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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고개--1.3km--계명봉(601.7)--1.5km--746.6봉--2.3km--금정산(801.5)--0.7km--북문--0.9km--원효봉(687.0)--0.7km--의상봉--2.8km--산성고개--1.4km--548봉--2.0km--만덕고개--0.8km--365.9봉--4.6km--백양산--4.5km--개금고개 |
8. 산행 일정
[1] 산행지 이동
수원(04:00) ∼ 영동, 중부내륙, 경부, 대구부산고속도로 ∼ 남양산TG ∼ 양산(07:30/아침/08:10) ∼ 지경(녹동)고개(08:30)
[2] 산행코스 및 시간
지경(녹동)고개(08:40)→계명봉(09:25/09:35)→746.6m분기봉(10:25/10:35)→철탑93번(11:20)→금정산고당봉(11:35/11:45)→북문(12:05)→원효봉(12:20)→의상봉(12:32)→동문(13:05)→산성고개(13:15/점심/14:00)→대륙봉(14:15)→상학분기점(14:30)→468m봉(14:55/15:05)→만덕고개(15:20)→산불초소(16:20/16:30)→백양산(17:10)→삼각봉(17:45/17:55)→286.8m철탑봉(18:25)→ 개금고개(개금역, 19:10) |
[4] 산행의 실제
(1) 총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약 13.5km 7시간 30정도 소요.
(2) 산행 코스 및 구간 거리 : 지경고개←1.3km →계명봉(601,7)→746.6봉←2.3km →금정산(801.5)←0.7km→북문←0.9km→원효봉(687.0)←0.7km→의상봉←2.8km→산성고개←1.4km →548봉← 2.0km- 만덕고개
[5] 산행 후
개금역(19:30) ∼ 부산 개금동(식사 및 숙박, 20:00 ∼ )
9.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신라해장국(055-388-3878)
○ 부산콜택시(051-200-2000)
○ 동부식육식당(돼지국밥, 055-352-0023)
○ 행랑채(055-352-8927)
○ 밀양콩나물해장국집(055-356-3604)
10. 산 행 기
[1] 山行 前
매봉산을 출발할 때, 낙동정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구간도 빠지지도 않고 중간 탈출 없이 완주를 하게 해 달라고 산신제를 올리고 완주를 하겠다고 단단히 작심을 하고 산행을 시작 한 것이 1년, 멀고 길게만 느껴졌던 낙동정맥도 이제 이번 구간 산행으로 마지막 한 구간(개금고개~몰운대)을 남겨두게 되었다. 큰 산줄기를 또 한 번 걸었다는 기쁨과 자부심보다 오히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이 밀려드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빠지고 '어렵다. 힘들다.' 며 중간 탈출을 다반사로 한 때문인가 아니면 한 구간을 남겨 둔 아쉬움 때문인가.
이 번 구간(제20구간 / 지경고개 ~ 개금고개)도 23.5km, 10시간 30분을 산행을 하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어 만만치 않다. 그동안 빠지고 중간 탈출을 빈번히 한 아쉬움이 있어 이번 구간만큼은 꼭 완주를 해 보리라 마음먹고 산행 준비물을 이것저것 챙겨본다.
11월 13일 03시 기상, 배낭을 다시 점검하고 03 : 40분, 집 밖으로 나왔다. 찬 기운이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찬 기운만큼이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04 : 00시경, 출발지 경기도 여권민원실 앞 도착했다. 늘 함께했던 안교장은 일찌감치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불참의사를 밝혔고 홍교장은 갑자기 집안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04 : 10분경 「노승애, 박상호,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6명)」대원이 이용준 대장의 차에 승차, 오늘 산행의 출발지 부산 지경고개로 --- .
07 : 30분경, 양산 도착. 밀양 돼지국밥집에서 아침 식사 후『지경고개(부산시와 경남 양산시의 경계)』로 이동
[2] 산행들머리(지경고개)
09 : 00분경 산행 들머리 『지경고개』도착
09 : 15,6분경, 농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주차를 시키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른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데 봄이면 활짝 핀 벚꽃이 상춘객을 유혹을 하고도 남을 운치 있는 농장 길이다.
포장길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부산광역시 노포 양묘장」라 쓴 입간판이 눈에 띈다. 이곳을 부산광역시에서 가로수 양묘장으로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양묘장」을 지나면서 부터 산 기울기가 점점 가팔라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숨소리도 거치러지기 시작한다. 된비알을 잠시 오르는데도 모자 창끝으로 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 10월 정맥산행 후 酒席을 자주 가졌던 탓인가?
[3] 계명봉(鷄鳴峰, 601. 7m)
급 비탈을 빡시게 오른지 45분여. 드디어 오늘 산행의 첫 고비인 峰 頂上에 올랐다. 주변을 돌아 볼 念도 내지 못하고 급히 배낭을 내리고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며 가쁜 숨을 진정시킨 후 주변 경관을 살피니 그제야 『계명봉(鷄鳴峰) / 601.7m / 산새들의 합창』이라 새겨 놓은 頂上石이 보이고 산 아래로 『梵魚寺』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 계명봉(鷄鳴峰, 601. 7m)
『계명봉(鷄鳴峰, 601. 7m)』은 금정산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어사의 맞은편 동쪽으로 뾰족하게 돌출해 있는 金井山 山群의 한 봉우리로 불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峰이다.
지난날에는 이 봉우리가 독립된 산으로 ‘鷄鳴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봉우리에는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鷄明庵이 있고, 이 庵子에는 梵魚三奇의 하나인 「자웅석계(雌雄石鷄」가 있고 계명봉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역사가 오래된 「계명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현재 약간의 석축과 불을 피울 수 있었던 터만이 남아 있다.
「鷄鳴」이란 명칭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이곳은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으로 밤 기도를 위해 밤을 세워가며 기도에 정진을 하던 남자들이 새벽2시쯤이면 일어나 예불을 드릴 때 맑은 하늘 날씨에 총총한 별을 보고 예불 시간을 가늠했지만 흐린 날에는 하늘에서 닭울음소리가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와 예불시간을 알려 주었던 데서『鷄鳴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새로운 우물(新井)이라는 뜻의 「새울이」 혹은 「새울이 뫼」라 부르는데 「새로울 신(新)」의 음이 「새(鳥)」 혹은 「닭(鷄)」과 비슷하다고 하여 「새」를 「계」로 옮겼다고 하며 우물(井)의 音이「울다」와 비슷하여 「울 명(鳴)」을 借用하여 『鷄鳴峰』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출처> 기분죤산악회
http://cafe.daum.net/maebarambd/NArM/85?docid=1AsD5|NArM|85|20101028125947&q=%C1%F6%B0%E6%B0%ED%B0%B3%7E%B0%B3%B1%DD%B0%ED%B0%B3&srchid=CCB1AsD5|NArM|85|20101028125947
○ 범어삼기(梵魚三奇)
「범어삼기(梵魚三奇)」란 범어사 주위에 있는 세 가지 奇異한 것을 가리키는데, 원효석대(元曉石臺)와 자웅석계(雌雄石鷄), 암상금정(岩上金井)이 그것이다.
① 원효석대(元曉石臺)
「원효석대(元曉石臺)」는 범어사 계곡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서면 '원효암'이란 안내판이 나타난다. 오솔길을 따라 원효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자연석 위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원효대사가 좌선 한 곳이라는 원효석대이다.
원효대사가 왜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수도하던 곳으로 주변일대는 부드러운 육산으로 흙과 나무뿐인데, 유독 「의상대」와 「원효석대」만 岩峰으로 치솟아 있다. 거대한 돌이 맞물려 하나의 단을 이룬 모습이 매우 기묘하고 아름답다.
② 자웅석계(雌雄石鷄)
「자웅석계(雌雄石鷄)」는 범어사 바로 앞산인 계명봉 중턱 계명암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암수 한 쌍의 닭을 빼닮은 바위를 이른다. 지금은 암탉을 닮은 바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자웅석계가 있는 계명봉에서 대마도를 바라보면 지네의 형상으로 보이고, 대마도에서 계명봉을 바라보면 닭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장군의 투구 모습으로 인다고 한다.
닭과 지네는 서로 상극인지라, 닭은 지네를 보는 족족 잡아먹는다. 그래서 자웅석계에 恨을 품은 일본인들이 암탉을 닮은 바위를 부수고 계명봉의 장수천맥(將帥泉脈)을 끊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해에 우리 장수 80여명이 알게 모르니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명봉에는 왜구의 침을 제일 먼저 알리는 금정산 유일의 봉수대가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의상대사가 부근에서 절터를 구하던 중 한밤중에 느닷없이 닭 울음을 들었기에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이름을 「계명암(鷄鳴庵)」이라고 불렀다. 또한 시계가 없던 그 옛날 비가오거나 구름이 끼면 달도 별도 볼 수 없어 시간을 알 수 없었을 때, 이 암자에서 정진하던 납자(衲子:수행자)들이 새벽 예불 때가 되면 하늘에서 나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그 시간을 가늠했다고 하여 ‘닭이 운다’는 뜻의 「계명암」이 되었다고 한다.
③ 암상금정(巖上金井)
「암상금정(巖上金井)」은 범어사 창건설화와 금정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금정암이라는 바위꼭대기에 있는 「금샘」을 일컫는다. 금정산성의 북문에서 고당봉 능선을 오르다 보면 고당샘이 나오는데, 금정암은 여기서 동쪽으로 5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 600m의 암릉지대 동남단에 솟아 있는 금정암은 높이 10m, 둘레 7m의 화강암바위다. 이 바위 꼭대기에 있는 금샘은 둘레 3m, 깊이 20cm의 규모를 가진 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량을 유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는 범어사 스님들이 대대로 비밀로 숨겨왔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출처>
http://blog.daum.net/cheongpa580601/61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cheongpa580601%2F610
http://cafe.daum.net/gjforeston/7JfN/1?docid=1KKgg|7JfN|1|20100226103611&q=%B9%FC%BE%EE%BB%EF%B1%E2&srchid=CCB1KKgg|7JfN|1|20100226103611
[4] 746.6봉(장군평전)
계명봉 정상에 올라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살피고 정상석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바로 우측 내림 길로 들어섰다.
15, 6분 후 안부 4거리(계명고개)에 도착을 했다. 옛날 양산의 東面 쪽의 불교신자들이 범어사를 넘나들었던 고개란다. 왼쪽 약 20여m 아래 임도가 있고 이정표에는 고당봉 3.2km라 표기되어 있다.
안부를 지나니 『鷄鳴峰』에 이어 또다시 급경사를 이룬 峰이 앞을 가로막는다. 계명봉까지 함께했던 대원들도 안부로 내려오는 동안 앞서 가고 뒤처져 보이질 않는다. 다른 산꾼들의 틈에 끼여 쉬엄쉬엄 오르기를 35, 6분, 『746.6봉』에 올랐다. 장군봉과 고당봉(금정산 주봉)이 분기되는 지점으로 봉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벌을 「장군벌」또는 「장군평전」이라 불리는 곳이다.
장군봉은 고당봉 북쪽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산시내에서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찾지 않는 다고 한다. 先踏者들에 따르면 장군봉은 주변 일대가 억새밭 천국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는데 한여름철의 파란 억새 물결, 그리고 가을의 억새꽃 군무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고 했는데 분기봉에 올라보니 빈말이 아니다.
분기봉에서 『장군봉(고당봉 북동쪽에 위치)』은 약 700여 m 거리를 두고 있는데 계명봉과 『746.6봉』을 오르느라 진이 빠져 눈으로만 확인을 하고 휴식을 가진다.
○ 금정산 장군봉과 김유신 장군
『금정산 장군봉』역시 금정산군의 한 봉우리로 금정산(고당봉)에서 가장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다. 해발 727m로 양산군 외송마을에서 은동굴을 거쳐 고당봉이나 범어사로 산행을 할 때 반드시 거쳐 오는 봉우리가 된다.
『장군봉』에는 천여 년 유구한 세월동안 그 푸르름을 자랑해 오고 있는 키가 작은 소나무가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를 「김유신 솔바위」라고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이 솔바위에서 ‘적국이 자주 침범하여 죄 없는 백성은 피를 흘리게 되오니 저는 소동이 오나 적을 소탕할 뜻을 품었사오니 천지신명이시어 굽어 살피시사 저에게 힘을 주소’라고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화랑단의 낭도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호연지기와 무예를 연마하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았다고 한다. 이 봉에는 김유신 장군의 얼이 서려있다고 해서 『장군봉』이라고 고 한다.
분기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앞서갔던 대장이 『장군봉』을 다녀오고 앞뒤로 흩어졌던 대원들을 다시 만났는데 박사장만 보이지 않는다. 아마「범어사」경내의 사진촬영을 위해 안부에서 범어사로 빠진 모양이다.
[6] 장군샘
분기봉을 뒤로하고 내림 길로 들어서 쉬엄쉬엄 내려 오기를 5,6분, 안부를 지나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산행 후 先踏者들의 山行記를 보니 안부(고당고개)로 내려서면『장군샘』이 있다고 했는데 가는 길을 재촉하느라 지나치고 말았다.
○ 장군샘
「옹달샘 약수터에서 목을 추기는 길손이시여! / 사랑하나 풀어던진 약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 우리는 한모금의 약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 우리는 한모금의 약수물에서 우리를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 장군봉옹달샘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출처> 장군샘 약수 안내판
『장군샘』은 부산 국제신문 제2대 산행대장을 역임한 건건산악회 ‘최남준’ 고문과 수년전 타계한 그의 후배가 사비를 들여 조성했다고 하며 그는 이 외에도 남문의 수박샘, 동문의 북바위샘도 사비로 만들었다고 한다.
진작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른 아침부터 물통을 지고 급 비탈을 오르고 산길을 걸으며 어깨가 무너져 내리듯 한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는데 ---
[7] 『梵魚寺基』와 『범어사』
(1) 梵魚寺基
안부에서 약 5, 6분을 진행하니「梵魚寺基」라 陰刻된 직사각형 화강암이 길가에 놓여 있는데 범어사의 토지 경계를 나타내는 석표(石標)다.
(2) 범어사(梵魚寺)
「관광가이드 부산」에 『범어사(梵魚寺)』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남도 3대 사찰로 한국 불교계의 중심지 중 하나다. 금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신라 제30대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창건, 흥덕왕 때 중건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 5년(1613년)에 묘전현감스님, 해민스님 등이 법당과 요사 등을 중건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대웅전과 일주문은 그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어사에 대한 현존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범어사는 해동 화엄종 십찰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이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화엄십찰을 열거하는 중에 '금정범어'라고 한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 기록에는 범어사라는 명칭만 전해질 뿐 창건이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범어사의 대표적 건물로는 대웅전을 꼽을 수 있다. 1614년(광해군6년) 묘전화상이 건립하여 1713년(숙종39년) 흥보화상이 중수했다. 그리고 유일한 신라시대의 흔적으로는 삼층석탑이 있다. 기단의 석재가 마모돼 日帝 時代 때 새 석물로 교체하긴 했으나 몸통돌과 지붕돌은 신라 때 것이다.
그리고 이 곳 경내에 들어서면 천연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된 등나무群生地를 볼 수 있다. 또한 금정산의 산기슭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산지가람 양식을 취하는 市 指定 유형문화재 제2호인 범어사 일주문과 유형문화재 제15호인 당간지주와 제16호인 범어사석등, 보물 제250호인 범어사 3층 석탑, 보물 제 419-3호 삼국유사,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이 소재하고 있다.단, 市 指定 유형문화재 제9호인 오층석탑은 부산대학교로 옮겨졌다. 그리고 梵魚三奇, 金井八景이라는 奇異하고 아름다운 경치들을 가지고 있으며 山內에는 11개의 庵子가 있다.
음력 3월 보름에는 3일간 실시하는 보살계산일과 춘추로 모시는 조사스님들의 추모제와 단오 날의 고당제의 전통이 있다.」라고에 소개를 해 놓았으며
<출처> http://www.tourguidebusan.com/tour/to_detail.asp?LCode=PLC0000028
(3) 梵魚寺 創建 緣起
『범어사(梵魚寺)를 창건하게 된 것(유래)는 「동국여지승람」에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 차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따서 『金井山 梵魚寺』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출처> 범어사
http://www.beomeosa.co.kr/beomeosa/sub1_02.php
『범어사』에 대한 또 다른 창건의 연기(緣起)에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다」고 한다.
<출처> 불교카페-석륜선원
http://cafe.daum.net/huajangjang/JoFo/14?docid=1I9UL|JoFo|14|20100420131706&q=%B9%FC%BE%EE%BB%E7%20%C3%A2%B0%C7%20%BC%B3%C8%AD&srchid=CCB1I9UL|JoFo|14|20100420131706
[8] 梁山 架山里 磨崖如來 立像
梵魚寺基 石標를 카메라에 담고(윤사장) 10여분을 진행하니 앞서갔던 노부장과 장부장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으로 가는 삼거리다. 이정표에 마애여래입상 0.7km라 표시가 되어 있는데 대장만 마애여래 입상을 보기 위해 내려갔다고 한다. 대장을 기다리며 휴식.
○ 磨崖如來 立像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 입상(梁山 架山里 磨崖如來 立像) 안내판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이 불상은 범어사(梵魚寺)의 북쪽(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금정산의 화강암 절벽 위에 있다. 마애불의 높이 12m, 폭 2.5m나 되는 거대한 여래 입상이다. 마애불의 주변에 축대가 남아 있고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에 새겨진 불상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으로 심하게 마멸된 데다 바위에 균열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각 부분별로 약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쓴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눈초리를 치켜 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과 큰 코, 꽉 다문 입, 어깨까지 내려 온 귀 등은 다정하고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위엄을 갖춘 수호신(神將)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손 모양(手印)이나 옷자락(法衣)의 형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옷자락의 주름 모양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일정한 양식을 따르지 않고, 이리 저리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으며, 두 개의 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을 해 놓았다고 한다.
<출처> 안내판 내용 전문
약 3분여를 기다리니 대장이 도착을 한다. 좀더 「磨崖如來 立像」을 감상하고 와도 되는데 ---
[9] 金井山 姑堂峰
(1) 姑堂峰 頂上
「磨崖如來立像」이정표를 뒤로하고 걷기를 약 12분, 바위군락을 이룬 봉우리, 93번 철탑을 지나니 안부 4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범어사 하산을 할 수 있다.
4거리를 뒤로하고 『고당봉』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고당봉』금정산의 중심봉인 때문인지 週末 부산 산꾼들이 몽땅 모인 듯 사람들로 북적였고 정상 오르는 계단과 암봉에도 사람들로 꽉 차 긴 행열을 이루고 있다. 몇 번이고 대기하며 쉬어가기를 여러 차례, 고당봉 정상을 오르는 나선형 철 계단을 따라 정상석이 위치한 곳에 올랐다.
고당봉 우측으로 낙동정맥 산줄기를 따라 유유히 흘러내러 온 525km낙동강 하구가 선명히 보이고 부산 시내의 전경과 부산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이 遠近으로 눈앞에 와 닫는다.
부산의 진산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붐벼 엄두를 낼 수가 없다. 기념촬영을 포기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2) 금정산(金井山, 802m)
『금정산(金井山, 802m)』은 어떤 산인가?
「부산의 진산(鎭山)으로 주봉인 고당봉(801.5m)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과 남으로 상계봉(638m)을 거쳐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642m)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의 준봉을 일구어 놓고 있다. 약수터가 14군데가 있어 등산객의 목을 축여주고 일부 區民의 식수로 쓰여지고 있다. 가까이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17.3Km)등 명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동으로 부산의 금정구, 북으로는 경남 양산시, 남으로는 부산의 동래구, 서로는 북구와 접하는 넓은 지역에 위치한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 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또 금정산에는 국내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인 「금정산성」이 있으며 그 둘레는 약17km, 높이 1.5m~6.0m 이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4개의 성문을 갖고 있다. 이 산성의 축성된 최초의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것은 경상감사 조태동에 의해 1703년(숙종 29년)에 임진왜란 후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여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어 1707년과 1808년 그리고 1824년에 각각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정산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산지일 뿐 아니라 부산의 진산으로서의 위용이 당당하며, 곳곳에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문화재와 명소가 많아 부산의 명산이라 할 수 있다.」 라고 「부산의 山(일보백양산악회, http://cafe.daum.net/nam-sh2/AAVf/19)」에서 소개를 해 놓았고
『고당봉』안내판에는
「정상(頂上)부분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봉우리는 하늘에서 천신인 고모(姑母) 할머니가 내려와 산신(山神)이 되었다(異說도 있다)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 바, 이는 고대의 신선 사상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정상 부근에 고모당(姑母堂)이라는 기도처가 있다.
금정산(金井山) 10여봉 중 최고봉이며, 그 가슴께에 용머리 형상의 용두암(龍頭岩)이 있고 남쪽 산허리쯤에는 고당샘이 있다. 동쪽 능선 허리에는 범천(梵天)의 금어(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살았다는 금샘(金井)이 있어서 금정산(金井山)과 범어사(梵魚寺)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었다.」라고 안내가 되어 있다.
돌우물 금빛고기 옛 전설 따라
금정산 산머리로 올라왔더니
눈앞이 아득하다 태평양 물결
큰 포부 가슴 속에 꿈틀거린다.
<출처> 고당봉 정상석 뒷면에 새겨놓은「鷺山 李殷相」의 시
(3) 姑堂峰 山神閣(姑母堂)
『고당봉』정상을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오니 돌담 안에 벽돌집에 주황색으로 도색을 한 작은 집 한 채가 돌담 안에 있다. 「姑堂峰 山神閣」이다.
출입구 위에「金井山山神閣 / 姑母雲神堂」란 현판이 걸려 있고 신당 안 祭壇에는「山王大神 / 姑母靈神」이라 쓴 位牌와 촛대를 비치해 놓은 것이 전부로 影幀(고모할머니)도 없는 조촐한 산신각이다.
1902년 발간된 궤범어사서기궤유전 산령축에 의하면 「지금부터 40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어느 날 보살께서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지켜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이어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번(정월보름날과 단오날)의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험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姑堂이 고당봉으로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고「姑母堂」과「고당봉」연유를 밝혀 놓았으며
<출처>
http://sanseong.invil.org/travel/temple/contents.jsp?con_no=19213
향토사학자「주영택」씨는 "고당(故堂)은 할미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할미 당집이다. 고모영신은 그 품에 생산과 풍요를 안겨 주는 그 영원한 할미의 원력인 인신계통의 신령 女性神이다. 박씨 할미의 높은 덕행을 기리기 위해 인격신이 되어 금정산을 담당한 진호신(鎭護神)으로 모셔 백성의 旱災, 水災, 病災 等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금도 고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무속에서 인간을 돕고 수호하는 역할로 산신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기도를 밤낮 올리고 있다." 라고 했으며 또 이곳 주민들에 따르면「범어사 사하촌」]에서 살고 있는 주민 몇 사람은 매년 정월 보름날 하루 다음날 밤에 합동으로 제물을 정성껏 마련하여 이 고모당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고모당의 내력이나 연유와는 상관없이 가족들의 건강과 액운을 막기 위해 전래 관습대로 제를 올린다고 한다.
우리가 「姑母堂」을 들렸을 때도 5,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람들로 분벼 마음 집중이 되지 않을 텐데도 반듯한 자세 로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진다.
[10] 金井山城과 원효봉, 의상봉
(1) 金井山城
「姑母神」에게 가정의 안녕과 무탈하게 산행을 할 수 있게 해 달라 마음으로 빌고 「姑母堂」을 나와 가야할 할 길을 보니 긴 석축(金井山城)이 쌓여져 있다. 말로만 듣던『金井山城』이다.
「부산광역시 문화관광(역사 · 문화) 홈」에 『金井山城』을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金井山城』은 길이 17,337m, 성벽 높이 1.5m~3m 정도로 우리나라 山城중에서 가장 규모가 광대한 성곽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금정산성의 성벽은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지형의 굴곡과 높낮이에 맞춰 쌓았고, 높은 봉우리들을 이용하여 봉우리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금정산에 언제부터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고대에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 때부터 이미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또 일부의 유구(遺構)를 두고 신라시대에 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지금의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계책을 강의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이 신라 때부터 있었던 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금정산에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차례 대두하였으나, 1702년(숙종 28)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청에 의해 1703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완공된 성은 둘레 9,011보, 높이 1척으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특히 서문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인 적대(敵臺)를 성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서문 오른쪽에는 3개의 아치형으로 된 홍예수구(虹霓水口)를 설치하여 성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 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는데, 평상시에는 중군(中軍), 승병장(僧兵將), 군기감(軍器監), 도계도(都計導), 군뢰(軍牢), 문직(門直) 등의 직책을 가진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등 3개 읍 소속군과 3개 읍 소재 사찰의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다.금정산성은 일제강점기에 관아건물 들을 비롯하여 많을 시설물이 파괴,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부산시에는 연차적으로 성곽, 성문, 망루 등 성곽 시설을 보수, 정비하고 있다.
<출처> 부산광역시 문화관광(역사 · 문화) 홈
http://tour.busan.go.kr/kor/05_culture/01_04/02/03/1204509_4792.jsp
(2) 北門 洗心井
앞으로 걸어야 할 산성 길을 보며 내려 선 곳이 금정산성 북문의 『세심정(洗心井)』이다. 세심정(洗心井)의 명칭으로 보면 「혼탁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우물」이다.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내는 것은 且置하고 우선 목마름부터 해결해야겠는 생각으로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남김없이 마시고 빈병에 물도 가득 채운다. 물맛이 그저 그만이다.
이곳 역시 고당봉 정상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로 붐벼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지척에 있는 金井山城의 4대문 중의 하나인 사적 215호인 北門으로 이동을 했다.
여기쯤이면 앞서 간 대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윤사장님과 함께 북문을 배경으로 기념촬영만하고 앞서간 대원들을 따라 잡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넓게 난 산성길을 따라 약 25분여를 진행하여『원효봉(해발 687m)』에도착을 했다. 원효봉에는 표지석(금정산 / 원효봉 / 해발687m / 토요산사랑산악회)과 삼각점(양산 25-1992재설)이 있고 부산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3) 원효봉
『원효봉』은 제3망루 금정산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장 먼저 어둠을 해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는다. 예로부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동녘, 서녘, 밝음, 광명 즉 신선한 아침 풍경의 산봉우리의 명칭을 '으뜸의 새벽' 원효봉이라 불렀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금정산에서 높은 교화력과 깊은 감화력인 신술로 5만의 왜구를 호리병으로 물리친 호국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http://sanseong.invil.org/travel/temple/contents.jsp?con_no=19213
『원효봉』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峰 아래로 난 넓은 길을 따라 『제4망루(성문이 아닌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에 도착을 했다. 의상봉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좀 전에 지나쳐 온 봉이 의상봉이다.
(4) 의상봉
『의상봉』은 제3망루에서 100m쯤 남쪽으로 가는 원효봉과의 중간에 있는 봉우리(620m)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인 봉우리이다. 마치 大虎가 포효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의상대사의 결기가 서린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원효와 의상은 AD650년 입당 구도 하여 요동 땅에 이르러 한밤중 산속에서 노숙을 하다가 원효가 문득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 옆에 있던 바가지의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밤에 먹었던 물은 해골에 고인 송장 썩은 물임을 알고 그때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고 의상은 구도를 위해 입당하게 된다.
<출처> http://sanseong.invil.org/travel/temple/contents.jsp?con_no=19213
[11] 어디까지 가야하나(중식시간)
멀리서나마 의상봉을 카메라에 담고 제4 망루를 관찰하는 사이 대장으로부터 전화다. 점심식사 장소를 봐 두었으니 빨리 오란다. 4망루를 배경으로 사진만 촬영하고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계명봉』이후 후미로 처진 줄 알았던 박사장, 언제 왔는지 도착해 있고 앞서 간 줄 알았던 노부장만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식당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고 일전에 장부장이 구입해 준 라면이나 국 등을 데워 먹을 수 있는 용기에 컵라면을 끓이며 노부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도착한지 5분여 후에 노부장 도착, 라면도 적당이 끓여졌다. 찬 날씨에 따끈한 라면에 밥을 말아 먹는 맛이 그저 그만이다. 더하여 식당에서 준비해 온 김치와 박사장이 가져온 곤드레 장아찌, 능이버섯 고추장을 곁들이니 珍羞盛饌이 따로 없다.
식사 후 오후 산행에 대한 논의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 『개금고개』까지는 6시간이 족히 걸리며 642m의 백양산을 넘어야 된다고 한다. 대장의 걸음으로 6시간이라면 내 경우는 7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 현재 13시를 넘긴 시간, 백양산까지 가는데도 9.6km, 백양산에서 4.6km를 더 걸어야 개금고개에 도착을 하게 되니 빨라야 20 : 00(오후 8시)시나 되어서야 산행을 종료할 수 있겠다. 오전 산행으로 지쳐 있고 남은 거리가 약 13km로 야간 산행을 해야 하는 처지라 자신이 서지를 않는다. 가나 마나 한동안 저울질을 하다 출발 때의 마음을 접고 『만덕고개』까지만 가기로 한다.
노부장, 박사장도 만덕고개까지 산행을 하겠다고 한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이 부족으로 마음이 조급해 食後 휴식도 갖지 못하고 대장, 윤사장, 장부장은 서둘러 배낭을 챙겨 일어선다. 결국 作心三日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12] 산성고개
완주 팀 서둘러 출발하고 잠시 후 노부장, 박사장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만덕고개까지 약6km로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래도 완주에 대한 미련이 남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동문을 지나고 다시 30여분을 더 진행하여 2차선 아스팔트 차도가 가로지르는『산성고개』에 도착을 했다.
이 고개는 부산시의 금정구와 북구를 이어주는 고개로 이정표와 금정산 등산안내도, 벤치, 화장실, 매점 등의 시설이 있고 관광지이기 때문인지 차들의 왕래도 빈번하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래서인가 산성 안내원도 배치 돼 있다.
안내원에게 백양산을 가는 방법, 만덕고개로 가는 길 산성고개 주변에 꼭 가볼만한 곳을 물어보니 친절히 안내를 해 준다. 안내원에 따르면 이곳에서 우측 북구 쪽으로 내려가면 산성막걸리로 유명한 산성마을이 있다고 한다.
○ 산성마을
「부산의 명소인 금정구 금성동에 자리 잡은 『금정산성마을』은 일찍이 부산시민 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친근한 곳이다. 금정산(金井山) 해발 400m의 분지에 아담히 자리잡은 산성마을로 해발 500~600m 높이의 금정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고지대라 기후가 차가와 부산의 평지보다 2~3℃가 낮고 계절도 15일 정도의 차가 있다. 마을의 면적은 7.45㎦로 금정구에서 제일 큰 동이다. 인구는 약 2,000명이며, 세대수로는 435세대 3개통 10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성동의 행정관리를 위한 금성동사무소와 유일한 교육시설로 전교생이 백여 명도 채 안되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금성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그리고 도요지 두 곳과 전국에 이름난 산성막걸리 제조회사(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가 제조업소의 전부이며, 123곳의 주류 및 음식업소 등 단순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성마을은 90% 이상이 녹지로 부산시에서 20여 년 가까이 유원지 예정지로 묶어 놓고 개발을 제한하고 있어 주민들의 재산권행사 등에 막대한 불편을 주고 있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하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수려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휴일이면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금성동 주민들이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경영하는 음식점에서는 부산시 지정 음식인 30년 전통의 흑염소불고기와 전국적으로 이름 난 부산지역 특산물인 "산성토산주"로 불리는 막걸리 등의 음식들이 있어 가족나들이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라고 금정산성마을 홈, 마을 탐방에 소개된 내용이다.
○ 산성마을 막걸리
이곳 금성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口傳에 의하면 옛날에 국(鞠)씨와 두(杜)씨 성씨를 가진 두 가족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곳의 전 마을사람들이 왜군에 납치되어 가서, 한동안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그 후 양산 철마에 살던 장사(壯士)인 김해김씨가 이주해 오면서 다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누룩생산이 유명했으며, 물맛 또한 유명하였다. 동래부사가 한 모금의 산성물은 마시기 위하여 자주 이곳 금정산성마을 찾았다고 한다. 부사가 즐겨 마시던 샘물은 1960년까지만 해도 동문을 들어서서 40m 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지금은 매워지고 없어졌으나 그 자리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되어 물이 고여 있다. 산성토산주는 조선시대 산성주변에 살던 화전민들인 국(鞠)씨와 두(杜)씨가 이 마을에서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성토산주의 역사는 누룩을 만들어 생계로 삼아 온데서 유래한 것으로 족히 450여 년은 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고유의 맛을 지닌 이 막걸리가 더욱 알려져, 금정산성에서 누룩을 많이 만들고 적게 만드는 차이에 따라 부산 · 동래지방과 경남 일원의 쌀값이 올랐다 내렸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정보화마을 부산 금정 산성마을
http://sanseong.invil.org/village/village_info/contents.jsp?con_no=17205
산성고개에 도착한지도 10여분이 지나도록 박사장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아마도 구석구석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모양이다. 앞서 출발한 대장팀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산행 계획표를 꺼내 보니 산성고개에서 만덕고개까지 3.4km라 되어 있다. 출발 시간으로 봐(15 : 00시경) 산성고개와 만덕고개의 중간지점(548봉)을 지나고 있을 것 같다. 개금고개까지 약 12km를 남겨두고 있으니 빠른 걸음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5,6시간은 걸릴 것 같다. 우리도 앞으로 2시간만 더 진행하면 만덕고개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염려가 돼 노부장과 벤치에 앉아 궁리를 해 본다.
산성고개에서 버스로 잠시 내려가면 산성마을이고 산성마을 막걸리가 유명하다고 하니 만덕고개까지 산행을 이곳에서 접고 산성마을로 내려가 적당한 토담집을 찾아 쟁반만한 해물 파전 하나 시키고 찌그러진 양은잔에 산성주 가득 부어 취흥을 돋워 보는 것도 운치 있을 듯싶은데 --- (혼자생각)
노부장, 백양산 등산로 입구(또는 개금고개)까지 택시로 이동하여 백양산을 오르면 어떠냐는 의견이다. 박사장 도착하는 대로 의견을 모으기로 하고 벤취에 앉아 막걸리 잔을 그리며 휴식을 가졌다.
약 7, 8분 후 박사장 도착, 노부장과 논의했던 의견을 제시하니 지도를 보고 거리와 시간 계산을 해 보더니 시행하기 어렵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계획한 대로 진행을 하자고 한다. 좀 더 휴식을 가진 후『만덕고개』로 출발을 했다.
[13] 대륙봉과 상계봉
2차선 도로를 지나면 넓은 임도와 화장실 뒤로 등산로가 있는데 임도는 남문으로 직진하는 길이고 마루금은 등산로를 따라 대륙봉, 제2망루, 상학봉 분기점을 거쳐 만덕고개로 진행을 해야 하는데 임도를 따라 가도 마루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편안한 임도를 따라 쉬엄쉬엄 걸음을 옮겨『금정산성 남문』으로 향했다. 잠시 편안함을 추구해 마루금을 벗어나 임도를 따르다 금정산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대륙봉, 상계봉」 등의 절경을 지나치고 말았다.
○ 직벽의 단애-대륙봉
남문을 거쳐 제2망루를 지나 동문방향으로 산을 따라오다 보면 直壁의 단애가 아찔한 곳을 보게 되는데 이곳에서 부산의 전통 있는 산악단체인 「대륙산악회원」들이 암벽훈련을 한 것을 기려 『대륙봉』이란 이름이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부산 금정 산성마을 홈
http://sanseong.invil.org/travel/geumjeong_mt_scene/contents.jsp?con_no=15551
○ 상학산(上鶴山, 638m)
그리고 『상학산(上鶴山, 638m)』도 금정산과 함께 지도에 공식적으로 나타나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대천(大川)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금정산(고당봉)이 있고 남쪽으로 상학산(상계봉)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금정산과 함께 상학산은 지역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일찍부터 그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의 直壁과 奇巖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上鶴山의 주봉(主峰)을 상계봉(上鷄峰)으로 부른다.상계봉(上鷄峰)이란 이름은 산정(山頂)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닭의 볏을 닮았다는데 유래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가 부근에서 가장 높아 새벽이 다른 곳보다 먼저 밝아온다는 뜻으로 상계봉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이는 봉우리 자체를 두고 평가한 것이지만 예로부터 불러오던 이름인 상학산은 풍수지리상 학(鶴)의 형상에서 유래하고 있다.地域(지역) 고로(古老)들의 이야기로는 상학산은 쌍학산으로서 학이 양 날개를 편 듯 좌우로 봉우리가 뻗어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다.상학산은 학의 근본이 되는 산으로 양쪽 날개인 좌우 봉우리를 살펴보면 화명쪽으로 화산(華山) 암봉이 뻗어있고 만덕쪽으로 마애석불(磨崖石佛)로 유명한 병풍암 능선으로 뻗어 내리고 있어 풍수지리상 명산으로 꼽히는 산이다.이 상학산의 학의 머리 부분은 화명 수정마을의 강변쪽 학사대(學士臺)가 있는 학성산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출처> 금정구청 홈
임도를 따라 걷기를 약 20여분, 『금정산성 남문』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금정산성 남문』은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나 있으며 『상학산(=상계봉, 638.2m)』도 남문에서 북구 화명동 방향의 성곽을 따라 계속 오르면 오를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어 『상학산』에 올라보는 것도 무리가 없었지만 그대로 남문을 빠져나와 만덕고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14]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458봉)
남문을 빠져나와 잠시 진행하니 금강케이블카 오르는 넓은 길과 이정표가 있는데 그대로 진행하다보니 마루금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소로를 버리고 잡목을 헤치며 우측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능선에 올라서니 마루금 표시기가 나풀거리고 길도 잘 나 있다. 드디어 마루금으로 들어서게 됐다.
마루금을 따래 내려오기를 10여분, 간이음식점 등이 있는 갈림길(금강공원)에 도착을 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잎이 만추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만추의 정취를 카메라 담고 우측 임도로 들어서 걷기를 잠시, 산악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단다. 방향을 잘못 잡아 알바를 했는데 우리 뒤에 따라오고 있다고 한다. 內心으로 반갑기 그지없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기를 7, 8분, 멋진 소나무와 바위지대가 있는 산봉(458봉)에 도착을 했다. 시야가 확 터지며 좌측으로 부산 월드컵 경기장이 아주 가깝게 내려다보이고 정면으로 높은 산봉과 산줄기가 장쾌하게 뻗어 눈앞이 시원하다.
암봉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산꾼 셋이 쉼을 취하고 있다. 우리도 배낭을 내리고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앞서 도착한 산꾼에게 앞에 있는 산과 개금고개까지의 산행 시간을 물어니 앞의 큰 산이『백양산』이고『개금고개』까지는 족히 3시간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하며 이 시간(16시를 넘긴 시간)에 『백양산』을 넘어『개금고개』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먼저 온 산꾼들이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떠난 후 잠시 기다리니 대장과 장부장 먼저 도착하고 윤사장도 곧이어 도착했다.
휴식을 취하며 산행 계속 여부를 논의. 오늘은 만덕고개에서 산행을 접고 다음 날 개금고개를 지나 한 두 시간 더 산행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오늘 계획 구간을 완주하지 못해 아쉽다 했는데 轉禍爲福이 되었다고나 할까 ----
[15] 만덕고개
잠시 더 휴식을 가진 후 급경사 내림 길로 들어섰다. 급경사도 잠시, 이내 울창한 송림 숲길로 바뀌면서 완만한 길로 이어진다. 송림 숲길로 걷기를 7, 8분, 성황당 흔적이 있는 안부 4거리를 지나 계단을 따라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고개 마루로 내려섰다. 『만덕고개』다.
고개 마루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도로변에는 등산복과 뻥튀기 등을 판매하는 이동 노점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고개 마루에는 만덕 등산로 연결을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였으며 백양산 쪽으로 7,80m 쯤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우측)으로「축 개통, 1965년, 부산시장 김현옥」이라 새긴 비석도 세워져 있다.
○ 만덕고개 (其比峴)
『만덕고개 (其比峴)』는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만등작, 만등재, 만덕재, 동래곡」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의 문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동래부지(東萊府誌)」에 『기비현(其比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홈페이지 「해양도시 부산 / 부산의 역사 / 동명유래 / 북구 만덕동」에『만덕고개 (其比峴)』의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 놓았다.
「만덕동(萬德洞)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 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이에 따라 1만 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만덕동에는 예부터 기비현(其比峴) = 사비현(射比峴)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낙동강연안에서 동래로 통하는 이 고개는 동래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길이 워낙 높고 험하고 숲도 많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에 따라 이곳은 장꾼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동래부 관내에서 도둑이 심하기로는 만덕고개가 으뜸이고, 다음은 모너머고개(송상현공 동상이 있는 고개)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혼자 만덕고개를 넘는 것을 겁내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만덕사는 만덕동에 지금 남아 있는 사지를 그 만덕사 텃자리로 본다. 그 만덕사로 인해 만덕고개란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만덕동은 신도시로 인구의 급증으로 1989년 만덕1,2동으로 분동되고, 1990년 만덕3동이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만덕마을, 사기마을, 상리마을, 중리마을, 하리마을이 있었다.」
구포에서 장을 보고 걸어서 넘어야 했던 만덕고개는 1965년 김현옥 부산시장이 도로를 개설하였으며 1973년에 만덕 제1터널, 1988년에 제2터널을 개통하여 고갯길의 사연이 사라졌고 최근에는 고갯길 도로도 포장되어 차량의 왕래가 잦으며 휴일에는 금정산성과 백양산을 오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만덕고개는 고려 충헤왕의 서자인「석기(釋器)」를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유배를 시켰다는 기록(고려사 열전)으로 보면 이 고개가 험하고 사람들조차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둑들이 들끓어 여기를 오르내리던 장꾼들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넘어야 했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이름 붙여진 고개라 도둑떼와 관련해「빼빼영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 만덕고개와 빼빼영감
「옛날 동래에서 구포 장을 보고 장꾼들이 넘나들던 통로는 주로 이 고개였다. 오를 땐 숨이 가쁘기는 해도 등에 진 물건과 새로운 물건을 바꿔오거나 몇 푼의 돈이라도 생기면 고된 줄도 몰랐다.그러나 이렇게 장꾼이 붐비는 만큼 고개 주변엔 도적 떼도 들끓었다. 특히 동래 사람이 구포장을 보러갈 때 넘는 만덕(萬德) 고개는 옛날부터 동래부 관하에서는 최대의 도적 소굴로 소문난 험한 산길로 지금 양정동의 마비현(馬飛峴 모너머 고개) 화적 떼도 이 고개의 무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이 만덕고개를 만등(萬等) 고개라고도 불렀는데, 만 사람이 무리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어느 날 이 고개를 동래 남문 밖에 사는 삿자리장수 영감이 구포장에 들렀다가 다른 장꾼들과 함께 넘게 되었다. 항상 말이 없는 이 영감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홀아비라는 것 외엔 이름도, 성도 몰랐던 까닭에 그저 빼빼영감이라 불렀다. 너무 여위고 피골이 상접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들은 지친 다리를 좀 쉬어보려고 만덕 고개에 있는 주막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십수명의 도적무리가 달려들면서「꼼짝마라. 움직이면 죽인다.」고 고함쳤다. 서슬이 퍼런 도적들의 기세에 질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장꾼들을 한사람씩 묶은 뒤 괴수로 보이는 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건을 판 돈과 가진 것을 모조리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이 때 빼빼영감이 용감히 앞으로 나서며 도적들을 향하여「여기 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나들면서 겨우 끼니나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적질을 하고 산다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할 게 아닙니까?」묶인 장꾼들은 평소와는 다른 빼빼영감의 태도에 깜짝 놀라면서도 당할 일이 너무나 뻔해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도적들은 이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이놈!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하며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는 등 영감을 쓰러뜨렸다. 영감은 주저하듯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 놈들아!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도적들의 시선이 빼빼영감에게 모일 땐 이미 영감의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이 놈 저 놈을 공격하는 솜씨는 날쌘 비호와 같았다. 이 비상한 완력을 당해내지 못하자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영감은 묶인 장꾼들을 전부 풀어주었다.이 때 힘을 얻은 장꾼들은 감탄하면서 다쳐서 달아나지 못한 도적들을 끌고 동래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영감은「우리들에게 소득이 없는 일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소. 그자들은 이제 도적질을 하지 않을 것이오. 자, 술이나 한 잔 합시다」라고 하면서 술과 안주를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주모(酒母)에게 청했다. 그리고는「여러분, 이 술은 제가 모두 사겠으니 마음껏 잡수시오. 대신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난 이야기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시오.」 라고 거듭 당부했다.술대접까지 잘 받은 장꾼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와 각기 제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 중 한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았더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오자 나라에서는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
<출처> 부산광역시 문화관광 / 역사와 문화 / 당산, 설화, 전설
http://tour.busan.go.kr/kor/05_culture/01_05/07/02/1248922_6923.jsp
[16] 산행 후
17 : 00경, 이번 산행에 참여했던 대원들 모두가 함께 『만덕고개』에서 산행을 끝내고 짐엔콜을 불러 동래구 온천동으로 이동, MT모델(부산 동래구 온천3동 1425-12 / ☎ 051-504-0882)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 근처에 있는 「제주 흑돼지」식당에서 이스리로 잔을 부딪치며 산행일정을 마무리 했다.
201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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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회장님. 오래오래 함께 산행해요. 이렇게 자료 정리 회장님 아니시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정말 남의 불행이 회장님의 행복이셨어요? 저희도 실은 행복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