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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유다의 신앙노선(5), “전도(顚倒)”, ‘한국교회의 변천과정’
이 단락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좀 많이 들었다. 성령게 도움을 구하고, 기도하고, 영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의 변천사에서 어떤 기반 전환이 이루어졌는지, 이 부분을 짚고자 한 것이다. 역사적 변천 과정이 아니라 현대사 우리 한국교회 기반으로써 영적 배경이 어떻게 전환되었고,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어떤 교회적 상태의 변천으로 내몰아 왔는지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산업 혁명 이후 이념 시대는 지구를 둘로 갈라놓았다. 두 차례에 거쳐서 일어났던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우리에게 나라적으로, 민족적으로, 불행이 찾아 온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난 것이다. 한반도의 분리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고 지났다. 북한이 공산주의 진영이 되자 우리 한국은 섬이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본래 독일처럼 3.8선 이념의 상징 철책선은 우리 한반도가 아닌 일본이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이어서 해방을 맞아도 우리의 국토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분리가 되었을 분만 아니라 해방 5년 후가 되었을 뿐인데 결국 내전으로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한 민족이요 한 국토였던 한반도가 총과 대포로 서로를 죽이는 불행한 민족 현실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성경이 예고한 대로 죄로 타락한 인류의 악이 어떻게 한 민족을 대립하여 분열, 분리가 되도록 하는가? 여기에 교회적 역할의 의의가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으로써 타락한 죄성의 문제를 다루고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통의 때에 우리 사회와 함께 한국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이점을 상기하며 지금도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들의 정체성 확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신흥종교로 시작되었던 한국교회는 시련 가운데 놓인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하며 시작되었다. 비록 근대 말에 이르러서야 선교가 시작되어 후발 종교로 한국 사회로 들어왔지만 처음부터 한국 민족의 시련과 함께하며 아픔을 보듬어주는 종교로 시작하였다.
게다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핍박과 폭력으로 한민족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일본을 향해서 한국 민족과 함께 불의에 항거하는데 교회가 앞장을 서 주었다. 이제 시작한 한국교회는 신앙으로 나라 잃은 서러운 민족을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며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며 나라 구하는 민족의 혼을 잃지 않도록 힘이 되어주는 종교로써 앞에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길을 잃고 유리 방황하는 민족이 되어있는 우리 민족 앞에 서서 인도해가는 수많은 지도자들의 출현은 물론, 교회를 중심 하는 교육, 의료, 고아원 등 사회 계몽과 기독교 운동은 급속도로 교회 부흥의 시대로 나오는 과정이 되었다.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1950년 6.25 내전으로 폐허가 된 나라 위에 교회적 역할은 다시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어주었고, 폐허의 나라 위에 국민들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어주는 종교로써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한국교회 안에는 작은 불씨 하나가 시작되었다. 한국 교회적 환경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주요한 변천기로 접어들었다. 장로교 주도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사회 속에서 성경 중심의 기독교 정신을 조용히 윤리적으로 계몽(啓蒙)하는 그와 같은 역할을 도시 농촌 등에서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50년 말에 일본에서 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순복음 조용기 목사의 불광동 개척시대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물결과 함께 새로운 교회적 붐을 조성하며 교회적 기반의 변화를 몰아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1950년 3년 내전으로 보릿고개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창궐하던 때를 겨우 넘기면서 60년대로 들어서던 우리 한국 사회는 변천의 거대한 힘이 소리 없이 우리 사회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는 과도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60년 대 일본에서 “국제이단협의체”가 유대인들과 일본의 공동합의로 출범을 하기에 이른 사건이 있었다. 이런 소리 없는 움직임은 일본의 계략이 주도된 우리 한국 사회를 겨냥한 변천의 힘이 형성되는 과도기로 소리 없는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요한 부분이 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역사는 우리 사회 종교와도 직접 관계되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는 불교를 겨냥했다. 단단이 준비를 하고 조선 침략을 단행했던 일본은 막상 조선 전쟁을 일으켰는데 실패로 돌아 갔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7년에 거쳐서 7곱 차례 싸웠지만 결국 비참하게 지고 돌아갔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조선 불교를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돌아갈 때, 도자기 공들을 비롯해서 15만의 포로들을 일본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들 가운데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20, 30년 교화와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쳐서 쪽배에 태워 우리 조선으로 다시 들여보냈다고 한다. 우리 사회 안에 똬리를 틀고 정착하여 살면서 조선 왕실, 불교, 기생 등의 기반들로 진출하여 일본을 위한 활동으로 당시 조선 사회를 유린(蹂躙)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임진왜란 후 350년 세월 동안 그렇게 진행해 왔다는 것이다.
정말 일본이 2차 침략으로 우리사회를 정복했을 때, 우리 사회 안에 불교는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당시 민족이 수난을 당할 때, 눈을 감아 버린, 그래서 불교 중심의 독립군들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현실이 되었던 조선 말의 사회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강제 합병까지 41년의 세월, 일본은 한국 불교를 주저 앉혀 놓았기에 종교적으로 자신들을 반대할 사회 정신적 지주가 없어진 것으로 알고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근데 말에 시작 된 신흥종교로 들어온 기독교가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자신들의 침략을 불의한 국가 행위로 단죄하고, 조선 전국에서 사람들을 계몽시키며, 일본을 반대하는 힘으로 조선 사회 힘을 모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은 결국 1945년 한국 교회가 바라는 대로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중심적 신앙 운동은, 하나님께서 조선을 불쌍히 여기시사 반드시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런 신앙 정신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듯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 정신은 당시 조선 민중들에게 희망의 소리가 되어 불굴의 정신력으로 항거하도록 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조선교회가 부르짖던대로 하나님께서 연합군을 사용하여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일본과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일부 조선인들은 통곡하며 억울해하면서 물러갔다. 그런데 물러갈 때, 일본은 조선의 기독교를 가슴에 품고 갔다는 것이다. “가슴에 품고 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일본은 41년 조선을 통치하는 동안 “육지로의 진출의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40년이 넘어간 세월 동안 다스리다보니 조선을 자신들의 땅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맥아더 원수에게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넘겨 줄 것을 로비하여 받으려 별 수단을 다 썼다. 하지만 미국과 맥아더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대신 일본은 이를 포기하는 척하면서 3.8선이 조선에 그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성공을 시켰다. 그것은 지금처럼 중국을 견제하는 붙어 있는 유리한 지정학적 이유로 바다 한 가운데 섬인 자신들 일본 땅에 경계선을 그어 이데올로기를 펼쳐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로비였던 것이다.
3개월 동안 무장해제를 당한 상태로 머무르다가 10월 달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가슴에 조선교회를 담아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40년 넘게 지배했던 조선을 다시 복원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단행해야 하는데, 그 전에 반드시 조선교회를 지금의 상태로 그대로 두고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고 갔다는 의미이다.
일본은 반드시 3차 침략을 단행하게 되어있다. 물론 그 형태는 과거의 침략적 배경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진행될 것이다. 일본 정부와 극우 세력들 입장에서 이들이 반드시 해야 될 사전 작업으로 한국교회를 일제 강점기 때처럼 항거하는 교회 기반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불의와 죄악의 문제로 바라보며 일제 강점기 때와 같이 한국 교회가 이전처럼 한국 사회와 함께 움직이는 교회적 환경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일본이 3차 침략을 단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염두(念頭)하여 갔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신들이 제3차 침략을 단행하기 전 한국교회 기반을 순수한 성경 중심의 기반에서 이탈하여 안으로 흐물거리는 종교적 배경으로 만들어 놓던지, 아니면 죄에 대해서 무디어 져버린 한국교회 기반이나 철저하게 일본 편에 서는 한국교회 기반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일본적 각성(覺醒)을 하고서 돌아갔다는 것이 가슴에 품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본의 국가적 노력의 일환으로 나오는 염두(念頭)였다. 일본은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서 국제적인 배경을 깔아가는 시도에 들어갔다.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1960년 대 국제적으로 이단협의체를 결성하였다.
우리 사회는 이때부터 이단들이 성행하는 기반으로 점차 강성해져 오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이단들이 성행하는, 한국 기반으로 나아온 것이다. 점차적으로 한국 사회 이단들은 그 규모가 거대해지는 형태로 드러났다. 게다가 우리 사회 정치 기반, 그것도 보수진영의 정치 기반들이 직접 이단들 육성(育成)과 결부되어 보호되고 부흥을 가져오는 형태가 강하게 형성되었다. 아는가? 이단적 경향일수록 세상 정부와 연합을 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도관 박태선이 몰아오던 불의 성령, 김계화의 생명수, 이초석의 최면술 등등, 이런 배경들이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조작과 연관되는 한국 사회 종교 몰이였다는 사실이다. 박태선의 기도 중에 불이 공중에 떠서 뒤쪽으로 갔다가 강단쪽으로 돌아다녔던 기적이란 것도, 이미 2차 대전 일본 군국주의 진영에서 그 기술이 발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박태선 시대가 말기현상으로 들어갈 때, 조용기목사가 일본으로부터 신학 과정을 마치고 우리 사회로 들어 온 것이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이를 우리 한국교회는 반드시 바로 규명(糾明)해야 하고, 만에 하나 일본이 주도한 국제 이단협의체 문제와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진리에 대해서 책임과 무게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주권가 섭리 앞에 서 있는 한국교회라면, 이는 반드시 짚어야 하는 문제라고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일본이 패전을 하고서 물러가면서 가슴 속에 한국교회를 담고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는 7년 임전왜란 전쟁에 실패하고 돌아가면서 당시 불교의 전쟁 참여에 한이 되었던 일본이 한국 불교를 가슴에 품고 갔던 것과 동일 한 문제이다. 2차 대전 패전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군국주의자들 중심에 한국교회를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는 의미는, 다시 제3차 침략을 단행하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 전에 한국 사회에 신흥종교인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저대로 가만히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대로 둔다면, 일본의 3차 침략은 어림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3차 침략 직전에 반드시 한국교회를 친일 구조로 만들거나 한국 사회 안에서 건강한 종교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는 의미이다. 혹은 비정상의 한국교회 기반으로 몰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돌아간 것이다.
여기서 50년 대 일본에서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순복음 조용기 목사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가?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조목사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기존 한국교회 전통 신앙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단 조목사는 일본 다신교(多神敎) 사상으로 들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반영되는 천막 교회 형태는 결코 교회라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 사회 안의 조목사의 등장은 신앙기반의 변천을 가져 온 것이다. 성경과 원리 중심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 조용히 기독교 윤리와 삶을 실천하던 인격 중심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던 한국교회 기반을 주관적 체험 중심의 은사주의 기반으로 바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불광동의 천막 교회시절은 그 지역 일대 무당들과 결합 되어 진행되었다. 그를 미화해서 무당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 온 것으로 잘 포장했지만, 90년 대 이전까지 순복음 안의 무당적인 형태는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게다가 교회 안에 무당적인 개념이 신앙의 교리나 원리 등의 성경적 개념들이 무속적인 개념들이 들어오는 문을 열어놓았다.
이 모든 현상은 신앙 기반 자체의 전환으로 이러한 배경을 간과할 수 없음이다. 단순히 개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 한국교회 기반에 전환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또한 2천 년 전통으로 이어져 오던 신앙의 맥락이 달라지는, 이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그와 같은 개신교 신앙 기반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과정이 우리 한국교회 기반 자체에 변질의 작용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신앙의 초기와 중기의 순복음은 도무지 전통 성경 중심적 교회 형태와는 너무도 다른 사이비적이었고 유사 교회 형태, 혹은 이단적인 요소로 가득 찼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일본에서 순복음 신학 과정을 거칠 때, 조목사가 어떤 사상에 심취되고, 일본과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한국사회로 돌아와서 교회 형태로 시작했던 그 배경은 전혀 전통적인 교회 기반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우리 한국교회가 넘어 간 것이 이점 때문이 아닌가?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 앉은 병이, 희귀 병 환자 등등, 병 고침의 역사, 방언 등은 성령의 능력, 역사라는 이름 아래 엄청난 회오리가 되어 한국교회를 휘몰아쳐 온 것이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규명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성경이 밝혀주는 신구약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그대로 실현되는 교회 현장임을 보여주는 힘이 되었다.
기존 한국교회는 엄숙한 예배로 밋밋하고, 하품 나고, 잠 오는 예배로 지루하고 답답함이 흐르는데 사이비인 순복음 교회 안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百闻不如一见)이라고 백날 말씀의 능력, 성령의 역사 말만 하는 기존교회에 비해서 순복음은 그냥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을 들이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전국 교회들이 순복음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키며 오순절 성령이 순복음교회 안에 다시 내려오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순복음이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인가 보다. 이런 말들이 모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짜 교회가 순복음이라고 믿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한국에서 순복음이 중심이 되는 성령의 능력의 문제로 자리를 잡아 갔던 것이다. 이런 세월이 30년이 되어 갈 무렵, 우리 한국 사회는 1990년 초에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MBC PD 수첩과 몇 곳의 방송들이 사기적인 형태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김계화 원장의 놀라운 역사들을 집중보도하면서 이런 형태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사기 행각임을 보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물을 끼얹기 시작하고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한 사회적 현상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들이 집중보도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사회적 환경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런 사실을 시간이 좀 흘렀다고 금방 망각하고 다른 곳으로 그 방향을 돌리려 하고 있다. 혹은 정치력이 없는 기독교 기반으로 인해서 천주교와 불교만큼 힘이 없다 하여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정치적 바벨탑을 쌓고자 정당정치에 참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 대 “국제이단협의체”를 만든 유대인들과 일본이 결합 되어, 아니 여전히 우리 사회를 노리는 일본이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 결합 된 종교 현실을 무너트리고자 시작되고 있는 작전임에도 우리 한국교회의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이런 일본적 입장에 선 무리들이 점진적으로 우리 한국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똬리를 틀고 앉은 그 힘이 교회를 혼미케 하는 그 배경들이 우리 한국교회 기반을 이미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해놓았다는 현실이 반영되는 것이라 간주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거론해 보도록 하자! 80년 대 초 순복음교회는 이미 30만 명이 넘어가면서 국제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위치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이때 순복음교회 성도들의 위세는 대단했고, 그런 자세는 미국까지 건너가서 고개를 뻣뻣이 들면서 자랑하고자 하는 힘이 넘쳤다.
이때부터 순복음은 미국 유대인 랍비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자신들의 교회적 놀라운 역사를 유대인 랍비들에게 한국에서처럼 자랑하듯이 열정을 토했던 것이다. 이때 유대인들은 너희가 구약성경을 제대로 아느냐? 하면서 히브리어와 성경의 형성 과정의 역사를 모르는 너희의 종교행위는 거짓이다. 이 한 방의 말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이때 아마도 순복음과 유대인들 사이, 그리고 천주교와의 결합체가 형성되는 조짐들이 일어났다고 간주(看做) 되어진다. 그리고 성경 중심을 강조하는 순복음의 변천의 시작과 이때부터 우리 사회는 랍비들처럼 성경을 분해하고 주석하듯이 강론하는 성경 중심이란 강조가 우리 사회 안에 강성해지면서 강해 설교 위주가 새로운 방법으로 교회 강단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는가? 주님의 강론은 교훈 중심으로 랍비들처럼 구약성경을 일점일획이라도 분해하고 주석하듯이 교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을 인용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영적 권위로 전하고 깨우치고자 하는 교훈적인 선포식의 설교였다. 우리 한국교회의 변형 된 강해 중점 설교는 유대인들의 랍비들처럼 주석하듯이 문자적인 언어를 잘 해석해내는 것으로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힘이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조목사와 순복음의 은밀한 랍비 그룹들과의 결합으로부터 온 구약 중심의 힘의 배경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랍비들의 라인을 쫓아가는 한국교회로의 문이 열렸기 때문에 목사라는 호칭을 버리고 “선생”으로 대처하여 호칭하려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시며 목양의 권위를 부여하심의 목회직을 내리셨는데, 한국교회 시대로 오면서 랍비들의 호칭과 중국식의 “선생” 호칭으로 선교가 진행되는 한국교회 시대로 나오고 있다.
그래서 조목사의 설교 언어 중 80년의 말부터 주요 강조 호칭은 “야훼”만으로 바뀌었고 91년 도의 ‘조다윗’으로 이름 바꾸기 시도는 모종의 변천을 시도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우리 사회 방송의 움직임은 한국교회 속임수 은사 문제를 들추어내면서 우리 사회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냉냉한 환경이 깔리도록 해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순복음교회 안의 기적 문제 또한 주춤하게 해 놓게 된 것이다. 자신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들 또한 방송 공격에 직결되는 문제로 드러날 것 같은 우려가 작용되었던 것이었다. 사기적인 문제로 다루기 시작하기 전에 순복음이 발 빠르게 선회(旋回)를 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한국 사회 교회적 공략은 한국교회 개신교의 불을 끄고,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직접 선도할 때를 미리 내다보고 그 힘을 축소(縮小)시키고자 하여 우리 사회 안의 유대적인 배경이 개입(介入)되었을 것이라고 사려된다. 이런 조치가 사전에 취해졌기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가 주도하는 세계선교 기반은 처음부터 이상한 현상이 강하게 형성되고 교회 본연의 선교 중심의 선교가 진행되는 기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거짓으로 종교적 힘을 만들고자 했던 은사 중심의 현대교회적 기반이 결국 그로 인해서 무너진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현대의 특징은 인간의 조작(造作)에 의한 창조의 개념과 성취(成就)하고자 하는 작용(作用)의 개념이 교회 안에까지 몰아오는 거짓의 힘이 성경에서 실현된 초자연적인 배경들조차도 속임수로 몰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랬던 것이다. 순복음 교회 안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서서히 힘들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은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달라지고, 우리사회 TV 방영을 통해서 교회의 사기술이 일본으로부터 들어 왔다는 방송들이 다루어지면서 순복음도 이런 행각을 멈추었던 것이다. 이럴 무렵, 개인적으로 조목사는 우리 합동의 박형룡박사를 모시고 2년이 넘는 동안 조용히 조직신학을 배우는 과정을 가졌다. 그러면서 지금의 순복음교회 형태로 나아오는 과정의 변화가 주어졌다고 본다.
또 불행한 일은, 순복음 안의 이런 변천이 일어나면서 순복음 안의 조목사 아래 있었던 숱한 주먹패들이 역시 목회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신학교 과정들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이 또한 인간들의 인위적인 회심 몰이는 긍정적인 교회적 배경을 만들면서 거룩의 위치로 올려 놓는 의미부여를 가미(加味)시켰던 것이다.
순복음의 이적시대가 끝나기 시작하니 조목사 아래 형성되어 있던 한국 사회 조직패들의 조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공공연한 비밀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김태촌 주먹패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은 바는 이랬다.
전라도 주먹패들이 주로 순복음 조목사 밑에 많이 포진해 있었다. 물론 전국 주먹패들이 순복음의 조목사 아래 군집해 있었지만 그래도 단연코 가장 많았던 지역은 전라도 지역의 주먹패들이었다고 한다. 조양은, 김태촌 주먹패들이 모두 순복음 조목사 아래서 움직였다는 것이다. 조양은의 기독교 개종 이야기도 영화에서 그려졌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연관 관계를 적나라하게 나열하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복음 안에서 예배 중 나타났던 기적과 관계된 이야기였다.
조목사가 설교 중이나 기도 중에 일어나는 기적들은 정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자신들 주먹패들이 조작하여 사전에 작전대로 진행되는 거짓 병 고침 행위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각종 환자들로 내세우기 위해서 10일, 20일, 30일 굶도록 하거나 속임수로 팔과 다리를 못 쓰는 환자들로 만들어서 상세히 기록하여 강단에 올려주면 그것을 가지고 설교하고 기도하던 조목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 불러일으켜 세웠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진행되었던 것인가? 교회 안에 신비한 역사를 조작하여 성경 안에 예시(豫示)되어 있는 역사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거짓의 영이 지배하는 것과 같은 환경으로 내몰아 온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것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 유력한 자들은, 한국교회 안의 이와 같은 거짓부리기 현상을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자들이 한국교회를 향해서 비웃는 것이다.
이런 거짓 배경이 목회자들을 존중하는 사회적 배경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국가 행정 일선에 있는 불신자들이 이러한 내막을 너무나 잘 알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은사주의 놀음으로 몰아가니 교회 기반만 주저앉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선의 이름으로 악이 성행하는 형태이다. 이것이 얼마나 가식적으로 느껴지겠는가? 이것을 빨리 깨닫고 거짓 신앙의 형태와 형식적인 위선의 신앙 몰이에서 건전하고 바른 신앙으로 빨리 교회적 회복(恢復)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으로 들어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 기자들이 너무나 적라한 한국교회 거짓의 은밀한 부분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기자들의 눈에 그러한 한국교회의 속임수 배경을 알게 되었으니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공격을 가하는 붓 놀림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괜히 한국 언론협회가 개신교회를 집중 공격하는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최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의 인위적인 힘은 결국 한국교회 순전성을 무너트리는 반교회적 힘이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뿌리는 바로 가롯유다의 신앙노선으로부터 나온 현상이다. 더욱이 일본과 결합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영적 회복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조직과 정적 관계에 의거해서 여전히 조작의 기반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우리 사회 안의 교회 기반을 냉냉한 공기가 흐르게 해 놓은 것이다. 무엇하나 행사를 해도 진정성이 없고, 전혀 정성도 사모하는 은혜의 분위기도 없고, 대신 기계적인 분위기 조성에 따라서 노래 부르고 아멘하고, 형식적으로 행위를 잘하는 환경이 지배하는 교회적 기반이 되어 있다.
성령의 역사, 능력을 부르짖는데 실제로 역사는 없고 인위적으로 기계적으로 조작하려는 환경이 주도된다. 화려한 영상처리와 화면, 인간적인 열렬함의 몸짓, 무도, 감정적 희곡 스토리 전개, 혹은 간증 등의 주관적 경험주의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와 같은 현상으로 전락한 원인이 무엇인가? 교회 안에 이와 같은 형태가 어떻게 들어 온 것인가? 이는 신사도 운동의 일종이다. 또한 이 배경은 유대인들의 거짓 종교 행위가 그 뿌리이다.
오늘 현대 교회 안의 거짓의 힘은 크게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작용하는 사탄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중점으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어떻게 현대교회를 위협하고 몰아오는 힘의 근원(根源) 문제인지? 다루어 볼 필요가 있겠다. 함께 이 둘의 문제를 다루어 가다 보면 확실히 현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영적으로 규명하게 될 것이다.
먼저, 신사도운동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현재 미국과 영국에서 진행되어 오고 있는 빈야드나 신사도 운동과 결부해서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왜, 교회 안에 이러한 유혹들이 일어나는지 그 근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신비적이고 신령한 일들이 역사 되는 곳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처럼 거룩을 지향하는 세상 속의 특별한 기관이다. 세상 안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존재 한다. 하지만 교회의 신비와 신령성은 참되고 거룩하고 특별한 방편이다. 이는 교회를 이 지상에서 보존해가는 신령함이고 신비함이다. 이러한 요소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 적용되는 영적 배경이다. 그런데 세상 안에는 이와 비슷한 운동들 또한 가득 차 있다.
일반적으로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러한 신성함이 느껴질 수 있다. 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지으신 장소들이기 때문에 반영되는 신비함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와 같은 일반 차원의 신령함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또한 죄에 빠진 인간과 그 세계의 신비함은 혼돈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영성과 교회의 영적 배경은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바라는 신령함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든지 교회적 신령함과 사회적 신령함들이 섞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바람과 욕망에 의해서 합체되는 혼합적 배경이다. 여기에다가 현실 교회가 조직적으로 바라는 신비적인 문제이다.
이를 신앙 안에 들어온, 교회 안에 들어 온 인간적인 바램의 문제의 개입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 기반의 조직을 노리고서 들어오는 세속의 힘이다. 이와 같은 인간 바램의 열정들이 신비주의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상들을 가리켜서 중간지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자신들 이득을 위해서 만들어가는 종교성으로써 중간지대, 혹은 유사 기독교라 할 수 있는 신사도 운동과 같은 인간적 열정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동일화(同一化)이다. 본 신앙의 신비와 신령함을 인간적인 바램과 동일하게 하고자 하는 인간적 의지가 작용되는 신앙의 힘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종교적 바람을 몰아오고자 하는 인간적인 힘이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인 본 신앙조차도 변질시키는 힘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나타난 신사도 운동 정신이다. 사도들의 권위와 동일한 능력이 지금도 동일(同一)하게 역사 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존재는 그때와 지금도 동일하다는 전재가 이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의 존재와 능력, 역사는 그때나 지금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 다음이 중요한 문제이다. 동일하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이 행한 대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들과 동일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 설정하는 인간적인 바램이다.
이런 교회가 통용(通用)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모든 교회적 환경으로 그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러자면, 말로 그와 같은 붐을 조성하는 몰이를 했던 것이다. 매우 지능적으로 진행하는데 조직적으로 입을 맞추어서 진행해가는 것이다. 가령 예전 시대 약 장수들이 약을 판매 할 때 사전에 조직하고 입을 맞추어서 충분히 시물레이선을 한 다음 현장에서 실행하는 것과 똑같다. 이것이 오랫동안 성공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를 종교적으로 유린하고자 우리 사회에 대해 전혀 양심이나 애정이 없는 자들의 조직이 함께 움직였다는 것이다.
조직적으로 입에서 선전(宣傳) 선동(煽動)으로 전국적으로 몰아온 힘을 길러 왔던 것이다. 즉, 한국 기독교인들의 힘을 모으는 선전을 조직적으로 해온 것이다. 이것이 힘이 되게 하고자 성경대로! 말씀으로! 방언, 성령시대 등으로 몰아온 것이다. 다음 단계로 이것이 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입의 소리로 일으키는 속임수가 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병 고침의 속임수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세월의 길이만큼 힘이 되다 보니 영적 권위의 독점적인 위치를 올려놓으려 해 온 것이다. 이러한 한국 순복음의 경향의 영향력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빈야드의 신사도운동으로 제자들, 예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로 올려놓는 배경으로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금요기도회 등의 현상으로 전이되고 있다.
기도하는데 “홀링 다운” 현상이 일어나고, 방언 등의 괴상한 소리내기 등이 동일하게 진행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홀딩 다운”이 왜 그렇게 인위적으로 넘어지는가? 이러한 분위기가 신앙적으로 미약하고 수준이 낮고, 아직 판단력이 경지에 올라가 있지 못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홀리는 경향의 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끝나고 나면 다시 이상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이것은 미혹 된 신앙에 끌려서 살아가는 현대 신앙의 유형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본질이 사탄으로부터 오는 더러움의 경향성이다. 그럼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현대는 무서운 조직들이 움직이는데, 이것이 개신교 안에 은밀하게 들어와서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힘이 되고 있음이다. 우리는 보았다. 가문적으로, 학문적으로, 교양, 지적 수준으로 가장 문명화되어 있는 성도들이 집단적으로 속임수 집회 활동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사전에 입 맞추는데 동조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알파코스의 전형이다. 그런데 신사도 운동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그 영적 권위가 동일하다라고 전제 한 다음, 그것을 입증시키려고 인위적으로 조작을 가동하는 오늘의 교회적 환경이 주도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적 요소를 스스로 가미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고안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그럼, 이들이 이렇게 조장하면서 성경의 역사와 배경을 그대로 현대에 실현하고자 하는 그 힘의 배경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있었지 않느냐? 그리고 말씀이 그런 능력이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신사도 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는 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강조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동일하게 일어난다라고 강조하는 것에는 무조건 이들의 주장을 따를 수 없다. 조용히 우리의 일상에서 여러 가지 순간순간 크고 작은 사건들과 역사를 통해서 위로와 힘과 강한 믿음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은 얼마든지 느끼고 고백 된다. 하지만 주님의 사역처럼 초대교회 제자들을 통해서 진행된 기적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진행되었던 숱한 신비의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서 혹은 집회 중에 동일하게 역사 된다라고 주장하는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적이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에서 떠나지 않는가? 귀신 쫓음과 병 고침, 방언, 등은 신앙의 외적 증거이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능력을 주심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거 지금처럼 병원과 치료기술이 발전되지 않았던 인류사회였기에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했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병원이 전국적으로 널려 있는 시대이다. 육체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의 출현은 보편적으로 병을 치료하고 고치는 시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셔서 인간에게 치료의 은혜를 베푸심이나 병원을 통해서 치료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인간 세계를 과학적 발전 세계로 나아도록 인도하셔서 인간의 치료 문제가 보편적으로 적용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자신들에게 교회적 힘을 집중되게 하고자 하는 현대적 욕구가 교회의 신령성과 신비적인 요소를 과도하게 자신들 중심으로 만들고자 의미부여를 가하는 인위적인 배경이 속임수의 환경으로 내몰면서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과 동일하다라고 몰아가는 배경이 교회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교회적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교회 안에 일어나는가?
두 번 째 문제로써 유대인적 마술의 문제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리고 사도행전적 초대교회가 진행 될 때, 유대인들의 마술 행위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성경은 소개를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 최초 이단들도 이 마술과 그 연관성이 깊고, 이는 유대인 역사, 그리고 유대인들의 과학적 발견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 마술적 배경이 오늘 날 교회시대의 알파코스, 신사도 운동들을 비롯해서 이단들이나 신비주의 운동들의 근원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술객(術客), 술사(術士), 점술(占術), 마술(魔術) 등으로 소개를 해주고 있다. 이는 인류사회 안에 죄로 인해서 들어온 사악한 신비적 경향으로써 마(魔)의 본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이다. 이는 그 근원이 마귀에게서 시작 된 성질의 통칭(統稱)에서 여러 갈래로 나온 것이지만 그 경향성은 모두가 같은 기류(氣流)이다.
이는 세상을 속여서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 힘이다. 힘인데 파괴적 방향으로 몰아가는 성질로써 힘이다. 사람을 미혹하는 힘이고,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혼란의 힘이 주도되도록 하고, 더럽고, 엽기적이고, 조잡하게 하고, 공포스럽고, 현란하고, 복잡하도록 몰아가고, 위선과 속임수로 사람들의 혼을 빼버리는 힘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마술(魔術)은 마의 기술로 사람을 현란하게 하여 자신을 능력자로 하는데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 마술과 깊은 관계로 세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 왔는가? 세계 마술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면, 유대인들의 마술과 아라비안 마술로 구분되는데, 아라비안 마술은 지금에 이르러서 거의 사라지고 오직 유대인적 마술이 전세계에 널려 퍼져서 전해져오고 있다.
그럼, 유대인들과 마술은 어떻게 해서 시작 된 것인가? 마술은 중동의 고대 근동지역에서 전해지는 능력의 문제였다. 모세도 애굽 바로 왕의 궁전에서 지팡이로 뱀이 되게 했을 때, 애굽의 마술사들도 그 정도는 부릴 정도의 능력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마술을 자신들의 능력의 문제로 연결시킨 것은, 남북조 왕국이 무너지고 난 이후부터 선지자들이 사라지고 난 후부터였다고 유추(類推)된다. 선지서들의 기록에서 이에 대해 기술 해주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셨던 초림 때와 사도행전 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하며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잘못 된 방향으로 인도해가던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성경은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신 민족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던 유일한 특별 선민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말씀 해 주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선정하시고 보내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이 일을 잘 감당하고 대언하는 사역을 감당해 가시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이들은 모세, 엘리야 같은 능력의 선지자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특별한 선지자들이었고, 이들은 다른 일반 선지자들과 그 능력면에서 혁격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일반 선지자들은 주로 말로만 전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각인되어 졌고, 이 하나님의 참 된 선지자들의 활동이 있을 때의 이스라엘은 바른 길이 무엇인지 그 길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고 길을 잃은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자를 잃은 무리들의 방황이 시작되는 공간으로 들어 왔던 것이다. 이런 사회 안에는 반드시 굴절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가짜들이 등장하는, 가짜 지도자, 가짜 전문가, 가짜 선행가들의 출현이 일어나는 사회가 성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무너지는 교회 기반 안에도 동일한 현상이다. 성경은 이들을 거짓 선지자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적으로 성공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유혹의 힘이나 변화를 능히 물리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지루하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탐욕과 손을 잡고 만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일어나는 탐욕의 마음은 종교지도자로 성공하고 싶은 열정이다. 이것이 마술을 배워서, 침놓기, 태권도 같은 것을 배워서 그 힘으로 자신의 사역의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둔갑시키려 하는 오늘날의 열정과 같은 기류이다. 마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속이고자 하는 기술이 접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마술의 능력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하셨다”라고 속이는 능력 행사를 한 것이다.
회중들이나 군중들은 이런 점에서 그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본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그 올바른 정신과 힘이 불안전하다. 이것이 군중으로, 회중들 집회로 모이면 앞에서 인도하는 대로, 속이면 속이는 대로 동요하고 따르는 미혹의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군중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대중 선동가가 올라서서 몰면 모는 대로 금방 현혹된다는 것이다.
마술은 그렇게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고 동의하는 군중들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것이 때때로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미혹하여 몰아가는 거짓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한번 속임수에 걸려 든 군중들은 집단적으로 혼미한 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몰이가 너무나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현대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들어와 퍼져 있는 이단적인 대군중 몰이가 잘 통하는 사회성, 이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이다. 알파코스나 신사도운동 같은 배경이 우리 사회 안에 득세하기 시작하고, 성도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힘이 몰아가는 그와 같은 배경은, 바로 유대인적인 마술 현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거짓 된 능력으로 성경과 똑 같다. 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은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속임수의 미혹의 영이 우리 귀에 속삭이는 것이다.
물론 한국 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는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하여 이와 같은 거짓 된 힘에 완전히 함몰(陷沒)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불광동 순복음의 시대에서 여의도 순복음으로 이이지면서 변천되기 시작한 한국교회 시대는 은사주의 중심으로 교회 기반이 전환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운동을 전개해 온 은사주의자들이 신앙의 원리조차도 마음 놓고 자의적 해석을 가해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국교회 기반이 되어 있다. 이제 이들은 한국교회 기반을 장악했다고 웃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신앙의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이라 말할까? 엄청난 이적과 표적의 역사로 성령의 역사와 능력로 연결하는 교회 기반을 강하게 하는 배경, 하지만 이는 가롯유다적 신앙노선이었던 것이다. 왜, 가롯유적 신앙노선인지, 한국교회 기반의 변천이 이를 반영해주고 있음이다. 인위적으로 성령론을 몰아가는 조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현대교회 기반으로 나아오기 시작한 조직적 힘의 배경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병 고침과 각종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앉은뱅이, 귀 머거리, 문등 병자, 혈루증 환자 등등,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순복음은 진정한 교회요 주님의 역사가 살아 있는 참된 교회처럼 인정되면서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순복음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기류는, 점점 시간이 흐르는데 한국교회 기반이 형식과 거짓이 강해지고, 이중적인 위선자 유형의 신앙인들, 그러니까 너무나 위선자들, 거짓의 무리들, 물질에 노예가 된 거짓 된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많아지는 교회적 기반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강조되고 거행되는 모든 은사들이 너무 속임수와 거짓됨으로 조작의 경향성이 깊어졌던 것이다. 비밀이 통하는 기간에는 이런 내막을 아는 직접 관련 된 소수자들만 알고 있었던 은밀한 문제였다. 한국교회를 대상으로 오픈되는 배경은, 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잘 엮어서 마술 부리듯이 그렇게 진행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물질과 여성 편력(遍歷)과 같은 문제들이 갈수록 더러움으로 가득 차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짓의 배경을 우리 사회 방송의 공략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거짓 은사 문제가 드러나도록 하시면서 교회 기반을 우리 사회로부터 버림받도록 하는 심판을 가하신 것이다. 이런 거짓의 힘은 우리 한국교회 기반을 어떻게 거짓의 힘이 통용되는 공간으로 만들어 온 것인가?
어느 군인 장교의 고백이다. 서울 어느 지역 한 빠에 들어가면 그곳의 70% 정도가 목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이런 분별을 떠나서 한국교회 총회적으로 노회적으로 이런 빠에 들어 다니는 집단들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기 때문에 이분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부정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곳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돈을 많이 뿌리는 대상들도 목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러니 어떻게 교회 갈 수 있겠는가? 고백하더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누가 등장하면서 이처럼 깡패들이나 주먹패들이 회심이란 허울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 안에 심어지도록 했는가? 바로 오늘 현대적 교회 기반을 은사주의로 전환하여 재물을 추구하는 가롯유다 신앙 노선이다.
누가 이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목회 과정을 통해서 목회자들로 세워지도록 한 것인가? 한국교회 내에서 자신을 따르는 현재의 풍토를 누가 조성해 왔던 것인가? 누가 이들로 하여금 몇 해 지나면서 총회나 노회를 장악하도록 하여 더럽고 지저분한 정치 현장으로 내몰도록 하는 것인가?
인간적인 배경의 힘이다. 은밀하게 한국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거짓의 힘이다. 고도로 거짓과 속임수의 방법으로 들어와 현대교회를 주도하는 가롯유다적 신앙노선이다.
성경과 성령의 이름으로 강력한 역사로 붐을 가져 온 것처럼 그렇게 몰아 왔지만 그 배후에는 거짓의 힘이 작용 되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반대의 모습, 순전하지 않은 거짓의 교회 현실이 거룩한 모습으로 교회 안에 서는 가롯유다 신앙노선이다. 이는 그 뿌리가 성령의 역사로 되는 교회 현실이 아니라 가롯유다 신앙노선으로 진행되는 인간 거짓의 교회 현실이다.
이는 마술을 성령의 역사로 둔갑하는 고대 유대인적 거짓의 힘을 따르는 현대 가롯유다적 신앙 노선이다. 이 가롯유다 신앙노선은 바로 우리 한국교회를 노리고 은밀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적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일본이 우리 한국교회를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는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가롯유다적 신앙노선으로 만들고자 했고는 의미이다. 이를 60년 대 이후 우리 한국교회 기반 변천의 직접적인 이유로써 은사주의 배경이 깔리기 시작 한 것이다.
거짓 능력, 거짓 방언, 거짓 병고침 등으로 속임수의 이중 마음으로 주님과 대립을 했던 가롯유다적 신앙노선이 우리 한국교회 기반을 유린해 오고 있었던 주원인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현대와 인간을 중심하는 인본주의 경향이다.
한국교회 안의 인본주의 정신은 그냥 되어 진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부흥의 방식의 뿌리는 이제 우리 한국교회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이를 바꾸는 회복의 전환을 위해서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부터 부단한 영적 전투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이고, 선하며, 거룩하신 분으로써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참의 힘이 강하게 일어나며 신앙의 복원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게 해 달라고 우리 모두가 구하며 세계선교를 위하여 다시 일어서는 영적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다음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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