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백제 때부터 조성돼 내려온 전통마을 '돌마리'이다. 돌이 유난히 많아서 '돌마리' 돌마을이라고 했다고 한다.
송파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원래 모래와 진흙이 많은 지역이었다.언제부터인가 돌무지 무덤 적석총이 많이 들어서면서
'돌마리' 석촌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동네에 널리 흩어져 있는 돌을 주어다 주민들은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삼전도에서 헌릉까지 탄천가에 주둔하면서 이곳 돌로 주둔지를 조성했다.
그래서 이곳을 '진터'로 부르기도 했다.돌무지 무덤 5개가 산봉우리처럼 봉긋이 솟았다.그래서 오봉(五峰)으로 불렀다.
일제 때 경기도에서 조사한 결과 이 돌마리에는 89기의 돌무지 적석총이 몰려 있었다.
초기 백제시대의 지배층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단순히 옛 무덤을 뜻하는 고분(古墳)으로 낮춰 불렀다.
바로 석촌동 고분(石村洞 古墳)으로 부르고 있다.돌마리 국립현충원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돌마리 백제국립묘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적석총이다. 기단식돌무지무덤(基壇式積石塚)이다.
사적 제243호이다.이 왕릉을 그저 3호분(墳)이라고 부르고 있다.보통 왕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때
총(塚)이라고 한다.그래서 이 왕릉은 적석총(積石塚)이라고 힌다.
무덤은 북방식과 남방식이 아주 다르다.북방식은 천손(天孫) 사상을 담고있다.
하늘의 자손임을 믿고있는 북방민들은 높은 돌무지를 쌓고 하늘과 가까운 그 계단 꼭대기에 시신을 모셨다.
이 적석총은 먼저 정리 작업을 한 후 진흙을 깔아 다지고 지대석을 놓은 외곽부에는 돌을 깔았다.
그 위에는 장대석을 기선분에 한 줄로 배치시키고 이 기단석렬 내부로는 역석을 쓰지 않고 비교적 납작한 활석을
쓰고 있다. 이렇게 1단을 쌓고 90cm쯤 올린 다음 2단을 쌓아 올렸다. 제3단은 높이가 다른 단의 두 배이다.
돌무지 모두 강돌이 아닌 깬돌과 막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다.
이 돌마리 적석총은 장수왕릉(高句麗将軍塚)보다도 더 크다.
장수왕릉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다.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3호분으로 밑바닥의 규모가 동서 51.5m 남북 50.3m로서 대략 90Cm~1m 정도의 높이로 3단을 올렸다.
단과 단 사이의 윗면 너비는 4.7m이며 3단의 중앙에는 언덕 위에 돌이 대충 쌓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대로 남겨 놓아서 전체의 높이는 대략 4.5m 이다. 좌향(坐向)은 정남북(正南北)이라 하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동서면이 정북에서 10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적석총은 규모로 봐서는 아마 7단 피라미드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남아있는 것은 3단일뿐이죠.
그 통구에 있는 장군총이 7단 피라미드인데 입구가 5단에 있습니다. 5단으로 들어가면 바닥은 4단에 있고
천정은 6단에 걸쳐 있어요. 7단 피라미드는 3단에 걸쳐서 석실이 있다. 아무튼 이것은 3단까지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주 석실은 이미 타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변에서 나온 금개영락이라던가 중국 동진대청자파편, 또 토기편 이런 것으로 봐서 이 무덤의 연대는 4세기 후반쯤으로 추정이 됩니다. 4세기 후반이라면 근초고왕 대거든요.
그래서 근초고왕이 백제, 특히 한성시대에 있어서는 가장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그런 분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근초고왕의 위세에 걸 맞는 이런 대규모 적석총이 무덤으로써 만들어 졌을 것이다라는 추정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임영진 교수(전남대)
제3호분 적석총 바로 옆 제 4호분 적석총 계단과 계단 사이에 놓여진 버팀돌 판석이다.
이 판석은 돌이 흘러내림을 방지하고 마을 입구에서 수호신 기능을 하는 장승역할을 했다고 한다.
제3호분 동쪽 제1단에서 약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1.4m x 40Cm x 40Cm 정도의 판석들이
제1단과 평행하여 가로 세로로 모두 6개 놓여져 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도 2개의 버팀돌 판석이 놓여져 있다.
복원 전에는 대략 동서 55.5m 남북 43.7m에 높이 4.5m이었으며 제1단의 동쪽 벽에 길죽한 버팀돌이
2개 넘어진 채 발견되었다. 제3호분은 내부를 발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 가운데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은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백제의 최고지배세력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은 돌무지무덤 내부를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돌 대신 흙을 채운 것이 아니라 기존 분구묘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의 요소를
채용한 것이다. 2호분의 시굴조사를 통해 2호분이 기존의 나무널을 가진 소규모 무덤을 포함하여 새로이 대규모의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4호분 역시 기존의 분구묘를 다듬어서 돌무지무덤으로 만든 특수한 무덤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제식 돌무지무덤의 주인공들이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내려오기 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였던 현지의 선주민이었음을 말해주는 한편 고구려계 이주민에 의해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백제가 건국과정에서 마한으로부터 동북 백여 리의 땅을 빌었다는『삼국사기』기록을
감안해보면 한강유역에서 백제 건국 이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고 있었던 선주민들은 넓은 의미에서 마한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백제식 돌무지무덤을 비롯한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들은『삼국사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