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공양 외 6편
박청환
병점역 하행 승강장
천안행 전철이 떠나고 한산해진 틈에
등에 커다란 집을 짊어진 사내가
투명 쓰레기통 앞에 서더니
허리를 깊숙이 파묻는 거라
그 모습이 얼마나 경건해 뵈던지
부처님께 절하는 큰스님 같았어
한동안 어깨가 들썩이더니
불현듯 신문지로 왼손을 말아 쥐는데
두툼한 왼손이 꼭 목탁 같았어
하나둘 다음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승강장 끝으로 슬금슬금 걸어간 그가
철기둥 뒤에 서서 신문을 펼쳐 드는데
저게 경전인가 싶더라고
쪽, 쪽,
큰스님 불경 외는 소리가
바나나 우유 향으로 퍼져나가는
향긋한 오후였어
어머닌 치매가 아니다
둘째 형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둘째 형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대신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셋째 형을 둘째네라 불렀다 처음부터 아들 사 형제가 아닌 삼 형제를 둔 것 같았다 마치 둘째 형이 애초에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던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글을 모르고 숫자를 몰라도 슬하 구 남매와 손주들 생일까지 때 되면 척척 꼽아 챙기시던 기억이 허물어졌다 매년 아버지 기일이면 두 해만 더 살고 따라가겠노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제사상을 보고도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신다 내 이름도 누나들 이름도 서로 뒤죽박죽 헷갈리신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셋째 형만은 여전히 정 확 하 게 둘째네로 부르고 있다
우리 형
친구 하나 없는 골짝 우리 집, 학교 들기 전 종일 혼자 놀다가 학교 마치고 올 때쯤 된 것 같아 자꾸만 건너편 언덕길을 바라보게 만들던
어쩌다 생기는 용돈 아껴 하굣길 삼양라면 한 봉지 사서 책가방에 넣고 달그락달그락 생라면 먹고 싶은 것 꾹 참고 와서 양은 냄비에 물 한가득 넣고 국수랑 섞어 끓여주던
충주에서 자취하던 고등학교 때 아침마다 새벽밥 지어 인문계 일 학년 동생 도시락 싸주던 실업계 삼 학년, 그 도시락 밑바닥에 계란 후라이 깔아 주던
공장 다니는 막내 누나 자취방에 얹혀살며 재수할 때, 금요일까지 내내 야근하고 토요일 오후면 삼겹살 사 들고 와 프라이팬에 구워 주고 밥 굶지 말라며 꼭꼭 용돈까지 챙겨 주던
합격 소식 듣고는 대학생은 컴퓨터가 있어야 레포튼가 뭔가 한다더라며 어느 날 덜컥 그 비싼 컴퓨터를 사 들고 오는
IMF 때, 일거리 없어 회사 문 여는 날이 절반도 안 되자 쉬는 날이면 새벽 인력시장 나가 끝끝내 적금 해약 안 하고 내 청약통장까지 대신 부어주던
치매 초기 엄마 모시고 사느라 아내 눈치 보며, 내게는 걱정 마라 걱정 마라 나는 지금이 좋다 말하는, 아흔의 엄마보다 머리가 더 하얀
그 국수라면을 먹고 그 후라이 도시락을 까먹고 그 삼겹살로 영양 보충을 하고 그 용돈으로 오락실도 가고 그 컴퓨터로 레포트를 제출하고 하이텔 천리안 채팅으로 밤도 지새고 그 청약통장으로 내 집 마련한 쉰 살의 내가 밥값 좀 내려니 극구 달려와 막아서는
기도를 훔치다
기 도 접 수
일 일 기 도: 1만 원
한 달 기 도: 10만 원
백 일 기 도: 30만 원
가 족 특 별 천 일 기 도: 100만 원
보문사 왔다가
기도도 못 하고 그냥 간다
같이 온 친구는
마애불 사백십구 계단 오르는 동안
기도를 훔쳤다며
퉤, 퉤,
침 묻혀 복을 센다
주먹 쥔 고사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
때로 저 조막손을 펴 보고 싶었다
굽은 곡선을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싶었다
덜덜 휘청이며 딛고 선 팔순의 지팡이처럼
흔들흔들
잡초들 사이를 비집고
한 걸음 한 걸음 짜내는 땅속의 생존
어느 한순간인들 최후 아닌 적이 있었으랴
주먹을 움켜쥐고 핏발 세우며
끊임없는 최후를 견디느라
목이 구부러졌으리라
그 안간힘이 아무리 안쓰러워도
누구도 대신 펴 줄 수 없는 것
함부로 나섰다간 통째로 목이 꺾일 수도 있다
비바람 지나간 어느 날
고개를 들고 움켜쥔 주먹을 펴자
순식간에 날개가 돋아났다
부채 같은 날개가
하늘을 향해
비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비잠에 빠진 어린것의 움켜쥔 손이 궁금하다
하지만 그 손을 펴 보는 건
하늘을 감히 훔쳐보겠다는 것
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저 어리고 거대한 것이
스스로 기지개를 켤 때까지
노란 신호등
빨강의 끝이면서 초록의 시작
초록의 끝이면서 빨강의 시작
접속사 같은
어느 땐 그리고 어느 땐 그러나로 기록되며
바쁘게 지나치거나 다급히 멈추거나
잘못 쓴 접속사가 문장을 망치듯
가끔 사고를 만나기도 하는 곳
잠길 듯 말듯 징검다리 같은
마음 숨긴 소개팅 주선자 같은
막과 막 사이 삐에로 같은
갈림길 같고 합류길 같은
겨울과 여름의 어디쯤
반짝 고개 내미는 봄 같은
초록을 여는 열쇠 혹은 자물쇠
빨강을 닫는 자물쇠 혹은 열쇠
대문 틈으로 훔쳐보던 옆집 순남이처럼
마음 다 보여주지 못해
늦은 밤 한적한 곳
깜빡깜빡 점멸등으로 안타까운
숨은 듯 다 보이는
지구에 사는 달의 자식들
비밀번호
경비원 6573이 퇴출당했다
사전 통보는 물론 사후 알림조차 없었다
신입사원의 출근으로
해고에 갈음되었을 뿐
수고했다는 인사말도 잘 가라는 송별식도 없었으니
퇴직금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언젠가부터 시름시름 지워져 갔고
지워지면 지워질수록 희미해지는 비밀
은밀함이 사라지자 가치는 하락했고
조직은 주저 없이 그를 버렸다
신입사원은 선명했다
선명하게 은밀했다
모두의 첫 출근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또
은밀한 냄새를 풍기며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들
조직은 6573 따위는 잊었고
새로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꾹 꾹 꾹 꾹
그리고 별표
<문장 웹진>
[출처] 공양 외 6편 / 박청환|작성자 마경덕
박청환 시인
2017년 20회 공무원 문예대전 은상 시 '가장자리'
2021년 제27회 지용신인문학상 시 ' 배웅' 당선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
현 KORAIL 1호선 전동열차 승무원
[출처] 공양 외 6편 / 박청환|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