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미/감 (제자: 一思 석용진)
곧 비가, 봄비가 오려나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가물다 마음속까지 먼지들이 푸석거리는 메마름 저 우산들이 더 환하게 펼쳐지는 날 봄비는 다정하리라 그 아련한 기억, 그리고 곡선…
가뭄 끝에 봄비. 달다.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 여전한 가뭄. 언제쯤 하늘이 풀려 그 달디 단 봄비를 주룩주룩 내리려나. 적어도 50㎜ 안팎 정도는. 옛날 중국 탕 임금 때 7년 가뭄이 들어 아들까지 팔러 나온 사람을 보고 임금은 역산의 금으로 돈을 만들어 그 아들을 도로 찾게 했다는 이야기가 '관자(管子)'에 전한다. 현실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예라지만 왜 우리들의 '그들'은 이런 비슷한 현실정치 쯤을 고려하지 못할까. 금값이 너무 뛰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들 값이 떨어졌거나.
흡족하지는 않지만 근래 봄비가 내리긴 했다. 흡족하지 않아서 단맛은 더 갈증을 부른다. 그래서 더 기다려지는 봄비. 그럴 때 내리는 봄비는 곡선이다. 박용래의 시 '고월'첫 머리에 "유리병 속으로/ 파 뿌리 내리듯/ 내리는 / 봄비/…"라고 했다. '파 뿌리'라고 했으니 정녕 직선은 아닐 터. 희끔한 파뿌리 같은 허술한 곡선으로 내리는 봄비에 몸과 마음은 젖어 모양 없이 후줄근. '강부자'들을 위한 현실적인 오늘의 경제정책이 너무 직선적이라서 우리들은 더 애가 단다. '그들'은 그저 오늘을 피하기만 하면 내일은 응당 태양이 비춰질 착각에 빠져있어 그것이 안타깝다. 그것이 되레 우리들을 주눅 들게 한다. 불안의 시대. 물가는 오르고 수입은 자꾸 적어진다. 고려 말 문신 이색(李穡)의 '기사(記事)'라는 시에 "그 후로 모든 물가 다 뛰어 올랐건만/ 다만 내 글 값은 돈이 되지 않는구나(邇來物價皆翔貴 獨我文章不直錢)"라는 구절이 보인다.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 세상에 비단 글 값뿐이랴.
박인수가 노래한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속으로 흥얼거려 본다. 한 때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저었던 노래다. 독특한 음정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에 담아 낸 기술이 대단하다. 그 때는 어떤 아픔이었을까. 물론 시대마다 그 시대의 아픔은 있게 마련. 이 시대의 아픔과 비교해 보면 그 때는 그래도 이런 노래가 있어 좋았을 것 같다. 더 아득히. 임진왜란까지 올라가 보면.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갑자기 비가 내린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신하들이 비를 피하려 황급히 뛴다. 그러나 이항복은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걷는다. "뛰어 가면 앞에 내리는 비까지 전부 맞는다. 천천히 걸어야 비를 덜 맞는다"고 웃긴다. 선조와 신하들이 그 피란 와중에 파안대소 했다는 것이다.
김광주는 '춘우송(春雨頌)'에서 "봄비는 포근하고 아름답다. 변변치 않은 옷자락을 그대로 촉촉이 적시울지언정, 우산을 퍼뜨려 막아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우리만치 조용조용히 얌전히 내리는 품이 더욱 사랑스럽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실낱같은 빗줄기를 손바닥 위에 받아 본다. 그 방울방울이 모두 피가 되어 혈관 속으로 오붓하게 스며드는 듯…"이라며 봄비를 읊었다. 피가 되는 봄비. 감정이 북받쳐 흐르는 계절. 그래서 김억은 "봄은 이지가 아니고 감정"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우산으로 막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봄비.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질 않는가. 흙비에다 황사까지 묻어 봄비는 언제나 질척거리며 내리기 십상이다. "보슬비가 시절에 맞추어 가늘게 새벽바람 따라 온다"지만 그런 비 만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산은 필수가 됐다. 가능한 비를 맞지 말아야 한다며 앙탈이다. 그렇지만 우산은 그 나름 엄청난 변화를 했다. 이름하여 패션우산 시대. 선교사들이 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우산이 오늘의 저 화려한 변신으로 격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우산이라면 기껏 삿갓이나 도롱이. 제법 멋을 낸다면 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종이를 바른다. 그러다가 비닐우산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찢어지고 부러지기 부지기수. 이 때까지만 해도 우산은 그저 직선으로 죽 뻗어 멋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다 박쥐우산이 대량으로 만들어 지면서 패션우산으로의 변신을 맞았다. 인터넷에서는 나만의 우산을 만드는 모임까지 생겨날 정도. 호사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어릴 때 불렀던 윤석중 작사 동요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우산 깜장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며 걸어갑니다"하고 부를 때의 그 아스라한 기억.
우산은 이제 그런 찢어진 시대는 가고 지나치게 화려한 시대를 맞았다. 캐릭터 우산, 명화우산을 비롯해 요즘 인기 있는 무지개 우산에다 온갖 메이커 우산으로 장식화되었다고나 할까. 종류도 다양하다. 장우산에서 2단, 3단, 5단 등 간편한 우산으로 탈바꿈하면서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산으로 우리들을 가슴 벅차게 만든 것은 자크 드미 감독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 청순하기 그지없는 카트린 드뇌브 주연.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 쉘부르의 우산장수 외동딸인 그녀가 지닌 이미지는 무어라 해야 할까. 봄날의 그 이미지. 아니면 봄비 속의 그 이미지. 그게 뭘까. 사랑이다.
오프닝 크레딧. 공중에서 촬영한 비오는 거리. 그 곳을 오가는 우산들의 풍경. 쉘부르. 돌무늬 보도블록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비단 몇 초 동안의 장면이지만 어찌 여기에 깊이 가라앉은 감탄이나 거대한 찬탄이 없을 것인가.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혹은 경쾌하게 혹은 침중하게 부단히 정감을 내놓는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곧 비가, 봄비가 오려나. 그래야 만물이 희색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너무 가물다. 마음까지 먼지들이 푸석거리는 듯 메마르다. 저 우산들이 더 환하게 펼쳐지는 날. 봄비는 다정하리라. 정호승은 그런 봄비 속의 우산을 '달팽이'를 통해 노래한다. "비가 온다/ 봄비다/ 우산도 없이/ 한참 길을 걷는다/ 뒤에서 누가/ 말없이/ 우산을 받쳐 준다/ 문득 뒤돌아 보니/ 달팽이다"('달팽이'전문). 신비하게 휘어진 곡선으로 굼뜬 달팽이. 그러나 그의 의지는 부단한 정감을 통하여 품미하다. 품미(品味). 이 단어 하나, 달팽이에게는 얼마나 맛 좋은 곡선인가. 멋진 곡선.
'강부자'들을 위한 오늘의 경제정책이 너무 직선적이어서 우리들은 더 애가 단다. '그들'은 그저 오늘을 피하기만 하면 내일은 응당 태양이 비춰질 착각에 빠져있어 그것이 안타깝다. 그것이 되레 우리들을 주눅들게 한다
협찬:대구예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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