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cuore è uno zingaro - Nicola Di Bari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1971년, 이 노래가 120번 버스를 타고 공부하러
다니던 시절 늘상 흘러나왔었다 )
주말에 집에서 유튜브로 KBS1 다큐,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4부작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960-70년대 어떻게 이 나라를 부흥
시켜 나갔는지, 그 열정과 노력, 그리고 거기에 헌신했던 수많은 분들!!
거기엔 실업계고 출신들의 역할도 지대했습니다. 그 터전 위에 오늘날의 선진 대한민국
이 서 있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공고를 나온 제가 곁길로 빠져 일정 부분 제 역할을
다 못한 듯해 약간은 송구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1/5만 지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조선소는 커녕 아무
기술도 없이 26만 톤짜리 배 2척을 (봉이 김선달은 저리 가라) 먼저 先 주문을 받고 팔아서
그 증명서를 가지고 영국 정부의 은행 차관을 얻어 추후에 조선소를 짓고 기술을 들여와
오늘의 현대조선을 만든 이 불가사의하고 전대미문의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기업인 정주영!
포항제철을 비롯한 여타 당시의 수많은 역정들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생각과 도전의 힘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
맨주먹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간 선, 후배님들의 그 불타는 열정을 되돌아보면서 감히 비교가
될 수준은 아니지만, 저 자신 맨땅에 헤딩 격으로 무모한 도전으로 제 일생 중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딱 1년간의 분투 기록을 하나 올려 봅니다 ~
때는 1971년~
(학교명을 거명한 점 양해 바랍니다)
* *
원래 대학 갈 형편도, 생각도 못했고, 그래서 공고 건축과를 들어갔지만, 고3 올라가며 무슨 바람인지
대학을 가 봐야지~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나 사립대의 엄청난 학비에 기가 질려 예비고사가 끝나고 나서야
학비가 덜 드는 곳이 서울공대라는 걸 생각해 내어 그곳을 목표로 삼은 게 전부이다.
처음에는 공대 공업 교육학과를 생각했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좀 있었고 거길 졸업하면 실업계고의
교사가 되는거였다.
나의 대학 준비는 매우 무모하고 순 주먹구구식이었지만,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거기까지는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은 순전한 나의 생각이었다. 하여튼,
그것이 출발점 이었다!
만일 너무 처음부터 세세히 모든 상황을 고려했다면 나는 분명 이 일을 진행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해서 1학년 때 하숙집 주인 아들인 두 살 많은 형의 코치로 대성학원을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 형은 나에게 '貴人'이었던 셈이다.
사실은 1년 추가 공부를 혼자 독학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그거야 말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다.
독학으로는 어림 반푼도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판단 착오였던 것이다.
용케도 학원 입학시험엔 붙어서 세종로에 있던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학원에는 세칭 1류 고등학교
출신들, 예컨대 경기, 서울, 경복고 등을 위시하여 지방의 명문고인 전주, 광주일고, 대전, 제물포고 기타
명문여고 등이 거의 전부였고 이들의 실력은 나 와는 초기에 비교도 안 되게 출중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재학 중 배우지도 않은 과목을 추가로 4-5 과목이나 그것도 1년 내에 익혀야 하는 과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어 간단한 도전이 아니었다.
서울대 입시 과목은 총 13 과목, 내가 학교에서 배운건 달랑 8 과목이 전부~
그 8 과목도 사실 부실하기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생물, 지학, 세계사, 통계 확률, 제2 외국어 등을 추가로 보충해야 했다.
언제나 책을 들고 공부를 하는 터라 식사 시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3월, 4월, 5월
갈수록 나의 성적은 점차 조금씩 우상향 되고 있었고 상급 애들과의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실업계 출신에게는 71학년도 까지는 제2외국어 시험 대신 '공업 일반'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72학년도부터 폐지될 거란 소문이 돌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제2 외국어 시험을 대비해 그나마 좀 가능성이 큰 불어를 택해 혼자서 독학해 나가기 시작했다.
학원 다녀오면 매일 '완전 불어'란 참고서를 무조건 하루 2~3 페이지씩 읽고 암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2 외국어 특혜는 72학년도 입시부터 폐지되었다.
이는 곧 실업계 출신은 시험 치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그러게 누가 제2 외국어 시험 치는 그런데 가라 했냐고? "
"아니 누구는 그러고 싶어 그랬냐고요~ 그 길 밖에 없어 그랬지! "
학비가 덜 드는 데가 거기니 그것만 보고 달려간 것이다. 누가 들으면 헛웃음이 나올 만도 하다.
" 돈이 덜 들어 서울대를 간 것이라공? 시방 장난하냐?"
서울공대에서만 공고 출신에게 일정 특례를 주어 뽑는 혜택이 다시 몇 년 후
부활했다는 얘길 듣긴 했다. 내용 확인은 못했지만, 서울공대 출신 고교 후배들이 나중에
삼성 전자의 임원으로 다수 활동하는 걸 수원지역 동창 명부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의 대성학원 한 달치 수업료는 6,000원이었다. 나는 수업료의 일부라도 충당
하고자 2월의 쌀쌀한 날씨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전단지를 만들고 풀을 쑤어서
인근 대방동 전봇대에 손을 호호 불며 붙이고 다녔다.
2월 바람은 왜 그리 매서운지~ 손끝이 얼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학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에 2-3 명의 고1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벅찬
학원 공부를 도저히 감당해 나갈 수가 없어 결국 2 개월 후 그만두었다.
내 공부가 열 배 백 배 더 중요한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학원비는 벌지 몰라도 나중에
대학 떨어지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짱 도루묵이지~
돈도 문제요, 시간도 문제요, 무엇보다 나의 공부 실력도 문제인, 3중 고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은 물론 버스 타고 가는 시간도, 휴식 시간도 없이 공부에
전력을 경주했다. 간혹 명문고를 나와 재수를 하는 학생 중엔 집안이 유복한 데다가
이미 다 배운 거라 슬렁슬렁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당연 달리 공부에 임해야 했다.
집에서는 공부를 하다가 책상에 이마를 대고 깜빡 졸기가 일쑤여서 앞니가 다 상하고 말았다.
지금도 학생들은 입시 공부에 목숨을 걸지만 당시 내가 공부에 집중함은 참으로 치열하다 못해
거의 사생결단을 각오한 수준이었다. 세종로 대성학원 뒤로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나무가 푸르면
여름이요, 물 들면 가을이 왔음을 겨우 어렴풋 감지할 뿐이었다.
사실 그 정도는 당연한 거였고 실은 그 이상의 초 집중 상태를 끝까지 유지해야만 했다.
허나, 제2 외국어인 불어는 불타는 독학에도 불구하고 10월 학원 모의고사에 0점이
나왔다. 그간 학원 불어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 연유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4지 선다형 시험에서 어떻게 0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입학 시험은 쳐 보나 마나였다.
불과 본 고사를 석 달을 채 안 남긴 이 시점에서 말이다!
나는 0 점을 받은 다음날부터 수업에 참가했고 딱 두 달 후 12월 최종 고사에서는 50점
만점에 35점을 받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당시 대성학원의 모의고사는 본 고사를 뛰어넘는
높은 수준이었다.
1-2점 커트라인을 다투는 입시에서 50점은 절대적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어 특례를
주느냐 마냐는 그래서 너무도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굳이 특례를 받아 거길 갈 마음이 없었다고는 말 못하지만, 제2 외국어 시험은 수많은 실업계 고교
출신들의 서울대 진학을 좌절시키는 결정적인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독학으로 서울대를 간다는 건 처음부터 완전 불가능이었던 셈이다.
허나 실제 대학에 가서는 제2 외국어가 별반 쓸모도 없었고 입학생 80명 중 독일 프랑스로
유학을 간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실제 교과목에서 그것이 활용된 것도 전무했다.
도대체 제2 외국어는 무슨 이유로? 누구를 위해 시험과목에 넣었을까?
단지 추상적인 명제, 해당 학과를 위한 정책이 아니었을까?
혹시 다른 이공계 학과에서는 필요했단 말인가~
심지어는 약대에서는 독일어를 추가로 배우게 해 이도 저도 아니게 나에게 힘만 들게 했었다.
불어 공부하교 겨우 들어와 또 독일어라니~
참 장난도 유분수지! 이게 뭐하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독어, 불어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당시 내가 겪은 상황이 그랬다는 말이다.
아무튼,
1년 안에 마(魔)의 외국어 고지를 넘어선 것이다.
참으로 열정과 도전정신 앞에는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나는 이 기억을 평생 간직했고 내 인생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늘 분발의 초석으로 삼았다.
첫댓글 사실 이 글을 처음 작성한 건 2012년 즉
지금부터 10년 전입니다.
그후 약 6개월 전 쯤 다시 글을 수정 보완하여
나의 인생 역정의 하나로 만들어 보았는데,
글이 좀 길어서 1,2 부로 나누어 올려 봅니다.
이미 50여년 전의 사건이자 기억입니다.
정말 수십번 읽고 수정을 반복했습니다.
어찌보면 자랑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초라하고 빛바랜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이력서 한 장 같은 글 입니다.
고삼때의 처절한 대학입시 시험공부?
나도 고삼이 되어서는 식사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에 몰두를 했습니다
나는 재수는 하기 싫었습니다
고삼때 만큼 심하게 공부를 1 년 더 하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추어서 대학 시험을 쳤습니다
주위에서 다들 케이대를 가라고 했구 떨어지면 후기 케이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후기 케이대는 누가 합격시켜 준답니까?
그래서 낮추어서 대학시험을 쳤구 합격을 했습니다
그외에는 글벗님들이 다들 아는사항입니당 충성
!@#$%^&*()
에스대?
수업료가 싼게 매력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학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입니다
그래서 실력이 딸리는 분들도 도전을 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였습니다
마론님은 재수까지 해서 에스대에 합격을 하셨지만 엄청난 노력 외에 특별한 머리가 있어서 였을껍니다
좌우간 훌륭합니당 충성
나는 대학교에 입학 하고 나서도 공부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아마 고삼때에 공부 하다가 지쳐서 일겁니다
근근히 4년만에 졸업을 할수 있었습니당 우하하하하하
좌우간 마론님 젊은 시절에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의 마론님이 되신거 축하드립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역시 그 시절 추억담에는 태평성대님이
단연 선두 주자임이 확실하게 ~~ ㅎㅎ
사실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무지무지한 노력들을
했었지요.
제가 고1때 건축과 3학년 선배 2분과 함께 한 방에서
하숙을 했었는데, 그중 한 선배는 나중에 K 대 건축과를
졸업했더라구요!
당시 와이대,케이대등은 문과가 좀 휘날렸고 이과는 조금
저평가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쉬운곳은 당연 아니었어요.
특별한 머리라 하기엔 사실 좀 민망합니다. 아이큐도 보통 수준
이었걸랑요.
전년도 경희의대 전체 수석을 했다가 이듬해 약대로 합류한 한
친구는 아이큐가 165 라고해서 모두 놀라기도 했었지요.
저는 모든게 좀 늦게 진행해 가는 타입인지라, 학교도 결혼도
아이들 공부도 다 그렇게 되더군요!!
당시 젊은 나이신데도 불구하고
집념과 도전 정신 열정이 대단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아네에,,
나이가 어리니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고
순 주먹구구로 대들어서
그랬다고 생각 됩니다.
저와 6년의 차이가 나네요.
우리 때도 과외와 입시학원이 있었지만,
진학한다고 크게 학원공부가 성행하지는 않았지요.
학원가서, 밤에 남학생이 뒤따라 오면 무서웠지요.
저녁반에는 엄두도 못내고
새벽반에 가면, 잠이 덜 깨여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원공부가 큰 도움을 못준다고 생각하여
우리 아이들 한테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변한 줄도 모르고.
글쎄요!!
60년대 중후반의 실정은 제가 잘 모르니
학원이란게 언제부터 성행했는지,,
학원공부가 유일한 통로였던 제 경우는
오로지 그길밖에 없어 그리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대성학원의 공부법은 완전 차원이
다른 딴 세상 공부였어요!!
저는 70 년도 대성학원 다녔는데 마론님과는 완전 정 반대,
학원은 등록금 아까워 빼 먹지는 않았으나 끝난 후 당구장으로 ㅎ
알바까지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신 마론님 대단하시고 그 노력의
결과가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때 님처럼 정신 차렸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생각도 드나
사람은 각자 자기 인생이 있는 것 같아 살아온 인생 후회는 안합니다만
마론님 정말 열심히 사셨으니 이 글 쓰실 만 합니다.
비슷한 시절 옛 생각이 나는 글을 읽으니
더 가까워 지는 듯한 느낌. 재수는 제가 1 년 선배네요. ㅎ
아하!!!
대성학원 선배님이시군요!!
남들은 까짓 학원이 뭐간데? 할지도 모르지만
제 경우는 학원이 특히 대성학원은 절대절명의
위치를 차지하는지라,,
고등학교 이상으로 애착이 간답니다.
그런데 어찌 당구로? ㅎㅎ
당시 경기고등 최우수 고교 출신들은 그저 슬렁슬렁
공부를 하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시험운이 없었거나 했지 실력이 큰 차가
나서 재수를 하는게 아니었거든요.
혹 만나게 된다면 학원 얘기로만 몇시간이 부족할듯도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실 최선을 다한거라 보기도 애매합니다.
누구의 조언도 그닥 없이 주먹구구로 부닥쳐
간신히 길을 헤쳐 나간 것이니..
단, 이해하기 어려운 제 인생의 행적이 다소 있기는
했다는거,
건축과를 갔다해도 그 이후는 누구도 예단하기 어려웠겠지요.
왜냐면 제가 건축에 무슨 타고난 재능이 있는게 전혀 아니다 보니,,
자연에 조금 관심이 있다는게 전부라할까!!
암튼 감사합니다^^
불굴의 투지로 금단의 문을 연 마론님 축하합니다.
ㄱ렇게 해서 약사가 되셨군요. 그것도 서울대 출신의 약사가요,
이마 이 글을 보시는 많은 사람들이 옛날 생각을 하시고 계실 겁니다.
눈물겹던 그 시절의 성공과 좌절의 역사를 회상하실 겁니다.
사진을 보니 키도 크시고 잘 생기셨습니다. ㅎㅎ.
에효!!
키는 어려서 시골서 자라를 고아 먹은탓에~
그건 엄마 젖을 전혀 먹을 수가 없게 늦게 태어난 때문이지요.
자난 일을 들추어 뭐하겠느냐 는 분도 당연 계실터이고!
허나 읽어 주시는 분들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와. 정말 의지의 사나이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땐 뭣도 모르고 그냥 부닥쳐 본
것밖에 별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