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우리나라 고승(高僧) 중에서
대학자 이자,
불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
원효대사입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길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일체(一 切) 가 마음에
달렸다고 하면서,
크게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유행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유심안락도"에서,
"정토"(淨土)의 깊은 뜻은
본래 범부(凡夫)를 위함이지
보살을 위함이 아니다. 라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고,
대승"기신론"을 비롯하여
240여 편에 이르는
불교 경전을 집필했습니다.
원효대사는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방방 곳곳을
주유(周遊)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힘 셨기에
전국 사찰 중 120여 곳이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가 34세때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와
규기화상에서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리꾼 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뒤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10년 후 45세가 되던 해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당나라를 가기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는
폭풍우를 만나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은거 할 수 있는
토굴을 발견하고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대사는 한밤중
천신만고 끝에
토굴을 찾아 누우니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잤을까?
심한 갈증으로 잠을 깼는데,
웬 바가지에 물이 고여 있어
캄캄한 밤중이라
아무 생각 없이
그 물을 마시고는
물맛이 달고 시원 하구나....!!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 였는데,
물을 마시던 그릇은
해골 바가지였다고 합니다
대사는 여기서
활연대오(豁然大悟)
즉
"환하게 크게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즉!
그 유명한 명구
"일체유심조"
(一切 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환하게, 크게,
깨우침을 얻은 대사는
신라로 다시 돌아와
미친듯이 이 곳 저곳을
방황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거지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것인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으나,
그 노래의 뜻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 노래를 듣고
그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무열왕이 말하기를
"원효가 아마 귀한 집
딸을 얻어
아들을 낳고져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태어나면
나라에 큰 복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자루 없는 도끼" 는
"과부"를 뜻함이요,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인재를 뜻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심
원효에게 줄 과부를 구하던
무열왕에게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오래된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열히 전사한
부마(사위)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결혼 한지 한 달만에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
청산과부가 된 둘째딸
"요석(선화)공주"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원효는
워낙 박식(博識) 하고
뛰어난 대사인지라
무열왕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였습니다.
몇 일 후 무열왕은
궁중내관을 시켜
원효를 불러 오라고
명하게 되었습니다.
내관이 대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다가
남산 아래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대사 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대사는
모든 것을 알고
발을 헛 디딘척,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져 버렸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내관이
물에 빠진 원효를 인도하여
무열왕 앞에 알현케 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크게 놀라
요석 공주를 불러
대사님을 요석궁으로
모시고 가서
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저녁상을 잘 차려 뫼시라고
명하였습니다..
요석궁으로 인도된 원효는
요석공주가 쓰던
향기 나는 옥수로 목욕을 하고
요석공주가 건네준
비단 옷으로 갈아입고,
푸짐한 저녁상에
반주까지 곁들이게 되었다..
어여뿐 공주랑 단둘이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요석공주의
아릿다운 향취와
풍만한 육체에 현혹되어
불심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석공주 또한 한 달 간의
신혼생활 이였지만
이미 사내와의 희열 넘치는
정분을 아는지라
뜨거워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원효대사의 늠늠한 모습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원효대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주의 향기가
성욕을 자극 하는데
요석(선화) 공주가,
과부임을 아는 지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는데
자루 빠진 도끼가 어디 없을까요?
허허허
그러자
요석공주가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대사님은
불심만 깊으신 줄 알았는데
대목(목수)일도 잘하시나 봐요?
호호호..
대사는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허허 물론이지요.
다만 하지 않을 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옛날 부처님의 큰 제자인
"아난"도
"마등"
(비천한 소성, 기생의 딸)이라는
여자 것을 빌려 쓴 적이 있지요.
이런 말은들은 요석공주는
차츰 마음이 동하여
그러시다면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드릴수도.
그럼 우리 음사의 묘미를
한번 느껴 볼까요.?
하면서
대사의 하초가
공주님의 옥문 앞에
당당하게 도달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대사님의 우람한 약물에
요석궁이 떠나가랴!
운우의 극치를 느끼며
업치락, 뒤치락 끝의
경제를 넘나들며
가뿐 숨을 몰아쉬며
천지개벽을 하듯
요란하게 통정을 끝내고,
숨가쁜 요석공주가
평온을 찾곤 했습니다.
이렇게 늪에 빠져
3일 밤낮을
구름이 비를 만난듯.
뇌성번개가 폭풍을 만난듯.
업치락 뒤치락 뜨겁고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익하며
열낙(悅樂)의 시간을 보내고
4일채가 되든 날.
인생사,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법.!!
원효는 요석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자,
요석공주는 요염한 자태로
원효대사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딜 가시든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 보다 깊은 이 가슴에,
티끌보다도 작고 먼지보다도 적은
소저 이지만,,
이 넓은 가슴속 한구석에
소저가 기댈 곳은 없는지요?
라고 말하자,
원효는 한참을 망서리 다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소?
하고 답하며 홀연히 일어나
요석궁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요석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습니다.
그후 3일간의 사랑으로
요석공주는 배가 불러오고
열달만에 아들"설총"을 낳았습니다.
후일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향찰 "이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적은 표기법)를 완성 시킨 "설총"이
바로 원효의 아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요석은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지만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석 공주와
열락(悅樂)의 밤을 보내고
서라벌을 떠난 원효대사는
스스로
실계(失戒) 했기에
소성거사(小性居士) 라고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으로
팔도를 유랑하다가
양주 근처를 지날 무렵
"한바탕 꿈이요,
헛개비 였구나~!!
하면서 파계한 스님이였지만,
새롭게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인적이 드문 소요산에
들어가
"심마니"의 온갖 유혹을 뿌리 치고
초막을 지어
"용맹정진"의 수행을 하다가
70세로 생을 마감 했다고 합니다.
소요산에는
지금도 요석공주의
지교한 사랑 이야기가
스며 있다고 합니다.
네. 수고 하셨습니다
성불 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