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幸福)”은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서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 '행복'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무엇이 행복인가?' 라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명확하거나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말은 불행입니다.
행복의 서양쪽 말은 happiness, hapless, perhaps, happenstance로 각기 다른 뜻을 가진 단어지만, 어원상 모두 다 친척 관계라고 합니다. 모두 다 ‘hap(우연)’에서 나온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본질은 우연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한 이후로 서양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즉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두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Arete(탁월성)의 개념으로,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토대로 하여 이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은 음악가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가수를 하는 것으로 지금의 행복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사는 목적은 바로 이 행복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좀 더 파고들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다른 점도 많은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물질적 행복 및 당시 그리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명예 등은 타율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보았고, 그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관조와 중용 같은 비교적 정신적인 것들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이기에 사람들마다 다를 겁니다. 애초에 이건 자기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만하면 행복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 안온한 만족감을 느껴버리고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행복하다고 감히 말해버릴까 봐 경계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행복에 대한 혐오’ 혹은 ‘행복에 대한 공포’라 말합니다. 방심하는 사이 ‘어, 나 지금 행복하네?’ 하는 느낌이 들까 봐, 나도 모르게 마음을 풀고 웃고 있을까 봐, 행복감을 애써 밀어냅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기쁨을 드러냈다간 불행이 찾아오리라는 미신적인 두려움이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인생의 변곡점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를 읊조리는 버릇이 있는 우리는 행복감을 좀처럼 환영할 수 없습니다.
본래 새옹지마는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하지만, 언젠가부터 행운과 불행은 반드시 서로를 데려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 습관은 행복 앞에서 더욱 주춤거리게 만듭니다.
개인적 역경 역시 영향을 미칩니다. 연구에 따르면, 행복 혐오가 높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불행한 사건을 더 많이 언급하고, 현재 외로움은 더 크게 느낍니다. 세상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할 수 있으니 늘 경계하라 배웁니다. 그렇게 배워온 대로, 마음이 늘 보초를 섭니다. 내 안에서 행복감이 발견되는 순간, 다양한 기복신앙적 노력으로 그 ‘불경’한 감정을 없던 일로 하려 합니다.
‘언젠간’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지금’은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 것 역시 원인 중 하나입니다. 대표적 예가 완벽주의적 염려가 많은 분입니다. 현재에 안주했다가는 곧 후회하는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이대로 만족해선 안 된다고 다그치며, 그렇게 오늘 자 행복을 유예합니다.
사랑하는 주변 사람에게 불운한 일이 벌어지거나 신체적·심리적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행복을 불편해하거나 죄스러워합니다. 행여 내가 웃고 있을까 봐, 행복해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자기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줄 도전적인 일에서 뒤로 물러나 버리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둡니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나 자살 유가족들에게도 행복 혐오는 몹시 긴 그늘을 드리웁니다.
행복 혐오는 행복감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감, 자부심, 즐거움과 같은 대부분의 긍정적 감정을 억압·차단하며 우울감을 높입니다. 보통 즐거운 사건을 기대하고 만족스러워할 때 우리 뇌의 여러 영역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입니다. 이를 뇌내 쾌락회로 혹은 보상회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거나 우울한 뇌의 경우 이러한 보상회로의 연결성은 약해집니다.
즉, 뇌 한쪽에서 어떻게든 즐거운 일을 도모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응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다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이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때때로 심리치료 중인 내담자들은 여러 증상이 호전되면서 우연히 느낀 행복감에 소스라치게 놀라 원래 상태로 회귀하려고도 합니다. 행복감을 느낀 자신을 처벌이라도 하듯 다시 행과 불행의 균형을 굳이 맞추려 합니다.
불운이 쫓아올까 봐, 내가 노력을 덜 하게 될까 봐, 나의 애인이나 가족은 아직 나만큼 행복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뭐가 되었든 그래서는 안 되니까, 이제야 봄처럼 찾아온 나의 행복감을 혐오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행복할 그 언젠가’를 위해 지금의 행복감을 애써 밀어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유로 나의 귀한 삶을 황폐하게 버려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행복감은 누적식의 적립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뇌는 그렇게까지 오래된 일에 일일이 행복감을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행복감이란 적어도 뇌 안에서는 유효기간이 몹시도 짧은 당첨 쿠폰입니다. 순간순간 당첨금을 찾아가지 않으면 쿠폰은 곧 휘발되어 사라집니다. 어째서 유효기간이 다 지난 당첨 쿠폰을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는지요?
오늘치 행복을 내일이면 사라질 듯 오늘 다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계속해서 축제처럼 벌여댔으면 좋겠습니다. 별것도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잠시 주위를 잊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그 몰입은 우리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커피의 따뜻한 온기와 냄새를 음미할 수 있다면 그 역시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지금은 불행하더라도 영원히 불행할 리도 없는 나의 사람과 팔을 대고 가만히 나란히 앉아만 있어도 이 역시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그때 부디, 찾아온 행복감에 무턱대고 방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어, 나 지금 이 정도면 행복하네? 잘살고 있네?’ 한마디쯤 내뱉고, 그 무해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해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중앙일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오피니언 행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흔히 하는 얘기 중에서 쾌락은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행복은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이고, 쾌락은 단기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명문대 합격하면 행복할 것 같다','로또 1등 당첨되면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을 원하는 것이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쾌락을 맞이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적응해서 당연한 일상이 되기에 행복감이 다시 평상시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얘기하자면 행복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위 글에서처럼 순간, 순간에 찾아오는 쾌락을 행복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나중에 무슨 큰 행복이 있을까요?
친구가 전화할 때마다 묻는 말이 ‘지금 행복하냐?’입니다. 제 대답은 언제나 ‘그래 행복해’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