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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馬鞍山148.8m)-윤산(구월산/317.4m)
산행코스 : 충렬사→망월산→인생문→마안산→도로→155번 버스종점→뉴그린아파트→만남의 광장→윤산→갈림길→임도→체육공원→임도→산길→임도(철탑)→오륜정보산업학교(부산소년원)→큰소나무 슈퍼→마을버스정류장 [약 3시간 30분 소요]
안락로터리의 충렬사 경내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동래읍성 동장대로 가는 숲속 길이 있다. 길목에 임진왜란 때 왜적과 7년 동안 싸워 뛰어난 전공을 세운 동래출신 24명의 공신을 모신 24별전 공신 기념탑이 있는데, 그 위로 망월산으로 가는 산책로가 열려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조선시대 동래지역의 국방을 담당 했던 군관청이 있다. 새로이 단장된 동래읍성 위로 올라 옛날 군사를 지휘 통솔했던 동장대가 정수리 부분에 우뚝 서있는 망월산에 오른다.
망월산(望月山)은 해발 106m인 전형적인 구릉성산지로 사면이 완만하고 산 전체가 종순형을 나타낸다. 짙은 수목으로 산림을 이루고 있는 이 산은 옛 동래부 동헌 등 관아 건물이 있던 동래읍성의 뒷산으로서 동래의 중심이 되는 산이었고 '장대산' 또는 '칠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망월산'이란 이 산에서 바라다보는 달빛이 좋은 데다 서정적인 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 산은 산자락의 모양이 소쿠리같다고 하여 일명 ‘소쿠리산’, '고쿠리터'로 불리어지기도 했다.『동래부지』에 기록된 증산은 망월산을 나타낸 것으로, 이는 산 모양이 시루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철문을 벗어나면 동래읍성 성터 위를 지나 인생문고개로 넘어간다. 인생무상의뜻이 담긴 인생문고개는 칠산동과 명장동을 왕래하는 고개로서 지금은 포장도로로 변해 있다. 도로를 건너 마안산 사적공원으로 들어서면 이내 왼편으로 숲속길이 있다. 잠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면 마안산 정상인데, 이곳에는 부산지역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부산 3.1운동 기념탑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마안산(馬鞍山)은 해발 149m인 2개의 종순형 산정으로 이루져 있고, 사면(斜面)은 완만한 편이다. 마안산이란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며, 동래의 진산인 윤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의 봉우리로서 옛 동래읍의 주산(主山)에 해당된다.
마안산은 일명 대포산과 유방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포산이란 조선후기 이 산에 별포군 200여명이 근무하여 대포를 설치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유방산은 2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의 모양이 여성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안산 아래에는 사적 제273호로 지정된 복천동 고분군이 있고, 옆으로 동래읍성터가 이어지며, 그 밑에 북문이 보인다. 북장대에 올라서면 탁 트인 조망과 앞에는 망월산, 뒤에는 윤산, 옆에는 종군산이 와 닿는다.
마안산에서 용인고 방면으로 내려서서 동래자동차매매시장 있는 곳에서 도로를 건너 매매시장 정문 안 으로 들어선다, 백수열씨 집 골목에서 위로 오르면 언덕을 넘어가는 용인고 옆 서동고개가 있다. 서1동 동네 골목을 지나 종점 전당포가 있는 곳에서 도로를 건너 "서동장식" 왼편으로 89번․155번, 버스종점으로 들어서면 부곡 뉴 그린 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중앙 언덕으로 오르면 이내 차도가 나오는데, 통나무 숯불갈비집에서 차도를 건너 윤산 입구에 진입 한다. 15분 후 제1 만남의 광장이 나오고 왼편은 약수터, 오른편은 제2 만남의 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등산로는 그 사이길이다. 15분 후 윤산 정상에 올라선다. 현재 이곳에는 정상석이 없고 산불초소만 홀로 서있다.
윤산이란 명칭은 동래쪽에서 보면 산 모양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다고 해서 바퀴 윤(輪), 뫼 산(山)의 윤산이라 한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1486)』과 『동래부지(1740)』에는 이 산을 윤산(輪山)으로 기록하여 진산(鎭山)이라 했다. 진산이란 도읍(都邑)이나 성지(城址)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말하는데, 윤산은 동래부 뒤쪽의 큰 산이니 진산이 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구월산(九月山)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윤산의 윤(輪)자는 '바퀴 륜'자이고 바퀴가 구불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구블다'의 어원는 '구르다'이다 그래서 '구르다'의 고어(古語)인 '구블다'가 '구을다', '구불산'으로 변하였고, 이중 구을산은 구월산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구월산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려니 우리나라의 신령한 산으로 유명한 황해도 구월산(九月山)과 같은 이름으로 잘못 기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동래의 풍수형국은 거북이가 금정산에서 동래로 향해 하산하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라 했다. '영구'는 구월산을 가리키며 이것이 풍수의 형이 된다. 이는 동래에 지덕의 발복이 '오라'는 "을" 진산(구)에 발원하는 의미있는 이름인 것이다. 거북이가 오는 산(구을산)이 구전되어 구월산(九月山)이라는 한자음을 빌려 구월산이 된 것이라는 풍수식 풀이도 있다.
2002년 7월 부산광역시는 금정구 서동, 금사동, 부곡동 일원에 걸쳐있는 해발 이 산의 명칭을 구월산에서 윤산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즉, 향토사 등에서는 해당 산을 윤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광복 전후 군작전지도상의 오기로 인해 구월산으로 불려왔기에 지역주민들은 원래 산 이름을 복원해야 한다는 민원을 부산시에 제기했으며, 부산시는 국립지리원에 의뢰하여 산의 명칭을 윤산으로 복원하였다.
윤산 정상에서 하산길은 두 갈래 길인데, 오른쪽 금사동, 왼쪽 부곡동 방향이다. 이곳에선 부곡동 쪽으로 가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오륜대 방향으로 간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도중 부곡동으로 내려가는 소로가 있지만 무시하고 직진한다.
20분 뒤 임도와 만난다. 잠시 왼쪽 산길로 올라 체육공원을 지나면 다시 임도. 체육공원 화장실을 지나면 다시 왼쪽 산길. 이 길 또한 결국 임도와 만난다. 산길로 간다. 잠시 후 임도와 만날 땐 철탑이 정면에 보인다. 임도시설비를 지나 내리막길로 간다. 곧 철탑 앞 갈림길. 오른쪽으로 간다. 일순간 금정산 주능선이 확 트인다.
다시 5분 정도 내려서면 붉은색 벽돌건물인 오륜정보산업학교(부산소년원) 담벼락을 지나면서 이내 오륜동 새동네에 닿는다. 50m쯤 내려오면 큰소나무 슈펴가 나오며, 슈퍼 바로 밑에 5번 마을버스 정류장(배차시간 15분)인데, 이곳까지가 이번 산행의 종점이다.
♠♠♠ 참고자료 ♠♠♠
▶충렬사(忠烈祠)
충렬사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72. 6. 26 지정)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에 위치해 있다.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 안에 송공사를 세워 송공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의 사액이 있게 됨과 동시에 충장공 정발을 배향하였다. 그 후 1652년(효종 3년) 동래부사 윤문거는 당시의 사당을 창건한 다음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선비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한편, 1709년(숙종 35년)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한 여러 사람을 봉사하기 위하여 읍성 남문의 충렬사 옛 자리(송공사 자리)에 별도의 사당을 건립하고 조정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동래부민 김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735년(영조 11년)에 동래부사 최명상이 충렬사 별사의 철폐를 조정에 올리고 이어 경상감사 민응수의 재청으로 그 이듬해 별사를 없애고 여기에 모신 여러 사람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동시에 임진란 때 사절한 다대첨사 윤흥신을 추가 배향하고, 임진란에 송상현·정발을 따라 사절한 금섬·애향은 충렬사 동문밖에 별도로 각을 지어 모셨다.
1766년(영조 42년) 강당인 소줄당의 대대적인 보수를 비롯하여 여러 번의 중수 및 보수를 하여왔다.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충렬사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 열사를 봉안하고 있는 사액서원이었기 때문에 철폐되지 않았으며, 선열의 얼을 추모하고 국난극복의 교육장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광복 후에도 미처 보수치 못하던 차 나라의 관문을 지키다 순절하신 순국선열과 맨주먹으로 분연히 궐기하여 항쟁하신 의병들을 추모하고 얼을 선양토록 함으로써 우리와 후손에게 향토수호 정신과 자주국방 사상의 수련장으로 정화하기에 이르렀다.
부산시에서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규모로 정화한 후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2위의 위패를 직책 또는 증직의 차순에 따라 봉안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춘추 중정일(中丁日)에도 (재)충렬사안락서원에서 제향을 드리며,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드리고 있으며 제향 절차는 홀기에 따라 행한다.
▶복천동고분군
복천동고분은 사적 제273호('81. 6. 9 지정)로 동래 중심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속칭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구릉상에 위치하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69∼1995년까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발굴에서 4세기 후반대의 분묘도 꽤 포함되어 있어 4∼5세기대 부산의 정치·사회·문화적인 구조를 비교적 치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고분군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체로 5세기중엽에 종료된 것으로 보이며, 금동관이 나온 동아대학교 발굴조사의 1호분은 규모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으로 볼 때 5세기 후엽의 수장급묘로 추정된다. 묘제는 목곽묘와 수혈식석실묘의 2종인데, 대형묘중에는 주곽과 일자형이 되게 목곽형식의 독립된 부곽이 딸린 것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 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9,000여점이다.
출토유물에는 토기류 2,500여점, 철기류(금속류 포함) 3,200여점, 장신구류 4,010여점, 골각기 등 기타유물 10여점, 이골 5구, 말이빨 등 동물유존체(動物遺存體) 7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와 갑주류가 특히 많아 주목된다.
부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기류는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물 제598호인 마두식각배, 오리모양토기,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부산시에서는 19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1996년에는 복천박물관이 개관하여 복천동고분군 출토유물 뿐만 아니라 인근 가야지역 및 동시대 일본의 유물도 함께 전시함으로써 가야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부산 3.1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지역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 및 3.1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조국애를 드높인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부산지역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또한 항일운동의 역사적 기념물을 세워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3.1운동 기념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3.1운동 기념탑의 건립위치는 일제 때 항일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동래시장 인근인 동래구 명장동 산 93-2일대인 마안산(일명 대포산) 정상에 세우기로 하였으며, 탑의 조성기간은 1995년 8월 15일에 착공, 1996년 7월말에 완공하여 8월 15일 광복절 기념일 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3.1운동 기념탑의 조성 이념으로는 부산지역의 3.1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미래의 조화에 두었고, 조형 요소로 상징탑은 창조하는 미래를 표현하고, 내부 조형탑은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표현, 8쾌 마당은 결집하는 민족정기를 표현, 조경으로는 만남과 화합, 휴식과 산책의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기념탑의 규모는 탑 전체의 높이가 21.6m, 원추형 군상높이는 6m, 좌대의 높이는 29m × 29m = 842㎡(254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탑에는 기미독립선언문과 독립운동 약사, 취지문을 수록하였다.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동래읍성지는 동래구 명륜·복산·명장·안락동 일대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72. 6. 26 지정)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읍성이다. 조선시대 중종 때 편찬되었던『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옛 읍성이 해운포에 있으며 동남은 석축이고 서문은 토석인데 둘레가 4,130척이며, 지금은 퇴폐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읍성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읍성이 있었다는 것은『고려사』병조에 현종 때 동래군성을 구축하였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고려말에 들어서면 동래성 구축에 관하여 기본적인 기록이 엿보인다.『동국여지승람(1481)』읍성조에 인용되고 있는 이첨 기사에 의하면, 원구 박무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성축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 당시 읍성의 석축은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번 왜구의 침입을 겪었고, 또한 침략의 가능성이 점차 짙어진 가운데 동래읍성은 대대적으로 구축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4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한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격전지이다.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이 고장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읍성이다.
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의 문루(門樓)로 동문은 지희루(志喜樓), 서문은 심성루(心成樓), 남문은 무루(無憂樓), 암문은 은일루(隱一樓)가 있었다. 또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앞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서문과 암문 및 북문에는 성문의 보호를 위해 옹성(甕城)을 부설하였고, 장대, 망루 및 15개소의 보루(堡樓)를 갖추고 있었다. 일제시기 때 시가지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도 민가가 점유하여 마안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만 성곽의 형태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동래향교(東萊鄕校)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1972. 6. 26 지정)인 동래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관아에 의해 설치 운영한 국립 중등학교 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들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 기능과 함께 지방의 사회교화 기능도 갖고 있었다.
향교의 교수․훈도직은 정규관원으로 임명하도록 하였고, 학생정원은 부, 대도호부, 목 단위에서는 90명을 정원으로 정하고, 하부단위인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으로 규정하였다. 향교에는 공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儒賢)과 우리나라 역대의 유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大成殿)과 학업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을 비롯하여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의 양재(兩齋)가 있어 그 건물의 구조는 마치 중앙에 있는 성균관(成均館)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동래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이 있고, 학생 정원은 70명으로 되어 있으며, 또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하여 학전(學田) 7결이 지급되었다. 부산지방의 유일한 관학기관인 동래향교는 태조 원년(1392)에 교육진흥책에 따라 주․부․군․현에 향교를 설립하게 됨에 따라 동래에도 설립되었다고 보여지나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될 때 역시 소실되고, 난이 끝난지 14년 되던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중건하였다. 원래 향교는 읍성의 동문밖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704년(숙종 30)에 유생들의 疏請에 의하여 다음해 동래부의 동쪽 수백보 거리에 있던 官奴山 밑에 이전하였다가 그 후 중성 부근과 학소대 부근, 그리고 인생문 부근 등으로 여러 차례 이건 중창되었으며, 현 위치에는 1813년(순조 13)에 동래부사 홍수만이 이건한 것이다.
동래향교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반화루(攀化樓),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구성된 강학공간(講學空間)과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무, 서무와 내․외삼문, 사주문으로 구성된 제향공간(祭享空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孔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儒賢) 7분과 우리나라의 유현 18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유림(儒林)들에 의해 석전대제(釋奠大祭)가 봉행되고 있다.
▶오륜대(五倫臺)
부산팔대의 하나인 오륜대는 금정구 오륜동의 회동수원지 부근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산과 새, 바위의 조화로 병풍을 이룬 기장군 철마면의 아홉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산에 쌓여 있는 골짜기에는 봉황과 백구가 날아 올 듯이 경치가 뛰어난 곳을 "오륜대(五倫臺)"라 했다. 지금은 그 옛날 노래하던 새들과 시인 묵객은 간곳없고, 미나리밭과 따사롭게 반짝이는 호수의 물빛뿐인 산중호수인 회동수원지만 옛 정취를 품은 채 출렁일 뿐이다. 오륜대는 1931년 수원지가 만들어져 오륜대라 이름했던 옛 풍치는 물 속으로 잠겨버리고, 호수를 곁들인 새로운 오륜대의 충기가 생기게 되었다. 호숫가에는 담수어를 파는 음식점이 들어서고 산책객이 한가히 거닐 뿐이다. 1967년 저수지확장공사로 당시의 마을은 철거되고, 1971년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나면서 오륜고분군이 발견되어 석실묘, 옹관묘, 철제품 등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동래부지(1740)』고적조에 따르면, "오륜대(五倫臺)는 동래부에서 동쪽자리 사천에 있고 대에서 4.5보 가량으로 시내(溪)에 접하고 암석이 기이하며 아름답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 부근에 사는 사람이 오륜을 갖추었기에 이를 기려 이름했다."고 한다. 또 19세기 후반의『동래부읍지』고적조에 보면, "오륜대는 부(府)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천암(川岩)이 기이하여 옛날 5인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유상하였다고 하여 이름 하였다"고 기록되어 왔다. 현재 부산시민의 식수원으로 만들어진 회동수원지는 둘레 20여㎞, 폭이 넓은 곳은 2㎞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