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우리가 서정주의 시를 시작하는데 서정주는 근, 현대를 통 털어 가장 대접을 받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큰 시인이에요. 저는 그를 큰 시인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800여 편의 시를 남겼고 또 시의 양이 많아도 전집을 읽어보면 퇴작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뛰어난 시인이라 생각이 들고 더우기나 그의 시 세계는 변화무쌍하고 다양합니다. 단일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그의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기 시 세계와, 중기 시와 또 내지는 질마재 신화로 가면 또 다른 얘기를 하고 있고 질마재를 넘어서서 여행시편에서는 또 다른 얘기를 들려줍니다. 끊임없는 자기 변신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배울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 근, 현대사에서 서정주가 이렇게 독보적인 평가를 받고 또 동시대의 시인들이 그의 영향을 다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정주의 행적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정주의 시는 단순하지가 않고 정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죠. 총괄 평가는 이 시집을 마친 후에 하겠지만 한 가지 말할 것은 그의 시는 단순하지가 않고 그는 영리한 시인입니다.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옛날에 비평에서 악동의 미소라고 했는데 그런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한 발짝 앞서가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쉽게 정복할 수가 없도록 만들어 놓아 연구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게 해놓았습니다. 김 수영도 그런 감이 있습니다. 김수영도 영리한 시인인데 영리한 시인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주는 시문학사에서 앞서 간 시인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서정주의 특징은 리듬감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 시의 형식적인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것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질마재 신화에서 터놓고 산문시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폭이 결코 좁지 않은 시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아는 김소월이나 김영랑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시 공부를 하는 우리는 서정주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주를 공부하지 않고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시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살아온 것에 의하면, 남들은 나는 서정주와 전혀 맞지 않다고 합니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옛날 한 지방지에서 서정주의 愛제자 14명의 명단을 붙여 놓았는데 그 안에는 고은도 있었고 김지하도 있었는데 문화면에 제 사진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서정주와는 다르지만 그의 시를 많이 공부했고 실재 시집이 닳고닳도록 공부하였습니다.
이 수업을 위해 다시 서정주의 시들을 보니 또 새롭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반드시 읽고 넘어 가야할 텍스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서정주의 다양한 시 세계라든가 또 서정주 시문학이 갖는 ?는 이라든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는 이제 시를 구체적으로 보면서 이야기하자구요.
대낮은 서정주의 초기 시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데 잘 들어보세요.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고
붉은 꽃밭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쫒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핫슈: 아편의 종류
핫슈는 아편의 종류이고 이 시 같은 경우에는 2, 3, 4음절이 일정하게 반복되어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고요. 매 행이 2개의 구절로 이루어져 있죠. ‘따서 먹는다. 자는 듯이 죽는다. 붉은 꽃밭이 있다. 그 사이에 길이 있다." 이런 식으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고요.
서정주의 초기 시 세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시라고 제가 말한 것은, 이 시의 형상은 여러분도 그려지지요? 여자아이가 끊임없이 유혹하면서 달아나고 남자는 끊임없이 따라가는, 온몸이 달아 따라가는 형상인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단순한 느낌에서 그치지 않고 심하게 얘길 하자면 부르고 쫓는 차원을 넘어서 관능적인 성행위까지 우리 머리 속에는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1행 1설로 한 번 해볼텐데 시는 1행 1설로 봐야 합니다. 우리 한국시 문학사에 가장 큰 문제, 비평의 위기가 온 것은 1행 1설로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한 행에 하나의 설명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시가 보이는 것이겠죠.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 그런 붉은 꽃밭 사이에 길이 있다." 편안히 죽는데요. 마치 죽음을 찬미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세상에 죽음을 지향하는 느낌입니다. 현대시는 죽음을 지향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현세보다 내세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정되고 영원하다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연에서는 죽음을 찬미하는 느낌이 있는 것이죠.
2행에는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 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님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 세계에서는 전통적으로 님은 대부분 남성입니다. 황진이의 시에서 나오는 님은 남자입니다. 여기서는 님은 여자입니다. 달아나면서 부르는 이 유혹이 마치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아편을 먹은 듯,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 길이라 하니까, 붉은 꽃밭 사이로 능구렁이 같이 늘어져 길도 연상되지만 핫슈가 주는 강렬함이 있잖습니까? 그 강렬함이 여자의 유혹과 중첩적으로 곁들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유혹에 끌려가는 나도 들어 있고요.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으로 받으며 나는 쫒느니 ” 거기서 나는 남성이죠. 그런데 나는 그 여자를 쫒는데,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코피 터졌다. 관능적 성행위의 표현이 너무 많아요. “남자가 코피 터졌다.” 하니까 자꾸 관능적 성행위가 느껴지는 것이죠. 또 내지는 1연에서 붉은 꽃밭사이, 붉은 꽃밭이 있는데 짝 있다고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붉은 꽃밭을 착 가로지르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붉은 꽃밭은 여자의 성기를, 능구렁이같이 착하는 것은 남자의 성기를 연상시킵니다. 상당히 관능적이죠. 서정주의 초기 시는 정말 관능적입니다. 이 시만 하더라도 당시 이 정도의 퇴폐적인 작품은 없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쓸려해도 이런 시 못쓰잖아요? 여러분들은 너무 도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관능적 표현을 못합니다. 지난 학기 숙제로 했을 때 다 느꼈잖아요. 관능적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관능적 표현을 쓰겠습니까? 늘 도덕적으로 일정한 틀거리, 규범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느닷없이 관능적 표현을 하려면 안 떠오르는 것예요.
관능적 상상력을 서정주는 젊었을 때 이 시를 보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이 작품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관능적 표현이 그의 시에는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집약화되어 있어요.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으로 받으며 나는 쫓아간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니까 관능적 성행위와도 연결된다고 했는데 피가 갖는 상징이 있잖아요. 피가 갖는 상징은 살아 있음이죠. 죽음에는 피가 흐르나요? 그런 점에서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1연과의 표현과 대비되고 있죠.
마지막 연인데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대낮에 나는 그녀를 쫓아가는데 내 몸은 밤처럼 달아 있다는, 밤처럼 펄펄 끓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얘기를 쓰시는지? 이 시는 부르고 쫓는 차원을 너머 관능적 성행위까지 연상시키는 그런 시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만 해도 이처럼 퇴폐적인 시가 없었기에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것이죠. 그래서 보통 평자들이 이 시의 주제를 생명과 죽음의 대립, 삶과 죽음의 대비라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 시가 정말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주가 갖는 영리함, 서정주 세계의 한 일면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서양 그림입니다. 서정주는 표현은 동양적이나 화법은 서양적입니다. 저는 아담과 이브이 생각이 나네요. 유럽의 기독교가, 아담과 이브의 전설이 한국적으로 변형된 느낌이 있고요.
이 시는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다, 이건 유화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를 그런 식으로 다루려면 동양과 서양의 미학의 다름을 알아야겠고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을 개괄적으로 얘기할텐데 여러분들의 느낌과 한번 비교하며 보시죠.
서양은 그림이 옆으로 길고 동양은 위 아래로 깁니다. 서양은 높은데서 아래로, 위에서 밑으로 시선을 둔다면, 동양은 시선은 밑에서 위로 쳐다보며 그림이 그려집니다. 동양화는 늘 첩첩 산중이죠. 따라서 고압적인 느낌, 자연의 위대함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서양은 이성적이고 서양화는 유화에 보면 화면을 가득 채워 그리지요. 예를 든다면 하늘을 그리더라도 서양은 하늘을 파랗게 칠하지만 동양은 하늘을 칠하지 않고 여백을 두고 여백 활용을 잘 합니다. 서양에서는 결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구체적인 세부 디테일을 시에서, 문학에서 중시 하지만 동양은 선을, 그런 디테일보다 선을 통한 기운을 강조합니다. 리듬은 우리글자 하나 하나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령 風자에서 완, 평, 급이 있고 어디 사이에 여백이 있잖아요. 이 비백 때문에 글자가 살아나고 꿈틀거리는 것이죠. 선이 곧 기운인 것이죠. 동양 미학의 정신은 여백과 선을 중시하고 서양은 사생,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양은 그런 사생보다 사의가 중요합니다.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 어떤 힘 같은 것들, 사실이 아니라정신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예각적 ,공격적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 곡선미를 중시합니다. 서양은 디테일을 중시 동양은 그 정신 이를테면, 산이 있으면 그 산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서양은 원근법을 중시하나 동양은 원근법을 무시합니다. 왜 동양은 원근법을 무시하느냐 하면 동양에서는 사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그리기 때문에 원근법을 무시합니다. 서양은 고정된 외눈의 시점으로 사물을 보나 동양은 움직임을 중시합니다. 움직임을 살아 있음이라 보기 때문에 이를테면 이런 글자 하나에도 이처럼 비백을 통해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서양에서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원칙을 통해서 재정비된 것을 이상적이라 생각했고 동양에서는 자기가 사는 세상과의 조화, 균형 이런 평정한 마음상태, 그래서 늘 자연과 하나로 엮어지게 되는 그런 미학이 동양 전통에는 있죠. 이런 점에서 동양과 서양은 틀립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를 보면 이 시는 아담과 이브의 냄새가 느껴지고 화면이 꽉 찬 그림입니다. 여백 활용을 하지 않습니다. 여백 활용은 마지막 행의 ... 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유럽의 기독교의 한국적 변형이라는 냄새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이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이 그려지는, 그런 분위기가 감도는 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가지는 붓끝이 굵고 두텁습니다. 동양화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선을 강조합니다. 이시는 표현은 동양적 전통적이나 사실은 서양적이다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서정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여기서 붉은 꽃은 어떤 꽃인 것인 것 같나요? 양귀비 꽃 같은 냄새가 나죠. 여기서 쾌락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쾌락이 중요하죠. 아리스토텔레스도 쾌락이 중요하다 했는데 이 쾌락이 풍속사적으로 달라집니다. 그 당시는 핫슈라는 이런 표현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0년대는 어떻습니까? 대마초, 본드, 극단에 가면 고무줄로 목을 칭칭 감아 놔버린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겠죠. 풍속사적 의미로 이 시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얘기하시는 것이 수업을 풍요롭게 할 것이니 언제든지 얘기하십시오.
西風賦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 발톱에 상채기와
퉁수 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어떻습니까? 내용이 쑥 들어오나요? 이 시는 내용이 난해한 시입니다. 난해한 시라고 피해갈 것이 아니라 난해한 시를 정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 여러 차례 계속적으로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 자기가 아는 대목에서 접근하여 모르는 부분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우기 서정주의 난해 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상의 난해 시는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생각해 볼 필요가 없지만 서정주의 난해 시는 반드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옥: 개가죽 방구가 뭡니까?
오: 개방구는 북입니다. 처음엔 북을 쇠가죽으로 만들었으나 나중엔 개가죽으로 만들어 쇠 방구, 개방구라 합니다. 오갈피 상나무가 뭐예요?
윤: 오갈피는 뽕나무, 상나무는 향나무입니다.
오: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모, 상모는요.
박: 남사당
오: 남사당이 떠오릅니까? 상모는 본래 남자가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나의 여자의 열두 발 상모상모.
여기서도 상당히 관능적인 표현이 나오는데, 홰냥 노루가 뭡니까?
노루가 화냥 노루라는 것은 발정 난 노루를 얘기하고요. 뉘 발목의 생채기, 퉁수 소리도 있고 단어들은 해결했으니까 시가 이해가 되나요?
왜 西風賦입니까? 부는 무엇입니까?
정; 글의 종류, 노래입니다.
오: 부는 글의 종류로 뱉어내는 것은 노래, 즉 賦입니다. 삼 시가 있는데 부는 노래, 비는 비유, 흥은 유흥적인 ? 것을 얘기합니다. 부는 서풍의 노래라는 것이죠. 1행 1설로 한 번 해 보시죠. 1행 1설을 좋아해야 시를 보는 눈이 쉬워집니다.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서쪽 하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를테면 서정주처럼 불교세계를 그리는 사람에서는 서방정토의 의미가 있죠, 그런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세계를 떠올리며 읽어보는 것이 좋겠고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오갈피 상나무와” 오갈피 나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무언가 얽히고 뒤틀린 모습이 떠오르죠.
정: 암수를 따로 해서 만들었나요? 불교에서 양쪽에 암수로 만든다고 그래야 조화를 이룬다고 했는데...
오: 아 그래요, 그럴싸하군요.
나의 여자의 12발 상모상모. 근데 그것이 어디로 연결 되냐하면 노루야 암노루야 화냥 노루야로 이어져 상당히 관능적인 표현이 되죠. 발정기에 있는 노루를 지금 이야기하는데 뉘 발톱의 상채기가, 퉁수소리도 나고, 발정기에 있는 그 화냥 노루가 얼마나 발정이 났으면, 늬 발톱의 긁힌 상채기, 거기까지 떠오르죠, 한쪽에선 퉁수소리도 나고 시간은 언제입니까? 밤입니다. 이혜민 선생의 시에서 시의 경제성을 얘기했는데 여기서도 오갈피 상나무, 개가죽 방구가 어떻고 하면서 대부분 풀어 갈텐데 여기서는 딱 잘라 놓아 시의 경제성이 있습니다.
1, 2연은 그래도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만 3, 4연이 이 시를 상당히 어렵게 합니다.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죠. 서서 우는 눈먼 사람은 뭘까? 자는 관세음은 뭘까? 이를테면 1, 2연은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거든요. 과거에 있었던 것인데 느닷없이 3연에서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연을 나눠 자는 관세음하니까 이것도 과거의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옥 : 퉁수 소리에서 나오는, 퉁수 소리를 듣고 거기서 생각이 나는 바.
오: 퉁수 소리로 떠올려지는 상이 서서 우는 눈먼 사람과 자는 관세음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 상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옥: 둘이 대립적인 것 같은데요?
오: 서서 우는 눈먼 사람과 자는 관세음이 그러면 같은 것인가요? 다른 것인가요?
아무튼 어렵죠. 실은 한 사람 내면 속의 두 개의 자아로 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그냥 서서 우는 눈먼 사람이면서도 자는 관세음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현실적인 자아인 것 같습니다. 과거의 것을 떠올리다 자기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옥: 같은 사람 안에 두 가지 측면이 떠올려지는데요. 인간은 누구든지 양면성이 있으니까...
최 : 서서 우는 눈먼 사람이라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기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자는 관세음이라는 것은 중생의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관세음이 자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오: 여러분들이 여러 갈래로 지금 해석하고 있는데 저는 1, 2연이 시적 자아가 떠올려지는 과거의 동경의 세계이고 3연은 그런 동경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한 현실 속 자아의 모습인 것 같고 4연은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서녘은 서방정토, 깨달음 이런 불교적 세계를 떠올리는데 한 바다의 정신병, 징역의 시간 우리가 알아야되는 것은 이 당시 이렇게 관능적 표현을 쓴 것이 아마 없을 것이라고 대낮에서 얘기했는데 이 당시 정신병, 징역시간 같은 이런 단어들이 시어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그 시대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개념인데 서정주가 이런 시어를 그 당시 쓴 것은 굉장히 놀랍죠. 그런데 4연은 어떻게 해석될까요.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 바다의 정신병. 왜 정신병이 생겼을까? 또 내지는 징역의 시간, 갇혀있는 시간이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1연과 2연은 동경의 세계를 쫙 돌아보는 것이고 3연에서는 현실의 자아를 깨닫잖아요. 4연은 그런 현실적인 자연?성 내가 동경의 세계를 미처 갖지 못하는 자?성으로 생기는 좌절의 결과다라는 것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어떻든 이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평에서 이 시를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서풍부는 난해하지만 부라는 말이 붙은 것 같이 노래처럼 가락이 잘 맞아떨어지고 잘 읽히는 노래입니다. 시는 난해한데 읽어보면 호흡이 맞아떨어집니다. 형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만 이시는 1연에서 과거에 자기가 떠올리는 동경인데 이 동경에는 자기 감상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기 감상을 통해 동경하는, 가장 그리워하는 한 대목이 향해 그려져 있고 얼켜 있음이 느껴진다. 3연은 이성적으로 풀려버려 시가 어려워지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해한 시이고 완성도 측면에서는 저는 형상화에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시를 보고 느껴지는 바는 있다. 이를테면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서정주적으로는 과거의 기억이 서녘에서 불어오는 오갈피 상나무고 개가죽 방구고 나의 여자 열두발 상모상모고 그 여자가 끊임없이 나를 대낮처럼 유혹하는 화냥노루고 뉘 발톱의 상채기가 나에게 남아 있는 듯하고 은은한 퉁수소리도 들려오는 듯 하는 모습이지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과거의 한 모습이 어떠한 이미저리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떠올리는 자연, 과거 속에 있는 모든 인물들, 여기서는 열 두발 상모상모 나의 여자, 화냥 노루를 떠올리는데 우리에게도 환기시키는 측면은 있지만 쉽지 않죠.
최- 서녁을 해석할 때 서정주의 종교적 측면을 가지고 해석 하셨잖아요. 저희들이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서녁은 해가 진다, 기울어짐 대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열두 발 상모상모 하면 춤이 연상되고 그 여자와 함께 춤을 추고, 퉁수 소리와 같이 호흡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체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잠을 자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로 정신병이 오고 갇힌 징역 시간이 오는 것은 아닐까요?
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자연의 순환 질서에 놓여있는 서쪽으로 보자는 것이군요. 굳이 서쪽을 불교적 의미로, 서방정토니 성찰의 매개체로서 서쪽을 떠나서 자연의 순환 질서 속에 놓여진 무력해진 인간상 그래서 그런 좌절감 속에서 자기 자신이 징역시간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옥-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퉁수 소리가 같이 들어 있고 그 위에 서서 우는 눈먼 사람이 바로 정신병이고, 자는 관세음이 징역시간. 퉁소 소리 가지고 이렇게 두 가지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까?
오: 제목이 西風賦고 더우기나 1연 첫 행에 서녘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마지막 연에도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하는 식으로 자꾸 반복되니까 서녘이 단순히 지나가는 표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서방정토는 영원성이죠. 서정주의 시는 영원주의를 이야기한다고 반드시 마지막 연을 인용하면서 영원성의 열망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1행1설로 하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자는 것이죠.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박-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모라 했는지, 2연의 노루와 나의 여자가 연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오: 얼키고 설킨 오갈피 나무, 상나무, 나의 여자의 열 두발의 상모상모, 발정 난 노루의 발의 생채기 이미지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정: 휘감는 이미지가 아닐까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세계, 어느 세계가 이어지는, 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아우라로 흐르는 흐름의 이미지로 말입니다. 징역이 아니라 징역 시간으로 표현 한 것도,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니...
오- 좋습니다. 넘어 갑시다.
부활
내 너를 찾아왔다... 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臾娜. 이것이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두 山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촛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 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서도 열 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臾娜가 뭘까요? 읽어보니 내용은 좀 들어옵니까? 臾娜가 죽었는데 臾娜를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로 네거리에 열 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얘들 눈망울 속에서 臾娜를 떠올리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가 보기엔 꽃상여가 아니라 꽃상부예요. 이 시를 쉽게 읽는 방법은 첫 번째 유나를 사랑하는 사람정도로 보면 되겠죠. 그런데 유나가 죽었어요. 그런데 쉽지 않는 시입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일찍 요절했는데 그렇다면 어린 여자의 죽음에는 꽃상여가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옥: 상여를 상부라 하지는 않는데요
오: 그러면 왜 꽃 상부라 했을까요?
옥: 자기가 생각하는 언덕이죠.
오 : 제 생각에는 아마도 꽃상여가 산언덕을 넘어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꽃상여가 산언덕을 착 넘어 가버리니까 언덕만 보이는데 이 화자는 자기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 잔상이 화자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꽃상부라 했을 겁니다. 겁니다.
옥: 유나는 실재적인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오; 화자는 따라가지 못했던 거예요. 상여는 어느 일정한 순간 지점에서 , 여자하고 임신한 여자, 임신한 아내를 둔 남편은 상여를 따라 갈 수 없습니다. 화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상여를 따라 가지 못하고 언덕을 꽃상여가 착 넘어 가는 것이 보였고 그 때의 처절함, 절박함의 마음이 잔상으로 그려진 것이죠. 그래서 꽃상여라 하지 않고 꽃상두라 표현한 것 같아요.
옥: 유나도 실재가 아니고 꽃상부도 언덕도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향이고 자기 마음속의 이상적인 여인상이 臾娜아닌가요?
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이제 1행1설로 해보자면, “내 너를 찾아왔다... 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밑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이 얘들을 보고 臾娜를 생각하고 자기 머리 속에 臾娜가 환생한 거죠.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臾娜. 이것이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두 山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그야말로 그 여자가 떠난 공간은 정말 처절하고 허무한 그런 공간인 것이죠. 그 여자가 떠난 뒤 빈 하늘만 남고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없는 상황이죠. 비만 자꾸 오고는 실재로 비가 오는 것일 수 있고 눈물일지도 몰라요. 비만 자꾸 오고는 화자의 심리적 상태가 비오는 것하고 동일시하여 묘사하는 것일 수 있고 또 한 편으로는 화자의 슬픔, 화자가 흘리는 눈물을 극대화시켜 비가 자꾸 오고로 표현했는지도 있겠죠.
촛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는 서구적 개념인데 부활과 연결된 기독교적 표현인 것 같애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죽어서 가는 그 어려운 주소가 무엇인 줄 모르죠. 서정주의 다른 시에 보면 그 죽은 사람들은 춘향은 제4천, 도솔천으로, 선덕여왕은 제2천으로 갑니다. 어떻든 죽어서 어떤 주소지로 간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거기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 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이 시를 臾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면 무난하지만 옥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상향의 여인으로, 臾娜가 시인이 도달코자 하는 또 다른 자아로 해석하면 또 다르게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인이 도달하고자하는 진정한 자아라면 과거의 기억 속에 꽃상여가 나가는 시절이 옛 시절 아닙니까? 그런 옛 시절의 것들이 가고 나서 제목이 부활이니까 다시 환생했을 때의 이 모습. 우리의 머리 속에는 환생은 무한 ,영원한 것이죠. 인간의 육체적인 삶은 유한하지만 현실적인 초월적인 (?)그런 것까지도 해석이 되는 시인데 쉽지 않죠.
密語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차일을 물은 듯, 아늑한 하늘가에
빰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 영이 참 흔한 이름인데 요즈음은 이렇게 짓지 않겠죠. 어려운 것 두갖 중에 돌아간 남아는 뭘까요.
최: 영이나 순이 같은 또 다른 이름 아닌가요?
박: 어떤 죽은 남자나 남자의 이름 같네요.
오: 차일은 뭘까요?
박: 잔치할 때 마당에 치는 것.
오: 맞아요. 광목으로 친 천막. 그럼 이 시에서 그럴듯한 대목은 어디에요?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차일 물은 듯, 아늑한 하늘가에
빰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꽃이 차일을 물은 듯하다는 표현은 상당히 형상이 살아 있죠. 빰 부비며 열려있는, 꽃이 차일을 물은 듯하다는 그럴싸 하잖아요. 이 시는 1947년 3월에 씌여진 것이므로 해방 이후에 쓴 것이니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오잖아요.
그 다음 1, 2. 3 연이 상당히 형상이 살아 있고 5연에서 저, 한 행를 한자로 처리한 것도 이 당시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요즈음은 많지만 이런 처리법은 조운의 시조에서 얘기했기 한 바대로 그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한 것입니다.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이 삼월은 광복의 해나 그 이듬해 일 수 있을 것이고 이제는 바로 숨쉰다는 것은 그 전에는 바로 숨을 쉬지 못했다는 얘기이니 일제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라는 이시는 부활을 노래한 시이며 일제를 지나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시인 것 같아요. 그리고 화자의 감정이 상당히 드러나 있죠.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 하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감정이 승해 노래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제가 볼 때 소품입니다. 제가 늘상 서정주 시 100 여 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봤다고 했는데 저는 이 시를 뽑지 않았어요. 제가 볼 때는 소품인 이 시를 서정주가 자선시집에 넣어 놓았는데 우리가 서정주하면 떠올리는 기가 막힌 시, 애비는 종이었다의 자화상이나 화사 등을 빼버리고 이 시를 넣은 것은 그의 친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최; 이 시를 보고 저는 영혼 결혼을 연상했습니다. 처녀, 총각이 죽으면 영혼 결혼을 시키는데, 누에실로 짠 비단 차일 쳐 맺어지고 나니까 이제는 숨을 쉬고 구천을 떠돌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오: 그렇다면 순이야. 영이야 두 사람인데요.
최: 그러면 복잡해지는데 전체로 보니 차일이 있고 잔치를 하고 해서 그런 생각이 ...
오: 순이야 영이야, 먼저 돌아간 남아 차일을 물은 듯한 이 꽃봉오리도 못 보는 너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죠. 죽어서 영혼이 되어 떠돌더라도, 구름이 되어서라도 무엇이 되어 떠돌더라도 와서 봐라라는 화자의 안타까운 감정이 상당히 드러난 시일뿐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제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 견디게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 수 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베짱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골일 것이다
아 여기는 대체 몇만 리이냐? 산과 바다의 몇만 리이냐.
팍팍해서 못 가겠다는 몇만 리이냐.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
는 어여쁘디어여쁜 꿈이다
무슨 말인 것 같나요? 무슨 내용인 것 같나요? 이시를 해석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정도로 서정주의 시에서 난해한 시입니다.
옥: 몇 년도에 쓴 것인가요?
오: 1944년에 썼습니다.
옥: 해방 후 친일로 몰려 고생한 시가 아닐까요?
오: 1944년에 썼고 그는 그런 고생 안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의 전기를 썼습니다.
정: 제목 여기가 어딜까 하는 것을 제목으로 잡을텐데 이분은 무제라 했으니 어쩌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옥: 그 당시 44년이면 일제가 망한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오: 아니 몰랐을 것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가 망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었니까요.. .
이 시에 대해서 유종호 선생님이 “극히 빼어난 절대 서정시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리듬이 있고 박진감이 살아 있으므로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반복의 중첩, 상당히 가락은 살아 있으나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이죠. 이 시를 많이 읽었는데 한 오십 번 읽고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불교 공부를 했어요. 불교공부 하다가 어느 순간 이 시를 거꾸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는 안 읽히면 거꾸로 읽어 봤어요. 시인이 비틀 수도 있으니까 ...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는 어여쁘디어여쁜 꿈이다”
불교에서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삼계가 있습니다. 욕계는 욕망이 남아 있는 세계이며 색계는 욕망은 탐욕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사물의 관계가 남아 있는 세계이며 무색계는 ?이죠. 욕계에는 밑에서부터 읽는다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싸움귀신), 인간, 일주문에 있는 사황천, 도리천 ,야마천, 우리 인생은 60년 사는데 야마천의 이세계에는 14억4천만 산답니다. 도솔천, 화락천, 타화 자재천 화락천 거기까지가 욕계, 즉 욕망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그위에 색계 18천, 그위에가 무색계 4천이 있어요. 이것을 삼계라 하는데 인간은 이 삼계 안에 떠도는 별이에요. 불교에서는 업이 있으면 그 업의 결과로 인연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업을 잘 쌓아야 합니다. 전생에 나쁜 업이 있으면 인간으로 안 태어나고 짐승으로 태어났겠죠. 지금 눈앞에 있는 짐승은 불교로 따지자면 전생에 업이 있어서 짐승이 된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살아 있는 결과로 뭔가 됩니다. 그래서 이 시는 삼계를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는 어여쁘디어여쁜 꿈이다 ” 귀비의 막걸리집도 있는 욕망이 있는 세계다. 4연은 욕계.
“아 여기는 대체 몇만 리이냐? 여기는 산과 바다의 몇만 리이냐.
팍팍해서 못 가겠다는 몇만 리이냐.” 진짜 팍팍하네요. 그 다음에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하늘나라입니다. 인간 세상이 아닙니다. 아까 정선생님이 얘기 한데로 꿈이든 어찌 되었든 인간 세상은 아닌 겁니다.
“아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베짱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골일 것이다” 는 색계를 말합니다. 욕망이 없고 사물의 관계만 남아 있는 이를테면 연한 풀밭에 베짱이, 서러운 시골 이것은 나로부터 맺어지는 사물의 관계만 남아 있는 색계의 세상인 것입니다.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 견디게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 수 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바위 속일 것이다. 이것이 무색계를 얘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영원한, 끝도 없는 그런 무색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 그러면 못 견디게 라는 단어가 걸리지 않을까요? 못 견디게와 이상향이 서로 배치가 되잖아요.
오 : 왜 못견디게라고 했느냐고요? 이끼낀 새파란 바위는 우리에게 훨씬 더 생명력을 얘기해주고 있잖아요. 그런 새파란 새파란 바위를 인간의 눈으로 보면 너무도 영원하니까 찰나의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눈으로는 못 견딜지도 모르죠. 그래서 거꾸로 읽어보면 그렇게 읽혀지기도 합니다. 너무나 난해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의 해석일 뿐 다르게 해석도 가능하겠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서정주는 영리한 시인입니다.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죠.
박; 아까 유종호 교수가 빼어난 서정시라 한 것은 요?
오;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리듬의 측면에서 뛰어난 시라는 것입니다. 내용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많은 서정주의 연구가들이 단 한 명도 이 시를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뭐겠어요. 이 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 번 읽어보세요. 리듬감이 워낙 좋기 때문에 여러 번 읽어보시면 새로운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죠. 10번 읽었을 때 해석과 20번 읽었을 때 해석이 달라질지 모르죠. 여러분이 혹 바로 이거야 하면서 무릎을 치며 그 선생 말이 틀렸어 하는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점심 살께요.
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오는 西域 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히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이 작품은 또 문제의 작품이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귀촉도 뭡니까? 귀촉도의 전설이 있습니다. 촉나라가 망한 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통곡하는 촉나라 충신의 넑이 귀촉도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망국의 설움까지도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귀촉도의 전설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설화에는 솟젓새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
육날 메투리는 신중에도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라고 나와 있네요. 이시는 교과서에 실려 있죠. 어떻게 해석하죠. 저는 이 시가 어렵습니다.
정; 참고서에 의하면 西域 三萬里로 가신 죽은 님을 떠올리면서 살아 있을 때 다 하지 못한 마음을 육날 메투리로 엮어서... 얘들이 이해가 잘 안 간다고 그러더라구요.
오 : 2연 때문에 그런거죠. 3연이 헷갈려 그렇게 해석한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자신의 머리털로 신이나 삼아 줄걸 하는 것은 우리 전통 시문학사에서 늘상 나와 있는 정서적 표현입니다. 떠나가는 님을 원망해야 정상인데 그러지 않고 자기 머리털로 신이나 삼아 보내지 못한 것을 오히려 애통해 하는 이 여인, 너무나 한국적인 여인, 요즈음 여자들이 들으면 열 받는, 요즈음 여자들은 발로 차는 것이 정상인데요. 떠나간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다해주지 못한 한국의 여성상을 그리고 있죠. 김소월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도 그런 것 아니겠어요. 일단 쉬운 것부터 접근해 봅시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7.5조의 율조가 중심이 되어 가락은 있습니다. 김소월의 시를 떠올린 것도 7.5조의 율격 때문인지 모르죠. 어떤 상심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1행 1설로 해봅시다. 우선 화자가 서 있는 자리를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할 수 있겠죠. 가락을 얘기할 때 제가 풀림, 감김이라 하기도 하고 완, 평,급이라고 얘기했는데 이것은 우리 비평에서 쓰는 용어가 아니고 제 방식의 가락 해석법입니다. 눈물 아롱아롱은 풀렸어요. 누구의 눈물이지 모르니까 보편적인 것이니 풀림이고 , 서역 삼만리는 개인의 감정이 드러나니 감겼어요.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 삼만리 ” 죽었나 보죠.
박: 서역 삼만리와 파촉 삼만리는 어떻게 다른가요?
오: 파촉이 무슨 말인가요?
옥: 서역에 있는 나라 이름 아닐까요?
오 : 그런 것 같네요. 고국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정: 중국 서쪽에 인접해 있는 서남 아시아나 중앙 아시아를 말하지 않나요?
1연은 임이 이미 떠났고 2연은 그런 떠난 임을 생각하면서 회한과 탄식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어려우냐 하면 귀촉도 귀촉도하며 우는 소리가 화자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런 상상이 먼 길을 떠나 가버린 님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청상과부의 독백이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쉬운 시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3연 첫줄은 화자가 서있는 자리라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하게 시간의 배경으로 볼 수 있죠. 정선생님의 해석대로라면 3연 1행은 시간의 배경이죠.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그 다음에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는 귀촉도의 울음을 얘기하는 것 같고 마지막 5연은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라고 하는 화자의 통곡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또 다르게 보면 만약에 1, 2연을 청상과부의 독백으로 본다면 3연 1행은 화자의 서 있는 자리이고 그 다음에 3연의 2행에서 4행까지는 화자가 대상으로서 발견한 귀촉도인지 몰라요. 그 다음 마지막 행은 귀촉도 울음소리가 흡사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는 것이죠. 귀촉도, 귀촉도 하는 소리가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윈통하다라는 뉘앙스로, 우리 전통에서 아줌마들이 땅에 털퍼덕 주저앉아 이 양반아, 왜 그렇게 갔나? 하는 식으로 통곡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교과서의 해석방법이 보편적이나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니 결코 쉬운 시가 아닌 것이죠. 다만 화자의 한 서린 것과 귀촉도 울음소리가 동일성,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인 좋고 것 같습니다. 또 가락이 상당히 좋은 또 내용의 측면과 가락이 어울려 있습니다. 가락을 다시 한 번 얘기해 볼까요? 1연 1행은 제 시각으로는 풀렸고 2, 3 행은 감겼고 이 감김을 살짝 돌려주는 것이 4, 5행 같습니다. 2연 1, 2행은 풀렸고 그 다음 3, 4행은 감겼어요. 3연의 1행 초롱의 불빛에서는 변주를 주었는데 이 변주에는 쉼표를 찍어 휴지를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보편적인 감정은 풀림이고 , 개인적인 감정은 감김이라 보는 것이죠.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