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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 ⑦
-정찬주 불교소설 〈천강에 비친 달〉 외
1. 경전 소설과 비경전 소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소설은 침체의 늪에 빠진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장편소설 《꿈》(2001, 창작과비평사)이 발표되고, 한승원의 《초의》(2003, 김영사)와 《소설 원효》(전 3권)(2006, 비채) 그리고 정찬주의 《만행》(2000, 민음사), 《아, 관세음보살》(2000, 동쪽나라), 《다불》(2004, 랜덤하우스코리아) 등이 2000년대초반에 발표되지만, 김성동의 《꿈》이 조신설화를 서사원형으로 하여 쓴 작품이고, 기타의 작품이 불교역사소설적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본격소설로서의 면모를 반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침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동의 《꿈》은 1999년 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만 2년간 〈불교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김광섭 시인의 시구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부제로 삼고 있는 ‘조신설화’적 로맨스 소설이다. 구도의 번뇌를 짊어진 젊은 수도승 능현과 아름다운 여대생 정희남의 사랑 이야기이다. 조신설화의 주제인 인생이 덧없음을 모티프로 한 소설이면서 자전적이고 픽션적 성향을 지닌 소설인 셈이다.
연좌제로 인해 낙인이 찍힌 능현은 고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입산하여 10년간 불교에 정진한다. 그때 미술을 전공하는 명문여대 3학년인 여학생을 만나 마음이 흔들려 문학도가 되어 종교 잡지에 소설이 당선되지만, 불교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당선이 취소되고 만행의 길로 접어든다. 그로 인해 승적이 박탈되고, 3년 뒤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를 만나 토굴에서 그녀(반야 보살)와 사랑을 시작한다. 이들은 한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죽은 원혼들의 해원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고 수행에 정진하면서 짧은 행복을 누리지만, 능현이 잠시 토굴을 떠난 후 돌아왔을 때 그녀의 자취는 사라진다.
이렇듯 이 소설은 조신설화의 서사구조를 차용하며 주제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이광수의 《꿈》과 김동인의 《조신의 꿈》을 제재전통으로 이어 받는 소설이다.
천이두는 ‘김성동론’ 〈허무주의자의 방황하는 혼〉에서 작가와 소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소설이란 세계 속에서 자아의 삶을 시험하는 무대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개인의 삶의 편린들을 주워 모아 삶의 모양새를 보여준다. 그 삶의 모양새는 곧 개인사이다. (……) 김성동은 자아의 생을 시험하되 자아의 내면을 시험한다. 그것은 폐쇄적인 세계이며, 자아의 영혼 속에 함몰되어 버릴 여지가 있는 것이다. 즉 세계가 대결의 요소로 보다 자아의 영혼 탐색의 배경으로 놓여 버리기 때문에, 혼은 시적으로 과장되어 허무의 세계를 파고든다.
이 같은 평가는 김성동의 소설 《꿈》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이에 반해 한승원의 《초의》와 《소설 원효》는 역사적인 인물을 모티프로 한 불교소설이다. 《초의》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 교유했던 선승 초의 선사의 일대기를 장편으로 쓴 역사소설이다. 한승원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과 강진의 다산초당 사이를 오르내리며 다산 시문집과 추사의 문집, 자하 신위(紫霞 申緯)의 글 등 초의 스님과 교유했던 지식인들의 문집 속에서 초의 선사의 행적을 좇으며, 선사상은 물론이고 당대의 지성인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추사의 예술혼, 그리고 그들과의 우정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차 문화를 통한 다선(茶禪) 수행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불교를 보여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주목하게 된다
한승원의 《소설 원효》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 대사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함으로써 하화중생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한 경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승원은 소설 속에서 경전 소설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한다. “경전을 다시 새로이 해석하는 것은 재창조다. 보석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손에 쥐여주어도 모른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수없이 많은 방편을 써왔다. 방편은 비유이고 비유는 뗏목이고, 뗏목은 강 건너려는 자를 물에 빠져죽지 않도록 안전하게 건네준다.”가 그것이다.
역사적 인물로서 원효는 소설의 모티프로서 호재다. 원효 대사를 소재로 해서 쓴 역사소설인 이광수의 《원효대사》(1942, 매일신보 연재)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신과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썼다면, 김선우의 《발원 1-요석 그리고 원효》(2015, 민음사)는 요석 공주와 원효의 진정한 사랑을 탐색하기 위해 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승원의 《소설 원효》는 단순한 소설의 소재로서 원효를 쓰기보다는 불자로서 원효의 인간적 면모를 조명하여 원효사상을 새롭게 해석한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현대불교〉와의 인터뷰에서 “불교로 소설 쓰다 소설로 불교”를 쓰는 마음이라고 토로했듯이, 작가의 ‘영혼의 스승’인 부처와 원효 대사의 이야기를 불심으로 쓴 것으로 이해된다.
정찬주는 첫 소설집 《새들은 발자국을 허공에 남기지 않는다》(1990, 풍경)를 출간한 후 불교적인 산문집과 동화집을 펴내다가 소설 《유마경》(1994, 삶과함께)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불교작가의 면모를 보인다. 단편소설을 모은 제2 창작집으로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가 있고, 불교를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로는 항일투쟁 이론가인 운암 김성숙의 이야기를 쓴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법정 스님을 모티프로 한 《소설 무소유》,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산은 산 물은 물》, 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당 성관 대종사의 생애와 가르침을 소설로 풀어낸 《가야산 정진불》이 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 시 가까이에서 시봉한 제자 아난다와 주고받은 석 달 동안의 이야기인 《니르바나의 미소》, 관세음보살 성도기인 《관세음보살의 기도》, ‘지장 큰스님’의 생애를 그린 《다불》,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그린 《만행》, 일타 큰스님의 이야기인 《인연》(전 2권), 경봉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그린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전 2권), 지웅 스님의 불사를 다룬 《천불탑의 비밀》과,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이야기를 다룬 《천강에 비친 달》 등 발표작 대부분이 장편소설이다.
위의 작품연보를 분석하면, ① 중 · 단편을 모은 정찬주의 창작집은 《새들은 발자국을 허공에 남기지 않는다》와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 두 권이다. ② 장편 경전 소설로는 《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의 기도》 《니르바나의 미소》 등이고, ③ 이른바 고승 인물소설로는 《유마경》(전 3권) 《산은 산 물은 물》 《만행》 《다불》 《인연》 《가야산 정진불》 《소설 무소유》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천불탑의 비밀》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그리고 《천강에 비친 달》이고, ④ 불교성지 기행소설로는 컴퓨터 마니아가 인도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그린 《그곳에 부처가 있다》 등이 있다.
특히 《그곳에 부처가 있다》의 발문을 쓴 한승원은 이 창작집을 이렇게 평가한다.
정찬주 씨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가벼워진 삶에 대하여 소름끼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인간의 길이다. 그 길에서 그는 야망의 컴퓨터 마니아, 수도승, 하산한 비구니, 인도의 갠지스강, 인력거꾼, 밤기차의 차장, 석가모니가 흘려놓은 그림자들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왜 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천방지축 뛰어가고 있는가 하는 참담한 생각에 젖어들게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내 마음속에는 순하게 돌아가는 길 하나가 뚫려지고 있었다.
감동을 감추지 않는 이 같은 묘사는 이 창작집의 소설들 도처에 사람이 있고, 부처가 있음을 환기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위에서 분류한 정찬주 불교소설의 경향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은 ③ 이른바 고승 인물소설이다. 이 소설들은 유마거사를 비롯하여 우리 시대의 고승들을 다룬 인물 소설이기도 하지만 역사소설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항일투쟁 이론가인 운암 김성숙의 이야기를 쓴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는 중국혁명사를 시대 배경으로 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사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좀 더 문학성을 담보로 하는 불교소설로서 중편소설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 표제작과 최근의 장편소설인 《천강에 비친 달》을 집중 분석하고자 한다.
정찬주의 중편소설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라 지칭되는 강헌이 ‘모태(母胎)와도 같은 고향’인 김룡사를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그 길에서 그는 동물적 암내가 강렬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귀향소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듯,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이 ‘인(因)’이 되어 현재의 ‘과(果)’로 나타나는 구성미학이 보통인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깨고 있다. 귀향과 여인과의 만남은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한 설정과 내러티브의 재미를 위한 흥미 유발 장치에 불과하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전문(前文)에서 제시한 석주 스님과 한 스님의 선문답이다. 해탈과 정토와 열반이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 자신에 그 해답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고승 이야기이다. 이에 따라 정찬주는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에서 불교의 본체를 환기해준다. 불교는 고(苦)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이며, 그 고(苦)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고(苦)로부터 시작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무애(無㝵) 즉 ‘걸림 없기’가 그 하나이며, 이 언어는 삶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언어이고, 불교에서 무위(無爲)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변화를 떠난 것을 말한다. 연기되지 않는 것, 영원불멸의 초시간적 진실, 열반,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없어진 자리, 적멸 그대로 즐거움이다)’의 자리이다. 그러나 소설은 표현구조상 인연을 간과할 수 없다. 그 인연을 이 소설은 금선대의 선사를 강헌의 생부로 설정한다. 그 선사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묵언 수행하는 법성 선사이다. 그 선사는 강헌이 올 줄 알고 수십 년을 기다렸다는 말과 “앞산이 푸르러졌다 붉어졌다 하는 것을 무심히 보고 있었”다고 하며 “한바탕 부질없는 꿈이니라. 꿈은 깨야 하는 것이니라. 부처란 꿈을 깬 사람이 아니더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 늙은이는 더 보탤 말이 없”다고 말한다. ‘여시관(如是觀)’이다. 이 법문은 《금강경》의 법문과 다르지 않다. 강헌이 법성 선사한테 받은 한 소식도 이것이다. ‘여시관’은 마음의 선어이다. 이 선어로 언어화를 통한 침묵의 깨우침, 언어화 과정을 통한 비언어화 상태의 심적인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선시적 마음을 타락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양식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불교소설의 지상 명제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는 점에서도 이 소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중편소설의 제목인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에서 나비는 ‘부처님 이마에서 힘을 모아 가까운 숲으로 날아간 가을 나비’를 표상한다. ‘부처님 이마에서 힘을 모은 나비가 법당 바깥의 차가운 숲 속으로 다시 날아가듯 나도 김룡사를 떠나야 한다’는 강헌의 마음은 나비에 의탁한 자신을 의미한다. 부처님 이마에서 힘을 모아 떠나는 나비처럼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강헌이 눈을 감자 또 누군가의 소리가 환청으로 나직이 들려온다. “헌아, 나비의 소식을 네 지식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시관이면 된다.”라는 구절에서 이 소설의 키워드인 ‘여시관’이 주목된다. ‘여시관(如是觀)’은 《금강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 그것이다.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에서 ‘이와 같다’ 혹은 ‘이와 같이 여기다’는 말이 ‘여시관’이다. 하나의 단순한 긍정적인 언어가 아니라, 불법이 함축되어 있는 언어이다.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공사상(空思想)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을 함축한 언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찬주의 중 · 단편 불교소설의 핵은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이다.
2. 《천강에 비친 달》의 불교문학적 위상
정찬주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한글로 풀어 제목으로 삼은 소설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1447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고자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 올리자 이를 칭송하고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찬가이다.
이 소설은 “세종 2년(1420) 8월 6일./ 흥천사 경내는 이른 새벽부터 백여 명의 스님들로 붐볐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사호(賜號)를 준 이 때의 일은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1450) 7월 56일의 기사에 나와 있다”로 마무리하고 말미에 그때의 기록을 첨부하면서 소설을 끝낸다. 이로 볼 때 이 작품은 세종 즉위 2년인 1420년부터 승하한 1450년까지 30년 동안 세종이 신미대사와 함께 한글창제를 하면서 그 시대상과 창제의 갈등 구조를 허구화한 역사소설이다.
이 역사소설을 불교소설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신미 대사가 한글창제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한글창제의 제작 원리 속에 불교정신과 불성의 논리가 게재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소설의 창작 노트인 ‘작가의 말’ 〈한글은 정에서 태어났다〉에서 정찬주는 창작 계기를 이렇게 토로한다.
속리산 복천암을 취재차 올라갔다가 어느 선승(禪僧)으로부터 한글창제의 공이 많은 신미 대사 이야기를 난생처음으로 들었던 것이다. (……) 이후 세종의 명을 받은 신미대사가 비밀리에 복천사와 흥천사, 진관사, 대자암에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 《천강에 비친 달》은 한마디로 범어(梵語)에 능통했던 신미 대사가 어떻게 세종의 한글창제에 가담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추리해간 소설이다.
이 작가의 토로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집현전 학사의 한글창제 도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어 기존 역사에 대한 전복이다. 여기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은 《문종실록》 등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해서 《영산 김씨 세보》 《훈민정음 해례본》 《용재총화》 《월인천강지곡》 등 한글창제 관련 서적을 참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정래는 ‘추천의 말 2’에서 “정찬주 작가는 《천강에 비친 달》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수암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는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세조실록》에 근거한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다. 작가는 소설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확산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고 평가한다. 이 점을 입증해주는 소설의 부분은 “김수온은 신미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 글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숨겼다. 신미를 보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 글자 창제(創制)에 있어서 창(創)은 세종, 제(制)는 신미의 몫이었던 것이다.”가 그것이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한글창제의 발상은 세종이 했지만 실제적으로 만드는 일은 신미가 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이 소설의 중요 서사는 세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열여덟 살의 풋중인 신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문종이 즉위하여 신미를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로 삼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이 소설의 결말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와 관련된 신미 대사에 대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불교를 모티프로 한 불교소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세종의 이야기가 한 축에서 전개되고 세종과 신미의 한글창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된 서사는 신미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글창제와 신미 대사의 서사 속에서 불교적 공간을 탐색해야 할 것이다.
신미가 세종을 만난 것은 함허 스님과 함께 부름을 받고 궁궐에 가서이다. 왜국이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로, 이제는 유교국이 되어서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대장경은 한자로 되어 있고, 사찰에서는 《범자대장경》을 보고, 무지렁이 백성들은 대장경을 읽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신미는 세종에게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글자를 만들자는 주청을 올린다. 신미의 제안에 세종은 침묵한다. 절로 돌아온 신미는 함허 스님으로부터 세종이 준 은부채를 받으며 스님으로부터 숙명적인 화두를 받는다. “어젯밤 임금님 앞에서 ‘전하, 우리 글자를 만드시옵소서’ 하는 너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허나 임금님께서 잠시 상념에 잠기시는 것을 보고 임금님과 너의 뜻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이 은선은 임금님께서 너를 격려하여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셈이”라는 함허 스님의 말씀에 한글창제의 숙명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로부터 신미의 고민은 시작되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범자의 자모(字母) 원리를 빌리되, 단순하여 쓰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우리 글자를 창안하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종과 신미가 꿈꾸는 조선의 글자였”기 때문이다.
흥천사를 떠나지 않았던 신미는 함허 스님의 부름으로 대자암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신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토굴 공부(우리 글자 창제 연구)의 진척이 있는가를 묻던 함허가 “머리에 불이 떨어진 것같이 더욱 정진해라. 나는 우리말, 특히 사투리와 범어가 한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며 “동이족이 우리와 천축 사람들 조상이 수미산 어느 산자락에서 함께 살다가 각자의 인연 따라 옮겨 살았”기에 “우리는 부처님의 현손(玄孫)의 현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세자와 수양, 안평, 정의공주가 절에 내방한 날, 신미는 벽화 팔상도를 세자 일행에게 보여주고, 한자로 된 《팔상록》이 있지만 백성들은 읽을 수 없어 그림으로 그려 설명함을 밝히고 우리 글자가 있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불화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벽화의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바라밀에 대해서, 그리고 부처님의 일대기가 압축된 팔상도 중에서 “육 년간 유영굴에서 극단적으로 고행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마라의 항복을 받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마침내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까지, 신미는 부처님의 거룩한 일생을 눈앞에 펼치듯 생생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뒷날에 결국 한글 스물여덟 자를 만들게 되지만 어려움은 있었다.
세자의 의견을 따라 세종은 신미에게 “자음은 혀의 모양과 입술 모양과 이 모양으로,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 보라는 상형(象形)의 바탕을 일렀던 것이다. 이를테면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소리는 그때의 혀 모양을 본떠 ‘ㄱ’으로, (……) 모음 글자 모양은 삼재(三才) 중에 하늘은 둥그니까 ‘ · ’이고 땅은 평평하니까 ‘ㅡ’이고,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로 해보라고 지시했”다.
사실 신미는 몇 달째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범자에 능한 신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범자의 칠음체계(七音體系), 즉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半舌半齒)에 근거하여 획을 더해갔다. (……) 이렇게 만들어진 자음과 모음은 자유롭게 상하, 좌우 교합하여 어떤 소리라도 표현할 수 있게 되는데, 심지어는 닭 우는 소리 등 짐승이 우는 소리까지도 정확하게 표현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심한 콧소리 등은 새로 만든 글자로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인용문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글의 제작 원리를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만들”었다는 부분이다. 중세 국어의 연구자들은 한글의 제작원리는 한자의 제작원리인 《홍국정운》을 본떠 만든 《동국정운(東國正韻)》에 의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범자에서 그 원리를 차용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신라시대에 범어가 불교와 함께 유입되어 들어왔기 때문이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 《진언집(眞言集)》 등이 범자로 기록되어 오랫동안 전승되어 민간 불교의 염불 형식으로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앞에서 언급한 우리 민족의 원류가 천축국 사람들과 같은 수미산 그곳이라는 견해와 궤를 같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범어는 한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언어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한글창제가 범어의 영향권 안에 있음을 추정하는 것은 멀리 인도로부터 기원한 불교문화가 한반도까지 전파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을 《천강에 비친 달》에서는 여실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날, 세종은 신미를 생각한다. “신미가 사는 방법은 세종의 그림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 글자가 완성되는 날에도 세종은 신미의 이름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신미를 죽이는 일이었다. 세종이 신미를 살리는 일은 신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종의 처사에도 “신미는 부질없는 공명심에 이미 초탈하여 개의치 않는다. 일찍이 《금강경오가해 설의》를 공부할 때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 무엇을 도왔다는 마음에 집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하심(下心)을 갖는다.
“허공과 같은 마음이옵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고, 넓어지면 허공과 같다고 했사옵니다. 부디 허공과 같은 마음을 잃지 마시옵소서.”
“과인은 대사를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소. 도교는 신선이 되라 하니 공허하고, 유교란 사람 간의 약속으로 옥죄니 답답하고, 불교란 집착하지 말고 걸림 없이 살라 하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소.”
위 인용문은 세종과 신미대사의 대화 부분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사헌부와 사간원 유신들이 관여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광화문 괴자(愧字) 사건’을 고뇌하다가 수양에게 엄중히 수사하라고 지시한 후, 신미와 대좌하여 괴자 사건의 전말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신미 대사의 말 ‘마음이 허공 같다’는 비유는 경전이나 《임제어록》 같은 스님들의 어록에서 많이 비유되는 말이다. 이에 대해 답하는 세종의 대화에서 동양 삼교의 비교가 주목된다. “도교는 신선이 되라 하니 공허하고, 유교란 사람 간의 약속으로 옥죄니 답답하고, 불교란 집착하지 말고 걸림 없이 살라 하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다는 세종의 말이 그것이다. 어떤 경계도 허락하지 않는 불교. 그래서 마음의 종교인 불교. 이를 환기해주는 작중인물 세종과 신미대사에 의한 한글창제는 유가 사회였던 조선조에 큰 파문을 던졌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정찬주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소설이 침체의 늪에 빠졌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불교 경전 소설이나 고승 구도소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순수 불교소설이 창작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 차에 최근 금년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세계일보〉에서 ‘침체의 늪에 빠진 불교문학’에 대한 대담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소설가 이상문과 《불교평론》 주간 홍사성 시인의 대담이었다. 이 기사를 쓴 이창수 기자는 이 기사의 서두에서 “한때 전성기를 구가하던 불교소설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불교소설 침체의 늪 언제 벗어날까’(2004)란 기사가 나오고 15년도 더 지났으나 변한 것은 그다지 없다. 물론 간간이 불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했으나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최근 계간 《불교평론》에 실린 〈불호사(佛護寺)〉에 더욱 눈길이 쏠린다. 4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황색인》(1987)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상문이 내놓은 이 소설은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시인)의 ‘불교문학 부활’ 기획의 일환으로 쓰인 것”이라고 밝히면서 “두 사람을 만나 불교문학에 대한 생각을 들어”본다고 전제한다. 이 자리에서 홍사성 주간은 “최남선 한용운 이광수 박종화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이원섭 김어수 조종현 등이 쓴 작품, 그러니까 문단에서 인정받는 불교문학의 특징은 종교에 국한되거나 매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미학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은 작품, “종교소설이 ‘포교’라는 목적을 지향하는 소설이 되기” 쉽기 때문에 “문학을 담보하지 못한 채 종교적 색채만 드러낸다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계한다. 그리고 온전한 불교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교조주의적이지 않은 작품,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한편 이상문 작가는 “대부분 종교가 그렇듯 불교에 이미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이 선뜻 손을 못 대는 이유 중 하나”는 일단 종교교리가 어렵고 “새로운 통찰, 탁월한 서사 구조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 “종교적 가르침을 담으려다 보면 작품이 평면적인 구조로 이어질 공산”이 커서 “소설적인 재미는 아무래도 떨어지”지만, “작가들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흔히 얘기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에서 엿볼 수 있듯 ‘허용 범위’도 대단히 넓”기 때문에 “종교가 가진 엄숙함을 친근하게 비튼다든가 하는 작업이 의외의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불교문학의 문학사적 가치가 작지 않”기 때문에 불교문학은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작가라면 한 번쯤 다뤄볼 만한 매력적인 소재라 (……) 많은 작가가 도전해봤으면 좋겠”고, ”불교문학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다시 우뚝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작가에게 불교 모티프는 매력적일 것이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또는 새 지평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2000년 이후에 발표된 불교적인 중 · 단편소설들을 좀 더 광범위하게 탐색해봐야 할 것이다. ■
유한근 /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