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에서/채필녀
속세를 한짐 지고 절에 올랐다
절에서는 왜 다들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지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불경소리 낭랑하게 퍼지는데
한껏 폼을 잡고 사진 찍는 중년남녀
저것들, 불륜이지,
불경소릴 들으면서 불경스러운 생각이나 하니
중생은 중생이로구나
대웅전까지는 가파른 계단,
짐풀기가 이렇게 힘들다
부처는 계단 오르는 심사만 봐도 훤히 알고
굽어 살피시나보다 법당으로 들어가니
쥐 한 마리 슬그머니 부처 허리를 돌아간다
부처에게는 쥐나 나나 미물 한가지로 보일까
께으름직하지만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눈물은 왜 그리 쏟아지는지 문고리에 옷자락만 걸려도
머리 깍을 거 같다, 뜨락 옆으로
여름이나 되어야 꽃 필 패랭이가 잎 피우고 있으니
견뎌야 할 것이 많은 중생이 여기 또 있구나
풍경소리 문득 들리고 오줌이 마렵다
화살표를 따라가다가
어쩐지 내 오줌은 오물구렁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계곡에 콸콸 쏟아내니 비로소 짐 벗은 듯, 가볍다
바로 그 자리에서 손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고 내려오는데
앞서가는 내 그림자에
누가 얹어 놓았는지 올라올 때 그 짐이
어깨동무하듯 걸쳐 있다
<시 읽기> 석남사에서/채필녀
채필녀는 41세에 시단에 나와 47세에, 위 시가 수록된 첫 시집 『나는 다른 種을 잉태했다』를 출간하였습니다. 늦깍이인 셈이다. 그러나 시 쓰는 데 늦깎이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삶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그때가 시를 쓰는 데 적기인 셈이지요. 젊은이의 시엔 젊은이다운 매력이 있고, 나이든 사람의 시엔 또 나이든 사람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이므로, 산술적인 나이를 앞에 놓고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은 좀 유치한 일이지요.
채필녀 시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할말을 거침없이 다해버리는 데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스스로 내면화한 자아검열 때문에, 위신 때문에, 도덕과 윤리 때문에, 시적 관습 때문에, 보고도 못 본 척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마음 한 옆에 밀어놓고 숨기던 말을 그는 어느 때는 순수한 아이처럼, 또다른 때는 능숙한 노인처럼 세상의 허를 찌르며 유쾌하게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과 화법을 구사하는 시인의 삶과 시적 공간은 시원하게 트여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도 훤히 바람 길이 나는 듯합니다.
석남사石南寺는 채필녀가 살던 경기도 안성에 있는 불교 사찰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적인 고찰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 시의 제목인 석남사는 절의 상징일 뿐, 그 이름이 다른 어떤 것이라 해도 시세계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위 시는 시 속의 화자가 속세의 짐을 털기 위해 그 짐을 지고 석남사를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속세의 짐을 털기 위하여 사람마다 찾아가는 곳은 모두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찾아가는 곳이 자연과 사원입니다. 이런 곳은 분명 사람들이 습관적인 방문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들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발길이 세월을 두고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런 곳이야말로 그 속의 쉼터가 꽤 넓고 두터운가 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곳에 가면 세상의 시간표 대신 우주(신)의 시간표를 받아들고 마음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공부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마음공부인지라 이 공부는 여간하여 금방 성적이 오르지도 않고 끝이 나지도 않습니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우리들이 마음 한쪽 마당엔 먼지가 쌓이고, 흠집이 나고, 폐허처럼 거미줄이 가득해집니다.
위 시에서처럼 세속의 짐을 털기 위해 절을 찾아가는 시적 모티프는 많은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석남사라는 제목 아래 바로 등장하는 첫 연의 첫 행을 읽고 우리는 조금 시들해질 수도 있습니다. 뻔한 세계가 전개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을 멈추고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시인은 우리의 인내를 배반하지 않고 아주 색다른 세상을 즐겁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우선 첫 연에서 살펴보면, 그는 절에만 가면 구제 받아야 할 중생이 되어버리는, 나약한 우리들의 희극적인, 아니 비극적인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절이 무엇이기에 그 앞에 들어서기만 하면 우리의 존재가 바닥으로 내려앉아 허둥대고 있는지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사에는 불경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중생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들의 허술한 틈을 뚫고 인간들의 행동과 상상력은 세속의 질서 속을 오갑니다. 시인은 이런 우리들이 모습을 그의 거침없는 말하기 방식에 의지하여 발랄하게 표현합니다. 중년남녀가 한껏 멋을 내고 사진을 찍는 것을 바라보며 “저것들 불륜이지”라고 순간의 윤리적 우월감을 드러내며 경멸적인 속생각을 번개처럼 시 속에 삽입시키는 것, 그러다가 불경소리 속에서도 불경스러운 생각이나 한다는 식으로 동음이의어의 묘미를 천연덕스럽게 구사하는 것, 그렇지만 이런 우리들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중생이 아니냐는 자조와 자성이 섞인 능청스러운 포즈를 보여주는 것, 이런 것들이 다 그의 시적 장기이며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의 요소입니다.
제2연으로 접어들면 중생으로서의 시인의 사찰 방문은 좀더 가까이 클로즈업되어 대웅전으로 향한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부처가 있는 대웅전까지의 가파른 계단은 그 가파른 계단만큼이나 그것을 오르며 영혼의 길을 닦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이 땅의 불교 사찰은 도시의 가게처럼 도로가에 바짝 붙어 있지 않고 세속의 시간표를 조금씩 잊으면서 입장하라는 듯 고요하고 긴 길을 통과한 깊은(혹은 높은) 안쪽에 자리 해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문을 들어서더라도 많은 경우 계단을 오르며 부처님을 맞이하도록 구성해놓았습니다.
시인은 이런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세속의 “짐풀기가 이렇게 힘들다”로 토로합니다. 사실 인생의 짐풀기가 쉽다면 그렇게 많은 절이 산속 곳곳에 있을 턱이 있겠나요? 그러나 우리는 쉽게 그것을 풀고 싶고, 그것을 푸는 데 성공했다는 부처는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시인은 그 존경스러운 부처에게, 그는 이 계단을 올라오는 모든 사람들이 안쪽을 다 아는 것 같다고 선망 섞인 투정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올라간 대웅전에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쥐 한 마리가 부처의 허리를 슬그머니 돌아가는 걸 봅니다. 쥐의 갑작스런 출현은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부처의 몸을 쥐가 휘돌아간다는 사실도, 고상한 법당에 주기 산다는 것도, 그것을 발설해버린 시인도 모두 놀랍습니다. 무엇보다도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돌려야 할 내용을 「벌거벗은 임금님」 속의 아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폭로한 시인의 용기가 놀랍습니다. 부처의 몸과 쥐, 법당과 쥐, 어떻게 짝을 지어봐도 이들 사이는 어색하고 삐걱거립니다. 그러나 조그만 사실적인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짝짓기가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그럴 법한 ‘개연성’이 있는 세계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신성은 관념의 산물이고, 불상이나 법당은 물질로서의 현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시인의 어린아이와 같은 폭로는 금방 속 깊은 노인의 마음을 동행시키며 “부처에게는 쥐나 나나 미물 한가지로 보일까”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울림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인간이나 쥐나 우주의 시간표로 보면 동급이지요. 부처도 인간만을 편애하지는 않았고요. 그러니 인간들이 부처의 몸을 만지는 것이나 쥐가 부처의 허리를 감도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처와 쥐가 한나라의 식구처럼 법당에서 함께 산다고 하여 그게 무슨 큰일이 될까요?
그런데 이처럼 고상하고 심각한 의미와 울림을 불러일으키던 시인은 다시 우리의 생각에 충격을 가합니다. 아무래도 쥐가 있던 자리는 “께으름직하”게만 느껴지니 그것과 쉽게 동거할 수는 없을 것같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참을성 있고 사려 깊은 인간답게 그는 이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부처 앞에 “오체투지”를 합니다. 오체투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며 대지에 몸을 붙이는 일, 그런 행위 속에서 시인의 마음은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은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나타나고, 쥐도 법당도, 께으름직함도 잊은 듯이 그는 금방이라도 세속의 시간표를 던져버리고 출가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변덕스럽고, 요동치고, 믿기 어려운 인간의 감정, 그러나 그 순간만은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영리한 시인은 눈물을 쏟으며 지금 이 순간에라도 출가할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얼마나 희극적이기까지 한가도 슬쩍 알려줍니다.
시인은 눈길은 다시 대웅전 뜨락의 패랭이를 보는 데로 옮겨집니다. 아직 덜 자란 패랭이 무리를 보면서 그는 이들 역시 우주 속의 아픔 많은 미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시인과 쥐와 패랭이는 모두 동족이 됩니다. 이곳은 상당한 수준의 마음공부와 깨달음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시를 읽는 우리들도 시인을 따라 무척이나 진지해 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강화라도 해주듯이 종교적 성물聖物인 풍경이 내는 소리란 바람(우주)이 사물을 쳐서 내는 진리의 소리입니다. 이렇듯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이끌던 시인은 갑자기 또 우리의 생각에 충격을 주며 우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습니다. “오줌이 마렵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풍경소리와 오줌이 마렵다는 것의 공존, 그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당황합니다. 진리의 소리와 오줌소리, 초월의 신성함과 생체의 리얼함, 형이상학의 황홀함과 형이하학의 사실성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맞추느라 또 한 번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상한 문명인이자 철학자라 하더라도 몸의 생체리듬을 무시하고 문명과 철학을 논할 수 없듯이 그와 더불어 우리는 그가 오줌 누는 장소로 가고 맙니다. 그가 오줌을 누는 광경은 멋쩍지만 파격적이고 통쾌합니다. 그 파격과 통쾌함을 거치고 나면 오줌이 마렵다는 사실이야말로 풍경소리가 잉잉대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느냐는 생각이 깃들게 됩니다.
이제 오줌까지 시원하게 해결한 시인은 “가볍다”고 일갈합니다. 꼭 선어나 법어처럼 들립니다. 그런 시인은 가벼워진 몸으로 오줌을 눈 계곡물을 손그릇으로 떠 마십니다.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합니다. 이렇게 점증하는 그의 통쾌한 파격은 자연인을 만나 것처럼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해방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여기에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의 사찰 순례가 한 나절의 드라마틱한 심리극 같았던 것처럼 그는 다시 또 한 장면의 연극을 끝으로 연출합니다. 그것은 마치 연극이 대단원이라도 되듯이 너도, 나도, 세속인이 아니었느냐고, 다시 세속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느냐고 우리 앞에 세속인의 하행길을 열어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하행길에 선 자신의 그림자에 세속의 짐이 자기보다 먼저 깃들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사찰을 순례하는 동안 세속의 짐을 아주 잠시, 그것도 간헐적으로 잊을 수 있을 뿐 그것을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우리가 세속의 짐과 평생 동행하는 일뿐인가요? 위 시의 뒷부분을 보면, 그리고 시인의 말에 동의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속의 짐은 “어깨동무하듯” 시인의 그림자에 걸쳐 있습니다. 그것을 거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과 동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결국 위 시에서 석남사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세속의 짐을 끌어안고 달래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너무 고통스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를 대비해 석남사가 있고, 그 석남사를 방문하고 쓴 시인의 석남사 시편이 남아 있으니까요.
모처럼 만에 절이 상징하는 신성의 무게와, 세속이 상징하는 생의 무게 앞에 무력하게 주눅들지만은 않고 경쾌한 보폭으로 자신만의 길을 내는 한 시인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지지하되 우울하지 않고, 발랄하되 경박하지 않은 그의 언어와 사유가 이 작품을 읽는 데 즐거움을 더해주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