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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스데반 집사의 설교1)
사도행전 7:1~8
스데반 집사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면서 헬라파 유대인 회당들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유대교의 전통적 믿음을 고수해왔던 극히 보수적인 헬라파 유대교 회당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복음 전도와 변증을 듣고서 이기지 못하니 없는 증인들까지 준비하고 강제로 체포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습니다. 일찍이 산헤드린 회당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에게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던 유대인 최고의결기구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승천 후에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고 성장을 해가는 와중에 지난 번에는 두 번이나 사도들이 불려갔다가 풀려났는데 이제 스데반 집사가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고발된 죄목도 예수님께서 당하신 죄목과 거의 같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께서 성전을 모독하였으며 율법을 고치겠다고 주장했다고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발을 당하여 공회 앞에서 스데반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변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 기회를 통하여 자기를 변명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통치과 인도하심을 길게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변증하는 데 열중을 합니다. 마치 훗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어 유대인들의 고발을 당했을 때 자기를 변명하기보다는 그 자기 변증 시간에 전도하여 듣는 자들을 주님께 인도하고자 함과 같은 시도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사도들의 설교보다 훨씬 더 길게 자세히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설교 첫 도입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통상 자기들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을 먼저 진술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믿고 섬겼던 동일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사랑하며 믿고 의지하며 더 잘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세상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절로부터 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서 보면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4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의 땅 메소보다미아의 우르 땅에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계시하셨으나 이후 근동 지역의 초등달 모양의 북부 초원 지대에 위치한 하란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드러내셨고 또한 그들이 지금 사는 이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스데반 집사님이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님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갇혀 지내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 안에만, 특별히 성전 안에만 머물러 계시고 다른 지역에는 아니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 139:7~10)
고 고백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3:24,2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어디나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외에서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예배 드릴 수 없다고 확고하게 믿었는데, 사실 그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도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그곳에서 회당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 그 어느 곳에나 계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예배를 다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에게 이르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한복음 4:21)
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어느 곳에 아니 계신 곳이 없고 온 땅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주의 백성들의 모든 예배를 어디에서나 다 받으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마음의 시선을 돌리고 그에게 우리 마음의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절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 집사님이 그의 공회 설교를 시작할 때에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소환한 이유 중 하나는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가 아주 심한 우상 숭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역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임종을 앞두고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푼 고별사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여호수아 24:2,3)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우상숭배자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이방인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거룩한 족속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들의 조상의 뿌리는 이방 족속이요 우상 숭배자 집안인 것입니다. 부르신 이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이 존귀한 것이지, 그들 자신이 존귀한 태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민족적 교만과 혈통적 자만심을 가질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3:29,30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점을 확실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님이 공회 앞에서 설교할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한 유대인 순수 혈통주의에 사로잡혀 모든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이요 마귀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 속에서 이러한 독단적인 혈통주의를 배제하는 말씀들을 많이 베풀어주신 바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는 고자들도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일컬을 때에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 곧 이방인들까지도 함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을 청결하게 하고자 성전 바깥 뜰의 소와 양과 염소와 동전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후에 하신 말씀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라면서 성전 바깥 뜰이 이방인들이 와서 경배하는 곳인데 그곳을 시장터로 바꾸어놓은 것에 대하여 격노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다름아닌 고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거룩한 분노의 채찍질을 통하여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혈통이나 신분이나 민족이나 피부색이나 인종을 결코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서 어느 지역, 어느 민족, 어느 혈통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멸시하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가난한 나라 출신 사람이라도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주님은 몹시 싫어하십니다. 우리들은 아프리카인이나 유럽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인도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탈북한 동포들이나 나라 잃은 난민들이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한 인격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혈통과 인종과 국적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형제, 자매로 생각하며 사랑하며 존중하며 섬깁시다. 우월주의, 독선주의를 버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자요 얼마든지 구원의 자녀로 부르실 수 있는 소중한 자로 여겨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셔서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1~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당시 나이가 75세였는데 그에게 큰 민족이 태어나게 하겠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고 그로 하여금 만민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나이 든 노인이요 기반이 잡힌 그 고향을 떠나면 낯설고 물선 이방 땅인데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삶이 그를 기다릴테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약속 하나만 믿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그의 아내 사라가 나이 89세 때에 찾아오셔서 다음 해에 사라의 몸에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 때 이미 그 아내의 경수도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육신적인 능력으로는 결코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라는 뜻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아이 이삭이 사라의 몸에 태어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이 없는 때에 팔레스타인 땅 곧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그 땅을 그들의 후손의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하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아직 자식도 없는 상태였고 그의 살아 생전에 땅 한 평도 그의 소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로 사게 된 헤브론의 막벨라 굴과 그 굴에 딸린 밭뙈기 외에는 아브라함 생전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 가운데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 믿음 그대로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였고 약 5백년 후에 그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진군하여 그곳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놀라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믿은 바 하나님은 그의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현실은 가진 것 없고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조용기 목사님이 불광동 깡촌에서 전도사 시절에 최자실 목사님과 함께 목회를 할 때에 유학할 꿈도 포기한 채 그곳에서 할 일도 없어 기도만 하고 있을 때인데, 한번은 기도하다가 예언이 임하기를 “네가 은빛 날개를 타고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벌여 새처럼 성전을 좌우로 흔들어 움직여졌다고 합니다. 당시 그곳은 완전히 시골이요 목회 대상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뿐이어서 그곳에서 목회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무능력하게 보였으니 그 예언은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님의 그 꿈은 실제로 그의 삶에 일어나서 온 세상을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현실이 밑바닥을 기고 있는 형편이고 고민거리와 염려꺼리가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는 상황일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온갖 축복과 은혜의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들입니다.
한 구절만 예로 들면, 시편 37:25,26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에 대하여 염려가 될 때가 있을 때 이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베풀며 살아갈진대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자손들이 걸식하지 않고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성경의 약속들이 있으니, 우리가 그 약속을 붙들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할진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마음의 약속이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이 있을진대,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몇 년 전 어느날 김미순 권사님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어떤 성도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권사님이 그 성도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네 헌신이 네 아들을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그 성도님에게 주시더라고 제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보기도할 때마다 그 언약을 붙들고 그 성도님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 약속대로 이루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자녀가 믿음이 없고 세상 가운데 있지만 신실하신 주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그 자녀를 돌보아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감동으로나 성령의 감화 가운데 개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것이 당장에는 아무런 현실적인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대로 모든 것들을 섭리적으로 역사해서 그 약속을 반드시 신실하게 지킬 것이기에,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감사하면서 소망 중에 인내하며 계속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넷째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절로부터 7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의 미래에 대하여 미리 다 알고 계시고 그 걸음을 정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애굽에 들어가서 사백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나올 때에 애굽을 심판하시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는 아브라함이 그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후손들이 애굽에 가서 나그네 생활을 할 것이요 사백 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할 것이요 그곳에서 나올 때 그 나라를 심판하고 이곳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미리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미래를 다 알고 계시고 자기 백성의 길을 미리 다 정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심지어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를 다 주관하시는 것까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문화 강국, 군사 강국인 애굽에서 누가 종 살이 신세에서 벗어나며 그 땅에서 구출될 수 있겠습니까? 아직 자식이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삶을 어떻게 이렇게 미리 말씀해주시고 그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대주재자이심을 여기서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이집트의 나라도, 가나안 칠 족속들의 나라도, 이후에 주변 열강과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나라의 흥망성쇠, 그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의 정복 전쟁과 그 후에 일어난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도 다 하나님의 역사의 통치의 손길 아래에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위하여 행하시는 통치 경륜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은 세계 열강의 지도자들이 있고 강력한 무기와 기술력을 가지고 세상을 뒤흔드는 강국들이 있지만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만사를 운행하십니다. 한번 택한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마침내 구원의 그 날까지 안전히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당하는 일들도 하나님께서 전혀 모르는 뜻밖의 일이란 하나도 없고, 고난당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피할 길을 준비하고 계시며, 이 모든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유익이 있음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을 그가 다 정하셨고 그 길을 기뻐하심을 믿으시고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그를 신뢰함으로 담대합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주시고 환난 중에도 함께하시어 끝내 이기게 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섯 번째, 주권적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신 하나님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이 말씀에 보면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하란, 나홀, 아브라함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선택으로 그 중에서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육신적으로는 첩 하갈을 통하여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고, 첩 그두라를 통하여 낳은 여러 아들이 있었고, 정실 부인인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 이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에서 오직 사라를 통하여 얻은 아들 이삭을 약속의 자손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삭도 그 아내 리브가를 통하여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하심과 같이 두 번째 아들 야곱을 택정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요 선물로 되어짐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여기서 말씀하는 바는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그 당시 유대인들이 혈통적 자부심으로 인하여 다른 이방인들을 천시하던 것을 비판하고자 함입니다. 자기들은 혈통만으로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 되고 구원받는 것은 당연히 여기는 것을 비판하고자 함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지, 유대인 자신의 어떤 공로나 의로움이나 쓸모 있음에 의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할 것이 전혀 없고 자기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부르심에 있음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감사를 돌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무런 가치 없는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 친척 중에서나 이웃이나 동료 친구 중에서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볼진대 우월감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구원받는 은혜를 입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세상 어디나 계시는 실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편견없이 사랑하시며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하며 존중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품는 자가 됩시다.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들을 반드시 지키심을 믿고 성경의 기록된 말씀과 감동으로 주신 성령의 약속들을 끝까지 믿고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고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불안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우리 모두 항상 담대하게 평안하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