창 밖의 여자” 노래 제목도 <창 밖의 여자>였다.
캄캄한 어둠 속 카세트 테이프 불빛만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나는 80년대 슈퍼스타, 남진과 나훈아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음악의 황제로 등극한 대가수 조용필의 노래를 처음으로 들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고 가요는 몇 개 알지도 못했지만 그 울부짖는 듯 애잔하고 절규하면서도 호소하는 독특한 음색의 가수의 노래에 아이들은 쉽게 집중했다. 얼마 후 등화관제가 끝났을 때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흉내낼 수 있을 만큼.
조영래는 황금같은 20대와 30대 초반을 칼날 위의 수배생활로 보내야 했고 조용필은 신인이 아니었지만 대마초 파동이니 뭐니 한참의 신산(辛酸)을 견뎌야 했다. 이 두 사람에게도 1980년의 여명은 ‘구차한 기억을 뒤로 하고 팔팔하게 날아오르는’ 도약대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바람으로 그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1980년대는 나의 것이다 하고 소리치며 주먹을 부르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 둘도 몰랐고 나머지 사람들도 거의 몰랐다.
개학 후 담임 선생님은 어느 수업 도중에 ‘인삿말’에 대한 얘기를 오래 했다. 과거 우리 인사말은 못먹던 시절에는 “진지 드셨습니까? 였고 해방 직후 전쟁까지 누가 죽을 줄 모르던 시절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조심스레 인사했고 그 뒤에는 ”날씨 좋습니다“라든가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돼 가다가 대통령 가신 뒤에 “밤새 안녕하십니까”로 돌아갔다고. 당시 인사말이 ‘좋은 아침입니다’ 등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는 담임 선생님의 학설은 지지할 수 없으나 그 예언은 몇 달 내로 불길하게 맞아 떨어진다. “밤새 안녕하십니까”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었다.
첫댓글 세계챔피온 이름도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요새, 새삼스레 조용필의 노래에 빠져있는 1인 입니다~~
그겨울의 찻집^^;좋아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역사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오래 기억 되는 그 추억!...()
모두가 챔 피언~~^^
홍수환이 생각납니다~ㅎㅎㅎ
챔피언, 즐거운 네가 챔피언~~!
지나고 보면 한 때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