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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 타계의 길
(14: 1-31)
본장내용
1-4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오다가 지시에 따라 바알스본에 장막을 침
5-14 애굽 군대가 추격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두려워 원망한다.
15-18 홍해를 건너게 하리라는 것과 바로의 군대의 멸망을 예고하심
19-20 구름기둥의 보호
21-31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건넜으나 쫓아들어간 애굽군대는 멸망함
서론
본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바알스본 맞은 편에 장막을 쳤을 때
애굽군대의 추격을 받아 극히 곤란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실이 기록되었다.
본론
1. 곤란을 당할 때 공포와 원망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
앞에는 홍애 뒤에는 대적이 있으니 두려워할 만도 하고 모세를 원망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진퇴유곡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전멸시킴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4,17,18)
이 점에서 우리가 알 것은 성도가 극히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공포와 원망중에서 시험에 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아야 한다.
2. 곤란을 당면할 때는 신앙으로 타개해야 한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은 여호와의 손의 권능이었다.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함은 주님의 높은 손으로라 하였다.
여호와의 높은 손에 의하여 나왔다. 고로 곤란을 당할 때에 여호와의 손, 높은 손으로 타개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모세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 (13,14)
곤란을 당할 때는
1) 승리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확신하자.
2)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
3) 우리는 그 하나님께 신앙으로 구원을 기대해야 한다.
4)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셨으니 이제 당한 고난인들 타개해 주시지 않겠는가?
3.곤란을 당할 때는 격려와 기도로써 타개 할 것 (시 50:15)
모세는 신앙으로 격려하고 물러가서 기도했다.
4.곤란을 당할 때는 더욱 전진해야 한다.
기도하는 모세에게 일어나 앞으로 나가게 하라고 하셨다. (15)
하나님은
나아가기를 명하신다.
그리고 길을 열어주신다.
바다라도 마르게 해서 육로를 열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오직 전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결론
앞에는 홍해 뒤에는 대적이 버티고 있는 곤란은 우리의 가는 길에 허다하다.
그러나
1. 공포와 원망으로 타개하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시험이다.
2. 신앙으로 타개해야 한다.
3. 격려와 기도로 타개해야 한다.
4. 더욱 전진함으로 타개해야 한다.
출처: 임성락 원문보기 글쓴이: 임성락의 행복한 날들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 14: 1-31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십계라는 영화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는 장면을 보고 통쾌하게 여긴 적이 있다.
LA에 있는 유니버살 스튜디오에 가 본 사람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을 촬영한 세트를 볼 수가 있다. 그렇게 조촐한 시설로 어떻게 그렇게도 장엄한 장면을 촬영하였는가 하는 영화 촬영 기술에 대한 감탄을 느끼게 된다.
또 성지순례를 가서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 본 사람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을 느끼게 된다. 저도 몇 년전 성지순례를 갔을 때 로마를 거쳐 카이로에서 이틀을 묵은 후 버스로 성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홍해 바다 밑으로 뚫린 터널을 통해 홍해를 건넜다. 바로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물위의 바다를 이스라엘 200만 군중이 남부여대하고 육지 같이 건넜다는 것을 상상할 때 감개가 새로웠던 기억이 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기적이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신 기적이라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얼마나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하나님은 왜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던가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아무데서나 기적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일 때에는 이유가 있다.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면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고 기적을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일 이유가 도무지 없는데도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일 이유가 있는데도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 다 큰 미스테이크를 범하는 것이 된다.
오늘 우리는 홍해의 기적을 상고해 봄으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앞으로도 이러한 기적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월 십사일 밤에 애굽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 날밤 그들은 첫번 유월절을 지켰다.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양고기와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다. 아무도 집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십오일 새벽 먼동이 트자 일제히 애굽을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발한 곳은 고센 땅 라암셋이었다. 라암셋에서 숙곳을 거쳐 에담에 장막을 쳤다. 그 때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 후회한 정도가 아니었다.
애굽 온 땅을 초토화시켜 놓고 떠나간 이스라엘 백성들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즉시 병거를 갖추고 장관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추격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여 없애든지 다시 잡아와 영원히 노예로 삼을 생각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숙곳을 거쳐 에담에 도착했다. 에담은 시내 광야의 끝으로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이 곧바로 시내산을 향하여 나아갈 지점에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지도를 보면 홍해는 팔레스틴과 애굽을 떼어놓는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남쪽은 바다가 되고 서북쪽은 시내 광야와 육지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방향을 바꾸어라.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로 나아가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명령대로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바닷가에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하히롯 바닷가에 장막을 치고 돌아섰을 때 바로의 말과 마병과 병거 600승이 추격해 왔다. 동쪽에는 홍해, 남쪽과 서쪽에는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절벽, 북쪽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안에 갇힌 쥐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좋게 해놓고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애굽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강요하다가 안되니까 재앙을 퍼붓고 나왔던 것이다. 재앙도 예사 재앙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장자를 죽이는 사망의 재앙을 퍼부었던 것이다.
떠나오면서 그냥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집 저집 금은 패물을 다 거두어 나왔다. 그랬으니 바로의 손에 붙잡히는 날에는 참혹한 변을 당할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바알스본과 비하히롯 사이 바닷가로 불러 들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참변을 당할 위기로 몰아 넣었을가?
이것은 하나님의 시나리오다. 하나님이 몰라서 한 일이 아니다. 애굽 사람들이 집집마다 장자가 죽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에는 추격해 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닷가로 몰아 넣으면 애굽 군대가 추격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안에 든 쥐와 같이 갇혔을 때 그 때 내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시나리오였다. 이것을 애굽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이 때는 기적을 믿고 기적을 바랄 때였다.
아무도 기적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 모세는 기적을 믿고 기적을 바랐다. 어떻게 해서 모세는 기적을 믿고 기적을 바랐나?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할 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14:4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 것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리라. 바로가 이스라엘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때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말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적을 나타낼 줄 믿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고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바닷가에 장막을 쳤다.
그런데 막상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느냐?
우리가 애굽을 떠나기 전에 우리를 애굽에 내버려두라고 한 것을 왜 이끌어 내었느냐? 우리는 애굽 사람들을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는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개죽음하는 것보다 낫다.”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불신이다.
이것이 신앙과 불신앙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기적으로 구원해 주기겠다고 하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애굽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자식이 죽었다. 사업에 실패했다. 자동차 사고가 났다. 한 가지도 희망이라고는 없다. 앞이 캄캄하다.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 이제 하나님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그런데 기적이 어디 있느냐? 예수 믿어 잘된 것이 무엇이냐? 예수 믿는 것 집어치우겠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불신앙과의 싸움에 이길까?
모세에게 있어서 홍해를 건너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백성들의 불신앙과 싸우는 것이었다. 모세의 믿음이 놀라운 것은 아직 보지 못한 일을 본 것처럼 믿는 것이었다. 아직 당하지 않은 일을 당한 것처럼 믿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애굽 군대를 인하여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이었다.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신앙과 불신앙의 싸움에는 신앙이 불신앙에게 궁지에 몰린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말이냐? 죽은 아이를 살린다는 말이냐? 망해버린 사업을 하나님이 일으켜 준다는 말이냐? 사고난 차를 하나님이 새 차로 바꾸어 준다는 말이냐? 대답할 말이 없다.
그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들을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겠다고 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싸우실 때에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적을 나타내 보이실 때 설치면 안 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때 떠들면 안 된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방자하게 굴면 안 된다. 사람이 싸울 때가 있고 하나님이 싸울 때가 있다. 사람이 나타날 때가 있고 하나님이 나타날 때가 있다. 사람이 일할 때가 있고 하나님이 일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일할 때에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일 때에 사람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이 떠들고 설치므로 하나님의 기적을 막아버리는 수가 많다. 이럴 때는 믿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자를 고쳤다. 왕의 신하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 그런데도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부인하고 방해했다. 그때 예수님은 거기서 기적을 더 행하지 않고 가버나움을 떠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행하려고 하시다가 그만 둔 일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고 하시다가 복받기를 거부하자 복을 거두어 가신 일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자.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어떻게 영광을 얻으려 하나이까? 여호와여 어떻게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여호와로 알게 하시려나이까? 여호와여 이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어떻게 하리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응답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아직 바다가 갈아지지 않았는데 먼저 나아가라고 했다. 너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바다를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로 난 육지로 걸어가게 하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라. 그때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출14:15-17 )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적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을 믿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면 바닷가 갈라질 것을 믿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믿을 수 있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이미 보았다.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리라고 하신 대로 뱀이 되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라는 대로 쳤더니 하수의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를 잡고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위에 폈을 때 개구리가 올라와 애굽 온 땅을 덮치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를 들어 땅에 티끌을 쳤을 때 티끌이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이 이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을 보았다.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자 하늘에서 우박과 뇌성과 불이 내려와 사람과 짐승과 밭에 있는 채소가 피해를 입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를 애굽 땅위에 높이 들자 동풍에 밀려 온 메뚜기떼가 애굽 온 땅에 덮여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을 남기지 아니하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 하나로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본 모세는 이번에도 지팡이를 잡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면 바다가 갈라지리라는 것을 모세는 믿었다.
그 모든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보았다. 보았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모세는 믿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았다. 전에 있었던 기적을 믿는 사람은 지금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 과거에 있었던 기적을 믿는 사람은 미래에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
전에 내게 어떠한 기적이 일어났던가를 확인해 보자. 여러분에게는 지금까지 한 번도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었나?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났어도 기적이 일어난 줄을 모른다. 적은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본 사람을 큰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지팡이로 물이 피가 되게 하고, 지팡이로 개구리를 올라오게 하고, 지팡이로 이가 생기게 하고, 지팡이로 하늘로부터 우박과 뇌성과 불이 내려오게 하고, 지팡이로 메뚜기떼를 불러오게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게 한다는 것도 믿었다.
여러분에게 적은 기적이 있었던 것을 믿는가? 큰 기적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전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는가? 지금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앞으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신다. 사람이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기적을 바랄 것도 없고 사람이 기적을 행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도구로 쓰일 것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이 가라는 데로 가면 된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난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지라 할 때 던졌다. 지팡이를 들라고 할 때 들었다. 지팡이로 가리키라 할 때 가리켰다. 그 때마다 기적이 나타났다.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기적이 있었다. 여러분에게도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번 기적이 있었다. 교회가 설립된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 있다. 두 가정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열 가정이 된 것은 기적이다. 설립 예배 때 400명 이상 되는 성도들이 축하하러 온 것은 기적이었다. 30명 교인 중에 10명 교인이 선교 여행을 다녀온 것도 기적이다.
기적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과 같다. 비단이 곱지만 그 위에 꽃이나 새나 산의 수를 놓은 것은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것을 금상첨화라고 한다. 기적은 맑은 하늘에 뭉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구름 위에 황혼이 비취는 것과 같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후에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구원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한 평생에 기적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 일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깨달음을 준다. 용기를 준다. 소망을 가지게 한다. 기적을 구하자. 기적을 바라자. 기적이 일어날 줄을 믿자.
여러분의 한 평생이 비단에 기적의 수를 놓은 것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한 평생이 맑은 하늘에 뭉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구름 위에 찬란한 황혼이 비춰오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자. 다채로운 인생을 살자. 먹고 자고 일만 하다가 죽은 인생이 아니고 내 인생 수첩을 열면 기적으로 수놓은 인생을 살자.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바다 위로 손을 내어밀었을 때 여호와께서 밤새도록 동풍을 불었다. 동풍에 바닷물은 물러가고 홍해는 갈라졌다. 바다는 마른 땅이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난 육지를 걸어갔다.
바닷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가는 좌우에 벽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 애굽의 군대와 마병들이 쫓아왔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애굽 군대를 혼잡게 했다.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애굽 군사들의 병거는 바퀴가 벗겨서 서로 부딪쳐 수라장이 되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덮이게 하라고 하셨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갈라졌던 바닷물이 합쳐져 애굽 사람들은 수장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날이 애굽 사람들의 멸망의 날이 되었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고 믿음 없이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멸망을 받았다. 홍해를 건넌다고 다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 민족에게도 큰 기적의 날이 있었다. 그 날은 1945년 8월 15일이었다. 1945년 8월 14일 밤 우리 민족은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바닷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다.
우리는 독안에 든 쥐와 같았다. 중국으로 피할 길도 막혔고 소련으로 피할 길도 막혔다. 일본은 점점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름도 국토도 국권도 다 빼앗기고 희망이라고는 어느 한 곳에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기적이 일어났다. 원자탄의 바람이 일본을 물속에 장사지내고 말았다. 우리는 자유를 되찾고 해방을 맞이했다.
우리는 미국이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던진 것이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리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던진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한 것이 되었다.
왜 하나님은 일본의 세력을 꺾고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셨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학대받는 민족을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기적을 믿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성도들은 일본은 망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일제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으로 해방을 주셨다.
8.15 해방의 기적을 본 우리들은 또 하나의 기적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남북통일에 관한 기적이다. 남북통일에 관한 소망은 아무데도 없다. 중국도 한국을 통일시킬 수가 없고 미국도 한국을 통일시킬 수가 없다.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다. 기적으로 한국을 통일시킬 수가 있다.
단 기적을 믿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기적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적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나? 적은 기적을 보고 큰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에게 기적을 믿는 믿음을 주신다. 전에 있었던 기적을 보고 장래에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에게 기적을 믿는 믿음을 주신다.
지난 날 우리에게 일어난 기적을 믿는 사람이 되자. 장차 통일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이 되자.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을 믿는 사람이 되자. 통일의 큰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통일의 기적을 나타내 보일 때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국민이 되자.
통일의 기적을 믿고 여호와의 구원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국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호와는 신의 신이요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우리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자. (끝)
홍해사건
출 14: 1-31
홍해는 지금도 갈라집니다.
지난 한 주간에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13-15장에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의 제목은 『당신은 홍해의 비밀을 아십니까?』라는 말씀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홍해사건은 구원받은 성도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홍해속에 크고 놀라운 비밀한 계획을 감추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홍해 앞으로 인도함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당신을 「블레셋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13:17-18)라고 했습니다. ② 「바로의 군대를 장사(葬事)」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의 모든 신들은 모세가 내리는 재앙 앞에 다 진멸되었으며, 생축의 초태생과 사람의 장자는 유월절 재앙에 다 멸망 받았으며, 이제 마지막 남은 군대들은 홍해에서 장사하신 것입니다. ③「이스라엘 백성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린도전서10:1-2)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꼭 기억할 사실이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 앞에는 반드시 홍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홍해 앞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과오를 행치 않습니까? 이제 홍해 앞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홍해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을 깨닫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홍해는 돌아서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14:2)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은 성경지도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돌쳐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가는 길을 돌아서(돌쳐서-turn back)가게 하십니다. 바로 가면 쉽게 빨리 갈 수 있는데 어렵게 돌아서 고생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당신이 알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왜 바로 가게 하지 않으셨는가? 바로 가는 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가면 「블레셋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족속입니다.(사사기16:23).그들은 성민이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민으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방해하는 그 모든 세력이 바로 블레셋 무리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블레셋 무리를 만나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홍해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빨리 가고 속히 이루기 위해서 가다가 「블레셋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주일성수」도 모르고 일해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모르고 모아서 부요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의 사명」도 모르고 열심히 한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그것이 당신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는 구원의 길입니다.
둘째: 홍해 앞에서는 끝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14:10-11)라고 했습니다. 위인과 범인의 차이는 위기에서 나타납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있는 자가 지도자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가? 잠시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애굽의 병거소리를 듣는 순간 기도를 포기하고는 탄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탄식은 순식간에 지도자 모세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으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안목입니다. 그러나 지도자 모세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14:13-14)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신앙은 이러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은 이 홍해도 능히 가르실 줄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부르짖는 기도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전에 열심히 특심했던 그 열정이 식어지지는 않았는가?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영적유산을 경홀히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6:9)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게 하신 그 하나님은 오늘 이 홍해 앞에서도 반드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셋째: 지팡이를 홍해 위로 내어 밀어야 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 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14: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지팡이를 다 주셨습니다. 이 지팡이는 광야를 헤쳐가는 능력의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는 주님의 권위의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23: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린 능력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능력의 지팡이는 있는데 그것을 활용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5:4)고 했습니다. 능력의 지팡이는 믿음의 담력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주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무기로서 각인에게 십자가의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팡이를 활용하지를 못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탄식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1:18)고 했습니다.
그런데 홍해는 모세의 지팡이 앞에 갈라졌습니다. 사실은 모세가 잡은 지팡이나 백성들이 잡은 지팡이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잡은 지팡이는 광야 40년 동안 연단 받은 믿음의 손에 잡힌 지팡이입니다. 연단 받은 믿음의 손에 잡힌 지팡이라야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장중에서 쓰임 받은 사람들이 다 연단 받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위해 연단 받는 것이 축복임을 깨닫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홍해작전은 하나님 사자의 전술입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14:19-20)고 했습니다. 임박한 홍해작전이 시작될 때는 하나님이 모세의 지휘권을 천사에게 이전시켜 하나님의 사자가 직접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애굽의 병거와 장관들을 일시에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민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민의 전후에 임재하여 성민의 발걸음을 직접적으로 간섭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진입을 시작하자 그들 앞에는 흑암을 주어서 도무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의 사자들은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14:25)고 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싸워 주시는 것을 애굽의 군대가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놀라운 체험들이 있는가? 믿음의 사람들은 신령한 영적 체험들이 많습니다.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편23:6)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기로 뜻을 정했을 때 그와 그 무리들을 하늘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풀무불과 사자굴에서도 지켜 주신 것입니다(다니엘1:8, 3:25, 6:22).
다섯째: 홍해사건은 하나님 경외를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14:31)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을 잊어버린 순간 세속의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이 세운 모세의 가르치심에 순종할 때 우리 앞에 있는 홍해는 날마다 갈라지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에 염려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찬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시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15:2,11)고 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비밀한 구원계획을 세워 높고 당신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환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에게 베푸신 일반은총이요, 지상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18)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홍해를 건너면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신령한 사건을 많이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을 구주로 영접하여 문설주에 피를 바른자들은 누구나 홍해를 건너야 광야교회에 이릅니다(사도행전 7:38). 하나님은 당신이 블레셋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애굽의 세속을 완전히 장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찬송을 잃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라
출 14: 1-3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 있는 택자도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치면 낙심하게 되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관을 헤쳐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며, 구원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Ⅰ. 숙곳에서 바알스본 맞은편까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된 수치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었습니다. 그 종살이는 무려 430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한 순간도 고역의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부르짖을 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권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 있던 모세를 통해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순순히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교만한 마음을 꺽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과 함께 시작된 출애굽의 거사는 가나안 복지를 향한 대장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애곡 소리가 진동하는 애굽을 등지고 숙곳에서 발행한 이스라엘은 광야 끝 에담에 이르러 첫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선두에는 여호와께서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로 인도하셔서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는 좌우는 큰 산으로 막혀 있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으며, 뒤에는 사막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 말하자면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는 앞뒤좌우가 꽉 막힌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낸 후, 바로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추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바로는 이스라엘이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쳤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했습니다.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는 앞뒤좌우가 꽉 막힌 곳이 아닙니까? 바로가 생각한 이스라엘의 처지는 독안의 쥐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으로 오판한 바로는 즉시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특별 병거 육 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습니다. 바로의 군대는 이스라엘이 장막을 친 곳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Ⅱ.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
바로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이스라엘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두려움은 점차 지도자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 졌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죄입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배은의 죄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감격과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바로의 군대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로 인도하시고, 그곳에 장막을 치게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두려움에 떨게 하려고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 영광을 얻고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라도 바로와 그 군대는 반드시 멸절되어야 합니다. 왜? 바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참자유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바로가 원하는 것은 애굽의 종, 곧 죄의 종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의 막기 위해 세상 끝까지라도 좇아가서 괴롭히고, 방해하고, 훼방하려는 것이 바로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Ⅲ. 위로의 멧세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위로의 멧세지를 보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①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다 - 야레>는 그 대상에 따라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부모님처럼 마땅히 두려워 해야 할 대상에 대한 경외나 공경심을 말하는 것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두려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원수와 같이 두려워해야 할 가치가 없는 대상에 대한 어리석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인도자요, 보호자이신 여호와는 언제나 이스라엘 곁에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도 곁에 계셨고, 유월절 이적의 밤에도 곁에 계셨고, 바로의 추격으로 인해 불신앙의 모습을 보일 때에도 변함없이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시는데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 할 까닭이 있는가? 하나님이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불신앙하는 망동입니다.
②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있다 - 하라쉬>는 <마음을 침착히 하다, 반대하지 않고 동의하다>는 뜻입니다.
곤경에 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지 아니하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망령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게 믿음으로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③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구원 - 예수아>는 <전쟁에서 도와주다, 위기나 환란에서 건져내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도자 모세도 바로의 손에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도, 모세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연약의 존재입니다. 누가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낼 것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단독 사역의 결과입니다.
④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와 싸우시는 이스라엘의 보호자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골리앗은 놋갑주를 입고 칼과 단창으로 무장했는데 다윗에게는 물맷돌 뿐입니다. 골리앗은 역전의 용사이나 다윗은 어린 목동에 불과합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입니다. 골리앗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놀랍게도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는가? 이유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편이 되어 골리앗과 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해 싸우시니 다윗이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의 형편은 마치 우리 교회와 비슷합니다. 건물 주인은 8월말까지 교회당을 비워 달라고 독촉하는데 아직까지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요즘 임대료는 왜 그렇게 비싼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3-4층에 위치한 50평짜리 건물을 얻으려면 적어도 전세금 3,000에 월세 150만원, 여건이 좋은 곳은 전세금 5,000에 월세 150-180만원을 줘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총 재산은 2,000만원입니다. 그것도 빌린 돈입니다. 저한테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한 평의 논도, 밭도 없으니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교회당 이전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오늘 우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교회를 구원하시는가? 누구를 통하여,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런지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볼 수 없습니다. 의심의 눈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불신의 눈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게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진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듯이 이곳에 우리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오는 것을 허용하셨듯이 교회당을 비워 달라는 주인의 요구도 허용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교회당 이전을 앞두고 있는 우리 교회의 형편은 그리 넉넉치 못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약속을 믿습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시니 침착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 사정과 형편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큰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Ⅳ.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신 후 모세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5-1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을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
첫째,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군대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두려움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불신의 자리에 누워 있었고,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는 이스라엘의 정착지가 아닙니다.
그곳은 잠시 휴식하는 곳이요, 스쳐 지나가는 곳입니다. 뒤로 물러 서거나, 제 자리에 머무르거나, 주저 앉아 있음은 죽음입니다. 이스라엘은 나아가야 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홍해를 밟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①하나님께서 앞으로 나아가라 하시니 그 말씀을 좇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②믿음의 진보를 이루라고 하시니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③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나아가야 합니다.
④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나아가야 합니다. ⑤망설일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⑥믿음의 연약을 보일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⑦형편과 여건을 따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⑧하나님께서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힘도 주시고,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⑨바다 위로 걷게 하시든지,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이 되게 하시든지 반드시 길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나아감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독경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기도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찬송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예배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감사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전도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헌신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물질 생활에 나아감이 있고, 자녀 양육에 나아감이 있고, 직장 생활에 나아감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나아갈려면 홍해가 갈라져야 합니다.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어야 합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들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바다를 향해 손을 들라>는 말은 문제의 바다가 갈라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뒤좇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이 되게 하실 수 있고, 바로의 군대를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Ⅴ. 갈라진 바다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한 번도 이스라엘 앞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뒤로 옮기자 구름 기둥이 앞에서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머물러 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진은 대낮같이 밝으나 애굽 진에는 구름과 흑암이 덮혀 캄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진으로 돌진하려고 했으나 어두워 밤새도록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때를 같이 하여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 아니라 바다가 육지가 되었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이 열렸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다가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나아갈려고 해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 길이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열린 마른 땅으로 건널 때 물은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 아이도 건넜고, 여자도 건넜고, 어른도 건넜습니다. 두려워하던 백성도 건넜고, 불평하던 백성도 건넜고, 가축떼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스라엘의 소유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건넜습니다.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이 될 수 있으며, 마른 땅같이 건널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물이 엄몰치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자 바로의 병거들과 마병들이 그 뒤를 쫓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뒤쫒는 바로의 군대를 보시고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병거의 바퀴를 벗겨서 달릴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큰 어려움에 직면한 바로의 군대는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망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을 내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과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자 좌우에 벽이 되었던 바닷물이 애굽 사람과 병거와 마병을 덮쳤습니다. 그 결과 바로의 군대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홍해에 수장되었고, 바닷가에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죽은 우상을 섬기는 헛되고 무능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동참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일하십니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침몰치 못하도록 보호하시며,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불꽃이 사르지 못하도록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행로에 온갖 문제의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까? 육백승 특별 병거로 무장한 현대판 유형, 무형의 바로의 군대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그 일로 두려워 하십니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낙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전사요, 우리의 군대 장관입니다. 여호와는 역전의 용사입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시고, 기울어진 것을 세우시며, 9회 말 투 아웃에 굿바이 홈런을 쳐서 승리케 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절망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끝났다고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불가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다고 체념하는 그 순간에, 아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여리고가 무너지게 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어떤 위급한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큰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제 자리에 머물지 아니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될 것입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