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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이 글은
바다와 바다목장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서
작성한 글 내용 중 일부분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대화체로 작성했습니다.
[독도 문제도 결국은 경제가 해결책]
사장 : 아까 200해리경제수역 이야기 나오다 말았는데, 강대국들이 대양의 바다에 섬들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뭐지요?
용하 : 제국주의 시대에 무력으로 점령했다가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독립시켜줄 때 사람 많이 사는 섬들은 해방시켜주고 사람 안 살거나 적은 섬들은 안 돌려줬으니까요!
형님 :.......
용하 : 독도도 일본이 그런 식이라면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국은 해방시켜줬어도 독도는 안 돌려 준 것이라고!
형님 :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
사장 : 진짜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없네!
용하 : 일본도 2차 세계대전 때 쿠릴열도 북방4개 섬을 소련(지금은 러시아가 그 정통성을 이어받음)한테 뺏겨서 계속 돌려주라고 하고 있는데, 그래서 일본에서도 양심 있는 사람들은 ‘독도는 한국 것이니까 비양심적인 소리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도 일본 정치꾼들이 그런 싸가지 없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라고!
청일전쟁(1894.~1895.4)에서 일본이 선제공격으로 청나라를 제압한 이후로 일본과 러시아가 다시 동북아 패권을 놓고 다투다가, 1904년 2월 8일 일본이 요동반도의 끝 항구도시인 여순 러시아 요새를 선제공격하고 인천 앞바다에서도 러시아 군함을 선제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러일전쟁 때 일본정부는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해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란 이름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고 1905년 8월에 독도에 망루를 세웠다.
조선과 중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유럽에 주둔 중인 막강전력의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지원 보냈는데, 이 발틱함대도 일본이 대마도해협에서 사실상 전멸시켜버렸다. 그 당시에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일본해군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력이 우세했는데, 일본이 대마도해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의 도움이 컸다.
영국은 그 당시에 ‘세계 최고의 식민지 정복과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는데, 영국이 점령 중인 수에즈 운하를 막음으로써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지금의 남아공 최남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뿐 아니라 영국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물과 식량과 기름마저 보급 받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영국의 상선들을 통해서 얻은 발틱함대의 운항정보를 일본에 알려줬다.
그래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지칠 대로 지치고 배에 기름마저 떨어질 지경에서 ‘중국과 조선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 참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유일하게 남은 극동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단거리인 대마도해협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국을 통해서 발틱함대의 보급부족과 진행경로를 알고 있던 일본함대가 부산 가덕도 뒤에 진해만에 숨어 있다가 발틱함대가 대마도 남쪽을 접어들 때 진해만에서 쏟아져 나와 발틱함대의 앞에서 갑자기 턴을 해서 대마도 남쪽을 지나고 있던 발틱함대를 부산 앞바다 쪽으로 몰아서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비슷한 전법으로’ 포격을 퍼부어서 타격을 가했고, 울릉도 앞바다까지 쫓아가면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켜버린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참패 이후 러시아는 짜르(황제)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내란이 일어나 유럽에서 힘을 잃은 것은 물론 만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패권진출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고, 영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마저 견제할 수 있었고,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국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때 미국은 ‘1783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으로 독립한 지’ 120년 정도의 역사밖에 안 된 신생국가로 자국의 산업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10년 후인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이때는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제국(지금의 터어키)가 동맹을 맺는다.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가 대량생산이 가능한 살상무기들로 나아가는 족족 ‘창이나 활 같은 원시무기들로 대항하는’ 미개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점령해나가면서 ‘지구상에 빼앗을 땅은 넓으니까 식민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지 말자’는 협정을 맺고 있었는데, 그 뒤를 이어 산업혁명이 일어난 독일에서도 식민지들을 점령해나가다가 ‘식민지 점령에서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는 협정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해서 부딪힌 것이었다.
이런 식민지 정복과 유지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뭉치고,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 뿌리가 같은’ 오스트리아가 게르만 민족주의로 독일과 뭉치고, 슬라브 민족주의로 뭉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면서 게르만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독일과 부딪히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고, 독일의 우세를 점친 오스만투르크제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서면서....... 1차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독일-오스트리아-터어키]가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참전했는데, 미국은 처음에는 참전은 하지 않으면서 같은 앵글로색슨족의 나라인 영국에 무기를 팔면서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영국에 대한 전쟁물자 운송을 막기 위해’ 독일의 잠수함 U보트들이 미국의 상선들을 침몰시킬 때, 이것을 명분으로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서 1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1차세계대전은 발발한 지 4년만인 19018년에 끝났고, 미국은 이때부터 신흥강국으로 떠올랐는데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135년 만에 세계의 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1차세계대전 때는 그 이전 전쟁까지는 없었던 탱크가 나오고 비행기가 나온다. 비행기는 1903년 미국의 라이트형제가 최초로 개발했는데, 불과 11년 후인 1914년에 발발한 1차대전에 전투기로 등장한 것이다. 산업의 경쟁력이란 이렇게 무섭다.
1차대전 패망 후에 독일은 다시 경제부흥을 이루어냈고, 그동안 자존심이 상해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인들은 ‘게르만민족주의 나치즘을 내세우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내세워 뭇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1939년 폴란드부터 시작해서 유럽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하면서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는데, 2차세계대전 때는 [영국-프랑스-소련-미국]이 동맹을 맺고, [독일-이탈리아-일본]이 동맹을 맺는다. 2차세계대전 때도 미국은 나중에야 전쟁에 참여한다.
일본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는데,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마저 점령하고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점령한 것을 확인한 이후였다. 그리고 일본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점령하고 있던 식민지들을 다시 뺏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전부터 영일동맹을 맺고 있다가, 1910년 조선에 무혈입성하면서 이미 대륙진출의 발판을 닦아놓은 상태에서, 1914년 1차세계대전 때는 영국과 독일이 붙을 때 중국에서 독일 조차지(다른 나라의 땅을 어느 시기까지 빌리는 땅. 청나라는 아편전쟁 후에 항구도시에 서양의 조차지들이 많이 생겼는데, 무력으로 빼앗긴 것임)를 점령한 덕분에 1차대전 후에는 승전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고, 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어떠한 전쟁 피해도 입지 않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1929년 미국에 대공항이 닥친 2년 후인’ 1931년에는 ‘일본군 스스로 만주철도 폭파 후에 그것을 만주사람들 테러라고 뒤집어 씌워서’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에는 ‘1912년 청나라에서 독립한’ 한족들의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의 주요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먹으려고 했던 중국을 ‘영국이 독일과 전쟁 준비한다고 중국에 미치는 힘이 떨어진 틈을 타서’ 일본이 치고 들어간 것이었다.
영국은 강성했던 청나라를 아편으로 썩어들게 한 나라이다. 만약에 청나라가 아편중독 없이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청나라는 자체 내수시장이 크고 충분히 문물이 발전되어 있는 문명국이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짧은 시간 안에 강성대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영국이 국가적인 전략차원에서 아편으로 청나라의 근대화를 막은 것이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아편으로 썩어들 때, 영국 혼자서는 청나라를 감당할 수 없어서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공동으로 달려들어 청나라를 내려앉힌 것이다.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의 황제들 이후로 중국 역사상 최대의 강성대국으로 발전한 나라로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그 어떤 나라도 혼자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였는데, 이들 나라의 군함들이 연합을 해서 항구의 일부 거점들만을 점령하고는 영국처럼 아편을 퍼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아편이 ‘스스로 흘러들어가는 중독성 때문에’ 중국 내륙까지 파고들면서 청나라가 내려앉은 것이다.
영국이 청나라와 아편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영국 의회에서 ‘국가 차원에서 청나라에 아편을 퍼트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찬반 투표를 했는데, 영국의회에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인도처럼 정복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아편을 퍼트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투표 결과가 과반을 넘어서, 영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청나라를 아편에 썩어들게 한 것이었다.
영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중국을 먹으려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아편까지 퍼트려서 공을 들여놨는데 자기들끼리 유럽에서 전쟁 준비하는 틈을 타서, 일본은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1939년에는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고 그 다음해 5월에는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영국의 본토까지 공격을 시작하자 그해 1940년 9월에 독일과 이탈리아하고 [3국동맹]을 맺고는 중국에서 바로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을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반도의 북부를 점령했고, 그 다음해인 1941년 7월에는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인도차이나반도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일본이 [남방전략]을 펼치면서 인도차이나반도를 급하게 점령한 이유는 전쟁 수행을 위한 석유를 확보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때, 일본은 만주의 병력을 동남아시아로 집중하기 전인 1941년 4월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는데, 그 2달 후인 1941년 6월 독일군의 히틀러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카스피해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그 다음 달인 7월부터 만주의 관동군을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투입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구 열강이 수백 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식민지들을 다시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동남아시에서 유럽 국가들을 몰아낼 때 초창기에는 해방군으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유전지대까지 점령하자 미국은 그 한 달 후인 1941년 8월에 미국 내 일본인들의 자산을 동결하고 ‘그동안 일본에 수출하면서 돈을 벌고 있던’ 석유에 대한 대일본 석유수출금지를 선포하였다.
그 당시에 일본은 석유의 전량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석유수출을 금지시켰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보면 비축하고 있던 석유가 떨어지면 비행기-군함-탱크를 움직일 수 없어서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그때까지 돈 받고 일본에 전쟁할 석유를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은 영국과 더불어 일본한테 ‘조선의 통치는 인정할 테니, 점령지인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철수하라’고 하였는데, 미국은 그때까지 고립주의를 지키면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전쟁으로 돈을 벌면서 자국의 산업육성과 함께 태평양을 제패할 수 있는 해군력과 공군력을 양성시켜놓은 상태였다. 미국은 2세계대전이 발발한 1년 후인 1940년에 해군기지를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의 하와이 진주만으로 집결시켜놓고 항공모함들도 여러 척 보유한 상태였는데, 미국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을 제압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의 압력에 일본은 거대한 군수산업 신흥강국으로 성공한 ‘미국과의 전쟁을 하느냐?’ 미국의 말을 듣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느냐?’로 일본 내부에서도 논쟁이 일어나는데, 결국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포기 안 하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석유를 확보한 후에’ 아시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기 위해 미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공습이다.
진주만 공습은 태평양 가운데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국의 해군력을 선제 기습 공격으로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해군만 제압하면 인도차이나반도와 중동에서 석유를 수송해올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때 일본은 하와이의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미국 군함들이 일요일만 되면 모두 항구에 들어와서 정박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41년 12월 7일 아침 8시를 공격시간으로 잡고(처음에는 11월 17일로 잡았다가 진주만 수심이 낮은 것을 알고 어뢰를 보완한다고 12월로 밀린 것임), 일본의 해군 비행사들은 가고시마 만에서 몇 개월 동안 폭격훈련을 한다. 가고시마만이 진주만과 비슷한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1월 22일 353대의 전투기기들을 실은 항공모함 6척과 항공모함을 보호하기 위한 25척의 전함 등 31척의 함대가 일본 홋카이도 북부 쿠릴열도 히도카프만으로 은밀히 모여들었다가, 4일 후인 11월 26일 진주만으로 출격을 하는데 그날도 미국으로부터 똑 같은 압력이 들어왔고, 그날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송신했다.
이때 일본 함선은 통신보안을 위해서 모든 통신교환을 금지하고 배들끼리도 섬광신호로만 연락을 취하면서 알라스카로 가는 알류산열도를 타고 가다가 꺾어서 하와이로 내려갔는데, 추운 날씨와 험한 바다 때문에 일반 상선들은 다니지 않는 항로를 타기 위해서였다.
12월 2일, 일본 함대는 뒤따르던 유조선으로부터 마지막 연료보급을 받고 전속력으로 하와이로 돌진한다.
그리고 5일 후, 그러니까 일본 홋카이도 북부 쿠릴열도 히도카프만을 떠난 지 12일 만인 1941년 12월 7일 오전 새벽 5시! 일본 함대는 계획대로 하와이 북쪽 370km의 해상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때 일본함대의 나구모 제독은 일본 본국으로부터 ‘하와이에 정박 중인 미 군함 중 구식 전함 8척은 그대로 있는데 최신예 항공모함 4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연락을 받는다. 함선의 위치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 통신보안을 위해서 전권을 위임받고 ‘본국과도 무선통신을 안 하고 군함들 사이에도 섬광신호로만 통신을 해오다가’ 전투기들을 출격시킬 수 있는 하와이 목표지점 해역에 들어와서 최종적으로 본국과 무선통신을 하니 주요 공격 목표물이었던 항공모함 4대(요크타운호, 사라토가호, 렉싱턴호, 엔터프라이즈호)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 전에 몇 개월 동안 전투기 비행사들이 폭격할 목표물을 할당받고 훈련을 했는데, 353세대의 전투기 중 80대의 폭격기가 항공모함 4대를 폭격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본국과도 통신을 안 하고 잠행운항을 하던 그 사이에’ 적의 핵심전력인 항공모함 4대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함대에서는 정찰기 한 대를 띄웠는데 이 정찰기가 오전 6시45분 하와이의 미군 레이더 기지에서 조지엘리엇이란 신참하고 조로커드란 병사한테 잡힌다. 그래서 레이더 기지의 병사들이 상부에 보고했는데, 상부(사프트기지)에서는 알았다고만 대답하고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함대에서는 오전 6시에 183대의 공격기들 1파가 떴는데, 이것도 7시2분 하와이 레이더기지의 조지엘리엇과 조로커드에게 다시 잡혀서 ‘220km 지점에 시속 300km의 속도로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거대한 비행군단이 몰려오고 있다’고 보고를 했지만 미국의 정보센터의 당직을 서고 있던 타일러 중위라고 하는 정보 장교가 '별 것 아닐 것이다'라는 대답만 했다. 그러자 미국의 레이더기지 두 명의 병사가 레이더를 끄고 밥 먹으러 가버린다.
그리고 잠시 후 아침 8시경 ‘하와이 북쪽 370km 해상 항공모함에서 아침 6시에 발진한’ 일본 전투기들 1파 183대가 하와이의 진주만과 비행장들을 강타했고, 그 1파가 빠져나갈 때 ‘일본 항공모함에서 아침 7시에 발진한’ 170대의 공격기들 2파가 다시 하와이를 강타했다. 1시간 45분 동안의 폭격 후에 일본 폭격기들은 일시에 북쪽으로 사라진다. 연료 때문에 항공모함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함대에서는 3파의 비행단을 출동시키지 못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단 한 척의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도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반격을 당하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폭격을 마치고 돌아온 2파의 비행단들이 항공모함에 내려앉고 잠시 후인 그날 1시 30분, 일본 함대는 서둘러 일본으로 철수하고 만다. 비밀리에 진행한 진주만공습에서 꼭 폭파시켜야할 미군의 가장 중요한 핵심전력인 항공모함 4대를 보지도 못하고 찝찝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은 비행기 29대가 격추되면서 조종사 55명이 전사했다. 미국은 해군 2008명, 육군은 228명이, 해병대가 109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68명이 공습으로 사망하고, 부상자 수가 1000여명이었고, 하와이의 항공 전력이 와해되고 진주만에 정박 중인 군함들이 대부분 침몰되었다.
그런데, 일본 전투기들이 확실히 폭격을 못하고 돌아가는 바람에 미군은 수심15미터를 넘지 않은 진주만에서 대부분의 군함들을 다시 건져 올려 수리해서 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공습 직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바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불타오르는 애국심으로 다투어 군에 입대했고, 미국은 진주만공습 당시 살아남은 항공모함의 위력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제압하면서 한동안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아시아를 다시 미국이 점령하게 된다.
소련군은 초창기에는 독일군에 밀리다가, 일본이 만주의 관동군 병력의 주력을 동남아시아로 빼돌린 덕분에 동부전선의 극동군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릴 수 있어서 1942년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에서 150만 명의 독일군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패전 이후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소련과 미국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에 결국 2차대전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당시에 ‘만주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만주에서는 1959년에 흑룔강성에서 대경유전이 발견되어 중국 국내 자급이 가능해졌고, (지금은 거의 고갈 상태지만) 1980년대에는 그 석유를 북한과 베트남에 수출까지 하였다.
만약에 일본이 그 당시에 이 대경유전의 석유 매장량을 알았다면 소련군으로부터 이 석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만주의 병력을 동남아시아로 빼돌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소련도 동부전선의 극동군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릴 수 없어서 독일군에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을 것이고, 일본은 만주의 석유만으로도 점령해놓은 아시아를 통치하면서 계속 전쟁을 수행하여 중국 본토까지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미국을 침공할 필요가 없었고, 일본의 희망대로 대동아를 이루었다면 미국도 제압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미국이 대일본 석유수출금지조치 같은 전략이 먹혀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당시에 만주에서 석유가 발견되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미국 본토에서 생산되고 있었는데, 미국은 석유만으로도 일본의 전쟁능력을 제어할 수 있어서 ‘일본하고 전쟁을 치르기 불과 몇 달 전까지’ 일본에 석유를 팔아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로 우리는 모든 전쟁은 나라들 간의 이해관계로 발생하고, 모든 전쟁은 전략과 선제공격이 있고, 모든 전쟁은 이해관계로 적이 될 수도 있고 동맹이 될 수도 있고, 그 동맹이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선제공격에 아주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 더 이야기하면, 미국은 참 준비를 잘하고! 미국은 참 잘 참고, 미국은 때리라고 참 명분을 잘 만들어줘요. 대일석유금수 조치에 따른 진주만공습, 애치슨라인의 6.25, 통킹만 사건의 베트남,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하게 한 걸프전....... 다 이겼는데, 베트남의 호치민한테는 졌다.
그리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한민족은 베트남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박정희 김일성 이후로 많이 세지기도 했고! 박정희 이후로 남한은 경제가 발전했고, 김일성 이후로 북한은 핵무기를 20개 정도나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박정희는 ‘독재한다’는 욕을 먹으면서 경제부흥의 기반을 닦았고, 김대중은 ‘퍼준다’고 욕을 먹으면서 박정희가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핵무기를 북한이 갖고 있도록 해준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한방씩을 맞고 미국(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한국도 해방시켜줬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주장은 ‘일본이 미국한테 져서 한국을 해방시켜줄 때, 1910년 한일합병으로 합병한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어도 한일합병 5년 전인 1905년에 별도로 빼앗은 독도는 돌려준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일본은 ‘조선은 500년 동안 공도정책을 펼쳐왔는데, 일본은 그 당시 무인지경의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한 것일 뿐이다’면서 독도문제를 국제재판소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다.
조선의 공도정책이란 섬을 비우는 정책이었다.
조선은 500년 가까이 ‘제주도와 거제도 같이 큰 섬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섬에 사람이 들어가 살지 못하게 하였고, 만약에 사람이 섬에 들어가 살면 잡아와서 사형에 처하거나 엄벌에 처했다. 조선이 500년 동안 ‘섬이나 바닷가 가까운 육지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한’ 공도정책을 펼친 이유는 고려말기 이후로 강력해진 일본 왜구들들 두려워하여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는 보급루트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왜구는 단순노략질 패거리가 아닌 통일되지 않은 일본의 지방정부의 정규군 단위일 때가 많았다. 우리역사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왜구와의 전공으로 유명해진 장군들인데, 역사를 보면 그 당시의 왜구들은 작은 국가단위의 전투 병력이었다.
왜구의 출현은 여몽 연합군의 2차례에 걸친 일본 정복 실패 이후로 고려 말부터 급속히 심해졌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뜸해진다. 1590년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일본을 최초 통일한 이후로 일본에도 중앙집권 체제가 완성되면서 지방 정부를 통제하면서부터 지방단위에서 집단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고,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사후에는 토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가 집권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로는 왜구의 출현이 줄어든 것이었다.
그 당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시대로 인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는 벌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는데, 작은 섬나라 일본이 서양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이유는 일본 자국의 내란에 단련된 사무라이들의 전투력 덕분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지금의 북한과 같이 항시 전쟁에 대비한 병영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의 공도정책은 일본 사무라이 집단(왜구들)의 전투력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공도정책과 비슷한 것으로 만주대륙의 청야(淸野)정책이 있다. 만주의 유목민들이 ‘중원이 강대해질 때’ 중원 세력의 만주 정벌을 어렵게 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만주에 이르는 길목의 수백 킬로미터의 땅에 사람이 살거나 농사를 못 짓게 했는데, 그것은 중국의 대군이 만주를 정벌하러 올 때 보급로와 휴식처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이러한 청야전략은
러시아가 두 번의 큰 전쟁에서 써먹었는데 -
한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군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 프랑스군이 들어오는 모든 길목에서 식량과 사람을 도피시키고 프랑스 군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불질러버리고 모스크바까지 불질러서 비우고 러시아 사람들은 더 추운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모스크바까지만 가면 식량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나폴레옹의 대군이 모스크바에 도착해서도 뺏어먹을 것이 없어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을 때, 추위에 단련된 사람들이 기마전으로 게리라 전을 펼치면서 쫒아가서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 프랑스 대군 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폴레옹과 극소수의 병사들에 불과했고, 이후로 나폴레옹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프랑스에서도 정권을 잃고 엘바 섬으로 퇴출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러시아의 또 한 번의 청야전략은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군이 침공할 때 또 다시 모스크바까지 비운 상태에서 더 추운 북쪽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까지 도망갔다가, 겨울이 오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독일군 150만 명을 초토화시키고 2차대전의 전세를 바꾸어놓게 된다. 이후로 독일은 밀리면서 패망의 길을 걷고, 히틀러는 방카에서 자살하게 된다.
이때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일본군이 만주를 비우고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동남아시아로 전력을 집중시킨다는 것을 알고서’ 일본 관동군과 대치하고 있던 소련 극동군과 시베리아군을 새로 개설한 시베리아 열차에 싣고서 달려올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것들로 우리는 청야정책이나 청야전략이 그 나라의 국토를 지키기 위한 유효한 전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조선의 공도정책도
왜구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쟁사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만주의 통구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로 대부분 성을 지키는 전략이었다. 성을 지어서 외적이 쳐들어오면 외적이 이용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옮기거나 숨기지 못할 것들은 모두 태워버리고 성안으로 들어가 성을 방어하는 청야수성전략.
그 과정에서 침략자들을 깊숙이 끌어들여서 죽이거나, 침략자들이 배고파서 힘없을 때 쫓아나가서 죽이거나, 돌아갈 때 길목을 막고 있다 죽이거나, 그럴 힘도 없으면 성안에서 버티면서 침략자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 그러니까 조선이 공도정책을 폈다고 해도 조선 땅은 조선 땅인 것이다. 조선 섬도 조선 섬이고!
그런데, 문제는 제국주의 시대에 대양의 섬들을 정복한 서구열강들이 2차대전 이후에도 일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섬들은 식민지에서 독립시켜줬어도 사람이 살지 않은 섬들은 그대로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현실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분쟁화 시켜서 독도 문제를 국제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형님 : 독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일본도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뻔히 알 것인데....... 그런데도 왜 그렇게 우기는 것이지?
용하 : 시비 걸어서 독도 해역을 공동수역으로 만들어서 나눠먹기하고, 동해 동쪽 바다는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확정해서 독점하려고!
사장 :.......우리가 거기에 계속 당해왔던 것이고?
용하 : 예. 일본 전략에 말려서 당해온 것이지요.
형님 :....... 그럼, 왜 그렇게 당했는데?
용하 : 결국은 우리가 제대로 준비를 못한 탓이지요.
사장 :.......
용하 : 그러면서 일본은 계속 공격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면서 독도에 위기감을 조성해서 공포분위기로 몰아서 우리가 움츠러들게 하는 전략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전략에 우리가 말려들어 있는 상태라고!
사장 : 일본이 독도에 위기감을 조성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요? 우리나라가 움츠러들게?
용하 : 그렇잖아요? 일본이 공격적이고 우리가 수동적이고.
형님 :.......
용하 : 그리고 거기에 우리를 만성이 되게 적응시켜가는 과정이고!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독도는 한일 분쟁 수역]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형님 :.......?
용하 : 일본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는 진짜 목적은 독도를 뺏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걸어서 ‘독도해역을 한일 공동수역’으로 하고 ‘동해바다 동쪽 황금어장의 반을 일본 경제수역’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입니다.
사장 :.......
용하 : 물론, 그 해저에 깔린 에너지자원들도 미래에는 개발해서 쓸 계산도 할 것이고. 지금이야 바다 밑에서 에너지 자원을 캐내는 데 기술이 부족하고 돈이 많이 들어서 경쟁성이 부족하지만 미래에는 그 에너지자원들도 경쟁력이 생길 것이니까.
형님 :.......
용하 : 냉정하게 말하면, 독도는 국제적으로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사실상 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전략이 ‘한국이 국제적으로 독도를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란 말입니다.
형님 :.......?
용하 : 우리나라가 독도를 세계적으로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독도가 일본의 200해리 경제수역에도 포함되고 우리나라 200해리 경제수역하고 겹치게 돼서....... 결국은 독도를 우리하고 일본하고 나눠먹기 해야 하고, 독도 동쪽으로는 사실상 일본이 다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일본이 그것을 노리고 것이라고.
사장 :.......?
용하 : 독도가 [200해리 경제수역] 같은 권리를 세계에서 인정받으려면 국제적으로 섬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세계적으로 볼 때 독도는 섬이 아니라 암석입니다. 암석!
사장 :.......
독도는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도가 [12해리 영해] [24해리 접속수역] [200해리 경제수역]의 권리를 가지려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섬(Island)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독도는 국제적으로 섬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암석(Rocks)으로 취급되고 있다.
암석(Rocks)은 [12해리 영해] [24해리 접속수역] [200해리 경제수역]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한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통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통하는 국제협약이다. 그래서 독도는 한국이 지배하고 있는 암석일 뿐, 일본을 떠나서 국제적으로 독도는 바다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암석(Rock)은 경제수역이나 접속수역에 들어있는 암석일 뿐이고 암석은 12해리 영해도 갖지 못한다. 12해리 영해를 가지려면 기선이나 기점이 나와야 하는데, 기선이나 기점은 섬이라도 유인도에만 주어지는 자격이고 암석은 기선이나 기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하 : 독도가 섬으로 인정받으려면 사람들이 독도에 몰려가서 경제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벌어먹고 정착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그것을 충분히 못해서 세계적으로 독도를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일본이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독도에 위기감을 조성해서 공포분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라고!
사장 :........?
용하 : 세계적으로도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독도는 한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지역으로 취급하고 있고.
형님 : 세계에서도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용하 : 현실이 그래요.
사장 :.......
형님 : 그럼, 만약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에 몰려가 경제생활을 하면서 정착해 살면서 그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
용하 : 독도가 자동적으로 섬으로 인정받아 독도가 실질적인 우리나라 영토가 되면서, 200해리경제수역 권리도 갖게 돼서 독도 해역이 우리나라가 독점하는 전관수역이 되고, 지금 일본이 독점하고 있는 동해바다 동쪽 황금어장 절반도 일본하고 우리하고 공동수역이 될 수 있는데.......
사장 :.......?
용하 : 이것을 못하게 하려고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에 몰려가 정착해서 경제생활 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독도에 사람들이 몰려가 정착해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형님 :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독도에 몰려가 정착해서 경제생활을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용하 :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은 일본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내부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더 크다고 봐야지요. 국제적으로 독도를 섬으로 인정 안 해주고 있는데?
사장 :.......?
형님 :.......?
용하 : 형님, 지금 해운대 아파트 놔두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형수님하고 애들 데리고 독도 들어가서 살라고 하면 살겠어?
형님 :....... 못 살지. 이혼당하지!ㅎㅎㅎㅎ-
용하 : 사장님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해운대 떠나서 사모님하고 자식들 데리고 독도 들어가서 정착해서 경제생활하고 살라고 하면 살겠어요?
사장 : 그냥 해운대 살지요! ㅎㅎㅎㅎ-
용하 : 남해안 다도해에도 독도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섬들 중에 무인도가 많습니다. 사람 살던 섬들도 ‘좀 더 편하게 살라고’ 지금은 젊은 사람들 거의 다 빠져나가버리고....... 허물어져가는 빈 집이나 돌담들만 수풀에 덮여있고....... 남아있는 집이라곤 노인들 몇 분만 남아있는 섬들이 많고. 그게 다 경제 때문이라고!
형님 :....... 하기야, 나도 섬에서 나왔으니까.
용하 :....... 독도가 먼 바다에 노출된 작은 바위섬이라 풍랑도 심하고 태풍 한번 지나가면 남아나는 게 없을 정도이고, 육지에서 216km 떨어졌고 울릉도에서도 87km 떨어져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 들어가서 정착해서 스스로 경제생활하고 살라고 하면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있겠어요?
형님 :....... 이해가 된다.
용하 : 거기다가 일본하고 영토 분쟁도 있고, 일본에서도 ‘독도가 섬으로 인정받으려면 사람들이 몰려가 집을 짓고 정착해서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는 유엔협약에 따른 섬의 조건을 뻔히 알고 있는데?
사장 : 아.......
용하 : 한일합병 때 일본은 고종하고 대신들 겁줄라고 일본 군인들이 경복궁을 포위한 가운데 야쿠자들을 경복궁 안으로 들여보내서 민비하고 궁녀들을 잡아 죽여서 불태워버렸다고. 그 후에 고종은 무서워서 궁궐을 비우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가서 숨어버렸고!....... 그런데 지금 어떤 민간인이 ‘생활터전도 없이’ 독도에 쉽게 들어가서 정착할 수 있겠어요?
사장 : 아.......
형님 :.......
일본이 민비(죽은 2년 후에 민비에서 명성황후로 승격됨)를 죽인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1895년 ‘을미사변이 있기 1년 전인 1984년 7월에 민비에게 쫓겨난 대원군이 섭정으로 다시 복귀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실권은 여전히 민비와 그녀의 친척들이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왕은 고종이었지만 민비가 남편인 왕과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휘어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 조선에는 기독교(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의 영향으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동학사상(민주화운동)이 퍼지고 있었는데,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 왕권을 두고 싸움을 하다가 조선의 국력이 더 쇠퇴했고, 그 당시에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과 러시아(공산주의 혁명 이전의 짜르 체제의 제정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때까지도 크게 힘을 쓰지 못한 시기였음)
조선에서 동학사상으로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주체적인 개화사상이 퍼지기 시작할 때 일본에서는 조선보다 먼저 동양 최초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은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메이지유신이 성공했는데, 조선에서도 메이지유신을 성공한 일본처럼 ‘사람을 상놈과 양반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노예제도)를 타파해야 한다.’는 개화파(친일파)와 ‘상놈과 양반은 씨가 달라서 절대로 신분제를 철폐할 수 없고, 상놈은 계속 상놈으로 살아야하고 양반은 양반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득권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민비는 처음에는 황제가 다스리는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나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지고, 러시아가 나서서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자 이번에는 러시아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1884년 동학농민운동(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인내천 사상,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조선관군이 동학군한테 밀릴 때, 조선조정에서는 ‘동학사상에 물들어 임금과 양반도 몰라보고 신분제를 폐지하려는 폭도들의 진압해 주라’고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들여보내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를 제압했는데....... 이에 조선정부는 청나라 대신 일본군에 ‘동학사상에 물든 폭도들의 토벌을 요청’했고, 일본군이 조선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쳐서 ‘평등사상을 주장한’ 동학사상의 농민 30~40만 명 정도 학살하였다.
조선정부는 봉건왕조의 신분제 유지를 위해서 청나라군과 일본군에 자국민의 토벌을 요청한 것이었고, 일본은 조선의 자주정신이 꽃피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선군 대신 동학농민들을 섬멸한 것이다. 노예제도가 있는 봉건사회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평등하다는 민주화사회의 경쟁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 사회의 경쟁력이 월등하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를 위해서 싸우니까. (이것이,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세계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프로테스탄트 사상이다.)
이것을 알고서 일본이, 일본은 1867년 메이지혁명으로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평등사회를 만들었으면서 조선에서는 자주정신이 피어나지 못하도록 조선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조선군 대신 조선왕조를 위해 싸우면서....... 친일파를 만들면서....... 자주적 경쟁력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는 동학사상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득권층과 제국주의적 일본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 7천 명 넘게 죽고, 광주민주화운동 때 몇 백 명이 죽었다고 하니까....... 동학혁명 때 조선의 민비-대원군-고종 같은 기득권 세력이 일본군한테 ‘임금도 몰라보는 동학쟁이들을 모조리 섬멸해주라’고 하여, 동학사상에 물든 30~40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됐다고 하니까....... 동학혁명 때 얼마나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1590년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일본을 최초로 통일하고 1592년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늘 있어왔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300년이 안 되어 다시 조선에 일본 군대가 들어온 것이었고....... 이번에는 조선왕조의 요청으로, 조선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과 조선의 관리들과 조선의 양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면서....... 조선관군이 정보만 주면, 조선팔도 어디라도 쫓아가서 동학사상에 물든 자들을 몰살했는데,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초토화시킬 목적이었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군에 겁을 먹고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소수의 양반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조선정부도 믿을 수 없고, 일본군하고도 싸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전쟁 한번 안 치르고 동학혁명 16년 후에 서류상만으로도 ‘한일합병’을 이루어서 조선을 점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각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식 부국강병을 추구한 덕분에 급속히 산업이 발전하면서 경쟁력이 생긴 일본이....... 자기들 욕심밖에 모르는 후진국 조선의 대원군-민비-고종 같은 왕실과 양반들을 이용해서....... 전쟁도 아닌 정당한 지원을 한 후에....... 결국 조선의 왕 고종이 조선을 팔아먹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전략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에서 동학군이 섬멸되자 민비는 다시 일본과 멀리하고 황제가 다스리는 봉건국가인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을 견제했는데, 이에 일본에서는 (고종은 물로 보고) 한일합병을 위해서는 실권을 잡고 있는 민비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하고, 동학혁명 다음 해인 1895년 10월 8일 흥선대원군을 앞잡이로 세워서 야쿠자들을 이끌고 민비를 잡으러 갔고, 대원군의 지원과 (사실상) 고종의 묵인 하에 최소한의 일본군이 경북궁을 포위하고 일단의 일본 야쿠자들이 경복궁에 들여가서 고종과 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민비와 민비를 감싸고 있던 궁녀들을 죽이고....... 죽인 여자를 강간까지 하고....... 불질러버렸다. 또 일본과 대원군과 고종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민비를 죽여준 덕분에 고종은 비로소 조선 왕으로서의 실권을 갖게 되었다.
역사의 기록에는 일본 야쿠자들이 민비를 칼로 난도질할 때 고종과 황태자가 옆에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조선의 실권자인 민비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 후계자로 내세울 고종과 황태자를 민비가 죽어가는 앞에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고종과 황태자는 떨면서 눈앞에서 난도질당하면서 죽어가는 민비를 봤다는 것이고. 그때 고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마누라한테 권력을 빼앗겨 치욕같이 살면서 민비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민비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통쾌했을까? 스스로 비참했을까?
역사는 일본 야쿠자들이 고종 앞에서 민비를 죽여 놓고 능욕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야쿠자들이 민비를 죽여 놓고 강간을 했겠는가? 살려놓고 강간을 한 다음에 난도질을 했겠는가? 어쨌든 간에 일본이 야쿠자들을 시켜서 그것을 ‘이후로 조선의 통치자가 될’ 고종과 고종의 후계자인 태자 앞에서 보여줬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역사를, 일본이 조선의 대가리들을 가장 비참하게 짓밟아버린 것이었고, 대원군이나 고종은 500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의 가치를 더할 나위 없이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민비의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앞장서서 야쿠자들을 끌고 와서 며느리를 죽이고 강간을 하게 했고, 그 아들인 고종과 그 손자인 태자가 그것을 지켜보도록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른 척하려고 한다. 대원군이나 고종이나 민비는 우리 역사에서 추악한 인간들이다. 이것들이, 그 1년 전에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우친’ 조선의 백성인 동학민들 30~40만 명만 학살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개 같은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명분으로도 이런 인간들을 미화시켜서는 안 된다. 조선 왕조의 역사는 그 말로가 더러웠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 역사의 가치는 무너져가는 왕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우친’ 동학혁명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있었던 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하고, 정체성의 가치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할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
민비가 죽은 이후로 조선 조종은 일본이 계속적으로 조성하는 공포분위기에 겁을 먹었고, 그 와중에 고종은 민비가 죽은 2년 후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승격시켰고, 민비가 죽고 15년 후인 1910년 조선 조정과 고종은 ‘조선을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한일합병 서류에 도장을 찍고 서명하였다. 일본이 조선이라는 500년 역사의 국가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다. 일본이 전략적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한 것이다. 전쟁해서 자기들도 피 보면서 점령하는 것보다 경제적이니까.
용하 : 그리고 실제로 8.15광복 이후로도 일본이 독도가 일본 땅도 아닌데도 ‘독도를 미군 폭격기 연습장으로 사용하라’고 해서, 미군전투기들 폭격으로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우리나라 어부들이 많이 죽어서 독도에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사장 :.......?
용하 : 미군 전투기들이 독도에 폭탄을 퍼부어서 독도에 공포분위기가 조성된 이후로 일본 사람들이 직접 독도에 여러 번 침범을 했는데........일본 사람들이 독도에 침범하는 것을 울릉도 사람들 독도의용수비대들이 막아낸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처럼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해서!
사장 : 아.......
용하 : 독도의용수비대분들은 미역채취 같은 어로작업도 하면서 ‘경찰에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전까지’ 3년 넘게 독도를 지켰는데, 정부에서 월급도 안 받고 자기들이 경제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의 경제터전을 지켜낸 것이라고. 이분들은 조선말기 왕족이나 귀족들보다 백배는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사장 :....... 훌륭하신 분들이네.
1948년 6월 8일 오전에 우리나라 어부들이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을 때 미군폭격기들이 독도를 폭격해서 미군 발표만으로도 우리나라 어부들 14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미군은 1947년부터 독도를 미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했었는데, 한국 정부가 항의해서 미군은 1952년 2월 27일 독도를 폭격연습장에서 제외시켰다. 그 당시에 미군이 독도를 미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승인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 이전에 맥아더라인에 보면 분명히 독도는 한국령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군이 한국정부의 승인이 아닌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고 독도를 전투기들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독도를 일본과 한국의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지금도 미국은 독도를 한국과 일본의 분쟁지역으로 취급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도 1948년 미군 폭격기의 독도 폭격은 일본 정부의 미공군 폭격연습장 승인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때도 미국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가 6.25전쟁 중인 1952년 5월 일본 의회속기록에는 “독도가 연습장으로 지정되면 일본의 영토로서 확인받기 쉽다는 점에서 볼 때 외무성이 독도의 폭격연습지 지정을 바라느냐?”는 한 의원의 질문에 외무성 관계자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한 기록이 있고, 그 3개월 후인 1952년 8월에는 일본인들이 독도에 몰래 상륙해서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말뚝을 박아놓고 간 것을....... 독도 사람들이 독도에 일하러 갔다가 뽑아버렸다.
그 이후에 홍순칠 대장 등 33명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그 중 16명이 1953.4.20∼1956.4.8까지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 거주하면서 미역, 전복, 소라, 물고기 같은 어로작업을 하기도 하고, 울릉도 사람들한테 지원도 받으면서 독도를 지켜낸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 정리는 다음과 같다.
- 1952년 1월 18일 : 정부에서 주권선언
- 1952년 8월 10일 : 2회에 걸쳐 일본측 불법 영토비 설치(즉시 제거)
- 1953년 4월 20일 : 독도 의용수비대장 조직 경비개시(수비대장 홍순칠)
- 1953년 6월 24일 :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귀향 조치
- 1953년 7월 12일 :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 발포, 격퇴
- 1953년 8월 5일 : 대한민국 영토비 건립
- 1954년 8월 5일 :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총격전 격퇴
- 1955년 11월 21일 :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3척, 항공기1대 발포, 격퇴
- 1956년 4월 8일 : 경비임무 전환(민간수비 → 국립경찰)
- 1966년 4월 12일 :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 근무공로훈장 수여.
위 독도의용수비대 활약상 중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1953년 6월 24일 :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귀향 조치”라는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그때 6.25 전쟁 중으로 1953년 7월 27일에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을 맺었는데, 그 한 달 전에 일본 의회에서 독도문제를 논의하고는 일본에서 전쟁하고 있는 나라에 고등학생들 타고 있는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실습 보냈다는 것이다. 그 학생들은 뭣도 모르고 실습선을 타고 실습을 나왔을 것이고. 만약에 저때 독도의용수비대가 총 가지고 있다고 저 애들 죽였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김유신이 새파란 사춘기 화랑 관창을 보내서 계백이 관창을 죽였을 때처럼. 일본의 교활안 전술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용하 : 그런데 그때는 일본이 2차세계대전 패전 직후라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미군정 통치하에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 자위대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2위의 군사비용을 사용하고 있거든. 특히 해군력에! 일본 자위대 군함이 일본 영토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독도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전쟁이라고.
형님 :.......
용하 : 그러니까 독도문제도 알고 보면, 어떻게 사람들이 독도에 정착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느냐의 경제 문제라고! 우리정부에서도 지금까지 그것을 알면서도 못했던 것입니다. 능력이 안 돼서!
용하 : 실제로 독도에 가서 살라고 하면 누가 좋아라 하겠어요?
형님 :.......
용하 : 대신에 편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만 해주면 서로 들어갈라고 하겠지요.
사장 : 독도 문제도 결국은 경제성 문제네!
형님 : 그럼 세라믹인공어초로 독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
용하 : 만들어냈지.ㅎㅎㅎㅎ-
첫댓글 많이 학습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