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객주
요즘 드라마 사극마다 기생이 안빠져서...
짜증스럽습니다.
밤업소에 많은 인간들 업체에 많은 인간들 이겠다 싶습니다.
말 말 말 속에서 ....
기생(妓生) 혹은 기녀(妓女)는 춤·노래·풍류 등으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 ·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 등 예기(藝妓)의 총칭이다. 천인 신분이었지만 춤, 노래, 시(詩) 등에 능한 예인(藝人)이었으며, 대표적인 기녀로는 16세기 사람인 황진이가 있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하기도 하며, 유교적 질서를 중시했던 당대 사회계급상으로는 천민에 속해 사회적 대우를 받지는 못했으나, 시와 글에 능한 지식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이한 계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기녀 중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권번의 착취와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한 김향화 같은 기녀도 있다.
역사
신라의 원화
신라의 원화 제도는 화랑 제도 이전에 있었던 제도로, 두 명의 여성을 대표로 뽑아 화랑도와 같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첫 번째 대표였던 남모와 준정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죽이는 사건 이후 원화는 폐지되고 남성인 풍월주를 대표로 하는 화랑도로 대체되었다.
원화 제도와 기생의 연관성이 명확히 나와 있는 역사 자료는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원화 제도가 기생의 본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도 원화 제도가 기생의 본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벽화 등에도 기생과 비슷한 여성의 모습은 발견되고 있으나,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다.
고려여악
고려 초에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행사에 필요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해 고려여악이 제정되었다. 가와무라 미나토 등의 기생 연구가들은 이 고려여악이 기생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시대 초기 삼국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고려 정권은 남자 포로를 '노', 여자 포로를 '비'로 관리하였다. 이 '비' 중에서 가무와 예악에 뛰어난 여성들은 따로 골라내어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후백제의 후예로 고려에 반항적이었던 양수척 중에서도 예악이 뛰어난 여성들을 뽑아 '기'로 삼았다. 왕실 주요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에는 항상 '여악'이 뒤따랐는데, 위의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조선 시대
장악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조선은 기생을 일종의 제도로 정착시켜 국가가 직접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기로서, 관가에 등록이 된 기생만이 기생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생들을 등록한 대장인 '기적' (妓籍)에 한번 오르면 천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관노비의 정년은 50세까지였으나 자식을 낳더라도 신분은 대물림되었다.
기생은 교양이 있는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노래, 춤, 악기, 학문, 시, 서화(글과 그림)을 알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장악원에 들어가서 몇년에 걸쳐 교육받고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교육은 일정 나이가 지나거나, 출산 등의 이유로 은퇴한 퇴기들이 주로 맡았다. 기생은 선배인 퇴기로부터 기본적인 춤과 노래, 시조 등을 배웠으며, 높은 관리를 대하는 예의도 배웠다.
보통 궁궐이나 관청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각종 춤과 노래를 담당하였고, 공식적인 업무 외에도 민간에서 벌이는 각종 풍류의 장에도 참여하였다. 기예가 뛰어난 여악은 세도가의 첩이 되기도 했지만 여성들만의 잔치인 내연 (內宴)에는 참여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악, 가, 무의 능력이 누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전문분야에 속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방 관기들의 경우 궁중잔치 일정에 따라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가 행사가 끝난 뒤에 내려왔다. 이때 대궐 안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돌아온 기생들은 지방 예술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보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0년대 무렵의 어느 작은 술집의 기생
조선 시대의 기생은 법적 신분으로는 양민이었지만(다만 관노로서 기생이 된 자는 천민이다), 직업의 특성상 생활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향유했고, 사회적으로는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기생들은 천민이었지만, 상대하는 이의 격에 맞게 가무(歌舞), 시(詩), 서(書), 화(畵)의 재능과 지조(志操), 지략(智略), 의협(義俠)의 덕목을 두루 갖춘 교양인이었다. 또한 기생이 머무는 곳인 기방에는 원칙적으로 양반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풍류를 즐기기 위해 그들을 양반이 노는 곳에 불러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양반과 왕족들은 기생집에 자유자재로 출입했고, 조선 후기에는 중인과 평민 상인들도 기방에 출입하였다.
조선 말기에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 세 부류로 나뉘었다. 일패 기생은 관에 소속된 관기로 양반기생이라고도 불리며, 조선말부터 생긴 옥당기생과 임금 앞에만 나가서 노래와 춤을 하는 기생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일부는 남편이 있는 기생으로 몸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은 일패 기생으로 주로 선비들과 학문과 시조를 나누고 교분을 쌓던 인텔리들이다. 이패 기생은 '은근짜(隱君子)'로 불렸는데 관아나 재상집에 출입했고 암암리에 몸을 파는 밀매음을 하기도 했었다. 삼패 기생은 몸을 파는 유녀(遊女)라고 할 수 있다.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
평양의 기생학교
을사조약 § 관가 여악 제도의 폐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관기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폐지로 함께 폐지되었지만,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 지속적인 활동에 나섰다. 1908년 일제는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며,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지었다. 기생으로 영업하기 위해서는 경무청에 신고하여 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경무청의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4]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기생조합은 유명 요릿집과 계약을 맺어 기생의 놀음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상업적 조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4] 또 기생들은 기생조합의 중개로 도시 요리관과 같은 상업적 공간에서 영업을 하고 시간당 화대를 받는 형식으로 노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경성에 생긴 최초의 기생조합은 1913년 지방 출신의 향기로 남편이 없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다동조합 (茶洞組合)과 경성 출신의 경기로 남편이 있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광교조합 (廣橋組合)이었다.[7]
기생조합은 1915년부터 일본식 표현인 '권번' (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동조합은 '조선권번'으로,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낙원동에 종로권번이 신설되고 이 세 권번이 경쟁하면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1942년에는 세 권번의 주주가 병합해 삼화권번을 발족하기에 이르렀다.[7] 경성 외에도 광주, 남원, 달성, 경주, 개성, 함흥 등의 지방에서도 권번이 설립되었고, 특히 평양에 설립된 기성권번이 널리 알려졌다.[7]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들은 '사라져가는 낭만의 나라 조선의 전통문화'로서 기생을 바라보았다. 많은 일본인들이 유명한 기생들의 화보집, 엽서를 발행하여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잡지에서 기생의 하루를 사진으로 찍어 팔기도 하였다.실례로 드라마 경성스캔들에서는 잡지사 사진 기자와 편집자가 잡지에 실을 기생 사진을 찍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민족말살정책으로 권번도 강압적으로 폐지되어 전통예악을 하는 기생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성매매를 하는 유녀만 남게되었다.
현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조선 시대의 '기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명기로 이름을 날렸던 몇 기생만이 해방 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통 예술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기생학교와 권번제도를 통해 기생을 유지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물러간 후 일부 요정(고급 음식점)에서 특권층을 상대로 기생과 비슷한 식의 성매매를 했었고, 1970년대 일본인들이 남한에 기생 관광을 하러 온 적도 있었다. 현재 성매매 산업의 대부분도 풍류 제공보다는 성매매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전 기생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대한민국정부에서 기생관광상품 팔고 있는지
상당히 밤업소타령을 하고 대통령들이라는 것들이 라디오 방송에 나불거리고 ....
딱 1970년대 상황같습니다.
객주
다른 뜻에 대해서는 객주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객주(客主)는 옛날부터 한국에 있었던 주요한 상업·금융기관의 하나이다. 이들은 포구에서 활동하던 상인이며,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船商)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객주에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의 2종류가 있다. 보행객주는 주막(酒幕)보다는 여러모로 고급이며 객실(客室)·대우(待遇) 등도 좋아서 중류 이상의 양반계급이 숙박하던 곳이다. 이에 대하여 물상객주는 일종의 상업·금융기관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된 업무는 상품의 매매였으나 동시에 창고업·위탁판매업·운송업을 취급하였으며 또 이들 업무에 부수(附隨)하여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비슷한 일을 하였고, 하주(荷主)의 편의를 위하여 여숙업(旅宿業)도 겸하였다.
관리들의 엽관(獵官) 운동의 자금을 대주어 일이 잘되면 특정한 화물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특권을 얻는 수도 있었다. 봉건적인 경제 체제이긴 하였으나 그 업무를 통하여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서, 개항(開港)과 동시에 초기 외국 무역의 담당자가 되어 새로운 자본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외국 상품이 개항지(開港地)를 조직하여 길드(Guild)적인 동업 조합(同業組合)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이들은 개항지에서 외국인과 절충하여 외국 상품 판매의 중개 역할도 하여 꽤나 수익을 많이 보곤 하였다. 그러나 1882년에 조청상민수륙장정을 통해 객주는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1890년(고종 27) 인천·부산항에 객주 25개소를 설치하여 화물(貨物)을 취급하는 도매업과 운송업·창고업 등 운영하는 상회사를 설립하여 맡아보면서 구전(口錢)을 받도록 하였다. 1930년에 철폐되었다.
드라마 객주에 기생이 섞여서 나오는 현상의 것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사극볼때 상당히 짜증스럽습니다.
사극에서도 이러한 조장질 같아서 밤업소, 업체 타령말입니다.
정부가 그렇고 방송도 그렇고 이게 나라인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