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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하고 교양있는 지휘관'
- 그루지아 대통령 에드워드 세바드나제
함자트 겔라예프는 간신히 러시아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한시름을 돌렸다. 콤소몰스코예에서 부하 10명 중의 8명을 묻어두고 빠져나온 길이었다. 강력한 군벌이었던 검은 천사는 이제 불과 150명 남짓한 병력 만을 이끌고 숨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던 겔라예프는 그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잊지 않았다.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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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자트 겔라예프
애초에 그로즈니를 빠져나온 뒤에 숲속에서 굶주리고 있던 그와 부하들을 평야로 유인한 사람은 바로 아르비 바라예프였다. 잔혹한 와하비였던 아르비 바라예프는 겔라예프의 선의를 배신하고 그를 러시아군의 포위망 속으로 인도하였다. 더욱이 그는 다른 체첸군 지휘관들이 러시아에 투항하거나 숲 속에서 은신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 고향인 알칸 칼라의 호화로운 집에서 멀쩡히 살고 있었다. 오몬과 GRU 스페츠나츠의 '자키스트카'도 그의 집은 예외였다.
심지어 러시아 군부대에서 10킬로도 안 떨어진 그의 집에서 2번이나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하기도 하였다. 체첸 내에서는 아르비 바라예프가 러시아 FSB와 결탁을 하여,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납치를 통해 받은 수백만달러의 돈과 다른 체첸군의 지휘관의 신병을 넘겨주기로 했다는 설이 파다하였다. 이는 러시아군의 반군 수배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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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비 바라예프. 그의 정체는 현재까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체첸인들에게 복수란 그들의 종교이자 율법이다. 겔라예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0년도 3월에 그는 알칸 칼라에 있던 아르비 바라예프의 그 호화로운 집을 폭파시켰다. 바라예프는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다. 이에 대항하여 바라예프도 2000년 6월 1일에 그로즈니 스타로프로미슬로브스키 근처 숲 속에서 겔라에프의 부하들을 공격하였다. 러시아군을 습격하기 위해 근처에 겔라에프가 은신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습격한 것이다. 양측 모두 50명의 체첸인이 죽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겔라예프는 알칸 칼라에 있던 아르비 바라에프의 집을 다시 폭파시켰다. 2000년 7월 마지막 주, 아르비 바라예프와 함자트 겔라에프는 그로즈니 남서쪽 살라치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격돌하였다. 치열한 교전 끝에 싸움은 종료됬으며 러시아군이 훗날 발견한 죽은 체첸인은 4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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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비 바라예프
하지만 간신히 사지에서 살아남고 러시아군의 추격을 피해야 했던 함자트 겔라예프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풍부한 자금과 충분한 사병을 거느린 아르비 바라에프를 제거하는 것은 아슬란 마스하도프 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살라치 전투 이후 겔라예프는 남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체첸 남동쪽 그루지아 국경 지대의 판키시 계곡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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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아 지도. 동북쪽이 판키시 계곡
판키시 계곡은 이미 체첸전으로 인한 피난민들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코카서스 산맥의 12킬로 남짓의 고갯길로 체첸군의 피난처이자 해방구였다. 공식적으로 그루지아 국경 지대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개입할 수 없었고, 그루지아로서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완전히 통솔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뿌리깊은 반러시아 감정을 갖고 있던 그루지아가 러시아측을 위해 무리하게 체첸 난민 중에 반군을 색출할 의향도 별로 없었다. 겔라예프가 은신하기에 매우 적당한 곳일뿐 아니라, 그의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는 것도 가능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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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키시 계곡
약 1년이 지난 2001년 8월, 겔라예프는 다시 3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킨다. 여기에는 터키와 아랍 출신의 무자헤딘들도 수십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병력의 식량과 무기를 지원한 주체는 다름 아닌 그루지아 정부였다. 그루지아는 겔라에프를 인도하라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함은 물론, 그 병력을 실질적으로 재건시켰다. 지난 압하지아 전쟁에서 샤밀 바사예프와 함께 그루지아군을 패배 시켰던 겔라예프를 왜 지원하였을까?
2001년 10월, 그루지아 정부는 함자트 겔라에프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압하지아 전쟁 이후 그루지아는 코도리 계곡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압하지아에게 넘겨줘야 했다. 바로 그 코도리 계곡 북쪽의 압하지아 영역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함자트 겔라예프에게 피난처와 식량, 무기를 제공한 대신에 자신들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압하지아 영역을 한바탕 휩쓸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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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도리 계곡. 압하지아 북동쪽의 유일한 그루지아 거점이었다.
겔라예프는 300명의 부하들과 함께 그루지아가 제공한 트럭에 무기와 식량을 싣고 400킬로 떨어진 압하지아 코도리 계곡으로 향한다. 코도리 계곡에 도착한 겔라예프는 그의 부하들을 압하지아 영역 쪽을 향해 배치시키고, 2001년 10월 4일, 계곡 북쪽의 압하지아 마을인 기오르기에브스코예를 공격한다. 삽시간에 마을을 점령한 겔라에프는 계속해서 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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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하는 함자트 겔라예프.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특이하게 기관총을 애용하였다.
그루지아의 계획은 함자트 겔라예프를 첨병대로서 압하지아 영역을 휘저은 다음, 그들이 압하지아 수도인 수쿠미를 위협하는 위치까지 도달하면 전개된 그루지아 정규군을 동원하여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겔라예프의 병력 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숙련도로 보아 충분히 압하지아의 방어선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지난 전쟁에서 겔라예프의 군을 직접 상대했던 그루지아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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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도리 계곡의 그루지아군
따라서 그루지아는 겔라에프의 부하들을 충분히 무장시켰다. Ak, 기관총, RPG는 물론 대공미사일도 충분히 제공하여 2001년 10월 8일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엔정전감시단의 헬기가 겔라에프의 부하들에 의해 격추된다. 안에 있던 9명이 모두 죽었다. 켄우드 사의 무전기와 휴대폰까지 갖춰서 교신에도 문제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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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자트 겔라예프. 그는 항상 허리에 단검을 차고 전투에 나섰다.
겔라예프는 계속해서 북진하였지만, 곧 압하지아군의 거센 저항을 받는다. 그루지아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상 진격한 거점을 유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아직까지도 팔짱을 끼고 있던 그루지아군을 위해 추가로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겔라예프는 후퇴하여 코도리 계곡으로 돌아온다. 이 때가 2001년 10월 18일, 약 2주에 걸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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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도리 계곡의 압하지아군
코도리 계곡 전투에서 겔라에프는 30명의 전사자를 낸다. 하지만 그루지아로서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만큼 충분히 싸웠다고 생각했는 지 겔라에프를 송환하라는 러시아의 요구에 그루지아 대통령 에드워드 세바드나제는 "교육받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겔라에프를 칭찬한다. 이들과 직접 교전했던 압하지아 공화국의 보안부 수장인 라울 카짐바는 "겔라에프의 부하들은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며 좀비처럼 싸웠다."고 평했다.
겔라예프에게 코도리 전투는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신세를 지고 있던 그루지아를 위한 '숙박비'의 가치는 있었다. 교전 후에 코도리 계곡으로 돌아온 겔라에프는 그루지아 정부가 제공한 트럭을 타고 다시 판키시 계곡으로 돌아온다. 이곳에서 그는 수회에 걸쳐 체첸, 잉구세티아, 다게스탄 영역의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러시아 정부는 2001년 11월 9일에 그루지아 정부를 향해 함자트 겔라예프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그루지아가 거부하자 직접 판키시 계곡을 폭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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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키시 계곡의 겔라예프 지휘부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다른 체첸군과는 무관한 겔라예프 독자적인 움직임이었다. 다른 체첸군 지휘관들도 나름의 교전을 통해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2001년 한해는 거의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는 상태로 싸웠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유기적인 지휘가 없이 개인적으로 부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처럼 압도적인 상대를 대적하면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는 다음해가 되서야 찾아온다. 2002년 6월의 남부 산악지대에서 개최된 마즈리스 알 슈라 (통합 군사 위원회)였다. 체첸 주요 군 지휘관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여 그들이 모두 복종할 수장을 선정하고 향후 러시아에 대항할 전략을 구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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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군. 이제 수장을 정해야 될 때가 왔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Ruslan_Gelayev
http://ru.wikipedia.org/wiki/%D0%93%D0%B5%D0%BB%D0%B0%D0%B5%D0%B2,_%D0%A0%D1%83%D1%81%D0%BB%D0%B0%D0%BD_%D0%93%D0%B5%D1%80%D0%BC%D0%B0%D0%BD%D0%BE%D0%B2%D0%B8%D1%87
http://en.wikipedia.org/wiki/2001_Kodori_crisis
http://www.kavkaz-uzel.ru/articles/59712
첫댓글 아 이제 결집 좀 하나요-ㅁ- 근데 왠지 또 저 안에서 파벌이 갈릴 거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일단 결집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겠죠
이제 와서 좀 정신 차리는 눈치군요. 그건 그렇고 그루지야군은 왜 팔짱만 끼고 있었던건가요?
러시아와 결코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었던 그루지아는 굳이 러시아를 위해 체첸인을 넘겨줄 동기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압하지아 전쟁에 겔라예프를 동원해서 자신들이 지난 전쟁에서 체첸인들에게 입은 손해를 벌충하고 싶었달까요
러시아와 그루지아에 의해 이슬람 진영이 자꾸 찢어지네요. 그나마 통합 사령관을 뽑는다니 기대가 됩니다.
진영의 분열은 외부의 요인보다는 내부적인 요인이 크죠
야거님의 이야기를 정말 기다렸습니다 체첸군을 볼때마다 느끼는게 조선독립군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ㅠㅠ
독립군과 다른 문제가... 정권을 잡고나서 각종 테러에에 주변국에 쌈질을
걸었다는거죠. 1차 체첸전에서 승리를 거둔후에 잉여 전투력으로 호전적인
태도에 테러/ 인질장사를 했으니 순수하게 한국을 독립시켜려던 독립군과
동급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도덕적으로 엄청나게 문제가 있는 군대죠
군인은 전투가 없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평화시에 제대로 정착을 못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직도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군요;; 이거 참..
2차 체첸전 이후로도 벌써 3년이 되가죠
정말 대단한 근성이군요. 푸틴 사마 등장할때 이야기가 끝난줄 알았는데 정말 질깁니다.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는군요.
기본적으로 수십년은 족히 싸울 것을 예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가운 업데이트군요. 좋은글 과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룰루~
감사합니다
님의 마지막 문단에서 지적하셨다시피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아군끼리 파벌싸움이나 하는 거는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죠. 체첸보면 안타까운 게, 파벌싸움을 종식시키고 그들이 어떻게 나아갈 지를 제시하는 위대한!!!! 리더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위 워털루님의 뎃글처럼요. ㅠㅠ;;
지금까지 나온 체첸지도자나 체첸 병사들의 전술적 능력은 거의 전설수준입니다만. 쩝, 그 게 대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르비 바라예프같은 인물을 비롯해서 몇몇 친러시아계 체첸인같은 인물이 나오는 것 아닐까요??
전체를 대국적으로 통솔할 만한 그런 인물은 쉽게 등장하지 않죠
행군하는 함자트 겔라예프 ->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특이하게 기관총을 애용하였다!!!
체구가 꽤 커보이는데요? 사진의 기관총과 대비해서보니 대략 185~195정도 되는 인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 험악한 산지를 저런 기관총을 들고 다니는지.
그 것도 지휘관이 기관총을 애용!!! ㅎㄷㄷ.
어느나라 군대나 지휘관은 그저 호신용으로 권총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검을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체첸군은 지휘관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한 부대였습니다.
더군다나 겔라예프의 경우는 ak도 아니고 그 무거운 기관총을 스스로 메고다녔으니 이는 전투에 참가하는 정도를 넘어서 필요하다면 자신이 직접 교착 상태를 타개하겠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죠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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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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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건 좀 다른 질문인데요. 러시아 위키피디아 자료는 어떻게 읽으셨는지?? 러시아어 전공하셨나요??
러시아어는 잘 모르지만 어찌어찌해서 읽어는 보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체첸내에서 활동하고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특히 비극인게 체첸인은 친러시아계와 갈라져있고 이주한 러시안인들도 서로가 갈라져서 암살하고 그리고 그걸 서로가 당연하다듯이 보고있었습니다 기사내용에서 기억나는게 어린병사의 삼촌이 친러시아계 경찰이라 어린병사의 상관이 이사람에게 몇번이나 경고했는데도 경찰직을 그만두지 않아 죽였다고합니다 그 어린병사는 죽은삼촌은 삼촌의 신념에 따라 살아고 그래서 자랑스럽다고 자신은 체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거라고 서로의 길이 다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ㅠㅠ 체첸에 사는 러시안인들중 젊은이들은 자신의 친구들을 죽인 러시아를 응징한다고 ㅠㅠ
아마 제가 올린 글로 보이는데 그 기사의 요지는 친러시아 측이라고 해도 자신들 나름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었죠. 어떻게 보면 현실론이라고 보입니다
그루지야가 체첸반군들을 비호하고 있었군요. 그루지야가 저때무터 러시아로부터 미움을 단단히 받고 있었는듯.. 그결과 후에 러시아랑 전쟁이 일어난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