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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숭실고등학교 83년 졸업 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곤 (9반)
김호기교수의 자살론 특강 그리고 행복전도사의 죽음
‘김호기교수’의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특강을 듣고 리포트를 써야했다. 개인적으로 소속돼 있는 한 단체에서 부탁해온 때문이다. 김호기교수는 잘 알다시피 연세대교수로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그리고 김광수 경제연구소 고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진보적인 학자이다. 때마침 한 인터넷신문에서 하는 ‘김호기의 사회학고전읽기 특강’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포트 쓰기는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초청강사와 주제를 소개하면서 꺼낸, 한 40대 남자가 아들과 함께 자살했다는 사회자의 말과 겹쳐서 이래저래 마음만 무거웠다.
헌데, 며칠 사이에 충격적인 자살기사 하나와 또 하나의 글을 읽게 되었다. 하나는 지난 7일에 보도된 행복 전도사 최윤희씨의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2년 전에 자살한 최진실씨의 전 남편인 조성민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하긴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는 탈북자 출신인 황장엽씨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잠시 사족을 달고 넘어가자면 황씨의 나이가 8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황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살일 수도 있다’는 말이 양념처럼 더해지기도 했다.
우선 전자인 최윤희씨는 경기도 일산의 한 모텔에서 남편과 함께 죽음으로 발견됐다. 약 2년 전부터 각종 병을 앓아 오다가 폐에 물이 차는 지경에 이르렀고 700여 가지의 고통에 시달려왔는데 남편이 최씨의 죽음을 돕고 이어서 남편 김모씨도 뒤따라서 죽었다는 기사였다. 잘 알다시피 최씨는 39세의 주부로서 재벌회사에 재취업 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52세에 퇴사한 후로는 KBS방송국과 SBS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면서 우리 사회에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후자인 영화배우 최진실씨는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잘생기고 건장한 야구선수인 연하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몇 년 후 이혼을 했다. 최진실씨는 잠시 슬럼프에 빠졌었다. 하지만 재기에 성공하면서 국민적인 사랑을 다시 받았고 상당한 재물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최진실씨가 느닷없이 자살을 한 것이다. 최진실씨에게는 끔찍이도 사랑하는 두 자녀가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와중에서 전 남편인 조성민씨는 국민적인 지탄을 받기에 이른다. 조성민씨에 대한 극도의 혐오증은 과히 여론과 언론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계의 조씨에 대한 혐오와 최진실씨에 대한 동정이 한몫 단단히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빠 곁에서 웃음 띤 얼굴로 야구구경을 하고 있는 아들사진과 함께 조성민씨의 인터뷰기사가 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일을 지켜보면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도덕과 사회와의 관계’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최윤희씨의 자살, 조성민씨에 관한 인터뷰기사, 황장엽씨의 죽음 거기다가 강의를 들으면서 사회자로부터 듣게 된 경상남도 마창대교에서의 40대 부자 투신 그리고 청중의 질문 중에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등이 서로 얼굴을 내밀면서 자문자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 내가 혼자 말을 하고 있네!’
에밀 뒤르켐은 프랑스의 에피날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독일에 유학, 1887년 보르도대학을 거쳐 파리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강의하였다. 칼 마르크스가 종합적인 사회학자라면 에밀 뒤르켐은 본격적인 사회학자라고 볼 수 있다. 뒤르켕학파로 불리는 거대한 사회학의 한 학파를 형성하여 세계의 사회학계를 이끌었던 것이다.
뒤르켐의 자살론에 의하면 자살은 전체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 독자적인 특성, 즉 사회적 특성을 갖는다. 자살은 사회집단의 통합과 유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자살의 현상은 개인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한 사회의 자살의 경향은 사회적 사실로서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통해 개인이 집단생활에 긴밀히 통합되는 가톨릭교도들 사이에는 자살률이 낮으며 반대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를 가운데는 자살률이 높다. 또한 가족 간에도 친밀도가 높은 경우는 자살률이 낮다. 가족이 와해된 경우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높다. 국가와 정치사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회 통합이 강조되고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참여가 활발해지는 때는 자살률이 감소된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서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했던 통계자료가 입증한다. 이에 따라 자살은 개별적인 이유만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요인인 사회통합도와 자살률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자살의 유형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즉 이기적 자살, 이타(利他)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이 있다. 이 중 이기적 자살은 사회적인 통합성이 약화될 때 개인의 판단이 우선한 자살형태인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이타적 자살은 덴마크병사의 자살이나 전체주의 하의 자살공격대와 민주화 열사들이나 독립투사들이 그 전형이 된다. 말하자면 덴마크 병사의 자살은 늙고 병들어서 조직과 집단에 부담을 주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자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도 있다. 저 낙화암에 빠져 죽었다는 백제(百濟)의 삼천궁녀 이야기다. 패망 하는 나라의 궁녀로서 적군에게 잡혀서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이고, 임진왜란 때 적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죽음 또한 이타적 자살이 아닌가.
여기서 나아가 사회규제(規制)의 정도에 따른 자살을 보자면 숙명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을 들 수 있다. 숙명적 자살은 사회의 규제가 과도할 때 나타나는 자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노예제도 하에서 도저히 삶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다. 이때 일어나는 자살의 형태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아노미적 자살인데 이는 무규범상태에서 저지르는 자살을 말한다. 가장 비사회적인 남녀 간의 사랑 즉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연애에서 실연을 당하여 한 자살일지라도 성, 사랑, 애로티시즘의 현상으로서의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19C후반 산업사회 즉 자본주의사회를 겪으면서 아노미의 증대현상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인들 뭐 다르겠는가. 국민 소득 2만 불을 훌쩍 넘어서 747을 부르짖으며 들어선 이명박정부 하에서는 OECD 20개국 중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가 된 것은 경제개발로 인한 도시화와 공동체간 유리(遊離)와 사회통합(統合)의 균열과 무관하지 않다. 도덕적 위기가 닥쳤고 신자유주의 경쟁의 사회에서 양극화와 세대 간 계층 간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의 총체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나타나고 이런 이기주의는 사회에 내재 해있던 자율, 책임, 공조의 부재로 나타났다. 목표는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으로 나타났다. 이런 목표는 끝내는 무규범이 팽배한 사회가 돼버렸다. 한마디로 경제개발로 인해 등 따시고 배부른 한동안의 풍요가 어느덧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와 세대 간 갈등의 공포로 나타나고 비정규직문제와 이태백, 사오정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무관하지 않게 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를 아우르고 통합을 견인하며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바람직한 사회규범 형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여기서 잠깐 청중사이에서 오고 간 질문 하나를 소개한다. 강의 주제가 큰 틀에서 사회학 고전읽기이고, 본 강의가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도덕과 사회’였으니 만치 질문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나왔다. 하지만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대답으로 인해서 답변다운 답변은 없었다.
이때 청중 한 사람은 ‘오래 전 일도 아니고 바로 작년 5월에 일어난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인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사건인데 답변을 피하는 것은 학자로서 넘 나약한 게 아닌가?’ 하고 질문 하나를 짤막하게 더 얹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서거로서의 죽음’이라는 대답에 있었고,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말하는 것은 괜한 논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무적인 동의의 침묵이 흘렀다.
다시 에밀 뒤르켐에 대해서다. 1917년에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죽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의 저서
<자살론>은 자살을 학적으로 다루었다는 의미가 있고, 오늘날의 벌어지는 자살에 대해 자살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범사회적인 관점에서 직시해야 함을 일깨워준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뒤르켐의 저서가 이러한 의미를 갖듯이 우리 앞에 닥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나라의 사회학자들이 좀 더 대범하게 맞닥뜨리고 천착하여서 대안을 내놓고 사회통합을 견인할 수 있는 진취적인 풍토가 숙성되길 고대하는 마음이다.
위의 여러 가지 자살의 유형에서 보듯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두고도 그 의미와 시사점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그런데 무엇에나 시간성이 있는 법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자살과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행복전도사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반응은 ‘아니, 그렇게 행복에 대해서 떠들던 사람이 자살을 해?’ ‘속았다! 행복전도한테 속았다.’ ‘날마다 웃으면서 살라고?’ ‘지나 잘 살 것이지!’ 그녀가 해온 일이 ‘행복하게 살아야한다.’고 강조하는 일이어서인지 이처럼 반응은 애도하기 이전에 허탈한 쪽으로 표출되고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죽음 자체를 불행이라 여겨서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견딜 수 있을 때가지는 그렇다 쳐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시점에서 생(生)을 마감하는 일을 스스로 결행했다고 해서 이것이 비난만 받을 일인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가톨릭이나 유대교신자들에게서 자살(自殺)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고 했다. 생명은 신(神)의 영역이고 인간은 이 신의 영역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과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가치 해석을 다르게 하고 또 그 가치에 대해 주입된 논리가 절대 진리가 아님을 증명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수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복(福) 중에 하나로 일컬어왔다. 이런 절대가치 속에서 어느 날 자기 생(生)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이름 하여 자살이라면 자살은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개인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두건의 자살은 둘 다 많은 사람들의 놀라움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헌데 최진실씨의 자살은 상대적으로 한없는 동정과 아쉬움을 일으켰고 최윤희씨의 자살은 ‘이럴 수가?’하는 반어법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최진실씨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의 전남편 조성민씨는 죽일 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조성민씨는 두 아이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출두하여 4시간 동안이나 아이들의 성을 바꾸는 것만은 참아달라고 애걸했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성민씨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타와 매도가 무서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신세요 삶이 나락으로 빠진 것 밖에는 더 있었겠냐 말이다.
유명 여배우로서의 남편이라는 꼬리표만 붙었지 인생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기에 그의 부모들은 이들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조성민씨는 ‘이 여자가 아니면 죽겠다.’고 수면제를 두병이나 털어 넣고 벌인 사투의 결과 결혼을 했지만, 결국 부모들의 염려가 사실이 되었다. 조성민씨 부모쪽에서 보면 최진실씨와의 결혼에서 아들에겐 뭐하나 제대로 된것이 없다. 이 사회는 도 아니면 모라는, 백이 아니면 흑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가 너무 횡횡한다. 이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살론>: 도덕과 사회라는 주제를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살과 관련하여 성찰해야되지 싶다. 심히 도를 더해가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남을 매도행위와 어느 한 사람을 삽시간에 죽일 놈을 만드는 광기는 또다른 아노미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밭에 거름이 뿌려지듯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양극화의 독소가 빠르게 뿌려지고 있다. 이 독소를 먹고 아노미, 즉 무규범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사회의 이기적 현상을 치유하는 혁신이 일어나야겠다. 그것은 도덕과 정직성이다. 이 도덕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경제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분열보다는 연대로 가야하고 사회공동체적 삶을 뿌리내리게 하여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이 같은 일을 누가 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남이 다 해준다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으면서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고. 누가 이렇게 편리하고 얌체 같은 처세술만 알려주던가요. 당신의 부모. 선생, 정치가, 법관, 의사, 장관, 대통령?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행위, 통할까요?
소박하기 그지없을망정 힘들여 쟁취한 결과에 축복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