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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시기, 어떻게 보내야 할까
예수님 공생활 모습처럼 일상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해야
교회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에 들어섰다. 많은 신앙인들은 연중시기에 대해 큰 행사를 치르고 잠깐 쉬는 기간으로 여기며 중요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실제로 특별한 기념을 하는 시기는 아니지만 34주간(혹은 33주간)이라는 가장 긴 기간을 지낸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긴 순례의 길을 가는 여정에서 연중시기를 뜻 깊게 보낼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
연중시기의 의미
교회 전례력은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시기들과 여러 축일들로 구성돼 있다. 연중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님 세례 축일’ 후 월요일부터 ‘재의 수요일’ 전 화요일까지의 기간과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월요일부터 대림 시기 전 토요일까지다.
연중시기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신비에 대해 축제를 지내지 않으며 어느 고유한 주제와 계획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즉 이 시기엔 구심점을 이루는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세례를 시작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전교활동과 복음 선포, 기적행위, 진리에 대한 가르침,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훈, 교회의 성장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연중시기는 하느님 나라 순례의 종착점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끝을 맺는다. 이 기간 동안 사제는 생명과 희열, 희망을 상징하는 녹색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한다.
연중시기 또 하나의 의미, 예수님의 공생활
교회의 전례주년은 그리스도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시기를 지내다 보면, 인간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새기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보다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윤종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는 이러한 연중시기에 대해 “특별한 사건이 있진 않지만 평범함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윤 신부는 “연중시기는 예수님과 공생활을 함께 지내는 시기인 만큼 공생활 중에 말씀과 삶이 일치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승구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는 “평범한 연중시기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어떻게 하면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고 도울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 밖 청소년들의 자립을 위해 투신 중인 김정미 수녀(성심수녀회)는 “공생활 중 예수님이 일상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보살핌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연중시기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활
연중시기는 예수님 공생활의 행적과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시기다. 이에 맞게 연중시기의 미사 독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교회의 성장 모습을 주로 들려준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요한 세례자가 잡힌 뒤 본격적으로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며 공생활을 시작한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세례 후 하느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드러낸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이어서 본격적으로 죄인, 여자, 병자 등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간다. 즉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과 억눌린 이들이 복음의 중심인물임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40)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13)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알려주심에 신분과 국적, 성별 등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며,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해서 이어 나간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루카 7,13-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마르 2,15)
마침내 예수님은 행복선언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선포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3)
예수님을 따라서
공생활 중 드러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겪는 고통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천명한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음을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가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중시기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 공생활 동안 행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즉 연중시기의 평범한 일상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할 때 성탄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세례 축일 유래와 의미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표양… 모든 인간이 주님의 세례에 동참
13일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받으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된다. 주님 세례 축일 저녁에는 구유를 비롯한 모든 성탄 장식을 치운다. 주님 세례 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살펴본다.
주님 세례 축일은 원래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낸다. 다만 주님 공현 대축일이 1월 7일이거나 8일인 때에는 대축일 다음날인 월요일에 기념한다. 올해는 1월 6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 13일이 주님 세례 축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세례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다. 요한 세례자에게 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예언의 성취를 위해 선택한 겸손의 표양이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간이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구원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는 것이었고, 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직 수행을 위한 도유와 파견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인간을 위한 구원사업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기도 하다.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와 주님의 세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빚은 기적(요한 2,1-12)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현을 나타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세례 축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공현’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세례 축일의 다음 주일(다해)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 세례 축일 미사의 고유 전례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다. 13일 미사 전례문 역시 입당송부터 본기도, 복음 말씀, 보편 지향 기도, 예물기도, 감사송, 영성체송 등 거의 모든 전례문에서 주님의 세례와 이에 대한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주님 세례 축일은 우리 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세례성사의 의미를, 그 첫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곤경에 처한 성가족을 도운 식물들
성탄절은 성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제다. 그래서 세상 곳곳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날을 기뻐하고 행복해 하며 지낸다. 그런 만큼 세상에는 성탄절을 경축하는 전통들이며 문화들이 다양하고 풍성하다. 또한 성탄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상징들이며 풍습들 그리고 이야기들도 많다. 그중에서 널리 알려져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것을 꼽자면 아마도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트리, 루돌프 사슴 이야기가 선뜻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쁘고 즐거운 축제의 뒤를 이어서 전해지면서 우리가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가슴 먹먹하고 슬픈 이야기가 있다.
2천여 년 전, 오래도록 기다려 오던 구세주가 마침내 탄생하였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기뻐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세상의 권력자이던 그 사람에 의해,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나시자마자 견제를 받으셨다. 유다의 왕 헤로데는 잠재적 경쟁자(?)의 출현 소식에 불편해진 나머지 성자 하느님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지명 수배되신 아기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피난길을 서둘러 떠나셔야 했다.
그런데 이 피난길이란 것이 말이 쉬워 그렇지, 갓난아기를 데리고 황망히 낯선 나라 땅으로 가는 것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의 전갈을 받고는 허겁지겁 갓난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나선 터였다. 이집트로 가는 길에 황량하게 펼쳐진 사막에서는 만나고 부딪치는 모든 것이 초조하고 불안한 세 식구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위험이요 장애물이었다. 언제 어디서 달려들지 모르는 들짐승들이며 강도들은 물론이었고, 뒤에서 추격해 오는 헤로데의 군인들은 더더욱 두려웠다. 성가족은 그저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따름이었다.
그 신산한 여정에서 성가족 세 식구는 어찌할 도리 없이 절체절명의 고비에 놓이곤 했다. 그러했음에도 우리가 뒷날 장성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계속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은 그 세 식구가 위험과 고통의 순간을 모면하고 무사하도록 보살펴 준 도움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작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 준 식물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성모님께 도움의 손길을 건넨 ‘세이지 덤불’
먼저 세이지(Sage)가 있다. 세이지는 2018년 9월호에서 ‘성모님의 숄’이라 이름으로 소개한 식물인데, 약초로서 그리고 허브로서 특유의 효능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세이지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미담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다.
헤로데 왕은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언젠가 유다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오랜 예언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마저 들었다. 불안해진 헤로데는 그 아기가 태어난 때를 계산해서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어린아이들 중 두 살이 안 된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장차 자기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 곧 성자 하느님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아기는 단 한 사람이었다.
- 세이지(좌) 주니퍼부시(우).
그렇지만 천사가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아기의 아버지 요셉에게 귀띔해 주었고, 요셉은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베들레헴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들어섰다.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그 낯선 곳에 손을 내밀어 성가족을 도와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일단 헤로데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힘겨운 피난길에 성가족은 차츰 지쳐 갔다. 요셉이 지친 마리아를 잠시 쉬게 하고는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숨을 돌리던 마리아는 갑자기 말들이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헤로데가 보낸 군인들이었다. 만약 저들에게 붙잡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말들의 발자국 소리보다 앞서서 다가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도움을 받을 길이라곤 없었다. 마리아는 급한 대로 곁에 있던 장미나무에게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장미나무는 그랬다가는 자신이 성난 군인들에게 짓밟힐까 봐 겁이 나서 이 부탁을 거절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순간에 장미 줄기에 가시가 돋아났다고 한다. 이번에는 정향나무에게 똑같은 부탁을 하였으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정향나무는 말리면 좋은 향신료가 될 꽃을 피우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향나무의 꽃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눈에 띄는 것은 세이지(Sage) 덤불뿐이었다. 세이지는 친절하게도 마리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재빠르게 잎과 꽃을 피워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 모자가 몸을 숨길 자리를 만들어 냈다. 군인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지나쳐 갔다. 마리아는 감사하며 답례로 세이지에게 축원의 말씀을 건네셨다. “세이지야, 참으로 고맙구나. 내가 너를 축복하리니,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너의 착한 행실을 기억하며 기릴 것이다.”
군인들에게 붙잡힐 성가족을 숨겨준 ‘주니퍼 부시’
그런데 이 훈훈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이지만이 아니다. 세이지 말고도 몇몇 종류의 식물들이 같은 선행으로 성가족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 중의 하나가 주니퍼 부시(Juniper Bush)다. 흔히 노간주나무, 향나무와 같은 향나무 속의 침엽수들을 통칭하여 주니퍼라고 부르는데, 주니퍼 부시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아프리카의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 자라는 침엽 관목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의 시실리에는 주니퍼 부시의 미담이 전해 온다. 피신 중이던 성가족이 군인들에게 붙잡힐 위기에 놓였을 때, 주니퍼 부시 덤불의 가지들이 넓게 펼쳐져서 성가족이 숨을 수 있게 되었고, 군인들은 설마 저런 바늘잎 덤불 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숨었으랴 싶어서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의 다른 이름이 ‘성모님의 은신처’(또는 ‘성모님의 쉼터’, Our Lady’s Shelter)다.
또한 덩굴식물인 클레마티스(Clematis)와 로즈마리도 피난 중인 성가족을 숨겨 준 식물이라고 전해 온다. 그래서 클레마티스는 ‘성모님의 그늘’(또는 ‘성모님의 쉼터’, Virgin’s Bower)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성모님의 작은 꽃다발’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2018년 9월호 참조) 로즈마리에는 이 미담 외에 성모님이 옷가지들을 빨아서 로즈마리 덤불 위에 널어서 말리신 뒤부터 향기를 생겨나서 풍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례, 그 능동적 참여!] 왜 1월1일이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가?
원래 12월25일 성탄절은 태양신인 제우스의 탄생일이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우리 믿음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을 인문학 언어로 문화전이(文化轉移: Transculturation) 라고 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황금, 유향, 몰약을 봉헌한 주님 공현 축일인 1월5일을 성탄일로 지내왔다.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생일은 이미 유럽의 희랍문화 안에서 널리 알려진 날짜이기에 교회는 선교차원에서 그 문화적 기념일을 선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다신(多神)문화의 최고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일신인 하느님이며 역사의 주인공인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유럽의 신관(神觀)은 바뀌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크리스 마스(Chris-Mass)라고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이름이다. 크리스 마스(Chris-Mas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상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러한 십자가상의 자기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미사를 제정하고, 이를 다시 오시기까지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전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과월절 음식을 나누면서 빵과 포도주의 잔을 들어 축복하며 이것이 나의 몸과 피임을 선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임을 선포하며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한다. 이것을 ‘미사(Mass)’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의 공적 예배는 바로 미사이다. 즉 크리스 마스는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고 모델이며 원리
그런데 태양력의 첫날인 1월1일은 그리스도의 축일이 아니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다. 교회는 11월 연중시기를 마치는 마지막 주간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고, 1월1일을 그리스도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로 정하여 의무축일로 지내도록 한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태양력의 첫날인 1월1일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는가?
그 이유를 먼저 성체강복의 장면에서 찾고 싶다. 타오르는 거룩한 빛이 태양처럼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성광’, 우리가 성시간 때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담은 성광을 떠올려 보자. 성체를 담고 있는 태양과 같은 모양의 황금으로 도금한 성광을 라틴어로 ‘솔라(Sola)’라고 부른다. 이것은 태양이라는 뜻이고 동시에 시간을 의미한다. 고대의 시간은 모두 태양의 위치를 보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태양은 모든 생물과 만물의 에너지원이고 동시에 시간을 의미한다.
사제가 성체를 성광 즉 솔라에 넣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성체를 그냥 성광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금테두리가 된 유리 케이스에 넣는다. 이것을 ‘루나(Luna)’ 즉 달이라고 부른다. 성체를 보호하고 안치하는 방과 같다. 이것은 여인의 태를 의미한다. 아기집을 의미하며 또한 처녀성을 의미한다.
솔라와 루나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녀인 마리아의 태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되셨다. “어둠속에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달이 어둠속에서 빛나듯 마리아의 신앙은 어둠속에 빛나는 신앙이다. 단순히 빛나는 태양의 빛이 아닌 처녀인 어머니의 순명과 사랑으로 하느님은 인간의 아들이 되셨다. 이것을 ‘육화(肉化)’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육체로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In-carnatio라고 한다. 그 여인의 신앙과 순명을 통해서이다. 성광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게 해주신 어머니인 마리아의 달과 같은 신앙과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예수 그리스도 출산은 육적인 어머니로서 만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고 모델이며 원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리아의 신앙이 신앙의 모범이며 모델이며 원리가 성경 어디에 제시되고 있는가?
바로 천사 가브리엘의 질문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에 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답한다.
그때 마리아의 표정은 어떠하였을까? 많은 이들이 그녀의 표정이 우울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라 착각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거로 그분의 표정은 밝고 친절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고 확언하고 싶다. 주님의 종이란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종속관계임을 나타낸다. 우리의 주님은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구원자이신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종이오니! 라는 말씀을 드리는 성모님의 표정은 밝았다.
중세 염세주의적인 분위기에서의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대화 장면을 그린 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수심에 가득 찬 마리아의 얼굴은 앳된 처녀의 얼굴이기보다 인생을 실패하여 짜증내는 못된 시어머니 얼굴이며 천사 가브리엘의 얼굴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 하나로 중세의 검은 시기가 얼마나 하느님과 인간관계를 역주행하여 인식했나 보여준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 말씀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운명체
복음에서 안드레아 사도는 단한마디의 복음으로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소!” 이 말에 베드로는 지체 없이 달려가 예수를 만나 그 역시 사도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베드로는 신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랑자체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전에 안드레아의 얼굴 즉 행복과 확신에 찬 미소가득한 동생의 변화된 얼굴을 본 것이다. 결국 복음은 미소였다. 미소가 선교가 되었다.
이러한 안드레아의 미소는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한 상황에 있는 카나 혼인 잔치의 종들에게서도 보인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러자 하인들은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이제 그것을 가져다주어라 하셨다. 그러자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무거운 돌 항아리를 가득 채운 하인들은 주인의 잔치가 바로 나의 잔치라는 하나 됨의 증거였다. 포도주가 떨어져 막막했던 하인들은 성모님의 말씀에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인들의 가득 채움은 신앙이며 희망이며 빛의 존재방식이었다. 땀 흘려 그 무거운 돌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하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다시 얻고자하는 의지와 희망이 잔치를 돕고 지휘하는 성모님과 하나 되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 결코 주인과 구분되고 차별받는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운명체적인 관계임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해의 첫날을 천주의 모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대축일로 지내며 그분이 첫 기적 카나의 잔치해서 하신 말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를 듣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새로운 한해의 삶속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돌 항아리를 옮기는 하인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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