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국민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言語를 캐다 / 송병호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 수상작)
차용하거나 임대한 어휘는 주목받지 못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를 상상의 반응을 살피며
비슷한 모양에 덧대고 보수해 써보지만
대부분 도로다 따로따로 읽힌 오독 때문이다
눈썹에 내려앉은 달빛만으로도 시가 되고
별 하나로도 애달픈 문양을 새겼던 연서나
음유를 멋 삼던 선비의 붓끝 낭만은
종간된 잡지 표지 모델처럼 잊힌 지 오래
같으나 같지 않는 미로의 관을 순환하는
통로에 서서 때때로 얼룩의 터널을 지나야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객석의 과묵한 폭로가
대나무 소리구멍을 뚫어 심장을 꺼내
타성他聲을 연기하라고 주문하지만
언어라는 것이 어디로 튈지 모를 오판을 안고 있듯이
점자만 따라가다 짚어보지도 못하고 자기를 버린
청상靑孀의 사랑고백이라고나 할까
황무지를 일궈 문장을 캐는 기인이라고나 할까
그늘을 쫓아가는 햇볕은 그대로인데,
영역을 넓히는 볕의 습관처럼 서걱거리는 혀 같아서
잇속을 행굴 때마다 생긴 간격은 더 벌어진다
종종 지갑 속에 숨긴 문장을 들킨 적 있다
누구를 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신의 말씀을 접목한 비유가 아니고서야
굳이 난해한 질문은 오답을 종용한다
늦여름 태풍에 유산된 낙과의 의도와는 달리
재해석 된 사생아,
마침내 비수에 꽂인 숨통을 퇴고한다
갑자기 순기능을 잃어버린 멍멍한 말 줄임
골똘히 암호문 짝짓기
조금씩 멀어지는 마침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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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술서 / 송병호
(한국예총 예술세계 등단작)
목양실, 에어컨실외기 커버 씌우다 얼핏
눈이 와도 울지 않을 빈집을 본다
성명 위 낙관처럼 각인된 故 질식사, 사망시간을 알 수 없는
끝내 깨지 못해 화석이 된 잔해, 사란死卵
꼬리 긴 둥지 밟힐까 울음도 울 수 없었을 불법입주
언제 비웠는지, 고요만 슳다
한해 농사 놓친 힘듦이 느껴오는, 가까워서 너무 먼
빛과 어둠 사이 열대야 불면의 달그림자 발등만 훑고 갔을 것이다
먹이사슬 윗선 고등의 무례, 피차 生의 平은 같은데
여린 빗물로는 씻기지 않을 시월의 바람 삭연하다
그때 나는 어디서 무엇으로 절반만 사랑하다가
꼭 마지막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침묵에 드는지
언젠가 헤쳐 나갈 무풍의 돛이면 좋겠다
명년, 흙이 새살 돋는 입춘 즈음 봄꽃 필 때 행여 꽃이 바람 시린 통증에 아파할지라도 유순한 구름 징검다리 삼아 어디 말고 여기 다시 왔으면 좋겠어 금의환향? 아닌 줄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해 불법 말고 의젓하게 입주해 자식농사 잘 지었으면 해 비닐하우스 태풍을 견뎌내는 것처럼 불볕열대야 제아무리 흔들어대도 매미가 제 숨통 다 뱉어낼 때까지 절대 틀지 않고 버텨볼게
악착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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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꽃밭 - 치매 / 송병호
식탁에 꽃이 앉아 있다
꽃은 꽃 저 닮은 꽃 그대로인데
내일 아침이면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꽃이 저 닮은 꽃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침대 위에 인형이 누워있다
인형은 애써 사람을 닮았다
홀사랑 그리 크셨을까 새벽교회
무릎으로 기도하시던
권사님 우리 어머니, 그녀가 지금
그분을 더 이상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인형 닮은 사람이 되어 있다
영혼이 방전된 어둠의 그늘에서
깜깜한 기억이 스쳐 지나간,
시차의 잃어버린 시절을 좇아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상상인, 2021
✒송병호 시인
ㆍ『예술세계』 시, 『한국문학예술』 평론 등단
ㆍ제10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ㆍ시집 『궁핍의 자유』 『환유의 법칙』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ㆍ김포문학상대상, 중봉조헌문학상 등 수상
ㆍ가천문화재단, 김포문화재단 예술아람 창작지원금 수혜
사유가 속독으로 읽히는 것에 대하여
송병호
간밤 어느 말간 영혼 하나가
저리도록 시린 별점에 등 기대고 앉아
밀어내면 밀리고 말 인연 하나 꼭 보듬고
인기척 없는 바람 집을 지었나 보다
충족되지 않은 글귀의 원인이야
저혈압에 주저앉은 서릿발 같은 거
편향적 체온에 갇힌 추상적 명사로는
시가 되는 형식이나
발상의 평형을 끄집어낼 수 없었다
아궁이와 굴뚝의 형질이 다른 것처럼
타액이 마른 입술, 끈적거리는 샘물 정도
혹은 장마철 자투리 볕에 화전을 일궈
심지를 돋울 산사람의 전설이라고나 할까
사유가 중독되어 갈 때쯤
새 언어를 캐 詩집을 지어야겠다
구름 비늘로 의관을 기워 입고
유순한 심상은 걸어 걸어서 꼭짓점에 이르면
어느 유순한 길손에 이끌려
품평의 때를 점쳐볼 것이다
0.5톤 트럭에 실린
습작 53415
첫댓글 모두가 복된 하루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