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반민특위의 활동과 이승만의 방해(월간중앙(2001.8) "반민특위 활동과 좌절"에서 발췌)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에 죄, 제2장에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에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 그리고 부칙 등 전문 32조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제1장 1조의 ‘죄’는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고 되어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8일 제1호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화신백화점 4층 집무실에서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위는 두번째로 해방후 자신 소유의 “대동신문”을 앞세워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일본 헌병의 앞잡이 이종형을 구속하고,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등을 지낸 이성근을 구속하는 등 온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10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했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힘입어 반민특위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친일경찰과 헌병사령부는 친일파는 남이 아니라는 듯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로 찾아가면 원용덕은 이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등 30여명의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하였다. 수배중이던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등과 함께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해 김병로·권승렬·김상덕·김상돈 등을 암살하다 백민태의 자수로 폭로되기도 하였다.
악질 친일경찰 최연과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반민특위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한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는 등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평북 고등과 사찰주임 김덕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계속했다.
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나섰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49년 5월 제1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 등 4명이 구속되고,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특위 위원 노일환과 서용길 등 13명의 의원이 구속됐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회 프락치사건은 국회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행정부의 이런 자세에 힘입은 경찰은 관제 군중을 동원해 특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1949년 6월3일에는 관제 시위대가 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난입하려 했는데,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친일경찰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그해 중부서장 윤기병 등의 지휘로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 시킨것이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습격사건을 놓고 국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 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해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런 와중에 국회 프락치사건까지 겹치자 극도로 위축된 국회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던 반민법 공소시효를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상덕 위원장 이하 전 위원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 뒤를 이어 평소 반민법에 반대해온 이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 임무는 법원과 검찰로 이관되었다. 검찰과 법원은 실형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 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재심청구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한명도 없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鼠一匹)’도 아닌 ‘서무필’(鼠無匹)로 끝난 민족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윤보선
이동자; 이승만,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이전, 쪽방
1
소극적 독립투쟁가로서,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음
장면(張勉)
이동자; 이승만,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이전, 쪽방
반민족 문제 연구소 편집. 청산하지 못한 역사 2권. 청년사 출간
1938.2.9
조선 지원병 제도 실시 축하회에 천주교측 발기인으로 참가.
1938.10.20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산하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 위원회 제1부 위원 44명 중,1인으로 선임됨.
1938.11.1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산하의 비상시 생활 개선 순회강연반에서 강원도 방면 순강반(巡講班)의 일원으로 참가.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 위원회 - 총독부의 강력한 방침으로 제1부:의식주, 제2부:의례,사회, 제3부:부인생활에 관해서 내핍,근로,기타 전시생활개선운동을 주관했던 기관.
해방 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장면은 특별법 재수정 위원으로 위의 여러 안 중에서 가장 반민족적이고 추상적인 그래서 친일파에게 관대하였던 재수정안의 작성 과정에 참여.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 정권하의 각료의 60%가 친일파 출신
박정희(朴正熙)
이동자; 이승만,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이전, 쪽방
반민족 문제 연구소 편집. 청산하지 못한 역사 1권. 청년사 출간
1940
만주 신경군관학교 입학
1942
만주 신경 군관학교 졸업-오카모토 이노부(당시 박정희의 일본 이름)가 어전강연이라는 답사를 함. 중국인, 조선인 생도 240명 가운데엣 수석을 하였기 때문에 답사를 한 것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받쳐 사꾸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란 선서가 포함되어 있음.
1944
일본 육사 졸업-당시의 육사 교장 나구모 준이찌(南雲忠一)장군은 "다카키(당시 박정희의 일본 이름)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하였다.
1944.7 ~ 광복까지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치되어 단장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팔로군 토벌함.
1946.9
조선 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학
1946.12
조선 경비사관학교 졸업, 소위로 춘천 8연대 배치.
1948
군부내의 남로당 숙군 작업시 남로당 조직을 순순히 불고, 홀로 자신만 살아 남음.
1950
1948년 이후,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 근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나자, 소령으로 복직.
1953
일본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만주군 장교 출신 들의 모임인 난성회(蘭星會)를 결성하고 박정희가 한국 동창회 명예회장이 됨.
1961
5.16 군사 쿠데타 일으킴.
평 가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일제 권력에 편승하고, 개인적 야망을 위해 항상 정치판을 뒤집어 엎고자 했던 집념어린 쿠데타의 꿈, 경제적 성장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가차없이 억누름. 박정희의 이 모든 것이 경제성장이라는 허울로 가리워져 있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를 "일제가 망하지 않았다면 평생동안 일본관리를 하였을 기회주의자"로 비난함.
최규하 (崔圭夏)
이동자; 이승만,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이전, 쪽방
반민족 문제 연구소 편집. 청산하지 못한 역사 1권. 청년사 출간
1.
만주 대동학원 출신_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시, 동경고등사범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력서에 최종학력으로 만주 대동학원으로 적음. 후일(後日), 최규하는 "나는 일본 고등사범학교에서 말을 배웠고, 만주 대동학원에서 정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고 회고하였다. ※만주 대동학원-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한 일제가 세운 것으로 만주국 관리를 속성으로 양성하는 곳이다. 당시 한족,만주족,몽고족,조선족,일본족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이른 바 5족협화(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를 통한 이상국가 건설을 이념으로 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
2.
미군정시(時), 정보 보고서 "G2"에서 1943.7.6 ~ 1945.8.15 기간동안 만주국 관리를 지냈다고 보고됨.
3.
박정희 집권시절, 정치권에서 친일 만주인맥을 구성함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됨.
외무부 장관(1967.6 ~ 1971.6),대통령 특별 보좌관(1971.6 ~ 1975.12)역임 時에 1974년, 만주대동학원 한일 양국 합동 동창회를 한국에서 열고, 한일의원연맹,한일협력위원회,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한일친선위원회등이 속속 만들어짐.
4.
광주항쟁 운동時, 광주진압을 하루 앞둔 5.25일 저녁, 이미 강제진압을 결정한 상황에서, 최규하는 광주시민을 상대로 실시된 선무방송에서 광주시민들을 향해 자제를 촉규하며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일종의 정치적 기만행위를 함.
1945년 8-15 이후, 미군정은 3 년간의 군정을 실시하면서..미국의 말을 잘 듣는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 세운 다음에..약한 지지기반의 이승만을 키워주기 위해 힘 센 곳(미국)에 빌붙기 잘하는 기회주의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해 붙여줍니다. 그 반역의 인물은.. 조선일보 전무였던 조병옥, 장택상, 동아일보 김성수, 김창룡.
친일파 놈들에게 :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이 더럽구나! 너희의 문제는 얼마 않되어 우리에게 고발되어질테니 어디한번만 국민들 앞에서 그 짓해봐라 내가 직접 식칼들고 찾아가서 단숨에 제육볶음과 육회, 갈비찜으로 만들어주마 이것은 일본천황(강물처럼 흐르는 설사같은!)에게 다 먹일것이오!
수수방관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라 지키느라 목숨 받친 사람들은 집도 없고 이게 뭡니까??? 위의 글에 대하여 공감하신다면 많은 분들께서 호응하여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목표인원 10,000 명입니다! 지금 현재 954 분께서 서명에 참여하셨습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39217&
첫댓글 일제때 전두환 아버지는 면서기출신이고 노태우 아버지는 면장 출신이라던데..확실히 아시는분 계시면 확인 좀 해주세요*^^*.그게 사실이라면 김대중전대통령.노무현 대통령 빼고는 역대 대통령 모두 직간접적으로 친일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겠네요.
친일의 굴레가 있는 대통령들은 부관참시해야.
ys는 모지? 흠 그리고dj는 6.25때 모라더라 목포에서 공산당 위원엇데나 어쨋데나 휴우
이승만 좋은사람인줄 알았는데.. 다시봐야 겠군요...
공산당은 난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한민족이니.. 그러나 친일행위를 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공산당은 통일되면 한 나라 되지만. 친일 행위는 어찌 되는것인가!!!!!!!!!!!!!!!!!1..
이승만이 우리나라의 첫 단추를 잘못 시작해서 친일파 군사독제가 시작되게 한 장본인 이승만은 역적중의 역적입니다
좌익보다 우익에 의해 죽은 민간인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모르시는 분 아시면 좋겠네요.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 보세요. 보도연맹편 등등 다 보세요.
이승만과 박정희도 친일 이였다니 허거 놀라 자빠지긋네요~~ 참나 믿을놈 하나더 읍네
1945년 8-15 이후, 미군정은 3 년간의 군정을 실시하면서..미국의 말을 잘 듣는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 세운 다음에..약한 지지기반의 이승만을 키워주기 위해 힘 센 곳(미국)에 빌붙기 잘하는 기회주의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해 붙여줍니다. 그 반역의 인물은.. 조선일보 전무였던 조병옥, 장택상, 동아일보 김성수, 김창룡.
김대중이도 역적이죠 ~이였다네요
하여튼이놈의 나라는 김구선생님이 계셔야 하는데...그래야 이런놈들 다잡아 족치지
친일이 군림하게된 시조 이승만을 역사와 민족앞에 처단하는 처단식을 거행합시다
공감합니다.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처음시작을 잘못했죠..친일정산을 너무도 못했죠. 본인이야 이미 고인이지만..자신이생각한데로 결정한 댓가로 지금 우리가 피해를 보죠 비록..많이 늦었지만..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만을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차디찬 만주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할 때 이승만은 미국에서 동포들 상대로 강연료 받아 챙기면서 호의호식한 사이비 독립운동가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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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도 저랬군요 이 개미친 이승만이 쪽바리들 싫어해서 아닌줄 알았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정말 한심합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고위직관부들이 친일파출신이니...
이승만도 저랬군요 이 개미친 이승만이 쪽바리들 싫어해서 아닌줄 알았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정말 한심합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고위직관부들이 친일파출신이니...
그래서 해방부터 역사를 되돌려야 합니다. 모든친일의 잔재를 없애고 다시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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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저런 이승만을 외교노력한다고 자리에 앉혀놓는......실수를 했구나......
우리나라는 백범 김구가 대통령 됐어야 하는건데...그놈의 미국놈,러시아놈들...그 두놈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두동강이 시켜갖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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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사람들을 대통령또는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국민이 한심합니다 우리스스로 반성하시고 정치에적극참여하고 관심을가집시다 국회의원한명이나라를바꾸고 대통령한명이 세계를바꿀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친일보다는 친미에 가깝죠. 당시 이승만에 편승했던 주된 권력인사들의 대다수가 친일 행적자들이었기에, 반민특위를 세울 수 없었을 겁니다. 이승만에겐 민족적 대의보다는 자신의 권력이 훨씬 중요했을테니.
친일파 놈들에게 :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이 더럽구나! 너희의 문제는 얼마 않되어 우리에게 고발되어질테니 어디한번만 국민들 앞에서 그 짓해봐라 내가 직접 식칼들고 찾아가서 단숨에 제육볶음과 육회, 갈비찜으로 만들어주마 이것은 일본천황(강물처럼 흐르는 설사같은!)에게 다 먹일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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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들......
일본에 원폭 2번째걸 떨구기 전에 국내진공을 했어야 친일파를 다 몰아내는건데...안타깝습니다. 여운형같은 분이 대통령을 했어야 했는데 암살당하고 빨갱이로 매도당하기까지 했으니...정말 비극의 나라입니다.우리나라는...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각하는 제외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가지가지하는구만..
수수방관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라 지키느라 목숨 받친 사람들은 집도 없고 이게 뭡니까??? 위의 글에 대하여 공감하신다면 많은 분들께서 호응하여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목표인원 10,000 명입니다! 지금 현재 954 분께서 서명에 참여하셨습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39217&
부관참시하고 모든 재산 국고에 환수 그리고 그 후손들도 모두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역적중에 역적 잡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