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7장에서 선지자가 다윗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서가 역대상 17장에 나오는데,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쾌한 그런 발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나단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됩니다. 특히 어느 대목에서 다른 지파가 들으면 섭섭한 이야기냐 하면, 10절에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 버립니다. 이것은 특별대우를 하는 거죠.
시편 89편 3절을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다윗이 속한 지파 아닌 다른 지파에서 들으면 기분 더러운 이야기를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78편 67-68절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를 선택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제가 히브리서 7장을 언급하면서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숨어있는 지파(유다지파)가 레위지파를 제치고 점령해서 영원히 이어진다. 이것을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부터 계속 로마서 1장 3절을 이야기했는데 그 대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아들을 보내 주시는데 그 아들이 등장할 때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말로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 같아서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자’라고 해요.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그렇게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즉 ‘성부’와 다른 차이나는 어떤 분이 숨어 있는데 이 지상에 12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12지파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 이스라엘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칭했습니다.
그런데 12지파가 뭔가 위에서 내려오는 강한 힘에 의해서 쭉 빨려 올라가요. 올라가면서 ‘어, 우리가 어디로 빨려 올라가지?’ 하면서 올라가서 만나는 지점. 여기는 누구냐?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다윗을 선택했다.’ 이 말은, 지상에서 하나 선택했다는 말도 되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분을 다윗의 집을 통해서 출생케 하겠다는 말도 됩니다.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설명하는데 에로사항이 많은데 하는데 까지 해 보겠습니다. 12지파 가운데 ‘다윗의 집’이라고 하면 이것은 이해하기 쉬워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니고 (다윗이 속한)유다 지파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그런 식으로 아무리 이해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임하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니까.
‘하나님이 널 부르신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어.’ 그러면 제가 금방지게 ‘하나님, 절 부르셨습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성자가 임하게 하소서.’ 안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신학자들이 오해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임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짧은 견해입니다. 인간의 다윗 집에 안 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자께서 준비한 다윗의 집을 묘사하는데 다윗의 집이 필요한 거예요. 제가 말을 했습니다만 참 앞뒤 문맥도 안 맞고 그렇습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산을 그려놓고 다윗과 솔로몬이 전부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다윗의 집’에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이 ‘다윗의 집’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어떤 집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짜 집은 따로 있고, 이 집은 진짜 집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그림자로서 작용했던 그런 것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위에 구름이 있으면 아래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가지요. 지나가는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집’이고 ‘성전’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하늘에 ‘다윗의 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서 이루어졌느냐 하면, 지상의 다윗 시대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다윗의 집을 향하여 모든 말씀이 꽂히게 되어 있어요.
다윗의 집에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지만 진짜 다윗의 혈통은, 육적인 다윗의 혈통으로는 모르고 예수님이 임하시면 본격적인 다윗의 다윗 됨은, 다윗의 이름으로 왔지만 다윗의 이름은 다윗의 이름이 아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는 겁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면 주 예수의 집이네. 그러면 다윗 집 아니잖아.’ 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옛날부터 하나님이 원하신 다윗 집은 바로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집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상의 다윗 집은 아닙니다. 로켓을 발사하면 로켓을 감싸며 지지하고 있던 옆의 지지대는 다 떨어져 나가지요. 이처럼 지상의 다윗 집을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영원히 맹세하는 것은 이 ‘다윗의 집’이라고 따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 있고, 그것의 그림자로써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시편 89편 4절에서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는 말씀은, 그림자 다윗의 집을 붙들고 있으면 곤란하고, 다윗의 집을 통째로 삽입시켜 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윗에 속한 유대인들도 (죄송하지만)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의 의미를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이야기 안하면 ‘다윗에 속한 유대인들은 전부 자동적으로 구원 됩니다.’ 라고 우길 수 있어요. ‘시편을 봐라. 다윗의 집에 언약했잖아.’ 라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은 다 구원 받고, 추가해서 이방인들 중에 덤으로 구원 받을 사람이 있다.’ 이런 식이 됩니다.
아닙니다. 제 할 도리 다 했으면 ‘다윗의 집’은 사라져야 됩니다. 이런 비유를 해 보겠습니다. 포장지는 작은데 내용물은 커요. 그래서 억지로 내용물을 포장지에 다 담으려고 하면 포장지가 찢어지지요. 바로 그 원리입니다. 포장지는 찢어지고 그 물건은 조금도 손상이 안 가지요. 왜? 포장지는 종이니까.
어설픈 종이 같은 ‘다윗의 집’을 역대상에서는 지금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에 의해 진짜 ‘다윗의 집’이 임하게 되면, “그동안 수고했어!” 하고 작별을 고하게 되고 어설픈 종이는 철거되고 맙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서 들통 나는가? 그게 바로 역대상 17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언약궤는 텐트(장막)에 있었어요. 그래서 다윗이 미안했던지 자신을 찾아온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다윗의 집을 세우리라.’는 것을 다윗은 본인인줄 알았어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셔서 정말 다윗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는 줄 알았단 말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거절하고 말았지요. 4절에 나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나님은 ‘내가 거할 집은 내가 짓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와 ‘다윗’이 균열이 일어납니다. ‘나’라고 하는 하나님과 ‘다윗’이라는 인간 사이에 틈이 벌어지죠. ‘내가 거할 집은 내가 짓는다. 너는 집을 짓지 마라.’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다윗은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이 짓는다고 하니까 나는 재료만 준비하면 아마 내 자식이 지을 것이다.’ 라고. 다윗은 아직도 집이라는 건축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건축 자재를 모으느라고 난리를 칩니다. 다윗은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지을 집이라는 개념은 건축 구조물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 자체를 집으로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의 아주 어려운 부분에 봉착합니다. 김해 김씨를 다시 예로 들겠습니다. 김해 김씨라는 집을 지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김대식 성도님께서 김해 김씨 집을 다 지었습니까? 지금 이 시간도 김해 김씨에 속한 사람이 산부인과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완료지요. 지금 김해 김씨 집이 완료되지 않았지요. ‘지금 이후로 김해 김씨 자식 낳기만 해라. 다 죽인다.’ 이런 것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지을 가문을 내가 짓겠다고 하면 이것은 얼마동안 짓고 중단되어야 될 텐데, 집을 짓는 것은 건축 재료로 설계에 따라 지어 완성하면 끝나는 것이잖아요. 어렵습니까? 쉽게 해 봅시다. 내가 십자가마을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한다면, 십자가마을 회원이 10명이면 끝입니까? 100명이면 끝이에요? 집 지어놓고 회원모집을 계속 합니까?
아니면 십자가마을 회관을 하나 만들까요? 매번 모일 때마다 회비를 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이 되니까 땅을 구입해서 십자가마을 회관을 하나 지을까요? 이게 바로 다윗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이여,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한 곳에 집을 짓겠습니다.’ 할 때, 하나님이 ‘집 짓지 마라. 내가 지을게.’ 하니까, 다윗은 ‘아, 십자가마을을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구나.’ 생각했지요. 죄송하지만 주께서 친히 인도하는 십자가마을은 없습니다.
주께서 친히 인도하는 십자가마을도 없고, 그런 다윗의 집(가문)도 없어요. 주께서 친히 지을 때는 미완료로 남아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집을 짓는 그 순간 이미 완료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학자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해요. 집을 짓지 말라고 해놓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니까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축복해 주시고,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일하시냔 말이지요. 집을 짓지 말라고 하면 성전 지을 때 짓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텐데, 성전을 지어 놓으니까 좋아서 ‘내가 축복하겠다.’ 이것은 주님께서 일관성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갈팡질팡합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이것 해결하지 못하면 가야산 못 내려갑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지은 집에 뭐냔 말이지요. 하나님이 지은 집이라는 것이 다윗이 생각하는 다윗의 가문, ‘아마 내 아들이 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에요. 부동산 건축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을 집은 자재가 있어야 돼요. 그것이 뭐냐? 포기한 다윗의 가문입니다. 다윗의 가문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애쓰다가 망했잖아요. 망한 그것 주워 모아서 다윗의 가문을 만들어요. 그 가문 만드는 설계자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자재로 자기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유대나라 이스라엘 우리 힘으로 못하겠다. 망쳤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죽이는 것까지.
인간들이 얼마나 메시아를 싫어하는가 하는 것들까지 한 개 두 개 모아서 그것을 건축 자재로, 버린 돌. ‘버렸지?’ ‘버렸습니다.’ ‘필요 없지?’ ‘필요 없습니다.’ 예수를 버린 자를 끌어 모아서 하나님이 친히 그 안에 거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했던 다윗의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려면 예수를 죽도록 싫어하는 체험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체험 학습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이번 수련회 기간 동안 체험 학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예수 같으면 나는 예수를 버리겠다.’ 맞습니다. 그런 것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항의할 거야.’ 맞습니다. 이때가 바로 주께서 친히 거저 건져주셔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천당 가기 위한 하나의 자재들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이 못 밝혀내요.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 이것을 이야기하면 ‘우리 총신(총회 신학교) 망해야 총신 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여러분에 교회에 실망해야 됩니다. 교회는 실망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실망해서 교회 버리면 그것은 예초부터 교인 아니고, 교회에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그 기대가 무너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님이 복음 전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다른 교회랑 똑같더라.’ 잘 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께서 세우려는 준비된 자재들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윗은 뭘 했는가 하면, 건축 자재를 끌어 모았어요. 이것은 이사야, 예레미야에 의하면 완전히 재(다 타고 남은 가루) 됩니다. 언약궤도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놋 뱀도 히스기야 시대에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그걸 알았어요. 남는 것은 뭐 밖에 없다? 성전이 중요하지만 성전을 유지하고 안 하고 하는 그것보다는, 성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과연 하나님의 언약에 가 있는가?’ 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이 지은 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오해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70년 동안 남의 나라에 가서 살도록 하셨는데, 남의 나라에서 율법 지킬 수도 없고, 성전도 없고 그 때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습니다. 시편 137편에 나오지요.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알 때까지 철저히 낮추시고,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하구나.’를 아는 순간, 여호와를 안 믿는다고 욕했던 고레스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진짜 메시아 같아요. 불신자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는 다 같은 불신자일 수밖에 없는데 왜 은혜를 받아서 신자가 되었느냔 말이지요. 그럴 때 그것이 바로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의 집은 주께서 따로 준비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성전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 몸이 성전이고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성전에서 내려오는 물,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됩니다. 에스겔은 알았어요. 기존의 성전은 부서지고 부서진 잿더미 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예언했습니다. 장차 올 성전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되는데, 이 성신을 어떻게 만드느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언약궤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살아요. 이 새로운 성전은 계속 물이 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 전부를 적시는데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하는 것과 똑같이 생명수가 흐르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들이 다 살아나는 그것을 에스겔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유대인들, 다윗의 가문들,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지키신다.’고 우긴 유대 지파들. 이 유대인. 그래서 유대인이 된 사람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이룬다고 양동이에 물을 퍼서 맥추절에 언약궤에다 물을 부었어요. 이 물이 생명수 강가에서 흐르는 물인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메시야에게서 성령이 나오는 그 물이 에스겔이 예언한 물입니다.
왜 성전은 부동산이 아니고 움직이고 있는 나, 내가 바로 성전인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그 전체를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있으려면 자재가 있어야지요. 어떤 분이 ‘목사님, 저도 성령 있어요.’ 그래서 성전이라고 하는데, 진짜 성령 같으면 그 자재가 내 힘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항상 느끼는 사람,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그것도 지극히 짧은 순간만 그렇지만), 어느 순간인가 ‘야, 내 힘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잖아.’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주의 손에서 이루어졌지 다윗이나 나나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도 주의 성전은 절대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단 말이지요.
교회마다 예배당 짓는 것 정도는 용납할 수 있어요. 정락원 목사님 써신 글에 보면 나오지요. ‘초대교회에 무슨 예배당이 있었느냐?’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잡아 죽이는 시대에 지하 동굴에 숨기 바빴지 언제 헌금 거두어서 구청에서 건축 허가 얻어서 예배당 지었습니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로마 군사들이 와서 잡아갔을 거예요. 그 때는 ‘가이오의 집’ 등 개인 가정에 숨어서 그렇게 모였고, 그게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냥 유대인 회당 빌려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회당이 성전입니까? 아니에요. 지하 동굴이 성전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있는 곳, 우리들이 있는 곳이 바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고 성전입니다.
모델이 큰 순복음교회가 모델이 아닙니다. 모델은 성경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요. ‘교회가 교회를 망친다.’고. 기존의 큰 건물이 있으니까 ‘아하, 저것이 교회구나.’ 라고 선입관이 박혀 있으니까 가이오의 집에서, 혹은 우인숙 집사님의 집에서 모이니까, ‘이게 무슨 교회야?’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은 생각 안하고,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개인 아파트네.’ 이런다고요.
저는 우인숙 집사님의 집을 교회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거기에 모인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 아파트 건물을 교회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어떤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이동할 필요가 없는 조건을 갖출 때 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우리 교회 옮겼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의 손에 있는 일곱 교회는 옮겨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곱 교회가 밑에서 교체되고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시편 89편에 있는 다윗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해서 진짜 하나님이 손수 지으시고, 스가랴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신에 의해 지어진 집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다윗은 ‘제가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수느냐? 나중에 부숩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 빠졌어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는다.’ 재미있지요? 내가 친히 집을 짓는데 이것이 다윗의 가문이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 이 가문 끝에 다윗의 자손이죠. 복음서에 나오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주님이 임하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집 지을 때 ‘다윗의 자손’까지가 집이냐, 아니면 다윗의 자손만 집이냐, 이것을 포함한 것이냐? 그러면 예수님 죽고 난 뒤 사도행전에서 계속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여전히 다윗 집은 미완료 아닙니까. 아직 다윗 집은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썼는데 이 점이 어떻게 해서 ‘다윗의 자손’ 이것이 예전에 있던 다윗의 가문과 후에 나올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아우를 수 있는가? 이것을 정지 상태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역대상 12장부터 쭉 나오는 다윗 가문의 확고성을 가지고 설명해 주는 겁니다. ‘또 하나님이 다윗을 가지고 놀랐구나.’ 다윗은 지금 좋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좋다고 하는 그것이 장차 올 확고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몰리게 된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예야, 그건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찬양 신학교를 만들었는데, 대구 동인 네거리에 보면 ‘율동 신학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율동 신학원이 무엇을 하는가 하면, 율동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서 주일학교 율동 교사를 배출하는데, 저는 이 단체를 보면서 ‘참 오래 가네. 저것이 망하면 구원 받는데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뭔가 하면, 시편대로 찬양해야 올바른 찬양이고 시편대로 찬양 안하면 잘못 된 것이라는 겁니다. 찬송가도 뒷부분에 있는 가락은 다 엉터리고 시편의 가락대로 해야 한다. 실례지만 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역대상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보좌하기 위해서 문지기와 성가대원들을 차출해서 성전에 포진하게 합니다. 바깥은 군대가 둘러 사고 --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멀리서 보면 하나님과 다윗이 맞닿아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다윗은 언약궤 가까이 가지 못해요. 언약궤는 누가 담당합니까? 이것은 레위지파 담당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노는가?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신 군대를 가지고 이 제사 직분이 계속 유지되도록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것을 지키지요. 블레셋, 암몬, 모압 등 소위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깡패들을 전부 잠재워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승리케 하셨기 때문에. 역대상 18장 13절에 나오지요.
다윗의 승리는 다윗의 승리가 아니고 다윗이 지켜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승리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승리에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름은 분명히 다윗 언약이지만 실제 내용은 모세 율법을 유지하기 위한 다윗 언약입니다.
거룩을 지키는데 거룩에는 피가 있어요. 피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케 하지요. 피의 복음 가지고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윗처럼 어디를 가든지 승리케 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그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기는데 어떻게 이기는가? 자기 생명을 포기하면서 까지 이겼다. 뭘 지키는데? 십자가 피 지키는데.
다윗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그 분화구에 활화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궤라고,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만든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 언약궤가 완성되고 뚜껑을 열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피]라는 책에 나오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에는 압축되어서 언약궤라는 좁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을 열고 나오면 온 우주가 예수님의 피로 넘치게 되는데,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충만’이라고 했지요. 이 충만은 어떤 충만인가 하면, 개인 소유가 안 되는 충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충만. 우리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아저씨 이쪽으로는 오지 마세요. 이곳은 나의 물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충만은 뭐냐? 둘이 있어도 충만이고, 네 명이 들어와도 충만이고. 복음, 십자가 피는 아무리 믿어도 나에게 모자람이 없어요. 그래서 충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명이 예수 믿어도 ‘야, 그만 믿으라. 지금 피가 모자란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충만입니다.
이것을 자꾸 개인 소유화 하니까 “목사님, 지난주에는 충만했는데 이번 주는 충만하지 않습니다.” 개인 소유화해서 그런 오해가 일어납니다. 주께서는 수영장에서 기다리지 개인이 소지한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너의 피’ 이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너의 피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피 밖에 없어요.
레위 지파에 있는 그 모세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군대가 포진을 해요. 멀리서 보면 맞닿은 것 같지만 가까이 가보면 거리가 띄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거리를 누가 메우는가? 그것이 역대상 15장에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왕궁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처소, 장막이 나오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다윗 가문이 아니고 다윗 자손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윗 자손이 다윗 가문을 흡수 통합할 수 있느냐? 이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확정화 시킬 때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된 것을 미리 보여주는 그러한 그림자로써 다윗은 스톱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로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해 놓고, 다윗을 중심으로 후지산처럼 되어 있습니다. 올라갈 때 14대. 14대가 넘는데 왜 14대냐? 올라갈 때 14대니까 내려올 때도 14대로 쳐주고, 14대 넘는 것은 다 빼버립니다. 왜? 그 다음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예수님까지 가는데 또 14대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42대로 한 것은 14대, 14대, 14대로 보지 말고 그것은 3으로 나누란 말이지요. 주께서 다윗같이 되었지만 그것을 인간들이 망쳤단 말이지요. 인간들이 망친 그것을 주께서 오셔서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보여주는 14대가 있단 말이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 인간이 절망한 자리, ‘이제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하는 그 자리가 구원이 성사되는 개시점이 되지요.
그 좁아 보이는 언약궤에 누가 총 집합을 하느냐? 레위지파와 아론 자손이 다 들어가요. 그래서 역대기 15장에 보면 쭉 나옵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메고 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을 수송하는데 레위 지파가 동원되어 수송을 합니다.
16장에 보면 드디어 언약궤를 옮겨놓고 난 뒤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 내용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대로 그 땅에 우리가 도착했습니다.’ 임무 끝. ‘드디어 마지막 종착점에 왔습니다.’ 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세계를 정복할 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세계를 정복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은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도달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더 이상 추가적인 언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짐 내려놓고 거기에서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거예요. ‘이제 다 왔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장소에 드디어 우리가 도착했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내려놓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에서 절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왜? 그림자니까. 마치 성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 사라져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려요.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뭘 믿는가? 우리가 믿는 것은 사라진 그분이 숨어서 각 개인에서 성령을 주게 되면 이제는 그 장소가 어떤 땅이든 상관없이 전부 약속의 땅이 되는 그런 신약시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