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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평화와 함께 하겠습니다.
추석 명절 연휴 끝부분과 겹치는 9월 성지순례 일자, 여러 가지 고민스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편히 쉬실 수 있는 날도 별로 많지 않은데... 9월 성지순례와 걸음 여행은 쉴까! 아니지 쉬면 안 되지! 마음은 결정하기까지 오락가락, 가을밤 들녘에서 흔들리는 억새 흰머리처럼 살랑거렸습니다. 그러다 친구와 산에 올라 마들 평야가 있던 불암산 자락을 소나무 그늘 암반에 앉아 조망하면서 홀연히 결정을 합니다. 서양 선교사로 조선에 처음 들어와 조선 사람을 사제를 만들기 위하여 세 소년을 선발하고, 기초교육을 가르친 후 서약을 받고 유방제 중국인 신부 출국 때 함께 가도록 합니다. 또한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 오기 위하여 대기 중이던 샤스탕 신부로 하여금 중국인 안내자를 몰 색 하여 마카오까지 무사하게 세 소년을 가도록 하였던 모방 신부님! 그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교우촌과 생가터, 구산 성당을 참례한 후 가을빛 따라 걷자! 달빛에 가을 추색이 겨울 속으로 걸어가듯 걷자!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어떠셨는지요. 저에 의도와 같이 은총안에서 행복하셨는지요? 걸음여행도 멋진 풍광만큼, 멋진 걸음 여행이 되셨는지요? 이것도 저것도 다 궁금합니다. 궁금을 해결해 주시려면 댓글 달아서 본색을 알려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꾸벅,샬롬~ 알렐루야
연이어 발생한 태풍의 영향으로 폭우가 대부분 남부 지방에 쏟아지고 서울을 중심으로 4mm - 40mm 정도 내린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16일 오후부터 많은 양의 비가 왔습니다. 근심이 또 생겼습니다. 그래서 근심을 씻어낼 요령으로 이웃나라 일기예보 기상도를 클릭하여 열어젖혔습니다. 태풍 예상 진로에 포함된 국가라 그런지 아주 상세하게 기상도를 준비하고 예측성 보도를 시시각각 내 보내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분명 있었습니다. 17일 종일 기상예측은 점차 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즉시 nap- sack를 꺼내 예측된 천우 표를 기준으로 짐을 꾸렸습니다. 오버 트러스 상하, 여벌 샤스 2, 간단한 우의, 물, 커피 용기와 작은 버너, 모자, 손수건, 묵주와 성경, 성가집, 견과류, 봉지커피 등 그리고 당일 카메라를 챙겨 넣고 아침, 5시 기상, 샤워, 다시 천우 표 확인, 뉴스를 보다 시계를 손목에 찬 후 10시 20분 전 집을 나섰습니다. 고덕역 프레트 홈에 내려서자 전철이 도착한 시간은 52분, 1호칸에 탑승하자 누군가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데레사 회장님! 그리고 앞으로 나가자 한 무리의 순례단들,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상일동에 도착한 시간은 55분, 내리자마자 지상 3번 출구로 나와 대기 중인 25인 승차를 하도록 하고 먼저 성지로 보내 드렸습니다. 아직 도착을 하지 못한 S, L. 두 자매님을 기다리기 위하여 다시 상일역으로 가 25분 기다림 끝에 10시 30분 다시 나온 구산성지 버스를 타고 성지로 갔습니다.
우선 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주례사제이신 정종득 바오로 신부께서 강론대신 앵베로 신부님과 관련된 천주교사 일부를 강의해 주셨습니다. 정종득 바오로 신부께서 평화방송을 통해 약 40분간씩 한국 천주교사를 강의해 주고 계십니다.
구산성지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에 의하여 교우촌이 만들어 지고 안토니오 형제들과 식구, 친척 그리고 마을전체가 교우촌화 되었으며 주문모 신부님 다음으로 조선에 입국하신 유방제 신부님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신 후 교우촌을 공소화 시키시고 사목회장을 선발하며 조선교회를 체계화 시키신 곳중 하나가 바로 구산이었습니다. 또한 유방제 신부나 모방신부께서 구산 김성우 안토니오 형제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우고 조선의 풍속을 하나 하나 배우던 곳도 바로 이 구산 이었습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 15대 손의 김영춘의 장자로 1795년 구산에 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만집, 문집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친척, 이웃들을 입교시켜 구산마을 전체를 교우촌으로 둔갑시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포도청으로 압송된 성인은 재판관의 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순교합니다. 성인의 나이 47세인 1841년 3월 9일 순교한 후 후손들에 의해 유해가 수습된 후 구산 성지에 묻히고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 반열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하기 위하여 여의도에서 열린 시성식 때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하여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모방신부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1829년 5월 13일 사제수품됨,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 입회 중국 사천성 교구 선교사로 발령 마카오를 떠났으나 중간 조선 천주교 첫 주교로 임명된 부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를 간청하여 허락 받는다. 두 사람은 조선 입국을 모색하였으나 감시가 심해 만주에 머물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병사함.
이후 상복으로 변복을 하고 1836년 1월 12일 정하상 조신철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15일 후 한양에 도착하여 구산에 들러 조선어를 공부하고 조선의 풍속에 대하여 익히며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명에게 영세를 줌. 한자나 통역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하였으며 조선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모방신부 뒤를 이어 입국한 샤스탕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았으나 삼개월 후 기적적으로 완치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수를 약 6천명으로 추산했다. 그 두 명의 선교사는 여러 산의 주로 격지에다가 선교 기지를 설립하고 빈번히 그곳들을 방문했다. 각각의 선교지에서 교리 교사를 임명했다. 1837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그들은 1,237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087 명에게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1,950 명에게 영성체를 분배했다. 그들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 수를 6천여명에서 9천여명 이상으로 증가시켰다.
모방 신부는 목회하면서 외국사람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조선 천주교 사제의 필요성을 느꼈던 모양이다. 1836년 말에 세 명의 청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를 정하상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그는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들을 마카오로 보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신학생들에게 라틴말의 기초를 가르쳤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기전까지 로마 가톨릭에서는 라틴말로 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젊은 신학생들은 6개월에 걸쳐 만주와 몽골 그리고 청나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조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외국 천주교 사제의 존재는 민중들을 비롯하여 관리들에게 까지 알려졌다. 조선 조정은 그 선교사들을 찾기 위해 많은 천주교 교인들을 고문했다.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는 것이 교우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1839년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권면에 따라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9월 21 (음력 8월 14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함께 참수된 후 군문효수되었다. 두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던 그 때 모방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그 세 명의 유해는 서울특별시의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삼성산에 묻혔다가 후일에 명동 대성당의 지하로 이장되었으며 일부 유해는 절두산순교성지와 최초의 매장지였던 삼성산 성지에도 세분의 성인을 모시고 1989년 축성식을 갖고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 의해 성지가 관리되고 있다.
미사 참례를 마친 후 정종득 바오로 주례사제께서 순례자들에게 안수를 주셨다. 미사참례를 모두 마친 후 성전에 물러난 순례자들은 성 김성우 안토니오외 8인의 묘역을 참례하였다.
기도를 드린 후
오랜 시간 묵상을 하며
큰 절을 드리고 참례를 끝냈다. 그리고 정자를 찾아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나눔하며 점심시간을 보내다. 구산 성지를 떠나야 했다.
성모상은 구산성지와 구산성당 초대신부(1979-1984)이며 성모님에게 특별한 신심을 갖고 계시던 故 길 홍균(이냐시오 1931-1988)신부님이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학장이신 김세중(프란치스꼬)조각가에게 작품을 의뢰, 김세중 화백이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작품입니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손에 지시봉을 들고 계시는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기리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중한 성모상입니다.
구산이란 뜻은 거북이를 닮은 산에서 따 온 이름이다. 180년된 구산 성당, 이 성당 자리가 바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생가 터다. 그 자리에 세워진 구산성당 (龜山 聖堂) 성인께서 유방제 신부, 또는 모방신부를 모셔 오신 후 안방을 내어 드리고 그 곳에 머물게해 드렸었다. 성인의 생가 터전에 건축된 성당이 있는 곳은 3곳 밖에 없다. 그곳은 바로 김범우 토마스의 명례방, 명동성당, 김대건 안드레아 출생지 솔뫼성지, 김성우 안토니오 구산 성당이다. 공소 설립 180년이 흐른 이곳 성 김성우 안토니오 이 출생지다. 그런 곳이 미사리 신도시 개발 영향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 것이다. 현재 위치에서 서남방향 미사리 한강대로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구산성당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옮겨 가기로 했다는 점이다.
곧 사라질 성 김성우 안토니오 생가터에 있던 구산 성당, 과거의 현장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례자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 사목을 하시는 구산 성당 황 안드레아 신부님은 LH 공사와 수용과 관련하여 다틈하면서 다음과 같은 공고문을 현장에 게시하기도 하였었다. 그 전문을 실어 본다.
거룩한 평화 ---
성인 생가터 구산 성당에 방문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구산 성당은 관할 지역내 성인의 성해가 모셔진 구산 성당지를 포함하고 있는 한국 카돌릭 3대 생가터에 건축된 본당으로서 한국 천주교의 자랑이자 2016년 공소 설립 180주년을 맞이하는 약현성당 건축에 많은 기여를 한 뿌리입니다. 현재 LH 수용을 이겨내고 본당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도록 기도의 힘을 보태주셨음 합니다. 다시금 방문을 환영합니다.
2014년 9월 27일 구산 성당 황 안드레아 신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이전하게 되어 가슴 아프다. 그나마 성당 건물은 원형을 보존하여 이전하게 되어 다행스럽지만, 씁쓸하다. 서울과 가까운 지역으로 천주교 교우촌으로서 9명의 순교자의 집성촌으로서 성당을 갖고 있는 순교의 뿌리라는 역사적 훼손은 가슴을 전율하게 한다. 오히려 당시 교우촌 모습을 재현하여 이 지역 전체를 성역화하였다면 좋았을 일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조성 중인 새로운 성당 터다. 구산 성당 원형 그대로 옮겨 올 자리다. 높은 현대식 아파트 기세에 눌리게 될 새로운 성당 터, 마음이 무겁다.
성당 내부 마감을 전부 철거 후 철근을 배근하고 레미콘으로 압축하여 양생 후 크레인을 이용하여 옮겨갈 계획이다.
순례자들과 함께 옛 모습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구산 성당을 찾아 참례하면서 원형 그대로 무사히 이전될 것과 새로운 성지 조성이 하느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기도를 모두 드렸다. 기도를 마친 후 걸음 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넜다.
버려진 나무들을 모아 만든 나무 고아원 숲 공원, 이 공원은 재개발이나 도로 확장 등으로 버려지는 나무들을 모아 재활 치료를 통하여 육성되는 나무들 숲이다. 너무 감사한 공원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목이 되려면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루아침에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이 태에서 보듯이 한 지름을 넓히려면 한 해 한해 나이를 보태면 태를 넓혀 나가야 한다.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대부분 개발자들의 논리다. 전기톱을 이용하여 잘라내면 끝이다. 나무 고아원~~ 기획자의 의도가 돋보인다. 다른 숲을 찾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 올 적마다 나도 모르게 창조적 질서의 가치와 정의로움을 느끼게 되어 너무 편해진다. 곧 무루 익을 가을,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 군락을 이루고 있어 단풍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숲에 있는 원삼국시대 유적지를 함께 관찰하고 숲을 걸어 강둑에 올라섰다. 바람이 얼마나 근사한지 계단에 모여 앉아 동요를 함께 불렀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리고 다시 걷다 쉬어가며 어느새 우리는 걸음 여행 일정을 끝내야 했다.
아네스 자매님께서 점심을 챙겨 주셨다. 종종 이렇게 챙겨 주신다.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과 함께 나누시는 일을 참 좋아하시는
자매님이시다. 자매님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연휴 중 참석해 주신 순례, 형제ㅡ 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0월은 더욱더 멋진 은혜로움 속에 진행할 수 있는 기획으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언제나 평화를 빕니다. 거룩한 평화를 항상 나누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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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절인 추석을 지내고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즈음, 강둑을 걸으며 가을바람이 이렇게 시원하다고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요? 연휴 끝에 받을 수 있었던 시원한 선물, 안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속 마음을 이렇게 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람이 참 시원하고 풍광이 너무 좋았고 성지에서 받은 은총과 자비로움도 너무 근사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석 명절 삼일 지나고 17일 토욜은 걸음여행에 딱 알맞는
날이다.
성지에서 많은것을 알았고~
은총도 함께....
우리팀은 하늘에서 주신 시원한 가을의 강바람을 타고
걷기 시작하였다.
쉼터에 앉아 동심으로 돌아가 동요도 부르며~
파아란 하늘과 가을의 강바람을 만킥하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걷다가 쉬어가고~
쉬었다 걷고~
저에게는 쬠 벅찬 거리였지만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리더님!
감사 합니다.
고맙 습니다.
함께하신 걸음팀 형제 자매님께도 성령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기를 기도 드립니다~^^
샬롬 & 샬롬
명절의 영향으로 늘어질 수 있는 정신적, 육채적 환경을 신앙적 순교의 영성으로 전환하고 자연의 빛과 함께 걸었던 일, 참 좋은 일입니다. 약간 벅찼다는 솔직한 표현. 그래도 행복하셨지요. 수고 하셨습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결실의 계절..
추석명절을 맞아 기쁘면서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나니
홀연이 어딘가 떠나고싶은..마음에
모든일 뒤로하고...
성지걸음으로 발길을......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있었지만
걸을 준비하고 나서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오랜만에 도착한 구산성지
곧 역사속에 묻칠 구산성당 ...
모든것이 귀중한 시간이였어요
가을 바람이 온몸을 감싸안아주니
행복함에 흠뻑취해......
보람된 하루였습니다......
늘 수고많으신 세베리노님께
감사드립니다
결실의 계절의 대표성을 지닌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 바람처럼 훌쩍 어디런가 가고 싶은 가을날~~ 도반들과 성지를 들러 신앙적 묵상과 기도를 통해 정화의 시간도 좋았지만 강과 산이 어울려 있는 두미강변 산책,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만족하며 다시 한 주간 멋진 생활을 보내시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샬롬! 구산성지가 구상으로 오타가 생겼군요. 수정하시와요~~~^*^
흔들리는 억새 흰머리처럼의 갈등을 딛고 떠난 63차 구산 성지 순례 좋았습니다
예쁜 구산 성당이 새 자리를 찾아 갈 때까지 많은 난관이 있겠죠?
브르기에르 신부님을 보시고 조선을 선교지로 택한 모방 신부님을 비롯한 3분의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에 대한 열정과 숭고함에 다시 한번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가을 강 바람을 맞으며 또 다른 트래킹의 묘미를 감상한 하루 였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코스모스 밭은 사라지고, 억 새밭은 아직 억새 꽃이 피지 않았지만 대신 가을 바람이 얼마나 근사했던지 가슴이 뻥, 마음 뻥, 뚫려 호강했습니다. 서양 선교사 세 명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분들이셨지만 세속적인 부를 탐하지 않으시고 마음만 부자의 길을 선택하시고 새남터 한강 모래밭에서 순교의 길로..... 위대한 성인들이십니다. 이렇게 첫 순교의 문이 거룩해서 그랬는지 모두 12명 입국하신 중 9명은 전부 순교하시고 칼렌강신부외 2명은 다시 탈출하셨습니다.
모처럼 만난 우리님들이 그저 편하고 좋아
절제없이 감성을 쏟아내고
왔지만 좀 부끄럽기도 하군요.
오래 전, 그 무더기 코스모스 숲을 찾아 나섰지만 추억으로 넘기고
비개인 오후, 하늘색이 너무 예뻐 올려다보느라 뒤뚱하기도 하며
강변 둑 길을 걷는 기분은 최상이었고
바람은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6년을 넘게 한국교회 신앙의 선조들과 교회사 전반에 걸쳐 귀한 말씀을
잊어 버려도 허허 웃으며 상기시켜 이끌어 주고
키워주시는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옛적 성지 여러곳을 함께 다니며 추억도 솔솔하게 쌓아 두었지요. 구산 성지 출행은 기억과 추억의 그림자를 찾는 기회였는데... 글세 사라진 꽃단지가 말썽입니다. 아무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늘 은총안에서 모든 것이 활발하고 풍요로운 일상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