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수 없으면 30주년은 고사하고 모두들 얼굴 한번 못 보고 저 세상으로 갈 뻔 한 것 아닌가..??
지금까지 너무 수고수고수고...
어쨌든 서울 전시회까지 화이팅~!합시다.
오늘 저녁은 토하젓에 밥 비벼 먹고 감탄함.
왜 내가 젓갈을 안 먹는다고 언니에게 주었을꼬...
안녕히.. 오늘은 이만~
--------------------- [원본 메세지] ---------------------
광주 비엔날레 나들이 일기
3월 30일(토) 오전 8시 40분경, 서울에서 출발한 친구들과 버스이동 중 돌발상황을 전해 들었슴다.
휴게실에서 아침 대용으로 먹은 우동에 급체한 이은산학형-아뿔사,
이윤행학형에게 엄지손톱 밑을 핀으로 따서 피를 빼라고 주문하였더니 핀이 없다네! 그러면 엄지와 검지 사이 옴팍한 데를 꼭꼭 눌러 지압을 해주시오, 돌파리가 따로 없음다.
학교에 나와서 급한 문건 처리하고 11시 45분 차 키를 꽂는데, 손전화가 따르릉!
서울에서 출발한 친구들 이미 터미널에 도착하였는데 팡파레가 없다는 것이었슴다.
바로 옆의 신세계미술관에서 좀 쉬고 있으라 하고, 정확히 12시에 터미널 하차장에 도착하여, 전주에서 올 김선희학형과 대구의 황태갑학형 그리고 부산에서 오기로 한 변충원학형과 박민옥학형을 기다리고 있었음다. 대구의 황태갑학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무런 구체적 연락을 받지를 못해 그냥 광주엘 갈까 하다가 포기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내일 새벽 첫차로 와서 합류하기로 했고, 다시 전주에서 아침에 전화를 준 김선희학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를 가지고 지금 서광주 IC를 지났다고 해서 신세계백화점 주차장으로 오라고 해놓고 보니 이미 12시를 20분이나 넘어 지났슴다.
마침 부산에서 들어온 버스기사에게 물어보니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고 해서 아무래도 분수대를 가봐야겠다 싶어 분수대 쪽으로 가니, 변충원학형과 박민옥학형이 벌써 30분도 넘게 터미널 분수대에서 탱탱하니 부어서(허벌나게 미안했음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슴다.
맨날 촌놈 하는 일이 그렇지마는, 그렇게 한가할라치면 한없이 무료하게 한가하다가도 일이 터지면 매번 한꺼번에 터집죠!
기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비엔날레 특별후원전이 소장작가 중에서 비교적 모던한 쪽의 중진작가 몇을 뽑아서 전시회를 하니 출품하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 지난 3월 10일 경이고 27일에는 전시장에 걸어야한다는데 평소 작품을 너무 게을리 하는 터, 사양하다 못해 별 도리 없이 작품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이 10여일 보내고 나니, 친구들 맞이하는데 통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슴다!!
배탈난 이도 있고(하지만 그새를 못 참고 일부는 신세계미술관 앞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군것질 하고 있었음다), 장거리 여행에 피곤도 하고, 이제부터 점심을 먹고 비엔날레엘 가면 도무지 시간이 충분치가 않을 거고 결국 차분한 전시관람이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일정을 바꾸어서, 우리는 급히 예약한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기로 하였음다.
신세계미술관 문 앞에 선 순서에서, 남자 친구만 하나씩 섞어서 허 진교수 카니발 밴에 손희옥, 변충원, 이윤행, 박임향, 김선희학형이 타고(점심먹으러 가는 도중에 허교수 아파트에 김선희학형 차를 파킹해놓고), 내 밴에 정진원, 이은산, 김영혜, 박민옥, 김성연학형이 타기로 하여 지하주차장엘 가는데, 어허, 촌놈 차 키를 허 진교수가 가지고 있어서 또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겨우 터미널부근을 빠져 나와 광주호 상류의 <물소리 바람소리>라는 기이한 카페로 갔음다.
거기 주인이 참 맹랑한 친구임다 - 언젠가 우연히 그 집엘 가서 생전 처음으로 날치알밥을 먹게 되었는데 광주촌놈 왈, 거, 먹을만 하네! 한 후렴을 전국적으로다가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었음다. "신경호화백이 추천한 날치알밥!"이라는 순 사기성 꼬드김이 어찌되었건 입소문이 나서 좀 손님이 든다는 것이었슴다. 언감생심 지가 화백이라고 사칭한 것이 절대 아니었거늘, 그 맹랑한 쥔장이 촌놈의 새까만 고교 후배인줄은 한-참 후에 안 사실이었음다.
버섯죽과 날치알밥을 묵은 김치와 깻잎 등으로 빈 속을 채우고, 무슨 세종대왕이 즐겨마신 차!라나, 석류차 등으로 입가심을 하고, 또 일정을 축소하여 김삿갓이 한 잔 후 투신하였다는 동복호의 물염정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가사문학권의 중심인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가 있는 식영정(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광주호와 이마를 들어 바라보는 무등산이 좋았지요?)과 양산보처사가 조성한 조선의 전통 정원의 백미인 소쇄원(그 쬐그만 계류가 마치 손금에 흐르는 개울물 같지 않던가요...)의 광풍각에 앉아서 썰 풀다가 서둘러 화순의 운주사로 난폭운전을 불사함시로 한걸음에 갔지만,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는데도, 메뚜기 한철 장사라더니, 관광지의 사찰도 입장료 수입 챙기려고 상기도 수위가 퇴근을 않고 있었음다.
쉬엄쉬엄 좌우 눈길 닿는 데 마다 어째 저리도 찌그러졌을까? 진짜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만큼 못생긴 부처님들이 길바닥에 퍼질고 앉아 우리들 중생을 그 지지리도 못생긴 얼굴로 보시하는 것이었음다.
우리는 거기에서 전혀 성비로는 짝이 안맞은 30년만에 만난 청춘 남녀들이었슴다.
와불 앞에서 모두들 돈 밝히는 한 쌍의 부처님을 성토하였고, 웬 여자 부처님?의 난상토론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손희옥학형의 부처와 보살이라는 해석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음다!
뉘엿 기우는 햇살을 받고 부지런히 광주외곽도로를 달려 이윽고 우리는 창평의 한옥에 앉아서 가볍게 반주를 수육에 곁들여 곰국으로 저녁을 떼우고, 인근의 후배 조각가 부부(박정환과 신옥주)네 호화 전원주택과 작업실로 가서 다과를 하고 밤길을 달려, 다시 창평의 달뫼마을 광주촌놈의 양철집 창고로 왔슴다. 양주 한 병과 창평읍내에서 사온 과자부스러기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다음과 같은 금년의 행사에 대한 계획을 성안하였음다.
1. 모든 자료를 전시에 참여하는 친구들이 각자 이재철학형에게 보낸다.
2. 가급적 돈을 들이지 않고 전시회 팸플릿을 만든다 - 서울,부산,고성(?) 전시회를 한꺼번에.
3. 작품의 운반과 전시는 저렴한 특송회사를 선정하여 귀찮지않게 한다.
4. 그래서 남는 예산을 모아간다면, 또뽑기를 하건 친구들이 전부 한 번씩 개인전을 하도록 해준다!!!
참으로 갸륵한 생각 아닙니까!
국민화가(임옥상)면 머하냐, 이런 데 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다시 30년 전의 풋풋한 젊음으로 돌아가 야심만만한 화가지망생의 꿈을 꾸기로 한 것임다!!!(삼삼칠 박수 계속 치면서 읽어갈 것을 제안함다!)
그동안 살아가느라 그림을 그리워했던 친구들이나, 어줍잖게 지지리도 궁핍한 화가로 연명해가는 친구들 모두 이 발상의 획기적 폭발력에 많은 기대와 협조가 있기를 빔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일부는 소파 그리고 맨 방에 눕히고, 촌놈 오랜만에 한 잔 걸친 김에 변충원학형에게 애궂은 시비걸고, 정진원학형 간간이 왔다리 갔다리 편들며 밤이 깊었슴다. 그 사이 서울에서 내려온 황지우시인(문리대 미학과 71학번)이랑, 앞집의 광주YMCA 정찬용사무총장(문리대 언어학과 70학번)이 잎새주와 홍어 귀때기, 코때기 담아와서 간단히 한 잔 하고 갔슴다.
밤이 이슥하도록 한 잔 하고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니 모두들 앞 마당의 대숲에서 부는 바람 마시고 있었음다.
그거 몸에 조오슴다, 유황성분이 있어설라니 신체에 매우 조오씀다.
우리는 창평읍내의 그 유명한 황토장터국밥집에 가서 순대와 동동주와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떼우고 드디어 광주비엔날레에 가기로 하는데, 벌써 대구에서 온 황태갑학형이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픽업해가가(!)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가서, 개막식 초청장 몇 장으로 사기를 쳐서 공짜로 입장을 했음다.
와, 이건 난장판이었음다.............비엔날레재단의 김포천이사장을 입구에서 만났고, 김종남사무총장이 차대접을 한다고 해서 녹차 한 잔씩 대접 받는 사이, 부산의 박민옥학형 터미널에 떨구고 다시 우리는 점심을 먹으로 갔슴다. 여기에 이윤행학형의 춘부장 어르신 제자가 동행을 하였고, 우리는 광주시청 옆골목에 있는 전통민속식당에서 좀 푸짐한 해물요리와 홍탁삼합을 잎새주와 함께 걸게 먹고, 홍성식교수의 차 공양 제안을 못이기는 채 받아들여 <숨겨진 섬>으로 가서 아아이스크림과 냉커피 등으로 피로를 씻었음다.
결국 우리는 상무대의 집행유예전을 포기하고, 대신 숨겨진 섬에서 그간의 일정에 들어간 회비계산을 하였던 것이었슴다.
신경호가 광주촌놈이라고 설레발을 치고설라무니 잇속은 토실토실하니 챙기는 것이었음을 알게되는 순간이었던 것이었음다!
그리고 그는 짜잔하게도 토하젖 한 통씩으로 입을 쓰윽싹 깨끗이 닦어버리는 것이었던 것이었음다 - 우리 광주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었슴다!!!!!!!!!!!!!!!!!!!!!!!!!!!!!!!!!
!!!!!!!!!!!!!!!!!!!!!!!!!!!!!!!!!!!!!!!!!!!
이윽고 터미널에서 징한 광주를 빠이빠이 하고, 김선희학형과 황태갑학형은 즈그 둘이서 전주를 돌아 "훈아오빠"는 대구로 갔던 것이었슴다.
할미꽃 5분을 박정환과 허진에게 하나씩 주고(김선희학형이 포도주 한병을 허진에게 또 주고) 나머지 3분을 우리동네 3가구에 한 분씩 나눠주었던 것이었음다.
이것도 글이라고 써올리는 광주촌놈 참으로 한심한 녀석임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