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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의거
마을 살림이 전보다 점점 더 어려워 허덕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물론 조준구의 과도한 수곡 강요에 있었고 희망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무기력해진 심리 상태에도 있었다. 마을 사람의 기색을 살피며 제법 온정을 베풀고 너그러이 행세했던 왕시 그 무렵은 조준구의 지반이 다져지기 이전이요 농사꾼이란 우마와 다를 것이 별로 없고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음이 분명하다는 따위의 말을 서슴지 않는 요즈음은 그의 지반이 그만큼 탄탄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조준구의 처사가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그의 자리는 공고해져서 대항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했지만 조준구는 조준구대로
"상놈들이란 원래 귀여워하면 강아지 모양 기어오르려고 하고 채찍을 들어야 일을 하게 되는 소와 같아서 심히 다루어야, 그래야 질서가 잡히는 법이니라."
지서방을 보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웃곤 했던 것이다. 최치수 생존시에는 그의 상민 혐오 - 정확히는 인간 혐오 - 에 대하여 세계 대세가 어떻느니 구습을 타파하고 인권을 존중해야 하느니 최치수가 치를 떨던 동학란조차 옹호하고 나선 조준구가, 하기는 그정도 말 몇마디 뒤집는 것쯤 조준구에게 뭐 대순가? 여반장이다. 하여튼 이곳 사정은 그렇다 치고 농촌 전반에 걸쳐 피폐하기로는 피장파장이었다. 거듭되는 학정에 민란, 그 악순환의 정점인 저 거대한 분화구 동학전쟁을 겪은 뒤 피곤한 농토와 농민은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을 뿐 눈부시게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에서 - 거의 주인 부재의 수렵장이었다 할지라도 - 망각된 존재였었고 농민들 스스로도 뜰안의 한 그루 과목에 세금을 붙이던 무서운 가렴주구에 과목을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와 같은 포기의 자학을 씹으며 가사상태로 도피한 시기,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은 일본제국으로 넘어갔고 실권자를 추종하는 새로운 세력군이 형성되는 혼돈 속에 권력과 동반하게 마련인 경제의 유동, 그 중에서도 후일 대다수 농민들이 피땀에 저린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뜨게 되는 악명 높은 착취 기관 동양척식회사 설립의 소지는 다져지고 있었다. 이런 대세에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면 아니 된다던, 고고하게 현실에서 몸을 사리던 선배들이 그러나 강의하게 일어선 항쟁은 물거품이었고 1907년에 들어서서 해아밀사사건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고종이 그나마 퇴이하는 비극과 훈련원에서의 조선 군대의 해산은 빈사의 목숨에 마지막 칼질이었다. 그로 인하여 참령 박승환은 자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무기고를 부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일군과의 처참한 교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 서울로 일 갔었던 윤보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뒷이야기는 연장망태도 버리고 거지꼴로 마을에 돌아온 것을 설명된다.
눈에 뚜렷이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윤보가 돌아온 뒤 분명 마을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럴싸 싶어 그랬는지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소 말마디나 한다는 장정들의 눈이 희번덕이는 것 같았고 윗마을과의 내왕이 어쩐지 잦은 듯싶었고 술을 마시거나 낚시질로 소일하는 윤보 모습이 이따금 마을에서 없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여느때 같으면 그것은 다 심상한 일이련만 마을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태가 급변하는 피비린내 나는 것을.
길상이를 제외한 최참판댁, 조준구 내외를 위시한 최참판댁 사람들만이 마을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러한 마을의 동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뭐니 해도 주막이다. 흔히 살림 이룩하는 집안에서는 그만큼 모든 것을 절용하기 때문에 하인살이가 어렵다는 것이요, 살림 빠지는 집안은 기왕 망하는 살림, 하고 쓰임새가 헤퍼지는 데서 하인살이가 편하다고들 하는데 마을도 그런 형세라고나할까. 전보다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만 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주막에 술꾼들이 그칠 새 없이 끓는다. 들끓는다고 해서 반드시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 망하는 판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주머니를 끄르며 술을 청하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자포자기한 심사와 더불어 거침없는 말들이 오고가고, 차츰 마을 공론 장소 비슷하게 발전된 것도 사실이다. 답답하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하고 어쩔 수 없이 주막을 찾아온다. 영산댁은 술을 안 하는 사람을 냉대한 일이 없고 입이 촉빠른 사람이면 반기는 터이어서 어느덧 그 자신 마을 공론에 한몫을 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중늙은이, 이름만의 남편도 발걸음을 끊어버린 외로운 여자, 오늘도 농부들은 술판에 술 한잔씩을 놓아두고 예외 없이 공론인지 한탄인지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못 산다. 무신 팔랑개비 재줄 지닜다고 살겄나?"
윗마을의 윤서방이다.
"못 살믄 죽기밖에 더 하까."
같은 윗마을의 배서방이었다.
"까놓고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가 머심살이보다 나을 기이 기가 있노. 아, 남의 집에 머심이라도 산다믄 새경은 꼬박꼬박 안 나오겄나? 이놈으 새가 빠지게 농살 지어봐야 뽀닷이 입치레, 등은 머로 가리고 덮노 말이다. 찬물 떠놓고 코방아나 찧는다믄 모르까 제사고 혼사고."
"코방아만 찧으라모."
"엄두도 못 낼 일이제. 그러니 도지빚이고 장리빚이고 안 낼 재주가 있나 말이다. 나중에사 가랭이가 찢어지든지."
"흥, 나올 기이 없는데 빚 줄 사람은 어디 있고?"
"입치레도 시절 좋을 때 얘기고 숭년이나 들어보제. 숭년 들었이니께 수는 물시하자, 그것도 옛날 고릿적 마님 살아 기실 때 얘기고."
"문서에다가 지장을 딱 찍었이니께 숭년 아니라 송장이 나간다 캐도."
두 사람의 얘기 듣고 있던 영팔이
"옛날에는 없었던 새 법이 생깄는가. 조상 대대로 그런 문서 없이도 아무 탈 없이 땅을 부칬는데."
혼잣말같이 뇐다. 그새 밖에 영산댁이 고추장 뚝배기를 들고 들어온다.
"새 법? 그기이 조참판네 법 아니가. 요새 도장 찍는 기이 시풍인 모양인데 나라를 팔아묵을 적에도 다섯 놈이 들어서 도장을 찍었다카고 그놈들은 백성들 허락 없이 도적질해서 팔아묵을 기지마는 우리네사 내 몸뚱아리 팔아묵었는 기라. 몸뚱아리 팔아묵은 기나 진배없지. 문서에다가 한분 약정을 했이믄 나라도 고만인데 이내 겉은 불쌍한 농사치기."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옹그러진다."
영산댁이 핀잔을 준다.
"아무튼지간에 꼼짝 못하게 생겼는 기라. 약정된 수를 못 내믄은 곡가를 따지서 돈으로 내야 하고 그것도 못 내믄은 장리빚 이자가 또 장리빚이 되고 또 되고 또 되고 눈사람이 되고 그, 그러고는 자손 만대까지 빚을 안고 넘어가는 기라."
"그러매 일이 그쯤 되얐이믄 한분 버투어볼 일이제. 날름허니 지장은 찍어놓고 와 생배를 앓는다요?"
"영산댁 겉으믄 안 찍었일 기든가? 내 혼자 무신 재주로 버텨 보노. 태산 겉은 바우를 작대기 하나 가지고 고울 기든가."
"남정네들이 모도 단이 없어 그러아우."
"이제는 늦었제. 그때 그만, 그 숭년 때 그만 뽀사아부리는 긴데."
"윤서방"
"와요."
"여기 누가 있는가 잘 보고 말허랑께? 참말로 염치도 좋소."
윤서방은 영팔이를 힐끔 쳐다본다.
"그때 고방 때리부실 때는 윤서방 어디 갔더랑가?"
"허허, 오금박는구마. 그때야 어디 누가 이리 될 줄 알았던가."
"물은 건네봐야 깊이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그러고 하나를 보믄 열을 안다 허지 않더라도 남의 살림 덮치는 인사가 작인들 헌티 인심 쓸 것이요? 임꺽정이라믄 모를까."
"이자는 벨수없구마. 벼락이나 한분 믿어보는 수밖에"
"머 지금도 늦다고만 할 수도 없일 기구마."
천천히 말하는 영팔의 얼굴에 세 사람의 눈이 일시에 쏠린다. 그러더니 뭔가 네 사람 사이에 양해된 것이라도 있는 듯, 다음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다.
"윤보가 김훈장댁에 가서 대판으로 쌈을 했다 카는데 와 그랬이꼬?"
배서방이 영팔의 얼굴을 숨어 보며 나직하게 입을 떼었다. 영팔이는 말이 없고 대신 영산댁이
"의논이 맞아서 자주 드나든다고 안 합디어? 헌데 무신 쌈이랑가?"
"머 들리는 말로는 내가 어찌 화적떼로 떨어질까부냐, 함시로 김훈장이 소리를 쳤다 카고 윤보는 자기 일신만 중히 여기는 양반님네 때문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느냐, 체멘이 있지 굿 뒤 날장구라도 쳐야지 않겄느냐 했다누마."
"그 말은 맞는 말 아니간디? 하모니라우. 굿 뒤 날장구라도 쳐야제."
이때 새로운 술꾼이 들어왔다. 두만아비다. 어색하고 불안스런 눈이 주막 안의 분위기를 살피는데 그들도 어색한 침묵을 지킨다.
"제에기! 그만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어부맀이믄 좋겄다! 영산댁 술 한잔 더 주소."
윤서방이 역시 어색하게 침묵을 깬다.
"그라믄 세상만사 끝장이지 머."
술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만아비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윤서방 말에 참견했다.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기는 하나 그의 사람됨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두만아비 역시 따돌림을 당한다고 자기 생활이 불편한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돌아온 윤보 거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은 어릴 때부터 윤보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강했다. 만일 어떤 사태에 직면한다면 자기 처신이 참으로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아는 때문에 마을 공기에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주막에 나타나는 것도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영팔아."
술잔을 받아가고 오랜 동안 잠자코 앉아 있던 두만아비가 불렀다.
"야."
"한조 소식 듣나?"
"읍내서 진주로 갔다 카더마는 그 뒤 일은 모르겄소."
"처가에 갔구마."
"그렇겄지요. 장사 밑천이나 얻을 양으로, 아니믄 어디 땅뙈기 얻을 곳이나 있일까 싶어 갔겄지요."
"그기이 어디 쉽겄나."
"그러기 말이요."
다시 묘한 침묵이 계속된다.
"아무튼지간에 까놓고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가 머심살이보다 나을 기이 조금도 없고."
윤서방이 목청을 다듬고 기껏 화제를 만들어낸다는 게 아까 하던 말의 되풀이다.
"그라믄 머심살이 하로 가라모."
배서방의 시큰둥한 대꾸.
"아 남으 집 머심이라도 산다믄 새경은 꼬박꼬박 나오지 않겄나. 하, 하모 새경이사.... 이눔으 뼈가 빠지기 농살 지어봐야."
"잔소리할 거 없이 머심 살로 가라 안 카나. 누가 잡는 사램이라도 있다 말가."
"그눔으 원시, 식구들만 없다믄야 내가 이라고 있이까? 벌써 떠났제."
"그는 그런디 최참판네 곱새도령이 아파 죽게 생깄는디. 말 들은게로 왜귀신이 붙었다누마 얼매 전에 왜나막신 신은 왜놈하고 큰칼 찬 읍내 별순사 대장놈이 왔다 가지않았던개비여?"
"그눔으 왜구신, 집은 자알 찾았구마."
"아암, 잘 찾았지. 왜놈한테 빌붙은 집안이라야 물밥이라도 얻어묵제."
막걸리 한잔에 짠김치 한조각을 와삭와삭 씹어먹은 뒤 두만아비는 일어서며 묻는다.
"영팔이는 장에 안 갈 기가."
"장에 갈 일도 없고, 집에나 가야겄소."
"우떤 사람은 장에로 다 가노. 우리사 장길도 잊어부맀다. 참말로 이팽이 봉기한테는 시절이 좋고나."
깊은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배서방은 비꼰다.
"백석지기가 이백석지기가. 비양치고 저브믄 얼매든지 쳐라. 백석지기나 되었이믄, 너희들 심보 밤에 와서 불지르겄다."
두만아비는 몹시 언짢아한다.
"기왕에 불지를 양이믄 만석지기지 그까짓 백석지기 머할라꼬."
뒤통수에 배서방 말이 날아간다. 장에 간 두만아비는 어물전 앞에서 선이 시아버지 장서방을 만났다.
"사돈 장에 왔소?"
두만아비가 먼저 알은 체한다. 장갱이의 불룩한 배를 쿡쿡 찔러 보고 있던 장서방은 장대한 몸을 돌렸다. 머슴아이가 지게 멜빵을 잡으며 장서방 옆에서 조금 물러선다. 젊을 때는 남의 고지기 노릇을 했으나 지금은 장배를 두 척이나 부리게 된 처지, 신수도 좋고 머슴아이까지 거느리고 장에 나온 모양이다.
"사돈이요?"
입술은 수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담뱃진에 전 들쭉날쭉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머슴아이가 지고 있는 바지게에 생선 비늘이 묻은 손을 쓱쓱 문지른 장서방은
"집안은 모두 평안하요?"
"예, 사부인께선 편안하시고요?"
두만아비와 장서방은 장바닥에 서서 새삼스럽게 맞절을 한다.
"제사 장을 보러 왔더니."
하다가 장서방은 비뚤어진 갓전을 바로잡는다.
"괴기가 물이 나빠서 못 쓰겄구마."
"참 그렇지요. 이맘때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두만아비는 헛기침을 한다. 완연한 가을철이어서 바람은 쌀쌀한데 두만아비의 동저고릿바람의 모습은 초라하다.
"아아들 조모 기일 아니요, 그라고 참 서울서는 소식이 왔다 카지요."
"예. 잘 있다 캅니다. 젊은놈이사 머."
"장은 다 보았소?"
"예. 죽물전에서 이거 하나 샀십니다. 아수바서."
두만아비는 보리쌀 바구니와 갈구리를 쳐들어 보인다.
"이리 만냈이니 그냥 갈릴 것이 아니라 한잔씩 안 할라요?"
"제사 장은 우쩌시고."
두만아비는 제 주머니 속을 따져보며 불안하게 말했다.
"아따, 해가 저기 반공중에 떴는데 무신 걱정이요."
장서방은 내켜하지 않는 두만아비의 팔을 끌고 가다가 돌아본다.
"이눔아야, 니 거기서 꼼짝 마라. 내 올때까지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이."
"야."
비리갱이처럼 여윈 머슴아이는 시투룸해서 대꾸한다.
"만물이 다 비상 값이라. 조상 물 떠놓기도 어럽기 되고, 세상이나 편하다믄 그래도 좋겄는데."
장서방 말을 귓전에 흘리며 두만아비는 주머니돈 셈을 한다. '말을 안 들었이믄 몰라도 알믄서 괴기 한 마리 안 사줄 수도 없고, 술은 사돈이 먼지 말했으니께 술값이사 낼 기다마는.... 딸 준 죄인이더라고 자반괴기는 한 마리 사서 지게에 올리주어얄 긴데, 눈 밝은 기이 탈이라. 그만 못 본 척 지나가부리는 긴데.' 두만아비는 장서방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도 마시는 시늉만 하다가 일어섰다. 다시 함께 장으로 들어간 두만아비는 어물전을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흑도미 한 마리를 샀다. 비싼 생선은 아니지만 그러나 명색이 도미였으니까. 사양하는 머슴아이가 짊어진 바지게 위에 올려주고 발길을 돌린 두만아비는 거의 장터를 다 벗어났을 무렵 무슨 까닭인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급히 되돌아간다. 그때까지 장터를 서성대고 있던 장서방을 찾은 두만아비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을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장서방은
"걱정 말고 그렇기 하소. 하모, 집안이 편해야지."
이틀 후 나룻배를 타는 두만아비와 영만이를 본 뒤 마을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그들의 모습을 마을에서 보지 못하였다.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부자가 집을 비우는 일이라고 마을 사람들 기억에는 일찍이 없었다.
"아지마씨, 이팽이 어디 갔십니까?"
윤보는 일부러 찾아온 모양이다.
"저, 사돈댁에."
윤보를 보는 순간부터 당황한 두만네는 보기에 민망스러울 지경으로 안절부절이다.
"사돈댁에요. 머하로 갔는고요?"
윤보의 얼굴은 험악하다.
"새, 생신이고 또 두만이 따문에 의논 좀 하, 할라꼬."
"두만이사 서울 안 있소."
".... "
"장서방이 두만이 데리와서 장배라도 한 채 모울라 캅디까."
"아, 아니요, 무신."
"하기사 배 모는 목수, 집 짓는 목수 따로 있이니께."
"어, 어린기이 아직이사 무신."
심술 사납게 놀리려 드는 윤보에게 고지식한 대꾸를 하는 두만네는 거의 울상이다.
"마 좋소. 이러나저러나.... 한데 집이 허술컸소."
"....?"
"아지마씨 혼자니께 말이오. 요새겉이 분분한 세상에 무신 일이 일어날 지 뉘 알겄소?"
울상이던 두만네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마 좋소. 이팽이 그놈 생각 잘했일 기요. 아지마씨, 나 물 한그릇 주소."
물 한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윤보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돌아선다. 그리고 간다온다 말 없이 삽짝을 나서는 것이다. '생각 잘했제. 이팽이놈.... 번갯불에 콩 꾸워묵을 놈. 하기야 답답한 놈이 새미 파더라고 지가 멋이 답답해서.... 머, 일 그르칠 놈은 아닌께. 동네가 잠잠해지기까지 피해 있자는 기지. 약아빠진 놈!"
"보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윤보
"나 불렀나?"
"야."
삼수다.
"와."
"좀 할말이 있어서."
태연했으나 윤보의 눈길을 긴장한다. 삼수는 여느 때와 달리 수굿한 얼굴이다.
"최참판네 하인놈이 나한테 무신 할말이 있이꼬?"
하면서 윤보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삼수는 잠자코 윤보를 뒤따라 걷는다. 언덕을 올라 외딴 윤보의 집앞에까지 와서
"니 와 따라오노?"
삼수의 얼굴은 여전히 수굿하다. 윤보는 돌연 몸을 돌리며 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저어."
"...."
"저어, 오늘은 속마음을 탁 털어놓을라꼬요."
"와? 누구 사람이라도 직있단 말가? 카더라도 내사 판관은 아니구마."
"그런 기이 아니고.... 나도 사램인데 우찌 내 잘못을 모르겄십니까."
"흐음?"
"조가네 편역이 되어서 최참판댁 은공을 잊어부린 천하에 직일 놈, 모두 그렇기 말하고 있소."
"니 선잠을 깼나? 나는 곰보목수지 최참판네 사돈팔촌도 아니고 최참판네 조상 구신도 아닌데 무신 잠꼬대고."
"최참판댁 은공을 잊은 것도 그렇지마는 동네 사람들한테도 몹시 했고."
"그렇다믄 새는 날에 동네 사람 모아놓고 빌 일이제. 나야 땅 한치 없는 떠돌인데 아무 상관 없구마."
"하여간에 내 얘기나 좀 들어보소. 세상에 못 믿을 거는 양반놈들이요. 속절없이 속았단 말이요. 그럴싸한 말로 사람으 마음을, 하기는 다 내가 못나서 한 짓이기는 하요마는 나 혼자만 직일 놈이 되고, 지내놓고 보니 억울한 생각이 드요. 하여간에 지 말 조 들어보소."
삼수는 꽤 자세히 그간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결국 다 아는 일, 삼월이 일부터 응당 자기가 차지했어야 할 자리를 서울서 온 지가놈이 대신하여 그나마 자기를 괄시한다는 그런 얘기다.
"부레풀도 풀이더라고 낸들 오기 없겄소? 남보다 더했이믄 더했지. 내 조가놈 망하는 꼴 보고 말겄다 그 말이요."
윤보는 결코 삼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거 그 양반이 잘못하긴 잘못했구마. 그래도 강약이 부동인데 우짜노. 머 요새야 노비 문서 겉은 거는 아무 소앵이 없는 기니께, 그렇다믄 떠나는 기이 우떻노? 나 따라댕기믄서 대목일이나 배울라나? 따른 식구 없는 홀몸이고 보믄."
윤보는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뗀다.
"머, 내 살 길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요?"
"그라믄 우짜자는 기고."
"원수를 갚겄다 그거요."
"우떻게?"
"못 묵는 밥에 재 뿌리겄다 그 말이요."
"흠, 그래?"
"그래서."
"아아, 아."
윤보는 손을 내젓는다.
"아무리 이 윤보가 남으 일을 잘 봐주기로, 거 송장 치다꺼리라믄 모르까 못 묵는 밥에 재 뿌리는 일에 동사할 수야 있나. 여포 창날 겉은 삼수 혼자라도 넉넉할 긴데 나보고 말할 거 없다."
"그런 소리 마소. 나도 밥 묵고 사는 놈인데 그만저만한 눈치는 다 있단 말이요."
"머?"
"요즘 시수가 우찌 돌아가는지 그것쯤은 나도 안다 그 말이요. 그 작년에 나라 뺏깄다고 해서 김훈장이 일을 꾸밀라 캤는데 그기이 안 되니께 전라돈가 어딘가 의병 일으킨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때 말을 해쌌거든요. 곰보목수가 있었이믄 일이 됐일 기라꼬. 듣자니께 이분에도 서울서 쌈이 있었다 카고 곰보목수는 이러크름 돌아왔고, 모두 소문이 한판 칠 기라꼬."
"머? 한판 칠 기라꼬? 으허허헛헛, 윤보 시세 나가는고나. 으허허헛, 으흐허허핫핫.... "
걸쭉한 웃음이 계속해 나온다.
"아무리 그리 시치미를 떼싸아도 알 만치는 나도 알고 있이니께요. 머 내가 훼방을 놓자고 찾아온 것도 아니겄고,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어서 온 긴데 너무 그러지 마소. 한마디로 딱 짤라서 말하겄소. 왜눔들하고 한통속인 조가놈들은 먼지 치고 시작하라 그 말이요. 고방에는 곡식이 썩을 만큼 쌓여 있고 안팎으로 쌓인 기이 재물인데 큰일을 하자 카믄 빈손으로 우찌 하겄소. 그러니 왜눔과 한통속인 조가부터 치고 보믄 꿩 묵고 알 묵는 거 아니겄소."
"야아가 참 제정신이 아니구마는."
"하기사 전력이 있이니께 나를 믿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겄소. 하지마는 두고보믄 알 거 아니요?"
"야, 야 정신 산란하다. 나는 원체 입이 무겁고 또 초록은 동색이더라고 내 안 들은 거로 해둘 기니 어서 돌아가거라. 공연히 신세망칠라."
윤보는 삼수 등을 민다.
"이거 놓으소. 누가 안 가까바 이러요? 지내놓고 보믄 알 기니께요. 내가 머 염탐이라도 하로 온 줄 아요? 흥, 그랬을 양이믄 벌써 조가놈한테 동네 소문 고해바칬일 기고 읍내서 순사가 와도 몇 놈 왔일 거 아니요."
큰소리로 지껄이며 삼수는 언덕을 내려간다. '빌어묵을, 이거 다 된 죽에 코 빠지는 거 아닌지 모르겄네. 날을 다가야겄다.' 삼수가 왔다간 다음 날 밤, 자정이 넘었다. 칠흑의 밤을 타고 덩어리 같은 침묵을 지키며 타작마당에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에서는 개들이 짖는다. 불은 켜지 않았지만 집집에선 인적기가 난다. 언덕 위의 최참판댁은 어둠에 묻혀 위엄에 찬 그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타작마당에서는 윤보의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얕게 울리고, 이윽고 횃불이 한 개 두 개 또 세 개, 계속하여 늘어나고 그 횃불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집앞에 나서서 횃불이 가는 곳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은 김훈장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라 캤십니까. 화적떼 겉은 소행이라 말심하싰니까? 그라믄 묻겄심다. 서울서 우리 군사가 무기고를 부싰고 왜군하고 쌈질한 거는 멉니까? 그것도 화적떼 겉은 소행입니까? 하기는 왜놈들이 우리 의병들을 폭도라 칸다 캅디다마는.'
곰보 얼굴이 김훈장 눈앞에 어른거린다.
'양반님네들, 날장구라도 치야 할 거 아닙니까! 굿 뒤에 날장구라도 치야 할 것 아닙니까! 체멘하고 염치를 목심보다 중히 여기는 양반님네, 나라 뺏긴 거는 안 부끄럽고 왜놈한테 빌붙은 역적눔 목베자는 거는 부끄럽다 그 말심입니까?'
곰보 얼굴에 경련이 인다.
'최참판네 만석 살림을 누가 묵었거나 그거야 우리가 있이니께 농사꾼들한테는 전연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겄지만, 지금 이 마당에서 사람으 도리가 우떻고 하는 거를 따질 여가가 없고요, 그 동안 행악이 많았다고 그 자를 치자는 거는 아니지 않십니까. 그런 거야 민란 때의 멩분일 기고, 하기는 농사꾼들 처지로서는 모두 나겉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리는 기 태반이고 보믄 객리 바램이라도 쏘이서 남으 소리라도 많이 들었다믄 모르까. 나라 헹펜이 이러저러하다 해봐야, 그보다는 지금 살기가 어럽기 돼 있고 악에 치받힌께 그자를 치자카믄 모도 일어서게 돼 있지요. 그러나 지금 양반 상민, 있는 놈 없는 놈, 백성하고 관가, 그런 쌈은 아닌 기라요. 다만 그자를 치자는 거는 딱 두 가지 까닭이 있일 뿐인데, 그 하나는 그자가 시적 왜나막신이라고 끌고 낭로 만큼 왜놈들 편에 빌붙어서 자개 영화만 생각는 역적인께 이차에 목을 쳐서 뽄뵈기로 삼자는 거요 다른 하나는 누구 재물이든간에 고방에 썩고 있는 거를 우리 의병이 써야겄다 그겁니다. 쌈이란 크나 작으나 배고파도 못하고 빈주먹으로도 못하니께, 동네 사람 인심이 딱 일하기 좋게 돼 있고 그 동안 일이 되거시리 다 꾸미놨이니께, 임실 순창에는 의병들이 모이 있고 우리가 가믄 합세하게 딱 그리 돼 있다 그 말심이요. 머 이런 일을 경영한다고 해서 잃은 나라를 당장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겄고 왜군이 물러설 기라는 생각도 없십니다만 부모가가 돌아가시도 곡을 하는 법인데 나라가 죽은 거나 진배없니, 자겔을 하는 것도 충절이겄지마는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보는 기이 지금은 도리가 아니겄십니까. 이분에 우리 군사들도 이길 기다, 살아남을 기다 하는 생각으로 왜군하고 대적한 거는 아니니께요.'
이제는 지나가는 횃불도 없다. 어둠이 있을 뿐이다. 김훈장은 돌부처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선택은 끝난 뒤다. 화적떼같은 소행이라고 끝내 노여워하고 반대했던 일은 지금 저질러지고 있다. 그러나 김훈장은 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신주와 손자를 안겨 아들 내외를 산천 사돈댁으로 떠나보냄으로써 김훈장은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지난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 내외에게 어떻게 하든 명 보전하여 절손의 불효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김훈장은 잊지 않았다.
이 무렵, 낫 도끼 쇠스랑 대창 등 각기 연장을 들고 최참판댁을 둘러싼 마을 장정들은 삼수가 열어주는 대문 안으로 왈칵 쏠리며 들이닥쳤다. 그 중 몇 사람이 삼수를 보고 으르렁거린다.
"그눔으 자석, 알고도 발설 안 한 거를 본께 우리 편역이다! 전사야 우찌 되었던 직이지 마라!"
하고 윤보가 소리친다. 몇 패로 갈라진 사람들, 그 중 한 패거리는 사랑을 덮쳤다. 그러나 조준구는 없었다. 안방을 덮친 사람들도 홍씨를 못 찾는다.
"멀리 안 갔일 기다! 샅샅이 뒤지라!"
한 패거리는 도망치려는 하인들 계집종을 모조리 도장에 가두고 지서방만을 끌어내어 뒤꼍으로 끌고 가 대창으로 찔러 죽였고, 한편에서는 미리 끌어다놓은 소달구지 다섯 틀, 이 중 하나는 두만네것이었고 최참판댁 소며 말이며 밖으로 끌어내어 곡식 피륙 온갖 물품, 안방 장롱을 엎고 다락을 쓸고 해서 쏟아놓은 패물 은전 지폐, 닥치는 대로 날라다 싣는 판이었다. 일사불란하고 재빠르고 군소리 없는 팽팽하게 긴장된 시각, 시각이 흐른다. 처음 조준구를 찾는 무리에 끼여들었던 길상은 안방 사랑을 뛰면서 혈안이 되어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토지 문서였다. 별당에서는 아침에 길상으로부터 밤에 일어날 사태 얘기를 들은 서희와 봉순이 등잔 불을 켜고 앉아 있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봉순이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고 서희는 조준구 내외의 죽음을 각일각 기다리는 긴장으로 하여 떨고 있다.
"용아! 짐을 실었이믄 어서 떠라라."
윤보 명령에 달구지는 움직인다.
"형님! 아무리 찾아도 없소!"
장정 하나가 쫓아와서 보고를 한다.
"멀리는 안 갔일 기다!"
윤보는 뒤채 쪽으로 돌아간다. 뒤채 뜨락 횃불 아래 병수는 꿇어 앉아 있었다.
"삼수놈이 귀띔을 한 거 아니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벼, 벼락맞일 소리!"
윤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치는 삼수를 바라본다.
"그, 그럴 양이믄 와 미리 쳐들어올 것 기다릴 것도 없었제!"
신변에 위기를 느낀 삼수는 다시 소리를 지른다.
"목수 아제요! 그, 그라믄 뒷산으로 찾아가보까요?"
윗마을 관수가 작은 눈을 초조하게 굴리며 말했다. 이제 조준구 내외는 증오의 대상도 아니요 보복의 대상도 아니다. 일을 저질렀으니 후환을 두려워하는, 다만 그 일념이 조준구 내외의 죽음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냉정히 따져보면 마을을 뜨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남을 가족들에게 화가 미칠 것도 기정 사실이다. 함에도 조준구 내외만 없어져버리면 적어도 가족들은 화를 면할 것 같았고 살림이 서희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장차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것은 그러나 일을 저지른 이 마당에서는 너무나 가냘픈 기대인 것이다.
"그럴 시각이 없다! 이 칠흑 같은 밤에 집안에서 찾아라. 못 찾으믄 할 수 없는 기다."
윤보 말에 모든 얼굴들이 굳어진다.
"한시바삐 떠나는 게 멋보다. 시급하제. 느적거리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어, 찾아라!"
"이 꼽새는 우짜꼬요?"
"그 벵신을 머하구로? 내비리두고 사당 있는 대숲 쪽을 뒤지라!"
"그라믄 삼수가 앞장서라! 니가 잘 알 기니께."
따줄이 삼수를 떠민다.
"어럽잖은 일이구마."
횃불을 든 장정이 삼수 뒤를 따르고 삼사 명이 또 따른다. '이 눔으 새끼들이 전자의 내 일을 잊지 않고, 윤보 아니믄 날 직이기라도 할 기세 아니가?' 대숲 쪽으로 가면서 삼수는 생각한다. '이렇기 되믄 나는 머가 되제? 오도가도 못하고 음.... 맞다! 오 옳지! 하하, 와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대숲 속의 오솔길을 횃불과 횃불에 비쳐서 검붉게 번들거리는 장정들의 얼굴이 간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간다.
"사당 안을 보자!"
사당 문을 삼수가 연다. 그의 눈이 마룻장으로 간다. 삼수가 먼저 들어섰고 몇 사람이 따랐다. 구석구석 살펴본다.
"여기는 없다!"
"그라믄 나뉘져서 대숲을 샅샅이 찾자!"
대숲 속으로 흩어지고 횃불은 별당 후원 쪽으로 간다. 흩어지면서 장정들은 삼수의 존재를 잊는다. 이때를 타서 되돌아온 삼수는 사당 안으로 기어간다. 마룻바닥에 엎드린다.
"나으리, 나으리."
아무 소리가 없다. 삼수는 마룻바닥에 귀를 바싹 붙인다.
"나으리, 소인 삼수올시다! 저놈들이 대숲 속을 뒤지고 있심다."
".... "
"나으리! 이러크름 믿지 않으시믄 소인도 맴이 달라질 기니께 대답하시이소. 지금 당장 말 한마디믄 이 세상하고 마지맥이 될 기니께요."
협박이다.
"나, 나, 나."
겨우 마룻장 밑에서 소리가 났다.
"기심서 그러시오. 이자 아싰지요? 삼수놈이 그래도 나으리한테는 쓸모가 있는 놈이라는 것을 우짜겄십니까. 이자는 이놈한테 한몫을 주시는 기지요?"
"주, 주고말고. 제 제발 사, 살려주게."
"예. 언약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기이 이 삼수놈 손에 매 있이니께요. 지서방도 횃바람에 찔러 직있이니께 나으리한테도 가차가 없일겁니다."
삼수는 어둠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띠며 사당을 빠져나온다. 조준구를 찾아 미친 듯이 쏘 다니는 무리에 얼렁뚱땅 끼여든다. 삼수가 사당 마룻장 밑을 생각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준구가 토지 문서를 사당 마룻장을 뜯고 그 밑에 감춘 것을 삼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준구는 우연히 소피를 보러 나갔다가 횃불이 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홍씨를 끌고 사당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최참판댁을 습격한 윗마을 아랫마을 그리고 윤보가 맥을 통해놓은 근동에서 온 장정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져 차례차례 떠났다. 조준구를 못 찾는다 해서 윤보는 애초 계획을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벽까지 남은 사람은 윤보와 길상이 이외 몇 명이었다. 조준구를 찾기 위해서지만 한편 먼저 떠난 사람과 짐이 정해진 장소까지 당도하기까지 최참판댁의 외부와의 연락을 끊어놓자 하는 데 중점을 둔 잔류였다.
결국 조준구 내외를 못 찾고 윤보 일행은 어둠이 걷혀지려 할 무렵 겨우 떠났는데 그 무리에 김훈장이 따랐고 먼저 떠난 무리에 끼여들었던 삼수는 빠져나와 숲속에 숨어 있다가 해가 뜰 무렵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