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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 기•고
불교의 평화사상
심재룡 교수(서울대, 철학과)
머릿말
1• 불교를 평화의 종교라고들 한다. 우리들은 한국의 산사에 안치된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가 뿜어내는 잔잔한 웃음을 보고 저절로 불고는 곧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와 평화, 이 두 개념을 한가닥으로 묶는 역할을 부처님의 상호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불교를 흔히 평화의 종교로 점찍는데는 단순히 불상의 상호가 아닌 불교 고유의 무슨 특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철학 및 종교의 차원에서 이상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불교를 그냥 평화의 종교라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 러나 부처님의 이상적 가르침이 구체화된 불교 문화의 틀과 그 사회 제도적 차원을 고려하자. 그러면, 언뜻 불교 국가에도 전쟁과 박해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불교 국가에 전쟁의 참화나 폭력이 계속된다는 작금의 현실을 손쉽게 떠올리게 된다. 멀리 일본과 조선의 승병(僧兵) 제도가 그러하고, 최근에는 동남아 불교국가인 베트남과 캄푸챠등지의 대량학살이 그러하다. 따라서 불교와 평화를 그냥 일의적으로만 짝을 짓기 어렵다. 과연 불교인 내지 불교집단의 어떤 태도 그리고 어떤 실천과 수행이 평화에 기여하는가? 불교의 교리와 실천 양면에서 시간과 공간, 역사와 사회를 건너질러 혹시 어떤 일의적인 평화관을 찾아 볼 수는 없을까?
몸 말
2. 1. 인도의 전통적 의로운 전쟁관
불교는 인도문화의 산물이다. 인도 고전 시가인 「바가 바드 기타」를 통하여 인도인들의 전통적 전쟁 및 평화관을 살펴 보자. 「기타」는 본시 인도인들의 집단적 지혜가 한군데 두루 모여있는 것이라서, 전쟁과 평화라는 양극적 해결책을 동시에 제시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크게 두 가지 모순된 가르침이 섞여 있는 듯하다. 때때로 전문가들도 상반된 해석을 내린다. 예컨데, 간디(Gandhi)나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 같은 학자들은 전쟁을 강요하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상징적인 것이지, 직접 살륙 내지 폭력적 방법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이와 정반대로, 포터(Potter)나 자야틸레케(Jayatilleke)같은 학자는 문자 그대로 무지막지한 전쟁을 권고하는 「기타」의 철학은, 차마 인정이 있는 사람은 따르지 못할 몰인정한 철학이라고 비난한다.
우파다야 교수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서양 중세의 신성한 전쟁관과 비슷한 견해를 판별해 낸다. 전쟁은 불가피 하다고 판단될 적에야 수행한다는 점에서 중세 기독교 전통의 성스러운 전쟁과 유사한 면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문화적 색갈과 형이상학적 전제를 달리하는 인도의 고전 「기타」에 나타난 '의로운 전쟁 (dharmyam sangramam)'관엔 무슨 특징이 있는가?
첫째, 우리는 구체적으로 「기타」의 주인공 아르쥬나가 비록 악행을 행한 자라 할 지라도 죽여서는 죄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민했음을 안다. 따라서 크리슈나는 악행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방화범, 독을 뿌리 는 자, 손에 무기를 들고 덤비는 자, 재산을 강탈하는 자, 영토와 아녀자들을 침탈하는 자등 여섯 부류의 사람들이 악행을 행하는 자들로서." 비록 스승이거나, 어린 아이거나, 늙은 이거나, 학덕높은 브라민일지라도 그런 범법자는 다시 고려할 필요도 없이 죽여 마땅하다. 범법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기타」의 배경이 된 「마하바라타」를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아르쥬나 및 그 형제 즉 판다족에 맞선 쿠라바 족들은 위에 말한 여섯가지 악행을 모두 범했다.
따라서, 아르쥬나가 수행하는 전쟁에서 비록 친족을 살상한다 할 지라도, 그 친족이 악행을 저지른 법법자인 한, 이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 도덕, 평화와 전쟁은 양립가능하다.
둘째. 「기타」의 전쟁관 가운데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무사로서 전쟁에 임하는 태도이다. 전혀 초연하게 객관적인 견지에서 전쟁을 수행하라. 단지 무사이기 때문에 그 의무 를 수행하기만 한다면, "그가 죽임을 행할 지라도 만약 그로 인한 고통과 쾌락을 똑같이 생각하고, 영예와 굴종을 평등하게 여기며, 승리와 패배 어느 쪽에도 동요하지 않는다면, 그 무사는 죄를 하는 것이 아니다 (18: 17) 이와 같은 가르침에 충실한 무사는 겉보기에는 아무리 흉포한 살상을 저지르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동시에 평정심을 지 닐 수 있다. 물론 초보자에게는 이런 마음가짐이 어렵다.
여기에 소위 '일 속에서의 요가/카르마 요가'라는 정신 수 양을 강조하는 소이가 있다.
셋째, 아무리 전쟁을 용인한다해도 「기타」는 전쟁 또는 폭력을 결코 정상적인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직 흉포 한 범법자를 다루거나, 평화적 해결책을 다 동원해도 안될 적에야 마지막 수단으로 할 수 없이 비정상적인 상태라 간 주하여 전쟁 또는 폭력의 행사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신성전쟁론과 같은 점은 위의 첫 번째, 세 번째 요소요. 다른 점은 두번째 요소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비정상적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평정한 마음으로나마 살상을 행해야만 하는 전쟁 행위는 무엇으로 정당화 할 것인가? 아마도 위에 나열한 표면적 이유 밖에 더욱 근원적인 형이상학적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우파다야 교수가 미쳐 지적하지 않은 네번째 이유로 인도 정통적 형이상학인 삼단계의 실재 이론을 들고 싶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이 세상은 궁극적 실재인 영원불멸한 아트만이나 브라만이 아니다. 있었다 없어지고 또 생겨나는 경험의 세계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삶은, 비록 '둥근 사각형이나 '토끼뿔'처럼 비실재는 아니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극적 실재가 아니므로 궁극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꿈 속의 존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적 인생은 절대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만약 이 세상을 만든 절대자가 있다면 그의 뜻에 따르는 것만이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일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인생 속에서 찾지 않고 그 밖의 절대적 존재에서 찾는다면, 인생끼리의 불평 불화 전쟁 그로 인한 인간의 승패 영욕 고통과 쾌락 따위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죽이거나 죽거나 한갖 절대자의 '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절대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견해는 백팔십도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2.2. 불교의 평화 사상
죽이거나 죽는 자는 그러나 한갖 그림자이거나 허깨비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인간의 현실적 세계를 긍정하면서 불교는 영구한 평화를 희구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오직 한 가지 길을 제시한다. 불교의 초기경전군에 속한 「법구경」의 팔리어 판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 한을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 라 선언한다.
불교의 평화사상은 바로 이 고전의 한 마디에 압축적으 로 표현되어 있다고 짐작된다. 「기타」에 따르면, 아르쥬나 역시 친척을 죽이는 전쟁을 행함에 아무 원한도 지니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허깨비를 치듯이 살륙을 행해도 그것은 오직 무사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라 한다. 혹시 전쟁 중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태어남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법구경」은 다시 태어남을 약속하기 보다 죽음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온갖 싸움이 살아질 것을. 제6절) 싸움의 종식을 유도한다.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괴로와 누워있다.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은/ 승패를 버리고 즐겁게 산다.(201절)
「기타」는 범법자를 제거하는 의로운 전쟁을 통해 세계 의 질서(법 dharma)를 보전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는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반해. 「법구경」은 단도직입적으로 행복/즐거움의 기준을 승패를 떠나 고뇌와 탐욕과 원한 속 에서도 오직 자기의 할일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마음 이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즐거움게 사는 길을 제시한다. 이제 불교는 평화를 구체적으로, 평화로운 사회, 평화 로운 인간 관계, 평화로운 마음씨 이렇게 세 가지 모습으 로 그려보이고 있다.
(1) 평화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는 인간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사회다. 단지 제 마음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같이 더불어 함께 사는
즐거움이 있는 사회다. 불교에 따르면 개인의 도덕적 행위와, 적당한 부가 함께 할 때 평화로운 사회는 가능하다고 한다.
팔리어 불전 앙구타라 니카야(Anguttara-nikaya A II 75)에는 정의로운 지배와 경제적인 안정이 온 백성의 기본 적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저들로 하여금 네 가지 즐거 움을 함께 누리게한다고 적혀있다.
첫째, 소유의 기쁨이다.(attisukha) 지나친 탐욕이 아니라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적당한 부에 만족하는 기쁨 이다. 둘째, 부를 사용하는 기쁨이다. (bhogasukha) 위의 소유를 제대로 의롭게 사용할 적에 느끼는 기쁨이다. 본시 소유는 도구적 가치를 지닐 뿐 그 자체가 궁극적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셋째, 빚이 없는 기쁨이다.
(ananasukha) 한갖 금전적 빚으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일체의 의무를 수행하고 더 이상 사회에 빚을 지지않 는 자 그는 즐거울 수 밖에 없다. 넷째, 허물이 없는 기쁨이다. (anavaijasukha) 오직 의롭고 있는 도덕적 삶을 누리는 자에게나 이 기쁨은 가능하다. 불교가 그리는 평화로운 사회는 단지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 표현을 넘어 고상한 도덕성이 삶의 질을 결정하여 사회 구석구석에 웃음꽃이 핀다.
(2) 평화로운 인간 관계
위와 같이 평화로운 사회의 구성원들간에는 네 가지 덕성이 보인다. 친절함 (metta), 남의 고통을 나누어 가짐 (haruna), 남의 기쁨을 나누어 가짐(mudita), 그리고 고통과 기쁨을 비롯하여 온갖 고난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이다. 흔히 한자로 사무량심 (四無量心)이라하여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마음가짐은 불교적 평화를 이룩하는 대인관계의 기본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마 사무량심 가운데 친절 하나 만이라도 실행하면 한 사회는 물론 국제관계 마져 담박에 평화가 올 것이다.
(3) 평화로운 마음씨
불교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한갖 사회 또는 국가간의 평화보다는 한 개인의 마음에 깃든 영구한 평화의 구축에 있다 할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는 불자가 아무리 사회와 국가의 평화를 외친다 한들 그 것은 헛된 공념불일 것이다. 팔정도를 따라 마음을 가라앉혀 올바른 수행을 거친 자는 소위 마음 속의 부정적 삼대 요소 즉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지니지 않게 된다. 이처럼 흔들림이 없이 평화로운 마음씨를 일러 불교에서는 열반(niryana/nibbana)이라한다.
열반을 궁극의 목표로 수행정진하는 사회가 곧 불교식으로 평화로운 사회요. 그 구성원이 평화를 진작하는 평화 의 일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모습을 다시 한번 뭉뚱그려 평화로운 불교적 이상향을 그려보이면 다 음과 같다.
첫째, 누구나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단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한다. 둘째. 인간의 기본적 의무를 수행함으로 써 기본적 인권이 보장된다. 세째, 통치자와 행정요인들은 모두 의롭고 도덕적이다. 넷째, 모두에게 일터가 주어지고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된다. 다섯째, 사회구성원은 적어도 다섯가지 불교의 계율을 자발적으로 지킨다. 여섯째, 도덕의 인과응보를 믿어 남을 해치지 않고 누구나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도와가며 살아 간다.
2.21 불교사회에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
불교사회라고 전쟁이 없을 수 없다. 스스로 남을 침략 하지는 않아도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당 연하다. 그러나 최근세의 서양의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수행한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전쟁을 연구한 트레버 링에 따르면 정작 어느 특정 국가의 종교와 전쟁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 짓는다. ④'국가권력이 존속하는 한 때 에 따라 전쟁과 평화는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다만 이들 동남아 제국에 불교 및 전통 종교의 영 향으로 대인관계에는 비공격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정작 전생 상태에서는 지나친 잔인성이 엿보인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이들 동남아 제국에 불교 및 전통 종교의 영향으로 대인관계에는 비공격성이 드드러져 보이지만, 정작 전쟁 상태에서는 지나친 잔인성이 엿보인다고 한다.
④ Buddhism, Imperialism and War by Trevor Ling (George Allen and Unwin, 1987) 한글 부분역에는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 전서』 30으로 편찬된 『현대사회와 불교』 (이재창, 벽성, 월폴라 라홀라 외) (1981, 서울)의 348-366을 참조할 것.
태국과 버마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바 대인관계에서 도발의 회피는 그 근원을 불교의 소승경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위에 언급한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는 「법구경』의 고전적 가르침과 비폭력의 전통은 동남아 제국의 일반 불교도들 사이에 엄청난 감화를 끼쳤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개인적 도발적 충동들을 직접적으로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불완전하게 남의 험 담을 즐기는 식의 발산이 가능하다. 또는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자신 내부의 정신역학 속으로 고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적국에 대한 전쟁 상태는 그들이 군 대 조직 속의 규율에 적응하기 전에 전쟁의 폭력을 이용하 여 분노의 덩어리를 아무런 통제없이 발산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어느 심리학자들이 내놓은 설명이다. 이 설명으로 우리는 혹시 불교국가의 군대가 왜 위험에서는 비겁하고 승리에서는 잔인한가를 얼마간 납득할 수 있을 것같다. 이런 관찰이 혹시 최근 크메르 루주의 잔학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한편 대승불교국가의 전쟁은 어떤 설명으로 정당화되는가?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 로 대승 불교의 보살도에서 그 정당화의 싹을 찾는다. 보다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다 작은 악을 제거하는 데 불살생을 범하지 말라는 중계를 어기더라도, 그로 인해 그 보살은 보다 많은 중생을 구제하니까. 그로 인해 그 보살 의 일신은 비록 지옥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더라도, 올바른 길, 정도(IE:)는 아니지만 방편으로서 악인을 살상함이 보살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승불교가 전쟁을 합리화하는 경우는 최근 우리 민족이 겪은 육이오 의 대량 살상 즉 한국 전쟁에 참가하기를 권장하는 어느 중국 승려의 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51년 『현대불학』 4월호에 실린 다음과 같은 문장은 대승불교판 보살도의 극단적 이용인가 ? 불교 본연의 모 습인가?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항미원조국가보위인민지원군 (抗美援朝國家保衛人民志願軍)에 입대하여, 석가모니께서
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중생을 대신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적들을 죽이는 정신을 실지로 배우는 길이다. 세계의 평화를 께뜨리는 미제(美帝)를 쓸어없애는 것이야말로 불교 교리에 충실한 것이므로 아무도 비난할 수 없을 뿐더러 당연히 공덕을 쌓는 길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지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역사상의 불교국가에서 평화의 모범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견지에서 평화는 어떻게 진작할 수 있을 것인가?
맺음말
3. 불교식 평화 건설법: 비폭력, 불살생의 철저한 확대 실천
불교식 평화 진작은 기본적으로 비폭력의 실천에 있다. 그것은 단지 생명을 지닌 존재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극적 불살생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너른 의미로 불교의 오중 계를 모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불교적 윤리적 삶의 이행 에 있다.
다시 한번 오중계를 생각해보자. 1) 일체의 생명을 존중해서 이를 내것으로 빼앗지 아니할 것입니다. 2) 생명 아닌 물건도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3) 육욕에 따르는 일탈행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4)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5)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체의 음식을 절제하겠습니다. 언뜻 이것들만 철저히 지키면 자동적 으로 이 세상에 평화가 오겠다는 희망을 품을 법도 하다.
그 한 보기로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자는 불교도의 결의는 다음과 같이 철저를 극한다. 구체적으로 살생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출적에 진정한 의미의 살생이 된다. 첫째, 동물이거나 인간이거나 살아있는 생명이 있을 것; 둘째, 자기의 행위가 생명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 있을 것; 셋 째, 살생을 마음 속에 품을 것, 넷째, 이 '살생'이라는 생각 을 적절한 방법을 동원하여 실행에 옮길 것: 다섯째, 그 결과 실지로 생명이 없어지는 죽음이 일어날 것. 네번째 요 건인 살생의 방법으로서 여섯 가지가 경전에 나열되어있다. 1) 직접 자기 손으로 죽임, 2) 남을 시켜 죽임, 3) 총을 쏘거나 화살, 막대기등을 동원하여 죽임. 4) 땅에 파묻거 나 숨을 막히게 하여 죽임, 5) 술수를 써서 죽임, 6) 마술을 동원하여 죽임.
불교가 이처럼 철저하게 살생을 분석하는 이유는 일체의 살생을 악으로 간주하여 비폭력 불살생을 생활화하기 위해, 그 구체적 반대 보기 즉 폭력의 실상을 직시하여 이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히는데 있는 줄 안다. 만약 위의 계를 철저히 지키자면 불교도는 아마도 철저한 채식 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평화론자로 직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불교식 오계를 모두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이 지상에 평화가 도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잠시 폭력의 유형을 생각해 보고 불교가 평화 진작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를 있음을 살펴서 이 소론의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평화학의 정착에 노력하는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의 지론에 따르면 폭력에는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마치 현대 사회의 율사들이 작성하는 법조문의 정확성을 방불케하는 위의 살상 분석의 틀을 보면 불교가 직접적 폭력에 대처하는 치밀성은 경탄할 만하다. 그러나 구조적 간접적 폭력에 대해서 불교는 철저하지 못하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못먹어서 영양실조로 인한 죽음을 보면, 불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두번째 계율인 도적질 않기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인 개인적 도적질에 대한 경고와 규제는 철저한 반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구조적으로 들어있는 착취의 과정에 대해서 불교는 제대로 눈을 떴는지 의문스럽다. 다음 문화적 폭력은 위의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방조하는 문화 행태를 지칭한다. 불교가 그런 문화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역사상에 전쟁과 폭력을 행한 불교 군주와 불교 국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요즘의 불교인들은 평화의 진작을 위하여 여러가지 방책을 제시한다. 현대 평화 학의 결론적 방안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불교 특유의 생활방식을 가미한 불교적 평화진흥책의 대강은 1) 가난을 구제하고 고용의 기회를 확대할 것, 2) 생활수준을 높일 것. 3) 교육기회를 확충할 것. 4) 건강 보건 시설을 제공할 것. 5) 인권을 보장할 것. 6) 무력사용을 철폐할 것 등이다. 이 모든 방책에 동조하면서 불교의 견지는 근본적으로 탐진치의 제거라는 인간의 근본적 자기 개조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개인의 평화없이 사회의 평화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강령이다. 이제 불교도는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기본강령을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에 모두 확대하는 실천적 용기 를 발휘할 때이다.
*2. Philosophy East and West, Vol. XIX, No. 2 April 1969: A Special Issue on Violence and Nonviolence East and West, Eö) Prof. Upadhyaya's paper "The Bhagavad Gita on war and peac, PP.159-169. 필자의 『동양의 지혜와 1』 (세계사, 1990.) 300-334쪽을 참조하시압.
법정 스님 옮긴 『진리의 말씀」 《법구경>에서 따옴. 불일소책(1984) 12쪽. 한역에는 더욱 참을 자를 덧보태어 원한을 품기보다는 참음으로써 끝없는 한풀이의 종언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방법이야말로 여래의 진리임을 표방
여기 법구경의 번역은 대부분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따옴.
Buddhism, Imperialism and War by Trevor Ling
(George Allen and Unwin, 1987) 한글 부분역에는 한길 사의 「오늘의 사상 신서」 30으로 편찬된 「현대사회와 불 교』 (이재창, 멱정, 월폴라 라라 외) (1981, 서울)의 548-366을 참조할 것.
중국의 경우는 John J. M. de Groot의 "Militant Spirit of the Buddhist Clergy in China." Toung Pao,
Series 1, 2. no. 2 (June 1891). 127-139를 보시고, 일본의 경우는 Paul Demieville의 "Le Bouddhisme et 1a
Guerre," Melange publies par l'i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1 (1957). 347-385를 보시압.
졸고"근대 이후의 중국의 불교연구." 「동양의 지혜와 선」 371쪽 참조.
H. Saddhatissa "Buddhist Ethics"" George Allen and Unwin, London: 1970. p.89ff.
태국에서 부정기적으로 발행되는 「Seeds of Peace」 Vol.5 No. 1 January, 1989. pp.9-11. "The Role of Buddhism in the Creation of Peace" by Johan Galtung, Professor of Peace Studies, University of
Hawaii를 참조할 것.
Dialogue New Series, Vol XVI Nos. 1-2-3. 1989. pp.37if. Esp.53-58.
필자소개 심재룡((1943~2004)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 문사 기자와 미국 하와이대학 강사를 거쳐 현재 서울대 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선불교의 철학적 기초 (태학사), 『끈기와 슬기의 사람들』(계몽사), 『한국의 전통사상』 (박 영사), 「현대사회와 윤리 (공저, 박영사) 『현대사회와 평화』 (공저, 서광사),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공저, 집 문당), 『동양의 지혜와 선, (세계사), "부처님이 올 수 없는 땅」 (세계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홉 마당 으로 풀어 쓴 선』 (스즈끼 지음, 현음사) 『연꽃속의 보석 이여-티베트 불교 길잡이」 (베러 음, 불일 출판사), 『있는 그대로의 자유」(앨런 왓츠 지음, 세계사) 『유배된 자유 달라이 라마 자서전』 (정신세계사)등이 있다.
1993년 1월 미주현대불교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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