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마태복음 7:13-14)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에 만나서 술집으로 가다가 마침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 게시판이 있고 거기에는 주일 저녁 설교 제목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였습니다. 한 친구가 ‘나는 오늘 이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를 들어야겠어!’ 하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아니 이 시간에 먼 교회냐? 그냥 선술집에 가서 한잔 하자. 나는 술 마시러 갈거야’ 하면서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나는 아무래도 저 설교는 들어봐야겠어.’ 하면서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 갔던 친구는 정신을 차리고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아펜젤러, 언드우드 선교사가 왔던 그해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온 신문에는 그의 이름과 그에 대한 기사가 가득 실렸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한 죄수가 그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신문에는 미국 제 22대 클리브랜드 대통령 취임 기사가 대문짝하게 나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30년 전에 술집으로 가다가 교회로 갔던 그 친구였습니다. 교회로 간 클리브랜드는 미국의 제22대 대통령이 되었고 술집에 갔던 친구는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있고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고 넓은 문은 지옥으로 가는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문이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자가 적다 했습니다.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넓은 길에는 세상의 기쁨과 쾌락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를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 길입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적은 수입니다.
교회로 가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해졌습니다. 다원주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오직 예수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기독교 진리만이 참 진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 했습니다. 생명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3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은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길입니다.
둘째, 좁은 길은 말씀을 따르는 길입니다.
넓은 길은 불순종의 길이요 세상의 길입니다. 불순종의 길은 가인의 길이요 발람의 길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이것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얼굴이 왜 붉어졌느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동생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발람은 어떻습니까?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 명리의 유혹으로 넘어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명예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 발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곳에 가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또 하나님께 ‘저 좀 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지 말라 하는 곳에 하도 가고 싶다고 조르니까 그럼 어디 한번 가봐...
이것을 응답으로 듣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모세가 보낸 암살자들이 발람을 죽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의 독자 네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아브라함은 곧바로 다음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하나님께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죽는 줄 압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셋째,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6:2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모든 것입니다. 내 생각이 중요하고 내 감정이 중요하고 내 입장이 중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돋보여야 하고 잘나야 하고 대장이 되어야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자기부인, 자기포기,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쉽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 감정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내 성질을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내려놓고 나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열심당이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던 독립군이요 파르티잔, 유격대였습니다. 로마 군인을 몰래 암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요 사명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명선언문이 ‘십자가를 지자’였습니다. 그들이 체포되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가정에는 무책임한 남편이 십자가 일 수 있습니다. 지난번 교회에 부임했더니 어떤 권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이었던 남편이 평생 월급을 집에 가져 온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내가 뭐라고 하면 폭행을 하고 칼을 들고 협박을 했습니다. 수없이 얻어맞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좋으냐고...남편이 십자가였습니다.
아내가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라는 십자가를 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시아버지가 십자가였습니다. 직장동료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면 거부하지 말고 잘 지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사를... 성가대를 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속회도 십자가일수 있습니다. 힘드는 일이라도 주님이 요구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좁은 길은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은 길이 좁고 험하지만 영생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