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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작전 北(북)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 ▣
◈ 제1장 ◈
-광주에서 벌어진 군사작전 내용-
☞증거1.
'5.18작전 병력 600명' 남북 문헌 4개에 기재돼 있어
☞증거2.
600명 중 300명. 이동 중인 제20사단 차랑부대 매복 습격
☞증거3.
작전 병력 600명, 군납업체 점령, 장갑차 4대, 군용트럭 374대 탈취
☞증거4.
600명 4시간 만에 17개 시·군에 위장된 44개 무기고 털어
☞증거5.
총기 사망자의 75%, 무기고 총에 죽어
☞증거6.
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발 조립
☞증거7.
광주교도소 5회 야간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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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 1.
'5.18 작전병력 600명' 남북 문헌 4개에 기재돼 있어 ◈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600명'이라는 숫자다. 600명이라는 숫자는 남한 당국의 문서 2개와 북한 당국의 문헌 2개, 도합 4개의 공식문서에 기재돼 있다. 작전 병력이 600명이라는 사실은 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가 공동으로 발표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92-93쪽에도 기재돼 있다.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 현황]에도 기재돼 있다. 여기에는 300명 단위로 나누어진 2개의 부대가 각기 광주공원과 유동 3거리에 활동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다. 1982년에 북괴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는 결사 항전을 선언한 주체가 '광주학생 600명'이라 했고, 1985년에 북괴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에는 '600명으로 묶어진 폭동 군중의 한 집단'이 무기고를 털고 폭약을노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는 600 이라는 숫자에 대한 증거자료다.
① 1995.7.18. 검찰이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ㅡ92-93쪽
●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失踪)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負傷)을 입었으며, 09:00경
ㅡ92쪽ㅡ
●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
②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 현황] ㅡ40쪽
● 14시 25분 / 유동 3거리 광주공원 / 학생 300명, 학생 300명 각 시위전개
③ 북괴가 1985년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 ㅡ35쪽
●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였다.
④ 북괴가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ㅡ595쪽
●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 시민들은 «도청»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전을 선언한데 이어 남조선에 와있는 미국대사 글베이스틴에게중재를 요청하였으나 그놈은 <내정불간섭>이라는 글레이스틴에 구실밑에 ...
◈ 증거2,
600명 중 300명, 이동 중인 제20사단 차량부대 매복습격 ◈
국제 용병급 부대 300명이 극비사항에 속하는 현역사단의 이동계획을입수했다. 20사단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08시 정각에 통과한다는 정보였다. 간첩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입수할 수 없는 극비정보였다. 극비의 이 정보는 20사단 작전참모부와 광주에 소재한 전투교육사령부(전라도지역 계엄사령부)의 작전참모실만 공유한 정보였다.이 정보를 북괴 간첩에게 유출한 내부 간첩은 이 두 개의 부서 중에 있었을 것이다.
위 2매의 사진에서 돋보이는 것은 전투 질서다. 병정의 몸매 자체가 예사롭지 않게 단련돼 보이고, 소조직 단위로 역할이 분업화돼 있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군사행동이다. 좌측 사진에서는 출발선상에서 지프차를 타고 있는 어깨들의 모습도 보이고, 몽둥이를 들고 출발을 엄호하는 어깨들이 보인다. 북괴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막대기라 하지 않고 '몽둥이'라 부른다. 이 몽둥이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북괴는 특수작전 기술을 아프리카, 중동, 남미의 나라들로 수출한다. 특수작전은 대부분 작전부대의 정체를 숨기면서 수행해야 하므로 총기를 휴대하면 안 된다. 그래서 북괴는 평소에 몽둥이 사용법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이들이 사용하는 몽둥이는 총기만큼의 위력을 발휘한다. 위 습격 장면에 2명의 어깨가 몽둥이를 들고 있다는 것, 이 자체가 그들이 특수군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몽둥이 자체가 북괴 특수군의 신분증이기 때문이다. 우측 사진은 지프차를 타고 한창 달리고 있는 어깨들의 모습이다. 승자들의 실루엣만 보아도 그들은 보통의 군인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도깨비처럼 날래고, 훈련되고, 조직화된 300명 부대의 정체는무엇일까? 절대로 광주 사람들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광주에서 사망한 광주인은 모두 154명이다. 그들의 나이와 직업을 살펴보면 그 30%가 10세 전후의 아이들이고, 나머지 50% 이상이 양아치 계급으로 천대받던 구두닦이, 껌팔이, 석공, 목공, 자개공, 식당 보이, 부엌일을 돕는 식순이, 행상 등이었다. 군법회의에 기소된 광주인은모두 361명, 이들의 신분도 154명의 신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 작전행동에 숙달돼 있고, 몸매가 비상하고, 역할이 분업화돼있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상태에서, 현역 부대로부터 극비 정보를 빼내서, 매복장소에 숨어 있다가 감히 정규사단 지휘부 차량부대를 습격한 이 300명은 어디에서 모집됐고, 어디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 증거3.
작전병력 600명, 군납업체 점령, 장갑차 4대, 군용트럭 374대 탈취 ◈
극비의 부대이동 정보를 빼내서 매복할 장소를 선택한 사실, 거기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매복한 사실, 무장한 상태로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와 군용트럭 34대를 타고 이동하는 정규군 부대를 상대로 감히 습격 작전을 감행한 사실, 무장한 현역 부대원들을 혼비백산시켜 차량 모두를 탈취한 사실, 그 차량들을 몰고 아시아 자동차 공장으로 유유히 행군한 사실, 또 다른 곳에서 대형 버스들을 타고 온 또 다른 300명의 특수군과 09시에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합류하여, 철조망이 쳐진 높은 망루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있던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군납업체를 점령한 사실, 자가용시대도 아닌데 374대의 군용트럭을 몰고 나간 사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생산되어서 운전 매뉴얼을 숙달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는 최신형 장갑차 4대를 운전하고 나간 사실들을 우리는 하나하나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통계자료는 검찰 자료, 안기부 자료, 군 상황일지, 치안본부일지 등의 기록이 모두 달라 숫자에 대한 판단은 저자가 오차 범위 내에서 판단했다. 검찰 보고서가 안기부 보고서보다 늦게 작성되었기 때문에 피탈된 장갑차의 경우 안기부 자료에는 5대로 기록돼 있지만 저자는 검찰 보고서에 기재된 4대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할 점은 검찰 보고서와 안기부 보고서에 기재된 차량 대수다. 안기부 자료에는 피탈된 총차량 대수가 882 대로 기재돼 있고, 검찰 보고서에는 779대로 기재돼 있다. 대체로 800대가 피탈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가용 운전시대도 아닌 1980년에 광주에 800명 정도의 운전자들이 양성돼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참고로 북괴특수군은 "바퀴 달린 것은 모두 운전하도록 훈련돼 있다.
→군용차량 305대, 장갑차 5대, 일반버스 100대, 고속버스 5대,
* 안기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55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터 온 사회에 3개 여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 1995. 서울지방검찰청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93쪽
위에서 '차량 56대는 356대의 오기로 보인다. 당시 아시아 자동자 공장이 생산하는 장갑차는 이태리 피아트사 제품으로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고무바퀴로 제작되었고, 단 한 번도 출고된 적이 없어 운전 전문가가 운전 매뉴얼을 가지고 한동안 숙달하기 전에는 운전이 불가능한 장비였다. 2종 차량 운전자가 경비행기를 몰 수 없듯이 일반 자가용 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신형 장갑차를 몰 수 없었다. 이 600명은 아시아 자동차에서 탈취한 370여 대의 트럭과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30여 대의 군용트럭을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걸쳐 위장된 무기고를 향해 곧장 달렸다. 사전 정찰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광주의 분노] 36-37쪽에는 무기고를 탈취하는 전투행위가 아래와같이 현장감 있게 묘사돼 있다. 반면 남한 자료에는 숫자들만 나열돼있다.
"괴뢰군 179 지원단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다. 폭동 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여 나섰다. 그리하여 무기고 기습 초기에 벌써 적지 않은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폭동 군중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이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기습하게 하였다. 정면의 폭동 군중을 막는데 급급했던 놈들은 배후에서 불의에 달려들어 내리치는 청년들의 각목 세례를 받고 모두 나가 널부러졌다. 보초병들을 까눕힌 군중들이 무기고를 열어제끼는 순간이었다. 꺼꾸려졌던 보초 한 놈이 정신을 차리고 무기고 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또 여러 명의 폭동 군중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 600명의 조직화된 어깨들이 광주의 10세 전후의 아이들일 수는 없다. 껌팔이, 구두닦이, 철가방, 식모, 행상, 목공, 철공.. 자개공 들일 수도 없다. 16세의 식모아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9세의 남아가, 17세의 구두닦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망한 광주인 154명과 재판을 받은 361명 모두를 보탠다 해도 515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 515명의 광주인들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600명의 어깨부대로 조련시킨 리더가 광주에 있었겠는가?
◈증거 4.
600명 4시간 만에 17개 시·군에 위장된 44개 무기고 털어..◈
전남에는 총 26개의 시·군이 존재한다. 용병급 부대원 600명은 이 중17개 시·군에 위장된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로부터 오후 4시까지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2개 연대를 무장할 수 있는 5,403정의 총기와 8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을 탈취했다. 바로 이 대목이 5.18이 '광주인들에 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괴특수군이 주도한 게릴라전이라는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5.18 상황일지 및 피해 현황]에는 20개 쪽(5271)에 걸쳐 시간대별로 피탈 당한 무기 숫자들이 산만하게 나열돼 있다. 검찰 기록에는 이 일부를 인용한 후 '다수의 무기고가 털렸다'는 식의 요약만 해놓았다. 이 두 개 자료를 읽는 사람들은 '무기고가 많이 털렸구나' 하는 생각까지만 하게 된다. 이 자료를 정리한 당시의 분석관들도 그랬고, 이 자료를 처음 접했던 저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어지럽게 널려진 자료를 통계적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많은 무기고가 털렸다'는 정보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정보로 업그레이드됐다. 안기부 자료에는 38개 무기고가 털린 것으로 기록돼 있고, 북괴 서적 [광주의 분노]에는 이 38개의 무기고 말고도 털린 무기고가 6개가 더 기재돼 있다. 그래서 도합 44개의 무기고가 털렸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다수의 무기고가 털렸다]는 정보에서는 '북괴의 소행'일 것이라는 냄새를 맡을 수 없었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정보에는 '북괴의 소행'이 투영돼 있다. 1980년 당시 보안사, 국정원, 계엄사 등에 수많은 분석관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통계학 개념이 없기 때문에 북괴특수군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석 과정에 통계학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북괴군 개입 여부가 판가름됐던 것이다.
☞참고문헌
① 안기부 보고서 52-71쪽
② 광주의 분노 34-36쪽
③ 계엄사 375쪽
더구나 1980년의 정보관들은 북괴가 1982년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에 실린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 정보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정보판단이 그만큼 불완전했던 것이다. 이처럼 판단은 정보의 양과 질에 의존한다. 북괴의 '조선로동당출판사'가 1985년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 제35쪽에는 5월 21일 오후 4시까지 400여 대의 군용차량을 탈취하고 3,5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하였다고 기재돼 있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kg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퇴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었다.」
[광주의 분노] ㅡ35ㅡ
◈증거5.
총기 사망자의 75%, 무기고 총에 죽어..◈
광주시민으로 등록된 사망자 총수는 154명이다. 그중 총상 사망자가117명, 이 중 75%에 해당하는 88명이 무기고 총에 의해 사망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시민은 짐승보다 못한 패륜집단이 된다. 이는 두고두고 손가락질 당하는 매우 부끄러운 주홍글씨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광주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을 때, 저자가 광주인의 희생이 북한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광주인들이 정상적인 사고력을 갖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저자의이 연구를 쌍수로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광주인들은 '광주인이 광주인을 사살했다'는 말도 거부하고, '북괴군이 광주인을 사살했다'는 말도 거부한다. 오로지 공수부대가 사살했다고만 우긴다. 북괴가 저질러놓은 범죄를 극구 공수부대에만 뒤집어씌운다. 북괴와 한편이 돼 있는것이다. 그런데 공수부대는 카빈총을 단 한 자루로 가지지 않았고, 실탄도 없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 부각돼야 할 것이다.
☞근거자료
① 계엄사 154쪽
② 안기부보고서 95-103쪽
◈ 증거6.
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발 조립..◈
북 특수군은 다이너마이트로 2,100발의 폭탄을 도청 지하에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히로시마처럼 날려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김창길로 대표되는 광주의 온건파 청년들이 전라도 지역 계엄사령부인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를 몰래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면서 “자기들이 호위할 테니 기술자를 잠입시켜 폭탄을 해체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소준열 전라지역 계엄사령관은 5급 문관 배승일과 조수 2명을 잠입시켜 이틀 동안 목숨을 걸고 해체케 했다. 폭탄조립은 공병 중에서도 특수기술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군 생활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조립이나 해체 작업을 할 수 없다. 이는 전형적인 특수군의 영역이다. 광주에서 천대받던10-20대 양아치 계급이 감히 넘볼 수 있는 영역은 절대로 아니다.
...사진에는 방독면을 쓰고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더미 속에 앉아서 작업을 하는 폭탄 전문가 2명이 보인다.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에서는 유해가스가 발산되기에 방독면을 쓰고 장갑을 끼고 작업을 해야 한다. 폭탄 더미에서 유독가스가 방출된다는 이 사실, 군 생활을 오래한 일반 장교나 하사관들도 잘 모른다. 장군들은 더더욱 모른다.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자체로 이 2명은 폭탄 전문가인 것이다. 더구나 폭탄, 수류탄 더미 속에 앉아있고 싶은 사람은 대한민국 장군, 장교, 하사관, 사병 출신 중에 없을 것이다. 광수의 양아치 계급에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 5.18기념재단 김양래는 2017년 서울 법정에 나와 이런 사람들은 광주 사람이 아니라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 일 것이라고 답했다.
광주 사람이 광주의 80만 시민과 도시 자체를 날려버리기 위해 2,100발이나 되는 폭탄을 조립해놓았겠는가? 말이 쉬워 2,100발이지, 2,100발의 폭탄을 옆자리로 옮기는 일만 해도 엄청난 작업이다. 그런데 광주인 사망자 154명과 군법회의에 기소된 361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면 이들 중에 폭탄을 조립할 만한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능력을 가진사람이 설사 여러 명 있다 해도, 광주시민 80만 명을 해골로 만들고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자신과 부모 형제 모두를 해골로 만드는 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싶어 할 광주인이 존재했을까?
광주인들 중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했다는 사람은 나타나 있지 않다. 유령이 조립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재앙의 무기가 도청 안에 쌓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80만 광주시민과 광주 자산을 보존시키기 위해 계엄사령부를 몰래 찾아가 조립된 폭탄을 해체시켜 달라고 읍소한 광주인들의 이름은 김창길 등 여럿으로 기록돼 있다.
'군무원 배승일이 온건파 청년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5월 25일 도청 지하실로 잠입했다. 도청을 장악했던 북 특수군은 그 전날인 2월 24일 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계엄사는 도깨비 청년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배승일 문관과 그를 따라 도청 지하실로 따라간 조수 2명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사지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승일은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고 그때를 술회했다. 해체하는 데에만 꼬박 2일이 걸렸다. 2,100발의 폭탄을 1~2일 만에 조립해놓았다는 것은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달려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증거자료
① 월간조선 2020 5월호
월간조선 뉴스룸 NewsRoom Exclusive 월간조선TV
☞2020. 05
→5.18 당시 전남도청 폭약 뇌관을 제거한 배송일씨-
"식은땀 흘리고 가슴 졸이며 다이너마이트 2,100개 뇌관 제거"
②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ㅡ588쪽ㅡ
"결정적인 순간에는 건물을 몽땅 폭파해버리기 위한 모든 장치까지 다 준비하였다. 그런데 적들이 공격을 몇 시간 앞두고 밀정을 침투시켜 뢰관을 모두 분해해 버렸기 때문에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배승일이 도청에 잠입한 날은 5월 25일, 이날의 도청에는 북괴군이 없고 오로지 피라미들만 있었다. 만일 5월 25일 도청을 북괴군이 장악하고 있었어도 배승일이 잠입할 수 있었을까?...
도청에 잠입하려면 그 통로가 정문 밖에없었다. 그렇다면 위 북괴 문헌 내용은 무슨 뜻인가?
5월 25일에는 북괴군이 도청을 비우고 철수했다는 뜻이다. 5월 25일에도 북괴군이 도청을 위와 같이 장악하고 있었다면 배승일 문관의 잠입은 불가능했다.
위 북괴 문헌을 보면 계엄군이 광주로 재진입하는 순간, 공수부대5,000여 명과 1만 명에 육박하는 20사단 3개 연대 (60.61.62연대) 병력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여, 계엄군 1만여 명과 80만 광주시민을 다 같이 몰살시키려는 계획하에 2,100발의 폭탄과 500여 개의 수류탄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북괴가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도소 공격으로 인해 600명중 475명을 졸지에 잃는 바람에 야반도주하듯이 24일 바람처럼 사라질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증거 7.
광주교도소 5회 야간공격 ◈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 판결 [2.가] 항에는 무장 시위대가 5회에 걸쳐 교도소 공격을 감행했다는 판결이 있다.
저자의 연구로는 5회가 아니라 6회였다. 광주교도소에는 170명의 간첩수를 포함해 2,700명이 수용돼 있었다. 교도소는 매우 중요한 국가 보안시설로 분류돼 계엄령이 발동되거나 비상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맨 먼저 군이 투입돼 경비하는곳이다. 이를 공격한 행위는 불법하며, 민주화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2017년 4월 19일, 광주일보 등은 당시 '5.18성역화'를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섰던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광주시민은 절대로 광주교도소를 공격한적 없다. 교도소를 공격했으면 시체들이 있어야 하는데 시체가 없다."
“시체들이 있어야 했는데 시체가 없다”
는 이 말은 자승자박의 말이었다. 교도소를 5회 공격했다는 사실은 1997년 대법원 판결문에 기재돼있는 사실이다. 야간작전으로 5회에 걸쳐 공격을 했다면 시체가 대량으로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분명히 있어야 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생은 했는데 발견이 안 됐다? 숨겼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북괴군 시체가 발견되면 김일성은 즉시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돼야 한다. 그래서 북괴군의 시체는 절대로 발견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987년 북괴가 저지른 KAL858기 공중 폭파사건, 북괴는 폭파범 김현희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노력했던가? 하지만 전두환 정부의 숨 가쁜 추격전에 의해 김현희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김현희가 북괴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비로소 미국은 북괴를 '테러지원국'으로 확정하여 엄청난 고통을 안겨줄 수 있었다.
저자는 2017년 윤장현과 김양래가 주장한 위 내용을 해석하여 인터넷에 게재했다.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상임이사 김양래의 이 발언은 광주교도소를북괴군이 공격했다는 발언에 해당한다. 대법원은 광주의 무장 시위대가 교도소를 5회씩이나 공격했다고 판결했는데, 그 무장 시위대가 광주인들이 아니려면 그 공격 주체는 북괴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에 윤장현이 발끈하여 저자(지만원)를 고소했지만 1년 후 그는 소를 스스로 취하했다. 지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표현을 상대로 고소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광주시장의 지능이 바닥 수준일까? 아니면 대충 고소해 놓으면 빨갱이 판사들이 알아서 죄를 뒤집어씌울 것으로 확신해서일까?
여기에서 우리가 음미해야 할 부분은 '무장시민군'이 공격했다는 [야간공격]이다. 총으로 방어되고 있는 교도소를 총을 들고 야간에 공격하는 행위는 절대로 민간인들이 시도할 영역이 아니다. 그것도 대량 학살을 감수하면서 5회씩이나. 이는 작두에 목을 넣어주는 것과 맞먹는 무모한 행위다.
'야간공격', 저자는 베트남에서 야간작전을 많이 나갔다. 적막한 밤에는 작은 동물 한 마리가 움직여도 한동안 심장이 뛴다. 하물며총을 가진 적을 향해 [야간공격]을 해야 하는 전사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1970년, 저자는 베트남전에서 육중한 헬기로 포 2문(2개 분대)을 밀림지대의 한 고지로 공수하여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칠흑의 밤을 가득메운 적막과 고요, 사방에서 베트콩들이 소리 없이 기어 올라오는 환상을 이겨내기 참으로 어려웠다. 하물며 야간에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는 교도소를 향해 공격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이야 어떠했겠는가? 혼이 나간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지엄한 명령이 있기 전에는 그 어느 지휘관도 능동적으로 결심할 수 없는 작전이다. 더구나 공격하는 공간이 평평한 들판이기 때문에 군사용어로 명중력이 최고인 [최저표척사]에 의해 전멸될 것을 감수하는 행위다.
김일성으로부터 지엄한 명령이 있었기에 엄청난 공을 들여 살인 기계로 양성한 600명 중 475명이 사살됐던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이후에 제시된다. 만일 이 공격 명령을 현지 지휘관이 내렸다면 그 지휘관은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주에 파견된 3성 장군 리을설은 이후 '원수'로까지 승진하여 인민군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성격의 [야간공격] 행위를 어떻게 나이 어린 광주의 구두닦이들이 5회씩이나 감행했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으니까 광주시장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가 순간적으로 "우리는 그런 짓 하지 않았다며" 발뺌을 했던 것이다.
도대체 김일성은 어째서 이렇게 무모한 명령을 내렸을까? 이 순간 박헌영이 오버랩 된다. 6.25 직전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간청했다. 일단 남침만 하면 남한의 공산주의자 수십만 명이 동조하여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남침한 김일성은 결국 전쟁시나리오에 엄청난 차질을 겪어야 했다. 5.18 때에도 김일성에게는 이와 유사한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게릴라전이 수행되기만 하면 광주의 모든 인민이 봉기하여 가세할 것이다".
아마도 김대중 파들이 간첩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가능한 것은 1980년 5월 16일에 김대중이 취한 놀라운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그날 김대중은 감히 최규하가 이끄는 대한민국을 향해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최규하 정부가 내각을 해산하고, 계엄령을 철회하겠다는 약속을 5월 19일까지 김대중에게 통보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전국 폭동을 일으키겠다"
고 선포한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정신으로 어떻게 이런 만용을 부릴 수 있는 것인가?아마도 김대중은 북괴가 600명의 특수군을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북괴특수군이 폭동을 주도하면 김대중이 키워온 전라도 세력이 질풍노도처럼 일어나 특수군과 합세하여 봉기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릴라전은 적국 주민의 적극적 동조와 협력을 전제로 한다. 김대중은김일성이 키운 골수 빨갱인데다 전라도 인구들이 강력한 반골 집단이기 때문에 6.25 때의 박헌영이 양성한 빨갱이들과는 다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무기고에서 총을 털어 광주 사람들에게 안겨주기만 한다면 김대중이 반골 세력으로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전라도 민병대가 적극 호응하여 총을 들고 싸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 당시의 일반 광주시민들은 훌륭했다. ◈
실제로 북괴군은 무기를 털어 도청과 광주공원 등 여러 곳에서 광주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줄을 선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들라며 윽박질렀다. 개념 없는 양아치급 부나비들은 총을 들었지만 그들은 군 훈련소에 갈 나이조차 안 되는 무개념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지각이 있는 시민들은 총을 나누어주는 북한군에게
“아저씨 여기 사람 아니지요?"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총만 주면 한편이 되어 싸워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광주시민들은 그들을 의심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북괴군의 패배는 예약돼 있었다. 게릴라전은 [군은 물고기, 주민은 물]이라는 전략개념에서 출발한다. 주민의 호응이 단절되면 군은 죽는다. 그래서 게릴라전의 대가인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월남 주민을 게릴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대민 지원과 친선 활동을 전개했다. 주민의 마음을 누가 쟁취하느냐가 게릴라전의 관건인 것이다.
5.18 당시 광주에는 박현채, 윤한봉, 정동년, 윤상원(본명 윤개원), 황석영 등 김대중을 추종하는 적색분자들이 서로 영웅이 되기 위해 선명성 경쟁을 벌였지만 이들은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거물들은 아니었다. 뒷골목에서 소영웅주의에 침몰됐던작은 건달들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오판을 한 것이다.
주민이 호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게릴라전에 치명적인 독약이었다.그래서 광주에서 북한군을 지휘한 리을설 당시 상장(3성)은
“광주인들이 총을 들려 하지 않는다"
고 김일성에 무전 보고를 했을 것이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다른 방법으로 폭동의 동력을 구해야만 했다. 간첩 수용자 170명을 포함해 총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그들을 폭동의동력으로 이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침투한 손성모 등 암약하는 간첩들에게 보내는 이 무전이 계엄 당국에 청취됐다. 너무나 다급한나머지 암호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제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다. 당시의 향토사단은 민병대로 불릴 만큼 체계도 훈련도 부족했다. 더구나 31사단을 지휘한 정웅 사단장은 사상이 매우 의심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북괴의 무전을 청취한 계엄 당국은 전광석화의 속도로 교도소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31사단을 교도소에서 철수시키고, 정예부대인 3공수여단을 배치한 것이다. 불과 두 시간 이내에 이루어진 극적인 조치였다. 전남대학교에 주둔했던 제3공수여단은 단 2시간 만에 땅을 파서 방어진지를 급조하고 수류탄과 대전차포를 포함한 방어용 무기를 증강시켰다. 이렇게 준비된 방어진지를 향해 무장시위대는 5월 21일 밤에 무려 5회에걸쳐 파상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자살행위 그 자체였다.
자살행위인 줄 뻔히 알면서 현지 지휘관이었던 리을설 상장(3성)은 왜야간공격을 감행했을까? 감히 김일성 명령에 토를 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 특수군 장병들은 언제든 위대하신 김일성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칠 준비가 돼 있었다. 국민들은 1996년 9월 16일 강릉에 좌초됐던 상어급 잠수함 침투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북괴 대좌 이하 11명이 집단자살을 했다. 자기들이 생포되면 북한 가족들이 몰살 당하는 반면, 자기들이 죽으면 북한의 가족들은 영웅 대접을 받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북한특수군 600명이 교도소도 점령하지 못한 체 고스란히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들은 물론 그 가족들 모두가 몰살될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따라서 교도소를 점령하라는 김일성 명령은 이들 600명에게 곧 죽으라는 명령이었다.
김일성에게 특수군은 이렇게 집단사살을 당해도 아깝지 않은 존재였던가? 아니다. 금쪽같은 존재였다.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데려다 특수한방법으로 장기간 훈련시킨 살인 기계요 만능 맥가이버들이다. 몰살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김일성은 왜 고귀한 병력을 교도소 공격에 내보냈을까? 분명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투입시켰을 것이다. 김일성이 생각했을 성공의 가능성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의 명령이 하달되던 바로 그 시각의 교도소는 최강의 병력인 공수부대가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31사단 병력이 경비만 서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 31사단의 수장은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정웅이었다. 김일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여 성공을 자신하며 교도소공격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계엄 당국이 단 2시간 만에 31사단을 공수부대로 바꾸어 놓을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결전장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어야만 상식에 부합한다. 하지만 동이 튼 다음 시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이 참전했다는 꼬리가 잡히면 북한은 UN 차원에서 전범국가로 처벌을 받는다. 그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 김일성의 지상명령일 수밖에 없었다. 이 5회의 교도소 공격에 리을설은 몇 명을 투입했을까? 아마도 도청에서 지휘부를 호위하는 100명 정도의 군병을 제외한 나머지 500명 정도는 투입됐을 것이다. 평균 1회에 100명씩, 그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죽었을까? 그 숫자가 북한이 4개의 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암시한 숫자 475명이었을 것이다. 이 475명에 대한 분석은 뒷부분에 전개돼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의 지각 있는 광주시민들이 총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5.18작전의 전세를 뒤집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 항목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총을 들었다면 5.18폭동은 전국으로 번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라는 매우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그들이 총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은 교도소를 공격했고, 그 공격에서 600명의 군병 중 475명을 졸지에 잃게 되었던 것이다. 동력을 상실한 북 특수군 부대는 긴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훌륭했던 광주시민들이 김대중 이후 주사파로 돌변한 것이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극대화시킨 역적이었던 것이다. 광주시민과 전라도사람들은 지금도 김대중을 '호남의 영광'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김대중은 그들을 값싼 소모품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라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로 재편입될 수 있는 관문이 될 것이다.
→ ▣5.18작전 北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 ▣
◈제2장◈ㅡ계속ㅡ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한 팩트 3개?...
① 불법.사기탄핵 무너진 법치회복
② 헌법위에 군림하는 5.18진실규명 (국가유공자면 관리.감독은 당연히 주무부처는 국가보훈처, 정부의 직무유기 감사하라)
③ 빨갱이로부터 국가 지키신 전두환대통령 명예회복
☞ 큰 팩트라고 외칩니다.
◈전두환대통령의 명예회복 조국의 미래다.
자세한 사항은「5.18작전 북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책을 권해리며, 책「전두환 리더십」한권을 밴드에 올려놓았습니다. 필독 부탁드립니다.
☞'전두환 리더십' 밴드
https://band.us/n/a3a786q4bb48w
☞'5.18결정적 증거42' 밴드
https://band.us/n/ada287Rbdbc2s
☞ 月明. 홍영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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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나(김태산)의 말은 5.18을 북한에서 보고 들은 사실이다!
...대한민국에 5. 18 유공자는 없다. 5. 18 유공자들은 북한에서 광주에 온 북한군들(북한 유공자들)뿐이다.
...남한의 5.18 유공자라고 하는 자들은 북한군의 교란 작전에 속은 자들, 난동부린 자들, 죽은 자들뿐이다(유공자는 없다).
...5.18 때문에 남남 갈등으로 국민이 갈라지게 됨을 알고 5.18 문제 빨리 종결지어야 한다"
<탈북자 김태산씨의 작심 발언/23.7.19, Sky Daily주최 5.18 가짜유공자 규명 및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 출범식에서>
[Youmaker영상(15분)]
●탈북인 김태산씨의
"광주 5.18때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들
+탈북한 황장엽,김덕홍의 5.18 북한군 개입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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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해(전 안기부장):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했다"
1994~1998년 안기부 재직때 비밀공작 통해 확인
"北 청진에 있는 '남파영웅렬사묘'가 직접적 증거
南에 묘비 존재 들통나자 돌연 제3의 장소로 옮겨"
[SkyDaily, 2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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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역사 진실]
답은 나왔다!
-북한 특수군이 그때 왔다는 것!
-반란폭동 역적질을 민주화운동이라 속여왔다는 것!
~증거하는 수많은 자료들
(링크 보세요)
https://m.cafe.daum.net/saintfullgospel/NqOe/3068?searchVie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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