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
조익표, 석사학위 논문, 1997
I. 서 론
A. '시간' 이라는 주제
시간이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서양에서 최초로 시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논술한 사람이다.[1] 고백 록 11권에 있는 어거스틴의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지만 시간의 문제의 복합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 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 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까?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가 ― 시간이 되기 위해서 ―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 까?"[2]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어거스틴의 결론은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있다"는 발견은 시간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요, 본질이다. 그것은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있는데, 어째서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며, "비존재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비존재성으로부터 모든 존재를 구원하여 존재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고백록 11장에서 13장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어거스틴의 시간에 관한 고도로 섬세하고, 미묘한 내성적인 분석은 신학뿐 아니라 서양의 지성사 전체를 통해서도 탁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어거스틴의 시간이해는 서양 사상에 포 괄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시간에 관한 자신의 탁월한 깊은 사색을 통해서 시간에 관한 분 석적 이해가 존재와 비존재가 교차하는 역설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시간 이해는 '유한한 시간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즉 죽음의 운명 앞에 서 있는 인간'과 '무한한 삶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신, 즉 죽음을 넘어서는 불멸적 영원으로 계시는 하느님'의 대비를 근간으로 해서 정식화되고 있으며[3], 그의 시간이해는 우주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시간이해가 이후 신학 전반에 영향을 줌으로써 서구신학의 우주론(특 히 창조론과 관련하여)을 정초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접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간 개념은 죽음의 운명과 불멸성, 영속성과 변화에 관한 인간의 관념에 항상 개입함으로써, 종교, 문학, 역사, 철학의 연구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되어 왔다.[4] 시간은 인간의 모 든 경험과 지식과 표현양식의 구성 요소인 것처럼 보이며, 정신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존재이며, 우주 의 근본적인 특성인 것처럼 보인다.[5] 인간의 생리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시간 경험은 행동과학의 탐구 과제이 며, 구조와 변화의 요인으로서의 시간은 자연과학에서의 본질적인 고려 사항이 되고 있다.[6]
B. 연구의 목적
17세기는 과학사상의 한 도식을 산출하였다. 그 도식은 1. 정신에 속하는 것으로 신체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2. 신체에 속하는 것으로 정신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는 사색하는 정신과 공간체로서의 물질의, 상호 독립적이며 전혀 관계가 없는, 분할을 기 초로 하고 기계론적 자연관이었으며, 뉴턴의 '자연과학에 관한 수학적 원리'의 물리학의 수학적 기초와 결합하였다. 이는 유기체론적 자연관을 유물론적 자연관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18, 19세기의 비약적 발전을 보인 과학적 탐구 의 결과를 해석하는 데 탁월함을 발휘함으로써 유물론의 압도적인 승리를 초래하였다. 당시 이 유물론이 근거한 시간관은 뉴우턴의 절대적 시간관인데, 시간은 다른 사물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 놓이는 장소 로서 이해되었다. 정신은 물질의 영역인 시간으로부터 쫓겨났고, 기계론적 이신론이 보여주듯이 세계를 새롭게 창 조하는 신은 현실의 영역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의 변화 전체는 새로운 과학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큼직한 새로운 관념이 이론 과학에 도입되었다. 1. 장(場)이론(Field Theory) 2. 원자성(Atomicity) 3. 에너지 불변의 법칙 4. 진화 론 등이 그것이다. 이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20세기의 걸출한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 4가지의 새로운 관념이 유물론적 이원론의 도식과는 조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유기체적 일원론의 도식과 조화되는 관념이라고 말 한다.[7]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자연 과학적 발견을 토대로 한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유기체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들어 물리학적 시간 이해에 관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19세기의 새로운 개념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주로 현대 물리학의 성과에 힘입어 일어난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상대론은 뉴톤의 체계인 절대 시 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하였고, 이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시간과 공간의 바다'를 떠다니는 '세계'라는 개념을 부정하 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론은 시간과 공간이 질적으로 분리된 개념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두 가지 별개의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시-공간(space-time)이라는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의 덩어리로 생각되어 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론과 함께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양자론은 시-공간 이해의 근본적인 문제 로서 동시성(同時性)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는 인간이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시'라는 문제가 더 이상 상식적 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상적인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이라는 개념 속에 사고하고 살 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임을 입증한다고 믿고 있다. 그 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일상 적인 사람들은 동시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의 경험은 '나의 현재' 와 '너의 현재'는 같다고 하는 동시성을 입증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간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적, 신학적 분석을 통한 시간이해와 잘 조화되지 못 한다. 인간의 경험적 시간 이해로는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시간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시간의 개념과 일상에서 경험된다고 생각되는 상식적인 시간의 개념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리가 존재한다. 시간은 경험 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시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는 그러한 의미관련이 무시되거나 배제되지 않 으면 안되기 때문이다.[8]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자연 과학적 발견을 토대로 한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유기체적 세계의 전망 을 가지고 있다. 세계를 유물론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점을 부정하는 시간이해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이제는 더 이상 현실과 관련이 없는 할 일 없는 신' 이라는 관념을 부정하고 '항상 이 세계의 새로운 창조에 관여 하고 있는 신'이라는 관념을 채택한다. 또, 화이트헤드는 시간에 관한 과학적 개념과 철학적 개념의 부조화를 극복 한 새로운 시간이해를 제시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세계와 함께 짜여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화 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우주론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시간에 관한 철학적 신학적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체계라는 좋은 도구를 가지게 된 셈이다.
본고는, 현대의 자연과학적 시간이해의 지평이 넓어진 오늘, 기독교의 시간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현대의 자연과학적 발견들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형이 상학적 체계로 정립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C. 연구의 범위와 방향
흔히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구분해서 기술되고 있다; 1. 그가 러셀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서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다루었던 1910년까지의 케임브리지 시대의 초기, 2. 런던 시대의 과학 철학을 형성시킨 1924년까지의 중기, 3. 미국으로 건너간 뒤인 형이상학자로서의 후기 등이다.[9]
본 연구는 형이상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의 시대인 후기에 쓰여진 저작들인 {과학과 근대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의 세 권을 중심으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대한 시대구분은, 그의 후기의 철학적 관심이 이미 초기와 중기에도 뚜렷이 나타날 뿐 아니라, 초기의 수리 논리학의 일반 전제가 후기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발전적 통일체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 각기 때문에[10],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원숙함을 보여주는 후기의 철학사상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다. 둘째, 위의 세 가지 저작들은 화이트헤드의 후기 저작 중에서도, 그의 새로운 "형이상학 체계인 '유기체의 철 학'을 구성하는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살펴보고자 하는 본 연구는,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12]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과 그의 유기체의 철학의 개념들이 낯설다는 점을 고려하여, 1. 먼저 시간 이해의 배 경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의 배경을 개관한 후, 2.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 본 개념들을 고찰하고, 3. 그것이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스며들어 있는가를 살피면서 화이트헤드의 형 이상학의 개념과 시간이해를 보다 폭 넓게 고찰한 후, 4. 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간략한 가능적 전망을 살펴보 고자 한다.
[각주]
[1] E. Cassirer, The Philosophy of Symbolic Forms, 3 Vols. trans. R. Manheim(New Haven : Yale Univ. Press, 1958), 3 : 166, 선한용, 시간과 영원(서울 : 성광 문화사, 1986), p. 15에서 재인용.
[2] Augustine, St. Augustine's Confessions I. II.(Cambridge : Harvard Univ. Press, 1960), 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1990), pp. 395-396. (이하에는 '고백록' 이라 한다.)
[3] 그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자신의 깊은 신앙의 명상 속에서 1. 사물의 변화는 창조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과 모든 변화하는 것은 피조물이라는 것, 2. 시간이란 변화와 함께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는 것, 3.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란 없었다는 것을 말했으며, 그리고, 이미 4. 그는 시간을 영원과의 대비 속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시간과 영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고백록, pp. 379-394)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시간적으로 무상한 인간 실존을 구원하시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과 의 대비 속에서 신앙적 실존 속에서 신학적으로 복합된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4]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40.
[5] Ibid.
[6] Ibid.
[7]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Cambridge : Cambridge Univ. Press, 1926), 오영환 역, 과학과 근대세계(서울 : 서광사, 1989), pp. 151-173. (이하에는 SMW 로 한다.)
[8] Ibid., p. 35.
[9] 오영환, "<과학과 근대 세계>의 철학적 의미", SMW, pp. 311-312.
[10] Ibid., p. 312.
[11] Ibid., p. 311.
[12] 화이트헤드는 그의 책 {과학과 근대세계}를 통하여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과학의 흐름과 과학이 서구의 사상에 끼친 영향들을 분석한 후, 과학의 놀라운 발전이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귀결되고 있는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의 발전 속에 19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새로운 관념들을 1. 장(場) field 2. 원자성 atomicity 3. 에너지 불변의 법칙 4. 진화론(進化論) 등의 네 가지로 특징 짓고, 이 네 가지 관념들은 유물론에 의해 지탱될 수 없고, 오히려 유기체론에 의해서 잘 지탱된다고 하였다.(SMW, pp. 151-173.)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에 '유기체의 철학 Philosophy of Organ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 An Essay in Cosmology(New York : Macmillan, 1978.), Edited by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W. Sherburne,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서울 : 민음사, 1991), p. 39.)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이 가지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들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비판적 성찰을 통해 철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II.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
시간에 관한 논의는, 공간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계속되어 온 우주론의 근본 주제 중에 하나이다. 시간론은 시 간을 경험하는 인간의 세계경험에서 비롯되며, 그 경험을 설명하려는 세계관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시간론 은 우주론의 도식을 형성하는 기초에 해당하므로, 화이트헤드의 시간론을 살펴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의 우주 론적 도식 가운데서 시간론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 유기체론적 관점은 과학적 유물론의 관점에 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유물론이 17세기의 뉴턴을 위시한 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식인 '단순 정위'의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단순 정위'라는 관념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오는 결정적 오류임을 지 적한다. 단순 정위의 오류를 피하는 우주론적 체계가 유기체론이며, 그 기저에 놓인 도식이 유기체론에 입각한 시 공이해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은 우리의 경험 가운데 구체적으로 놓여 있는 실유(實有)에 관한 분 석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궁극적 사물을 "현실적 존재"라고 부른다. 현실적 존재의 분석은, 거칠게 표현해 본다 면,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구체적 사물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의 한편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모든 사물은 흐른다'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나타나는 '유동'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 이다. 유동의 문제는, 거칠게 표현해 본다면, 부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지속하는 구체적 사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다른 한편이다. 궁극적 사물인 "현실적 존재"의 분석과, 그것이 당면한 '유동'의 문제라는 두 가지 축은 그의 우주론이 "존재를 과정 속에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음을 분명 히 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에 불가분리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시간의 이해의 배경들을 살펴봄으로 써, 앞으로 전개될 화이트헤드의 시간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그 내용들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A. 단순 정위의 오류
화이트헤드 사상의 후기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의 시대는 그의 자연철학자로서의 중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관련을 잘 나타내 주는 책이 그의 형이상학적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과학과 근대세계}이다. 그는 20세기 초에 철학을 거부하는 과학을 비판하면서, "과학이 임시변통을 위한 가설들의 잡다한 집합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철학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그 자신의 여러 기초들을 철저하게 비판해 나가야 한다"[13]고 하였다. 그는 과학적 우주론이 철학을 대신하고 있던 시대에 철학의 기능 중 하나는 여러 우주론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를 풍미하고 있던 과학적 우주론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였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자연 철학자로서의 중기의 사상적 토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토양을 바탕으 로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은 그 결실을 맺었으며, 화이트헤드의 시간 이해는 그 우주론적 도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우주론을 살펴본 후에 그 기간 동안의 우주론이 '하나'의 과학적 우주론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 과학적 우주론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배치구조 속에 들어 있으면서 공간 전체에 널려 있는, 원리에로 환원시키기 어려운 단순한 물질 또는 물질적 요소를 궁극적인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물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감각도, 가치도, 목적도 지니지 않으며, 다만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지 않는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 부과된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 을 뿐이다. 이러한 '단순한 물질'로 구성된 세계라는 가정에 입각한 사상을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불렀다.[14]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유물론적 가정이 20세기초의 과학적 상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러한 유물론적 가정을 대신할 새로운 자신의 우주론적 체계를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하였다. 과학적 유물론이 '단 순한 물질'의 관념을 전제하게 된 배경과 화이트헤드가 그것을 배격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단순 정위" simple location 란, 물질이 다른 여러 존재에 대해 단순히 그러한 위치 관계 를 갖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그 다른 여러 존재에 대한 유사한 위치 관계로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영역에 관련시켜서 설명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특성이다.[15] 요컨대 물질이 다른 여러 존재와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단 순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유물론의 특징이라고 본다. 여기서 '단순한'과 대비되는 낱말 들로는 '복합적', '발생적', '관계적', '유기적' 등등을 생각할 수 있다.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연은 ○○으로 만들어 졌다'라는 대답을 했을 때, 그 술어를 구성하는 '○○'은 시공 속에서의 단순 정위를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이 때 단순 정위는 시-공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16] 뉴톤을 비롯한 17세기의 사상가들은 고대의 자연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세계는 질료나 물질의 순간적인 배치 구조들의 계기'라고 답하였다. 뉴턴은 중력은 전적으로 질량의 배 치 구조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단순 정위'의 개념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물질의 배치구 조가 자신의 변화를 결정하게 됨으로써 17세기이래 기계론적 자연관은 '과학의 정통 신조'로서 최고의 지배권을 누려 왔다. 이 신조는 이후 계속된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견과 진보에 따라 정당화되었고 효과적으로 기능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철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 에 집중하면서 중세의 합리주의에 반역한 '반(反)합리주의'를 강조하였다. 18-19세기의 사상사는 이 유물론적 기계 론 에 매달려 왔다.[17]
화이트헤드는 단순 정위를 '시간'에 관한 한,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 자연의 근본 사실로서 간주되는 한, 베르그 송이 강력하게 비난한 바 '지성에 의한 실재의 공간화에 기인하는 자연의 왜곡'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18] 이러 한 왜곡은 단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오인하는데서 오는 우연한 과오로서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라고 부른다.
'단순 정위'라는 관념은 1. 시-공간의 이해와 관련하여, 2. 귀납법과 관련하여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물질의 분할을 생각할 때, 단순 정위의 난점이 드러난다. 만약 물질이 어떤 시간 동안 존재하고 있었 다면, 그것은 시간의 모든 부분에서 똑같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은 분할되어도 물질은 분할되 지 않는다. 공간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체적의 분할은 물질의 분할을 의미하게 된다.[19] 물질이 공간과 관련하여 끝없이 분할된다고 할 때, 공간의 기하학적인 한 점에 위치한 물질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밀도의 개념에 해당 하지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동일한 맥락에서 취급하는 현대의 상대성 이론을 충족하지 못한다. 한편, 시간이 물 질을 전혀 분할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의 경과가 물질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간의 기하학적인 한 점에 해당하는 순간에도 물질은 완전하게 자신을 존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의 추이와 물질은 아무런 관계 도 없게 된다. 따라서 시간의 각 순간은 추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의 추이가 각 순간들의 계기로 이해된 다.[20] 그러나, 과거나 미래의 다른 어느 시간과도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는 순간에 대해 운동이나, 변화와 같은 것을 정의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둘째, 과거나 미래와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이 단순 정위한 자연을 본다는 것 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간들에 존재하는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귀납법은 자연에 내재하는 것으로 서 관찰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된다. 중력의 법칙과 같은 어떤 법칙들에 대한 우리 의 신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연을 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21]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물 질의 '단순 정위'라는 개념은 오류이며, 유물론과 기계론은 이 오류에 따른 산물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시간 이해와 관련하여 '단순 정위'를 오류라고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단순 정 위에 관한 반박을 통해서, 1. 시간은 물질의 본질에 속하며, 2. 시간은 점이 아니라 지속을 가지며, 3. 사물이란 단 순 정위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의 변용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22] 이러한 시간 이해는 자연이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 된다.
B. 시간이해가 놓여 있는 두 개의 축 : '과정'과 '존재'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그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서의 '인간 경험'에서 출발하 기 때문이다.[23]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매우 미세한 원자이다. 아마도 화이트헤드의 사유의 구체적 현실은 돌, 나무, 강아지, 사람, 산, 강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이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이러한 구체적 인 사물들을 구성하는 유기체적 원자이다. 우리는 사람을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유기체organic body란, 말 그대로 각 기관organ이 결합하여 그 기관들의 단순한 합sum 이상의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는 개체를 말한다. 사람은 심 장, 콩팥, 혈관, 혈액, 뇌, 뼈, 근육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그 구성요소의 어느 것에도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성 격을 부여받은 결합체가 사람이다. 화이트헤드는 원자보다 더 미세한 소립자인 전자도 결합체라고 본다.[24] 하이 트헤드는 현실적존재와 가장 유사한 구체적 물리적 존재로 '에너지의 양자(量子)'[25]를 들지만, 그것에서조차도 현 실적 존재는 희미하게 식별될 뿐이다.[26]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를 구체적인 감각경험 속에서 직접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지점이 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가는 관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란 구체적인 사물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형이상학적 도식 속에서 가장 궁극적인 우주의 구성요소로서의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란 비록 인간이 감각할 수 없을지라도 지금 거기에 분명히 구체적 사실로 존재하는 궁 극적인 final 현실적인 사물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이 세계가 원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근대 자 연과학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인간 경험의 감각여건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 물의 최종 종착역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라는 관념은 모든 존재는 존재로부터라는 존재론적 원리[27]를 예증하는 여러 가지 측면들 중에 하나이다.
화이트헤드의 또 다른 출발점은 "모든 사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28]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세 단 어(All, things, flow)의 결합을 하나의 의미로 해석해 내는 것이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라고 한다. 더 나아가 "[이러 한] 사물의 유동이야말로 우리가 그 주변에다 철학체계를 구축해야 할 궁극적인 일반화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9]라고 말한다. 이러한 또 하나의 출발점에 주목할 때에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과정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록 화이트헤드가 존재 분석을 통하여 자신의 체계를 확립하고 는 있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보다 궁극 적인 것은 과정일까 존재일까 하는 점을 '런던 시대'의 화이트헤드에게서는 분명하게 읽어 볼 수는 없다.[30] 하지 만, 필자는 설명의 제 1범주에서 과정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 '과정의 원리'가 '존재론적 원리'보다 먼저 언 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정'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고찰한 {과정과 실 재}라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도 과정을 실재(존재)에 앞세우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본다.
어쨌든 '과정'과 '존재'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두 개의 축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과정 과 존재은 세계를 차례로 설명해 가는 27개의 형이상학적 범주적 도식 중에 첫 번째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의 제 1범주는 다음과 같다. "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이라는 것. 따라 서 현실적 존재는 피조물이며,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31]
설명의 범주로 체계화 된 화이트헤드의 철학 체계는 개략적으로 살펴볼 때, 이 과정과 존재를 다음과 같은 순 서로 설명해 나간다. 설명의 제 1범주에서 세계의 '과정'과 과정으로서의 '존재'를 정의하고, 설명의 제 2범주에서 과정으로서의 존재인 '합생'을, 설명의 제 4범주에서 우주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상대론적 원리'를, 설명의 제 9범 주에서 있음이 생성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과정의 원리'를, 설명의 제 18범주에서 생성 과정의 모든 근거는 현실적 존재로 부터라는 '존재론적 원리'를, 설명의 제 25범주에서 생성 과정으로서의 존재의 마지막 위상으로서 완결된 주체성 혹은 개체성을 가지는 '만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친다.[32] 그리고 설명의 원리를 전체적으로 개관할 때, 화이트헤드의 철학 체계는 과정과 존재를, 다수의 존재들이 서로서로 하나의 개별적 존재의 생성에 참여하는 '유 기체적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동과 현실적 존재, 다시 말해 과정과 존재라는 이 두 가지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두 축이다. 형이상학은 유동 속에 소멸해 가는 현실적 존재를 구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존속하는 현실적 존재'도 유동 속에 '소멸해 가는 현실적 존재'도,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우리의 경험의 궁극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유동 속에 소멸해 가는 현실적 존 재와 엄연히 존속하는 현실적 존재라는, 언뜻 보기에 모순된 우리의 경험을 조화시키는 것이 형이상학의 과제로 주어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과제 속에서, '시간의 문제'가 차지하는 근본적인 위치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과정이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흐르는 '과정'으로서의 시간이다. 사물이 흐른다는 명백한 경험이 우리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 다른 하나는 '존재'로서의 시간이 있다. '존재'로서의 시간은 '과정'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겪는 사물의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속하는 사물의 존재를 지탱하는 시간이다. '과 정'과 '존재' 사이에,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유동과 영속성'이라는 문 제로 정식화되어 있다. '유동과 영속성'의 문제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주요 배경이며,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절에서는 유동과 영속성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자.
C. 유동과 영속성
화이트헤드는 사물의 유동 flux of things 과 영속성 permanence 사이의 대립이라는 서양철학의 고전적인 문제 를 그의 유기체 철학을 통해서 조화시키고자 한다.[33]
유기체의 철학인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많은 사람들이 '과정철학'으로도 부른다는 것은 화이트헤드를 조금이라도 들어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과정"이라는 말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주조(主調)를 이룬 다. 바로 위의 인용문이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중에서 유일하게 "과정"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장의 첫머 리(제 1 절)에 나오는 글이다. 화이트헤드의 논의는 유동과 영속성의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우리는 유동하는 현실 의 삶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영속성을 또한 발견한다.
"관련성이 없는 세부적인 것들을 벗겨 내고 그 일반적 형태를 표현하면서 통합적 경향을 가장 훌륭히 묘사하고 있는 예는, 종교적 열망 을 나타내는 말 속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그처럼 많은 근대 형이상학이 천박성을 띠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이러한 본원적 인 감정 표출의 풍부성을 무시한 데에 있다. 결국 우리는 저 유명한 찬송가의 처음 두 줄에서, 하나의 통합적 경험에 있어서의 두 관념 의 완벽한 결합에 대한 표현을 발견한다.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우니.
여기서 첫째 줄은 '함께하다', '나', 그리고 호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존재자'[신] 등, 영속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두 번째 줄에서는 피할 수 없는 유동의 한복판에다가 이 영속하는 것들을 갖다 놓고 있다. 여기서 마침내 형이상학의 완전한 문제가 정식화되고 있음을 보 게 된다."[34]
화이트헤드는 대다수의 철학자들의 논의는 위에 인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앞줄(영속성)과 뒷줄(유동) 사이에서 요동하는 균형을 유지려는 것이라고 갈파한다.[35]
그의 책 {과정과 실재}는 엄밀하고 정교한 논의를 통해서 마지막 단원인 "최종적 해석"이라는 단원으로 넘어가 고 있다. 바로 그 최종적 해석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유동과 영속성에 대한 해석이다.
"피할 수 없는 유동 속에는 무엇인가 머무르는 것이 있고, 압도적인 영속성 속에는 유동성으로 빠져나가는 요소가 있다. 영속성은 오직 유동성으로부터만 추출될 수 있고, 일시적인 계기는 영속성에 복종함으로써만 충분한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 이 두 요소를 분리시키려 는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조차도 해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플로렌스의 메디치 교회에 있는 네 개의 상징적 조상(彫像) - 미켈란젤로 의 걸작 조각인 낮과 밤, 저녁과 아침 - 은 사실의 추이 속에 들어 있는 영속적 요소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조상들은 순환하는 연 속에 기대어, 사물의 본성 가운데 있는 본질을 영원히 보이면서 거기에 있다. 완전한 실현이란 단지 추상에 있어서의 초시간적인 것의 예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일시적인 것 위에 초시간성을 심어 놓는다. 완전한 순 간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쇠하지 않는다. 이때 시간은 '끊임없이 소멸한다'는 성격을 잃게 된다. 그것은 '영원성의 움직이는 영상'이 된 다."[36]
위의 아름다운 인용문이 바로 "최종적 해석"이라는 단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화이트헤드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의 문제제기의 출발점이었을까? 무엇이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그로 하여금 철학 하게 하 였을까? 필자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을 뒤흔드는 이 아름다운 문장이야말로 화이트헤드의 출발점과 그의 목표 를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예시되고 있는 시간성 과 영원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본다.[37] 화이트헤드는 이 한 쌍의 대극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갈파한다. 만일 시간과 영원을 분리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석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인간 실존의 비극은 다름이 아니라 유동하는 시간성이라는 숙명에서 비롯된다. "세계는 끊임없이 소멸해 간다는 성격의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한다."[38]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단순 히 소멸하지 않는 것이 구원인가? 과거의 단순한 유지가 구원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인간은 또한 새로 운 미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합리적 삶의 정점을 이루는 사실은 스스로를, 일시적으로만 유용한 덧없 는 향유 transient enjoyment 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39] 세계는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면서도, 친숙한 과거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40] 시간의 과정에 따르는 새로움이 상실을 수반한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 적 사실이기 때문이다.[41]
따라서 구원은 "시간적 세계의 과정이, 새로움이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 그런 질서"[42] 속에 놓여 있다. 세계의 과정이 그런 질서 속에 서로 결부되어 있는 다른 현실태들의 형성으로 이행하여 가는가 하는 문제야말로 종교의 근본 문제이다. '새로움'이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 그런 질서! 바로 그러한 창조성 속에서만 구원이 있다. 시간과 영원과 창조가 만나는 바로 그 자리, 시간성에 묶인 세계가 창조적 영속성과 만나는 그 자리, 바로 그 자리를 꿈 꾸며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의 최종 목표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43] 그 희망이 화이트헤드로 하여금 '과 정' ― 시간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는 ― 에 주목하게 한 이유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태도는 인간의 경험을 하나의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확신에 근거하며,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세계를 우리 나름대로 이해하기에 앞서 서, 우리의 경험의 통일성과 그 경험이 향유되는 세계의 통일성을 먼저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4]. 따라 서 시간성에 묶인 세계가 창조적 영속성과 만나는 그 희망이야말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유기 체로서의 세계의 통일성에 관한 하나의 해답이며, 동시에 시간 이야기의 목표이자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 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일견(一見) 엄밀한 기하학과 물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딱딱한 형이상학으로 보 일지라도, 그 근본에는 우리의 현실의 비극적 실존과 그 구원의 열망이 담겨 있는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시간이해 인 것이다.
여태까지의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에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하자.
[각주]
[13] SMW, p. 37.
[14] SMW, p. 37.
[15] SMW, p. 81.
[16] SMW, pp. 80-81.
[17] SMW, pp. 82-83.
[18] SMW, p. 83.
[19] SMW, p. 82.
[20] SMW, p. 82.
[21] SMW, pp. 84-85.
[22] "현대 물리학은 '단순히 위치를 점한다'는 학설을 포기하였다. 별, 행성, 물질의 덩어리, 분자, 전자, 양자, 에너지의 양자 따위로 불리고 있는 물리적 사물이라는 것은. 각각 그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시공 속의 변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 of Ideas(Cambridge : At the Univ. Press, 1933), 오영환 역, 관념의 모험(서울 : 한길사, 1996), p. 256. (이하에는 AI 로 한다))
[23] "우리의 여건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현실의 세계이다. 이 현실의 세계는 관찰에 있어 우리의 직접 경험의 주제라는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 어떤 사상이든 자신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길은 직접 경험을 해명하는 것이며, 사상의 출발점은 이러한 경험의 구성요소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데에 있다."(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 An Essay in Cosmology(New York : Macmillan, 1978.), Edited by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W. Sherburne,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서울 : 민음사, 1991), p. 51. (이하에서는 PR 로 한다))
[24] 전자는 전자적 계기들의 '사회'이다. (PR, p. 195.)
[25] 최소량의 에너지를 가지는 양자(量子). 그것의 에너지는 양자조건에 입각해서, 진동수가 1인 양자이고, 에너지는 1h이다.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常數)이다.
[26] 현대물리학에서 입자를 더 나누기 위해서는 더 큰 입자 가속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더 큰 입자 가속기에 의해 잘라진 입자들은 현실적으로 에너지의 교환에 의하여 더 작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무거운' 입자가 된다는 데 그 문제가 놓여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물리학은 몇 가지 쿼크로 이루어진 유기적 결합이 소립자를 구성한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아직 쿼크는 이론적 상상의 입자일 뿐이며, 독자적 존립은 밝혀진 바 없다.
[27] '존재론적 원리' ontological principle 는 설명의 제 18범주에 속하며, 현실적 존재의 생성 과정이 임의의 특정 순간에 순응하고 있는 모든 조건은 그 근거를 자기 자신인 주체의 성격에 두고 있거나, 그 과정(합생)의 현실세계 속에 있는 현실적 존재의 성격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존재는 존재로부터라는 말이 가지는 유기체적 원리이다.(PR, p. 83.)
[28] PR, p. 382.
[29] PR, p. 382.
[30] 화이트헤드는 {자연 인식의 원리에 관한 연구}에서 시간의 비가역성을 '자연의 창조적 전진'과, '사건의 고유성'에서 찾고 있지만, 그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원천인지는 결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PR, p. 오160.) 이 글의 맥락과 관련하여, 자연의 창조적 전진은 '세계의 과정'에 해당하고, '사건의 고유성'은 존재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31] PR, p. 80.
[32] PR, pp. 80-86.
[33] "<모든 사물은 흐른다>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그것과 경합하는 정반대의 관념이 있다. … 이 정반대의 관념은 사물들 ― 견고한 지구, 산, 돌, 이집트의 피라밋, 인간의 정신, 신과 같은 ― 의 영속성 을 역설한다." (PR, p. 383.)
[34] PR, pp. 383-384.
[35] PR, p. 384.
[36] PR, p. 581.
[37] 화이트헤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의 면도날보다 더 날카로운 논의와 전자현미경조차 따라갈 수 없는 세밀함 속에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것 때문에 화이트헤드가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깊이 느낄 만큼의 풋풋한 사람의 살내음 이었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주는 큰 매력이다.
[38] PR, p. 584.
[39] PR, p. 585.
[40] PR, p. 584.
[41] PR, p. 586.
[42] PR, p. 585.
[43] "신과 세계는 창조적인 창시성의 성질, 즉 개념적 욕구와 물리적 실현에 관한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학설에 의해, 우주론적 문제에 대한 해석을 구현하고 있다. 이 논제는 이 우주론의 마지막 장을 이룬다" (PR, p. 587.)
[44]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p. 147-148.
III.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
우주를 유기체적 관계와 과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그의 시간이해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시간 이해의 가장 큰 특징이자 근본개념으로 알려진 '시간의 획기성 이론' epochal theory of time 과 관련된 시간 이해의 논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시공의 기하학적 구조
화이트헤드는 17-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구를 지배했던 우주론을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 는 과학적 유물론은 19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네 가지 관념인 1. 장이론(場理論), 2. 원자성(原子性), 3. 에너지 불 변의 법칙, 4. 진화론(進化論) 등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으며, 그 관념의 연장선 속에서 등장한 20세기의 상대론과 양자론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유물론의 근거가 17세기의 뉴톤을 중심으로 하는 천재들이 '존재를 시공간에 단순히 위치를 점하는 물질들의 배치구조'로 이해하던 도식에서 찾았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 의 하면, '단순히 위치를 점한다' simple location 는 도식은 분명한 인간의 경험과 조화될 수 없으며, 추상적 개념이 구체적 경험을 왜곡하는 사례라고 보았다. 과학적 유물론의 도식은 물질이 단순히 위치를 점한다는 '단순 정위의 오류' fallacy of simple location 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 추상 이론이 구체적 경험을 왜곡하는 '잘못 놓여진 구체 성의 오류'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를 통해서 확고한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위치를 점한다는 것은 모든 물질들은 자신이 위치한 시공영역 안에서 독자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물들의 관계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뉴턴의 물리학이 단순 정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 다.[45] 뉴턴 물리학은 독립된 물질 입자의 개체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46] 각각의 돌은 다른 물질 부분과의 연관 을 도외시해도 충분히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우주 속에 고독하게 존재하는 단일 공간의 유일 한 점유자이다."[47] 이 곳에 놓여 있는 그 돌은 저 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도 충분히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돌은 과거나 미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도 충분히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현재의 순간 속에 구성되 어 있는 것으로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파악될 수 있다.[48]
'단순 정위'에 표현되는 시공 이해는 연장을 가지지 않는 점들의 무한한 집합으로 구성된 시공이해이다. 여기에 는 유클리드의 점과 선의 정의에 따르는 기하학이 적용되고 있다.[49] 이 기하학에 따르면, 시공은 무한한 분할이 가능하다. 어떤 공간을 어떤 기간 동안 점유하는 물질의 존속을 가정할 때, 그 물질은 시공간으로 무한한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공간에 대해서는 분할이 가능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분할이 불가능하다. 왜 냐하면, 그 기간 동안 물질은 그 기간에 속한 모든 시간에 대해 완전한 구조를 가지고 존속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 문이다. 만일 그 기간에 속한 모든 시간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동일한 기간을 새로운 기간으로 설정하면 동일 한 논의가 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물질은 어느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은 물질이 독립 적으로 시공을 점유하고 있다는 가정에 위배된다. 이렇게 공간에 대해서는 분할 가능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분 할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은 물질의 본질이 아니며, 시간의 추이는 부정되어야 한다. 기하학적으로 점이 그 기하학적 공간의 기본요소이며, 기하학적 공간은 점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하학적 성격이 동일하게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추 상적 기하학이 구체적 자연을 왜곡할 수는 없는 것이다.[50]
이러한 점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을 해석하는 기하학은 다른 기하학이 되어야 하며, 화이트헤드의 논의를 따르자면, 공간적 연장과 시간적 추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하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 제 4 부에서 자신의 유기체론을 위한 기하학을 전개한다.[51] 이 기하학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의 주요 문제인 연장적 연속체에 관한 기하학이다.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은 드 라구나 T. de Laguna 교수의 '포함'과 '연장적 결합' 의 정의를 사용하여 전개된다.[52] 이는 뉴톤이 사용한[53]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있어서 고전적인 점, 선의 정의에 의하여 전개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간략하게 개요만 본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이 점과 선의 정의는 각각 제 1 공준과 제 2 공준에 해당한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은 점과 선의 정의를 시작으로 전개되고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점의 정의는 암암리에 '지속'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끌어들인다.[54] 이에 반하여,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은 영역과 결합의 개념으로부터 전개된다. 따라서 점과 선은 영역과 결합의 개념을 통해서 연 역되고 있다. 점과 선은 각각 정의 16과 정의 18에 가서야 등장하는 개념이다. '영역과 결합'이 '연장과 연속'에 관 련된 개념임을 염두에 둔다면,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이 다루는 점과 선은 연장과 연속에 관련되는 개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 제 4부에서 연장적 결합의 개념을 통해서 지속의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 고도 점을 정의할 수 있으며, 연속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55]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 드의 연장적 연속체의 정의는 연장적 결합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이 유클리드의 기 하학의 설명을 포함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이 점, 선을 정의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이 전적으로 다를 뿐이다.[56] 예컨대, 화이트헤드의 점적이라는 개념도 점에 관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함의를 넘어선 다. "점의 한 성원인 추상적 집합은 '점적'이라고 불릴 것이다"[57]라는 화이트헤드의 정의는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 다. 아래의 인용문은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에 있어서 점이 가지는 지위를 잘 보여준다.
"'연장'은 '연장적 결합'에 의해서 해석되었어야 한다. 즉 연장은 결합체의 현실태들 간의 관계가 지니는 한 형식인 것이다. 점은 어떤 '형 상'을 갖는 현실적 존재의 한 결합체이다."[58]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전개한 기하학을 통해서 정의된 '영역'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영역의 내부인 '용적'은 그 외 부의 연장적 가능태에 대해서는 부정되는 완전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 한계성 boundedness 은 연 장의 시간적 측면과 공간적 측면에 다같이 적용된다" 고 한다.[59] 이 기하학에 따른 시공의 도식은 연장적 연속체 로서의 시공의 도식이며, 이 도식 속의 하나의 연장은 그것과 외적으로 결합된 다른 연장과 관계되지 않고는 존립 할 수 없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연장적 연속체에 관한 기하학은 '단순 정위'라는 개념을 배격하고 있으며, 이 기 하학을 따르는 시공의 기하학은 현실적 존재의 연장적 결합과 연속성에 부합된다. 화이트헤드의 시공은 기하학적 으로, 연장적 결합의 관련 속에 놓인 연장적 연속체인 것이다.
시공의 기하학과 관련하여 첨가할 중요한 개념은 초점적 영역[60] focal region 이다. 초점적 영역을 쉽게 표현 하자면, 시공의 기하학적 구조와 관련하여 사물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61] 화이트헤드는 현대 물리학에 있 어서 물리적 사물이란 각각 그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시공 속의 변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62] 초점적 영 역은 시공이 변용된 영역이며, 일상적인 표현 방식으로는 사물이 있는 곳에 해당한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의 장이 론과 상대론, 원자론, 양자론을 함의하는 것이다. 즉, 상대론에 따르면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를 원자화시키는 양자론(量子論) quantum theory 에 의하면 모든 에너지는 양자조건(量子條件) quantum condition 을 따르며, 장 이론(場理論)에 따르면 물질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이렇게 조건화된 장이론에 따라서 사물이 있는 곳을 표현하면, 어떤 집중된 장소에서 장의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소가 바로 시공의 기하학적 도식에 의하면 초점적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초점적 영역은 시공의 가장 먼 깊은 곳을 거쳐 유한한 속도로 그 영향이 흘러나온다고 한다.[63] 따라서 초점적 영역은 외적 흐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순간성에 매인 사실이 될 수 없다. 영역의 내부인 '용적'은 그 외부의 연장적 가능태에 대해서는 부정되는 완전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역은 외적 흐름과 다 를 뿐인 그런 요동상태(搖動狀態)[64] a state of agitation 를 이룬다. 물리적 사물이란 공간들과 시간들의, 또 그 러한 시간들 속의 공간들에 있어서 조건들의 어떤 조정이며, 그러한 조정은 수학적 관계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일반적 규칙의 한 예증 사례이다.[65]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적 시공은 플라톤의 수용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수용자는 모 든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로부터 추상된 역사적 경로가 자리하는 필연적인 공동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66] 화이트헤드는 현대 수리물리학의 시공이 플라톤의 수용자의 관념과 가깝다고 한다.
"수리물리학자들은 이러한 공식들이 엄밀하게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하며, 단순한 시공의 개념으로부터 이러한 공 식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플라톤이 선언한 바와 같이, 시공 그 자체는 형 상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67]
B. 시공의 실재성과 사건
오로지 인식 활동만을 본령으로 하는 정신 속에서 실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철학적 관념론이라고 하는데, 화이트헤드는 19세기의 관념론을 비판한다. '절대적 관념론'[68]의 경우 자연의 세계는 단지 '절대자'의 단 일성을 어떻게든 분화시키고 있는 여러 관념들의 세계에 불과하며, '다원적 관념론'의 경우 이 세계는 다양한 모나 드들의 다양한 정신적 단일성들을 분화시키고 있는 갖가지 관념들의 최대 공약수일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관념론들이 자연의 사실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유기체라는 궁 극적 개념의 기초를 위해서 진일보한 단계의 잠정적 실재론을 구성하고자 한다.[69]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의 지위를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분석과 관련한 중요한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이 양자[시간과 공간]에는 각기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사물들은 공간에 의해서도 분리되고 시간에 의해서도 분리된다. 그러나 또한 그것 들은 공간에 있어서 공존하며, 비록 동시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간에 있어서 또한 공존한다. 나는 이러한 두 특성을 각각 시공의 분리적 separative 특성 및 파악적 prehensive 특성이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시공의 제 3 특성이 있다. 우선 공간 내에 있는 모든 사물은 어떤 명확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오직 현재의 모양만을 가질 뿐 다른 모양은 갖지 않으며, 또 어떠 의미 에서 그것은 오직 이 장소에 존재할 뿐 다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간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물은 어떤 기간 동안 존속할 뿐이지 그와 다른 어떤 기간 동안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시공의 양태적 modal 특성이라 부르겠다. 이 양태적 특성만을 떼어내어 생각할 때, 단순 정위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양태적]특성은 분리적 특성 및 파악적 특성과 결합되어야만 한다."[70]
4차원적 시공을 동시에 고찰해야 하지만, 사고의 편의를 위해서 공간에 대해서 먼저 논의를 진행시켜 보자. 공 간을 분리시켜서 생각한다고 해서 더 이상 새롭게 설명되어야 할 것은 없다.[71] 이하의 시공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설명을 정리한 것이다.[72]
체적은 공간의 가장 구체적인 요소이다. 분리적 특성은 체적을 부분 체적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만일 분리적 특 성만을 고려한다면, 체적은 무한히 부분체적으로 분할 될 것이고, 결국은 더 이상 체적을 가지지 않은 점으로 이 행할 것이다. 이것은 체적이란 단지 체적 없는 요소들의 집적에 불과한 것이라는 추론을 낳는다. 그러나 경험의 궁극적 사실은 체적의 통일이다. 예컨대 우리는 체적을 경험할 때, 방의 내부 공간으로서의 통일을 가진 체적 같 은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지, 점들의 단순한 집적으로서의 방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점들의 단순한 집적으로 서의 방이란 논리적 상상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공간 경험에 통일을 부여하는 것이 파악적 특성이다. 따라서 근원적 사실은 체적의 파악적 통일 prehensive unity of volume 이며, 이 통일은 분리적 특성이 초래한 무수한 부분들을 통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 리가 구체적으로 이 부분들을 경험할 때, 그 부분들은 또 그 나름대로의 파악적 통일을 가지고 있게 된다. 따라서 파악적 통일은 부분들의 파악적 통일들에 의해 제한되며, 그것은 단순한 논리적 통합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부분들의 파악적 통일들은 각각 하나의 양상으로서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양태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공간의 부분체적들을 A, B, C 라고 할 때, B는 A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양 상을 가지며 C도 그렇고, B와 C의 관계에서도 또한 그렇다. 이때, A로부터의 B의 이러한 양상은 A의 본질에 속 한다. 공간의 부분 체적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전체 안에 있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만일 우리 가 부분들을 그 주변환경으로부터 떼어 낼 경우, 우리는 그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A에서 본 B의 양상을 B가 A의 구성에 참여하는 양태라고 한다.
따라서 A의 파악적 통일은 A의 관점에서 본 다른 모든 부분체적들의 양상을 A가 파악하는 데서 성립하는 통일 이다. 하나의 체적이 지니고 있는 형상은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양상 전체를 모두 이끌어 낼 수 있는 공식이다. 따 라서 체적의 형상은 그것의 부분들의 여러 양상들의 단순한 합보다 더 추상적인 것이다.
시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분리적 특성은 일정한 시간적 지속을 분할한다. 그러나 지속이 없는 하나의 순간이란 상상에 의한 논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간경험의 궁극적 사실은 하나의 통일된 지속이다. 따 라서 근원적인 사실은 파악적 통일성이다. 시간의 각각의 지속은 다른 모든 지속들을 자신 속에 반영한다. 이것이 양태적 특성이다.
위와 같이 시공의 특성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가 상호적임으로 해서 일종의 악순환이 존재한다. 그 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난점이 생기는 까닭은 시공이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함으로써 시공 그 자체는 형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주장에 동의한다.[73] 시공은 여러 사건들과 그 사건들 상호간의 질서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 특성을 명확히 규정해 놓은 것이며, 따라서 시공에 관한 설명은 그것이 추출되기에 앞서 시공 을 포함하고 있던 사건들에 대한 언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74]
"파악" prehension 이란 화이트헤드의 신조어(新造語)이다. 관념론자인 버클리는 우리가 정신 밖에 존재하는 사 물을 실재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들의 실재일 뿐이라고 한다. '감각 적 사물이 그 자체로, 즉 정신 밖에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표현이라는 것이다.[75] 이러한 극단적 관념론에 맞서서 화이트헤드는 버클리의 '관념'은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며, 인식은 사물의 파악적 통일을 인식하 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인식 이전에 '이미' 사물의 본질적 특성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파악이란 이러한 극단적 관념론에 맞서는 실재론적 용어이다.[76] 화이트헤드의 파악은 인식 이전의 직관적 이해를 뜻하는 말로 ― 비인식적 직관적 이해 uncognitive-apprehension 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실 현 realisation[77] 이라는 것은 사물들이 모여서 파악에 의한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고, 이때 실현되는 것은 사물 들이 아니라 파악이라고 한다.[78]
이러한 논의를 따라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여러 파악적 통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로 간주한다. 현실세계는 다수의 파악으로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그러한 파악태들의 상호 연결된 여러 관계의 일반적 도식 을 나타낸다. 각각의 파악태들은 전체적인 통일적 복합체의 실재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파악 태는 자신의 입각점에서 전체의 각 부분에 부여해야 할 여러 양태성을 통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악이 란 통일의 과정이며, 자연은 파악에서 파악으로의 필연적인 전이를 통한 팽창적 발전의 과정이다. 이처럼, 자연은 발전하는 여러 과정의 조직체이다. 실재는 과정이다.[79]
화이트헤드는 이 파악태를 사건 event 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가 목표로 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나 여러 구성 요소의 단순한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 존재로서의 사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공은 여러 집합 들을 여러 통일체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사건은 이러한 시공적 통일체들 가운데 하나인 것 이다.[80]
이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 가지 특성 ― 분리적, 파악적, 양태적 ― 을 가지는 화이트헤드의 시공 이해는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체로서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되고 있으며, 사건이 자연현상의 궁극적 단위라는 것 이 전제되어 있다.[81] 시공은 사건에 앞서서 자립적으로 실재하는 것도, 사건에 대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도 아니다. 시공은 사건과 더불어 사건을 성립시키는 체계로서만 실재하는 것이다. 실재는 과정이며, 시공은 과정의 특성일 뿐이다.[82] 시공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형상도 가지지 않은 것이다.
C. 시간과 공간의 분화
화이트헤드는 연장적 관계를 우리가 사는 우주시대의 시공적 관계보다도 더 기초적인 것으로 본다.[83]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물리적 시공을 그보다 더 보편적인 기하학적 전망 속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장적 관계의 일반적 도식에서 볼 때 "이 우주 시대에 있어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물리적인 연장적 연속체는 4차원적이다".[84] 즉, 4차원의 물리적인 연장적 연속체는 연장적 관계의 일반성에서 도출된 우리의 우주시대의 특징인 것이다. 이 네 개의 차원을 가진 연장적 연속체에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의 차 이에 앞서 시공을 동일한 연장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해를 다루고 있는 이 장에서 절의 제 목을 '시공'이라고 붙인 이유는 아직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4 개의 차원 중에 3개의 차원을 공간에 1개의 차원을 시간에 할애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특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연장적 관계가 있고, 다음으로 이 우주시대의 4차원의 물리적인 연장적 연속체가 있고, 맨 나중에 시간과 공간의 분화가 있다.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의 분화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 를 추상적 수준에서 식별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한다.
"새로운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과거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었으리만큼 긴밀하게 결합시켰으며, 그래서 구체적 사실에 있어서의 양자의 분리는, 다른 의미를 낳게 다른 추상 방식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추상 방식은 자연 안 에 있는 어떤 것에 주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고립시켜서 고찰한다. … 여기서 철학에 맡겨진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상이한 의 미의 공간과 시간이 가능하도록 자연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지위를 해석해 내는 일이다"
화이트헤드는 사건을 분석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분화를 설명한다.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하나 는 외부의 사건들의 양상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 양상을 통해서 외부의 사건들의 형성에 관여하는 것. 따라서 1. 사건이란 여러 양상들을 끌어들여서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패턴을 형성한다. 2. 어떤 사건 이 그 외부에 미치는 작용은, 파악된 통일체들로서의 다른 여러 사건들의 패턴을 형성하는데 관여하는 그 사건의 여러 양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패턴의 영향력이 커지고 환경의 변경에 중요성이 되려면 패턴의 지속이 필요하다. 이 패턴의 지속이 시간과 공간의 분화를 요청한다.[85]
패턴이 지속된다는 것은 사건의 계기하는 여러 부분들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이고, 또 사건은 패턴의 생애를 이 루는 것이다. 이점에서 패턴의 지속은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분화시킨다.[86]
한편, 시간적인 '지금' 패턴이 공간적으로 존재할 것을 요청한다.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공간은 시간으로부터 분 화된다. 시간적 질서는 패턴이 그 생애의 각 시간적 부분 속에서 재생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그 패턴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대상 또한 지속함으로써 공간을 시간으로부터 분화시킬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여러 사건들 의 집합체가 지속하는 대상들을 위해서 존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지속하는 대상들이 없이도 집합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존속하는 집합체가 없이는 지속하는 대상들도 있을 수 없다.[87]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의 시공 이해의 논리적 맥락은, 먼저 연장적 관계가 있고, 다음으로 이 우주시대의 4차원의 물리적인 연장적 연속체가 있고, 맨 나중에 시간과 공간의 분화가 있다는 순서를 가진다. 시간과 공간의 분화는 '지속하는 유기체'의 전개와 더불어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사건들 사이의 영향력과 관계하여 사건이 가지는 패턴의 지속의 필요성은 시간의 분화를 요청하며, 역으로 지속하는 대상은 공간의 분화를 요청한다.
D. 자연을 넘어서는 시간
이와 같이 시공의 분화는 어떤 사건이 다른 여러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그 본질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화이트헤드는 하나의 사건이 가지는 관계는, 다른 관계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사건 에 관한 한 모두 내적인 관계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과 구별되고, 유일한 장소와 존 재방식을 부여받는 것은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본질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관계 항으로서의 영원적 객체들은 사건과 외적인 관계를 가지지만, 시공 관계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관계이 론은 화이트헤드의 상대론적 관점을 시사한다.[88]
내적관계라는 개념은 여러 관계를 종합하여 사건의 발현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활동력으로서의 실체라는 개념 을 필요로 한다.[89] 이 실체가 사건 안으로 끌어들인 여러 양상들을 통일적 복합체로 만드는 것이다. 사건과 사건 들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외적 관계로만 이해할 때 모든 사건은 공평해지며, '사건의 그 사건임'은 ― 사건의 동일 성, 혹은 사건의 유일성 ― 성립될 수 없다. 관계의 내적 특성은 추상적인 외적 관계의 공평한 도식 속에 실재적 인 것으로 나타난다.[90] 이것은 관계성에 의해 개체적 동일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구별을 무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의 구분은, 개체적 동일성에 대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여러 사건들이 자신을 실 현하는데 이용하는 개개의 종합적 활동력들을 조정하는 것은 사건의 기저에 있는 여러 활동적 실체들에 대한 조 정이며, 그 조정에 의해서 이 실체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유일한 실체들의 개체화, 즉 양태들로 나타난다. 이 조 정의 과정이 시간적 과정을 끌어들이는 장본인이다. 따라서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종합적 실현의 과정을 조정하 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자연의 시공 연속체를 넘어서고 있다."[91]
지속하는 유기체라는 관념은 한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를 내적인 것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본질로 한다는 것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들의 개체성을 조정하는데 시간적 과정이 요청된다. 시간은 종합적 실현의 과 정을 조정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점에서 시간은 자연의 시공 연속체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사건은 개체적 동일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종합적 실현의 과정을 조정하는 특성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자연의 시공 연속체를 넘 어서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은 시간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자연의 시공 연속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시간이 자연을 넘어서서 정신으로 연장됨'을 의미한다.[92] 왜냐하면 정신은 '실현의 과정을 조정 하는' 감각인식과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넘어서 연장된 시간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이] 자연을 넘어서 정신으로 연장된다는 것은 계기적 serial 이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단지 자연에서의 추이의 특성을 표현할 뿐인, 자연에서 그것이 획득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측정할 수 없는 추이 그 자체의 특성이다. 다시 말해 추이는 연장 의 결합 안에 있는 자연에서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지속 안에서의 추이의 특성 quality 은 자연을 넘어서 연장하는 [시간의] 특성의 특별한 표현이다. 예컨대 추이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으로서의 자연의 특성일 뿐 아니라, 앎의 진행과정 으로서의 감각인식의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 시간의 측정가능성은 지속의 속성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래서 또한 시간의 계기적 성격이 기도 한 것이다."[93]
관계의 상대성에 따라 개체성의 와해가 문제되고, 개체성의 문제는 관계의 상대성을 와해시키는데 따르는 조정 의 문제를 요청한다. 이것은 각각 우주의 연대성을 구현하는 상대론적 원리[94]와, 개체적 실현을 뒷받침하는 존재 론적 원리[95]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주와의 연대성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개체적 동일성을 실현하는 두 가 지 원리가 된다. 바로 이 문제가 시간이 자연을 넘어선다는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존재론적 원리를 지탱하는 시 간은 자연을 넘어서는 시간인 것이다. 또 이 두 가지 원리가 상호 결합됨으로써 세계의 과정에 있어서 등장하는 개별적 사건은 모두 유일한 것이 된다.[96] 개별적 존재의 유일성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다. 이 두 가지 성격은 모두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측정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 계기적 시간과 관련된 지속이다. 이것은 자연의 연장적 결합으로서의 계기로 이해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상대성의 원리를 반영한다. 다른 하나는 측정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 하나의 지속 내부에 있으며, 감각인식 이 진행되는 시간이다. 이것은 자연의 연장적 결합으로서의 계기를 넘어선다. 이 시간은 개체적 실현을 구현하며, 존재론적 원리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이끌어 낸다.
E. 시간의 획기성 이론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자연을 넘어서는 시간이 있음으로 해서 '시간의 과정'이 반드시 하나의 일직선적 계기의 계열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다만 과학적 가설이 현재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적 시 간을 넘어서는 시간의 과정은 하나의 일직선적인 계기의 계열이 아닌 경우라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끌어들인 다.[97]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직접적인 관측을 토대로 ― 이것은 측정 가능한 자연적 시간의 경우가 되겠는데 ― 실현의 시간적 과정은 계열을 이루는 일직선적인 과정들의 1군(群, group) 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 직선적 계열들은 각기 하나의 시공계에 해당한다.[98] 여기서 각기 하나의 시공계에 해당한다는 말은 각각의 시공계가 상대론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써 이러한 가정을 옹호한 다.
"1. 우리의 외부에 확대되어 있으면서 우리 자신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표상, 2. 감관에 의해 인식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무엇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한 지적인 파악 apprehension, 3. 발현 하는 대상들의 존속 enduring 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한 분석"[99]
이 인용문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존속은 시간적 단편을 나타낸다. 위의 3항에서 말하는 존속은 지금 실현된 패턴의 현시를 포함한다. 이 현시는 패턴을 한 사건에 내재하는 것으로 그러나 또한 영원적 객체들에 다가 여러 양상을 부여하는 자연(또는 마찬가지로 사건들에다가 여러 양상을 부여하는 영원적 객체들)의 시간적 단편을 표시하는 것으로 현시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존속은 시간적 단편을 나타낸다. 둘째, 패턴은 지속 안에 서 공간화 된다. 실현된 패턴은 사건의 본질 속에 들어가며, 그럼으로써 하나의 전체로서의 지속 안에서 공간화 된다. 사건 안에는 그 자체 안에 내재하는 여러 양상(다른 사건들과의 관계)이 있으며, 각각의 사건은 이러한 양상 의 부분들로서 지속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지속은 그 사건과 동시적인 자연전체이다. '우리의 외부에 확 대되어 있으면서 우리 자신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표상' 이라는 말의 의미는 지속이 그 안에 동시적인 자연 전체에 대한 패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서 이러 한 분석에 따라서 시간의 두 가지 성격이 어떻게 양립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렇게 사건은 자신을 실현시키는 가운데 하나의 패턴을 현시하며, 이 패턴은 명확한 의미의 동시성에 의해 규정되는 일정한 지속을 필 요로 한다. 이러한 동시성은 제각기 현시된 패턴을 하나의 명확한 시공계에 연결시킨다. 여러 시공계의 현실성은 패턴의 실현에 의해 성 립되지만, 그것은 실현의 시간적 과정을 뒷받침해 주는 여러 사건을 이루는 도식 전체에 내재해 있다."[100]
이 인용문이 시사하는 바는 사건의 완전한 실현을 통해서 외적으로 표현되는 명확한 시공계는, 비록 모호한 형 태이기는 하지만 그 실현의 과정 안에 그와 유사한 싹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패턴은 어떤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포함하는 지속을 필요로 한다. 순간의 무한한 합이 지속일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 지속은 순간적인 시간이 아니어야 한다. 순간이란 단지 구체적인 사건들간의 어떤 점적 접촉만을 나타 내는 더 추상화된 개념이다. 공간화 된 패턴은 지속의 공간화를 요청한다. 이 지속은 공간화 된다. 이 공간화는 지 속이 사건의 특성을 구성하는 실현된 패턴을 위한 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속은 공간화되어 있음으로 해 서 정지되어 arrest 있다. 지속이 공간화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기간화 되었다는 것이며, 기간화 되었다는 것은 측정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01] 또, 이 지속은 공간화 되어 있음으로 해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은 이 지속의 켜 slice 로 이해된다. "지속은 시간적 폭에서는 유한 하지만 공간적 연장에서는 무한한 자연의 구체적 널판이다."[102] 화이트헤드는 이 지속을 에포크[103] epoch 라고 부른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의 지속의 개념은 이 에포크로서의 지속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에 있어서 에포크로서의 지속은 하나의 합생을 담은 하나의 지속이다. 화이트헤드의 다음의 말은 에포크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존속 enduring 이란 계기하는 사건들에 있어서의 패턴의 반복이다. 따라서 존속은 저마다 패턴을 지니고 있는 여러 지속들의 계기를 필 요로 한다. 이 설명에서 '시간'은 '연장'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며[104], 또 시공의 연장적 특성에서 생기는 '가분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다. 그러므로 시간을 또 다른 형식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시간은 오직 에포크를 이루는 여러 지속들의 계기일 따름인 것이다. 그 러나 이 설명에 있어 차례로 계기하는 존재들은 지속들이다. 지속은 일정한 사건 속에서 패턴이 실현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가 분성과 연장성은 일정한 지속 안에 있는 것이다. 에포크를 이루는 지속은 그 계기하는 가분적 부분들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105]
여기서 시간이 연장과 가분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다는 것은, 이 우주시대의 물리적인 4차원적 연장적 연속체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이 자신의 독자성을 획득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차원을 형성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 라서 시간은 여전히 '연장적 성격과 가분적 성격' ― 자신이 갈라져 나온 물리적 4차원적 연장적 연속체가 가진 ― 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에포크를 이루는 지속은 그 계기하는 부분들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에포크를 이루는 지속을 통해서 시간이 에포크적이라고 time is epochal 결론 짓는다. 이 것이 '시간의 획기성 이론' epochal theory of time 이다. 에포크적인 시간은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특성을 가 장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에포크적 시간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명확한 설명이다.
"실현이란 연장의 장에 있어서의 시간의 생성이다. 연장은 가능태로서의 여러 사건의 복합체이다. 실현을 통해 가능태는 현실태가 된다. 그렇지만 가능태로서의 패턴은 지속을 필요로 하며, 지속은 패턴의 실현에 의해서, 하나의 에포크를 이루는 전체로서 나타내야 한다. 그 러므로 시간은 본질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가분적인 요소들의 계기인 것이다. 지속은 시간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어떤 존속적 사물의 실 현을 초래한다. 여기서 시간화란 실현인 것이다. 시간화는 실현을 떠난 또 하나의 연속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원자상을 이루고 있는 것의 연속적 계승 succession 이다. 따라서 시간화는 가분적이지만, 시간은 원자적인 즉 에포크적인 것이다. 이러한 학설은 사건 및 존속 적 대상의 본질에 관한 학설에서 비롯되고 있다."[106]
에포크로서의 시간은 그것이 원자적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단순히 부드럽게 진행되는 연속체라고 생각했던 우 리의 상식을 뒤엎는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이는 마치 상식적 시간이해가 '경사면' 처럼 매끈한 추이를 가지는 것이라면, 에포크로서의 시간은 '계단' 처럼 덜컹거리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에포크로서의 시간은 최소단위를 가 짐으로써 그 측정치에서 불연속적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똑 같은 놀라움이 현대물리학의 양자론(量子論)에서 발 견된다. 현대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가 연속적인 추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원자적으로 띠엄 띠엄한 값 만을 가진다는 이론을 내어놓았다.[107] 이것이 양자론 quantum theory 의 기초이다. 연속적인 흐름으로 생각했 던 에너지에 원자성을 부여하는 조건을 양자조건 quantum condition 이라고 하며, 모든 물질은 양자조건에 의하 여 양자화 된다. 이로부터 저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파생된다. 화이트헤드 자신도 에포크로서의 시간이 함의 하고 있는 우주론적 관점이 현대물리학의 양자적(量子的) 불연속성과 일치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08]
지속은 내적으로 패턴의 실현이라는 명백한 방향을 가짐으로써 에포크적 시간은 내적으로 방향성을 가진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 존속이 패턴을 지니고 있는 여러 지속들의 계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내적인 방향성은 외적으로도 방향을 가진다. 에포크적인 시간은 패턴의 실현이라는 시간의 방향을 따라 매 실현마다 종결점이 놓여 있는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방향성을 의미한다.[109] 이 방향성은 앞절에서 논의된 시간의 비가역성의 문 제와 더불어 거시적인 시간인 역사가 직선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외적으로 드 러난 에포크적 계기들을 느끼는 것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현실적 존재는 사건으로, 지속은 합생으로, 실현은 만족에 대응될 수 있다. 현실적 존재는 시간적으로는 시간을 원자적으로 분할하는 하나의 지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만족은 하나의 에포크로서 새로운 현 실적 존재를 완결한다. 이 논의는 다음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시간의 획기성 이론이 가지는 함의는 이제까지 논의해 온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총 결산과 같은 성격을 가 진다. 시간의 획기성 이론은 1. 연장적 결합의 기하학적 전망이 예시하는 4차원의 물리적 연장적 연속체에 의해 뒷받침되며, 2. 사건의 실재성으로부터 생성되는 시간이며, 3. 패턴의 지속으로부터 공간과 분화된 시간이며, 4. 자 연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한 시간적 성격을 그 안에 포함하는 시간이며, 여기에 더하여서 이 절에서 논의한 대로, 5. 다양한 상대론적 시공계를 가지는 시간이며, 6. 측정가능한 시간이며, 7. 양자론적인 함의를 가지는 원자적 시 간이며, 8. 방향을 가지는 비가역적 시간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에 관해서 살펴보았으며, 그것이 '시간의 획기성의 이론' 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시간이해가 {과정과 실재}에 나타나는 여러 형이상학적 개념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주]
[45] 본고에서는 뉴톤의 절대 시공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반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뉴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단순 정위이며 단순 정위의 오류는 그것이 절대 시공이론이건 상대 시공이론이건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 정위의 오류는 시공이론이 절대성과 상대성이냐 하는 것보다 상위의 개념인 것이다.(SMW, p. 81.) 본고에서는 다만, 화이트헤드가 상대적 시공이론을 구상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임으로써 절대 시공이론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46] 이러한 도식은 질점역학(質點力學)에서 잘 드러난다.
[47] AI, p. 255.
[48] AI, p. 255.
[49] PR, pp. 527-528.
[50] 이것은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의 하나의 사례이다.
[51] PR, p. 515-535.
[52] PR, p. 505. 518, 519, 520. 화이트헤드는 Journal of Philosophy, Psychology, and scientific Method, Vol. XIX, 1922 에 실린 드 라구나 교수의 3편의 논문을 참조했다고 밝힌다.(PR, p. 505. 화이트헤드의 저자주2.)
[53] Fritjof Capra, The Turning Point(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82), 이성범 구윤서 역,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서울 : 범양사 출판부, 1985), p. 61.
[54] 점에 관한 유클리드 제 1의 공준은 (히드역으로는) "임의의 점에서 임의의 점으로 직선을 긋는다고 가정하여라."로 되어 있다.(PR, p. 528.) 여기서 '긋는다'는 행위는 암암리에 '지속'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부분과 전체에 관한 한 {과정과 실재}이전의 논의를 담은 {자연 인식의 원리들}과 {자연의 개념}은 결함이 있다고 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이러한 난점을 겪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출발점의 결함은 … 지속의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점을 정의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리하여 '지속'의 속성이어야 했던 것이 '점의 정의'가 되었던 것이다."(PR, p. 505.)
[55] "그 시점 이후에 드 라구나 교수는 '연장적 결합'이라는 …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고찰[지속]에 의하지 않고서도 점의 정의에 관한 나의 난점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PR, p. 506.)
[56] PR, p. 523. "정의 16. 기하학적 요소는 그것에 부수적인 기하학적인 요소가 없을 때, '점'이라고 불린다. '점'에 대한 이 정의는 '점'은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유클리드의 정의와 비교되어야 한다."
[57] PR, p. 523.
[58] PR, p. 528.
[59] PR, p. 526.
[60] 현실적 존재들의 느낌을 특징짓는 공적 사실인 곧고 평탄한 장소에 관한 기하학적 사실이 있으며, 이러한 기하학적 사실을 포함한 느낌이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여건 속에 예증된 형식이 곧고 평탄한 이 기하학적 장소와 관계하고 있는 느낌을 '변형' strain 이라 부른다. 공허한 시공 속의 사건은 변형의 특이한 질서화에 대한 집중적인 강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질서화된 물리적 복합성의 증대는 변형들간의 질서화된 관계성의 증대에 의존한다.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과 같은 수리물리학의 기본적인 방정식은 물리적 우주를 관통하는 변형들의 질서화를 표현한다. 이 변형은 기하학화된 영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영역의 일부로서 초점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초점적 영역은, 주체의 입각점을 한정하는 용적에 속해 있는, 그 기하학적 자리에 의해 정의된 직선들의 '조밀한 공점(共點)' dense concurrence 의 영역이며, 이른바 투사 projection 가 행해지는 영역이다. (PR, pp. 540-545.)
[61] AI, p. 256.
[62] AI, p. 256.
[63] AI, p. 256.
[64] AI, p. 256. 오영환은 '진동상태'라고 번역하였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초점적 영역은 직선들의 조밀한 공점의 영역이며 그 내부는 외부와의 흐름이 단절된 하나의 용적이므로, 격렬하며 교란된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요동상태'(搖動狀態) 라고 표현했다.
[65] AI, p. 257.
[66] AI, p. 248.
[67] AI, p. 248.
[68]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헤겔을 꼽을 수 있다.(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Neu zeit und Gegenwart 11., Verbessert Auflage(Freiburg Basel Wien : Herder, 1981), 강성위 역,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下(대구 : 이문출판사, 1987), p. 579.)
[69] SMW, p. 103-104.
[70] SMW, p. 104.
[71] SMW, pp. 106.
[72] SMW, pp. 105-106.
[73] PR, p. 106 ; AI, p. 248.
[74] PR, p. 106.
[75] SMW, p. 109.
[76] SMW, pp. 108-114.
[77] 화이트헤드의 신조어(新造語)이다. 이 글에서는 사건의 과정 안에 놓인 실현을 지칭하고 있다.
[78] SMW, p. 112.
[79] SMW, p. 115.
[80] SMW, p. 116
[81] SMW, p. 162.
[82]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177.
[83] PR, p. 158.
[84] PR, p. 531.
[85] SMW, pp. 182-183.
[86] SMW, p. 183.
[87] SMW, p. 183.
[88] SMW, p. 188
[89] SMW, p. 188.
[90] SMW, p. 189.
[91] SMW, p. 189.
[92] Alfred North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 Cambridge at The Univ. Press, 1971.), p. 55.
[93] Ibid.,
[94] PR, p. 80.
[95] PR, p. 83. 특히 다음의 인용부분, "그[존재론적 원리의] 결과 과정에 있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은 모두, 다른 현실적 존재의 실재적인 내적 구조에 관한 사실이나, 그 과정을 제약하고 있는 주체적 지향에 관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96] 동일한 존재의 반복이 없다는 것은 '느낌의 유혹'으로서의 신의 성공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은 자신의 원초적 본성을 실현시켜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만일 세계가 부분적으로라도 반복적 순환을 가진다면, 그 목표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라도 실패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존재론적 원리는 신의 결과적 본성이 신의 원초적 본성의 영원한 완성을 향한 퇴락 함이 없는 진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PR, p. 65.)
[97] SMW, p. 189. 여기서는 원문을 의역한 것임. 원문은 "this is not the case" 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의 문맥상 'this'를 '자연적 시간을 넘어서는 시간의 과정' 으로 'the case'를 '하나의 일직선적인 계기의 계열'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98] SMW, p. 189.
[99] SMW, pp. 189-190.
[100] SMW, p. 190.
[101] Alfred North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 Cambridge at The Univ. Press, 1971.), p. 65-66.
[102]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오167
[103] "에포크란 그리스어 epoke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 '중지', '정지'를 뜻하던 것이 변화해서 특수한 사건에 의해 표시되는 시간의 조각, 즉 '획기', '신기원'의 뜻이 되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을 여러 지속의 계기로 보는데, 이 지속은 결코 점적(點的) 순간이 아니고, 어떤 폭을 가지면서 전후의 구획을 내장(內藏)하는 것, 즉 에포크를 말한다."(SMW, p. 190. 역자주.)
[104] PR, p. 191. "… 'time' has been separated from 'extension' …"에서 문맥상으로, 시간이 연장에서 유래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갈라져 나온다'로 번역했다.
[105] PR, p. 191.
[106] SMW, p. 193.
[107]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양자론(量子論)의 기초가 되는 플랑크 상수(h)를 기초했다.
[108] SMW, p. 205
[109] 여기서의 방향성은 부분적으로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의미하지만, 거시적인 시각에서 역사의 순환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순환이 부정되는 것은 세계가 창조적으로 전진한다는 점, 또는 동일한 사건이 반복해서 등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 인식의 원리에 관한 연구}에서 시간의 비가역성을 '자연의 창조적 전진'과, '사건의 고유성'에서 찾고 있지만, 그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원천인지는 결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160.)
IV. 시간의 관점에서 본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과정과 실재}는, 우주론의 관념들을 압축시킨 구도를 제시하고, 그 관념들의 의미를 경험의 다양한 주제들과 대결시키면서 전개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특수한 논제를 서로 결합시킬 수 있는 충분한 우주론을 정교하게 구축 해 내는 것을 목표로 쓰여졌다.[110]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를 '사변철학을 위한 논의'라고 하면서, "사변철학 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소개하였다.[111] 이러한 점에서 {과정과 실재}는 후기의 형이상학적 구도가 정교한 개념적 언어들의 체계로 짜여진 책이라고 할 것이다.[112]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구도와 시간을 검토함에 있어 서 {과정과 실재}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과정과 실재}에서 나타나는 형이 상학의 개념들 안에서, 앞서 살펴본 시간이해가 그의 형이상학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 속에서 시간이해를 조명함으로써 그 폭을 넓히고 그 충분한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고 자 함이다.
A. 현실적 존재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의 연장적 관계는 시공이라는 특수한 관계보다 더 일반적이다. 화이트헤드의 연장 적 연속체란 전체와 부분과의 관개, 공통 부분을 갖게 되는 중복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 관계에서 파생된 다른 여러 관계들과 같은 다양한 관계들의 제휴에 의해 통일체가 된 존재들의 복합체이다.[113] 화이트헤드의 연 장적 연속체의 개념에는 존재론적 원리[114] ontological principle 가 나타난다. "연속체는 무한한 가분성과 끝없 는 연장이라는 특성을 함께 포함한다. 비존재는 결코 경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 저편에는 언제나 존재가 있 게 마련이다. 따라서 존재적 원리는 연장적 연속체를 원자화하는 하나의 양자조건 quantum condition 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구체적 경험의 대상인 사물(혹은 존재[115])의 분석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주요과제이다. 화이트헤드는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라는 것이 그 존재가 '어떤 것인가' 를 결정한다고 한다. 존재의 '있음' being 은 그 '생성' becoming 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의 원리"이다.[116]
연장적 연속체는 형태나 차원, 또는 측정 가능성 같은 것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4차원의 물리적 시공이란 우리 의 우주 시대에서 비롯되는 부가적인 결정들이다.[117] 연장적 연속체는 '어떤 존재'로 분할될 가능태이다. 바로 이 연장적 연속체를 분할하는 구체적 존재가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이다. 현실적[118] 존재 actual entity 는 보 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배후로 나아갈 수 없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 다.[119] 현실적 존재는 연장적 연속체의 도식에서 하나의 연장을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 린다.
현실적 존재는 연장적 연속체를 실재적으로 분할한다. 왜 하필이면 현실적 존재로만 분할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파악과 관련된 다음절에서 다루게 된다. 연장적 연속체는 현실적 존재에 의해 분할됨으로써 원자화된다. 우 리의 우주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원자화는 4개의 차원을 가진 특수한 시공적 관계를 제공한다. 현실적 존재에 의한 연장적 연속체의 원자화는 시간화와 공간화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시간화와 관련된 것이 바로 시간 의 획기성이론 epochal theory of time 이다.[120] 공간화와 관련된 것은 시간적 세계내의 모든 현실적 존재의 전 망적 입각점을 위한 공간적 체적을 부여한다.[121]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간화가 시간적 세계를 미리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화가 공간화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자연의 창조적 전진 ― 과정은 본질적인 것이며 [122], 연장적 연속체는 그것을 위한 형이상학적 가설이다.[123] 객체화가 자신을 넘어선 창조성을 위한 여건이 된 다는 점에서, 객체화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124] 이러한 가설에 따라, 시간화가 공간화보다 앞서서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위의 간단한 논의는 앞절에서 살펴본, 1. 시간의 기하학적 구조 2. 존재론적 원리와 관련하여 사건의 실재성으 로부터 생성되는 시간, 3. 시간과 공간의 분화 등의 개념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간의 획기성이론의 토대로서 기능한다.
B. 합생과 파악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사물을 분석하면, "합생"을 발견할 뿐이라고 말한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 주가 그 다자의 각 항을 새로운 일자의 구조 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 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125] 하나 하나의 합생은 그 자체가 개체적 사물'이며', '합생'과 '새로운 사물'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26] 이 합생은 사물이 그 생성 과정에서 생겨났던 여러 파악[127]들의 합생이다.[128] 사 물은 파악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현실적 존재는 파악에 의해서 무수한 방식으로 "분할"될 수 있다.[129] 따라서 그 다음의 모든 분석은 파악에 대한 분석이 된다.[130] 결론적으로 ―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를 분석한 결과 ― 화 이트헤드 존재의 분석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존 existence 은 현실적 존재, 파악, 결합체, 주체적 형식, 영원적 객 체, 명제, 다수성, 대비 등의 여덟 가지이다[131].
화이트헤드의 존재 분석은 합생의 분할과 구체적인 것의 분할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132] 합생의 분할은 (발생적 분할이라고도 한다)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발생을 그 생성 과정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의 분할은(등위적 분할이라고도 한다) 시 공의 영역을, 합생의 과정을 통하여 통일성을 획득한, 개체들로 분석하는 것 이다. 여기서는 주로 시간적 성격이 강한 합생의 분할을 중심으로 화이트헤드의 존재 분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실적 존재는 연장적 연속체를 원자화하며, 연장의 경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며, 현실적 존재를 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답변은 현실적 존재는 '경험의 방울'이라는 말속에 암시되어 있다.[133] 즉, 하 나의 경험적 계기가 하나의 현실적 계기의 시간적 지속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연장적 관계를 제공하는 것 은 하나의 경험행위이다. 세계의 연장적 관계는 "다수의 객체들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실재적 통일 속으로 결합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하나의 일반적 도식"[134]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서 먼저 고찰할 일은 세 계의 연장적 관계에 대한 명석 판명한 명석 판명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지각 양태이며, 연장적 관계 안에 공간 의 연장성과 시간의 연장성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수의 객체들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실재적 통일 속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이 바로 합생이다.[135] 합생은 경험 을 통해 현실적 존재가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실현의 과정을 간략하게 세 가지 나눈다. 1. 물리적 순응적 느낌의 호응적 위상, 2. 개념적 느낌의 보완적 위상, 3. 만족.[136] 현실적 존재가 자신의 직접적 과거에 속한 개체적 현실적 존재의 객체화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새로운 개체로 실현시키기까지 의 과정이 '하나의' 경험의 방울이다. 하나의 경험의 과정은 주체가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주체적 형식 [137] subjective form 을 완결하는 과정이다.[138] 과정은 '있게 됨을 향해 감' coming-to-be 이다.[139] 주체는 이 과정을 향유함 enjoyment 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어 간다. 존재는 경험을 향유함으로써 자신을 이룬다.[140] 주 체적 형식의 완결은 새로운 현실적 존재가 하나의 개체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최종적 실현을 만족이라 고 부른다.[141]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분석한다는 것은 합생을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분석 방식도 있겠지만, 화이트헤드는 현 실적 존재를 분할을 통해서 분석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분석 방식을 파악이라고 부른다.[142] 파악은 인간의 경험 과 관련된 현실적 존재의 구체적 분할이며, 지각과 관련된 것이다. Prehension(파악)이라는 낱말이 apprehension 과 관련된 화이트헤드의 신조어임은 경험과 지각의 관련성을 분명히 해준다. 경험은 지각행위이다. 다만 화이트헤 드는 이러한 경험이 의식적 지각을 가진 인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표현하 기 위하여 uncognitive-apprehension(비인식적-직관적이해)을 뜻하는 신조어 prehension을 만든 것이다.[143]
파악은 하나의 분할이며, 하나의 현실적 존재 안에 있는 계기이다. 현실적 존재의 경험 과정이 무수한 파악으로 분석된다는[144] 점에서 현실적 존재의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특성은 연장적 결합의 특성을 연속체라는 형 태로 가지고 있다. 현실적 존재의 구조는 연속체를 포함한다.[145]
파악도 하나의 분할이라면, 어째서 파악은 연장적 연속체를 분할하지 않는 것일까? 다시 말하다, 왜 연장적 연 속체는 현실적 존재에 의해서만 분할되는 것일까?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의 모든 특징이 파악에 있어서 재현 되고 있지만, 주체적 형식과 관련하여 아직 만족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답한다. 즉, 파악은 만족에 있어 서의 주체적 형식 ― 그것은 하나의 개체의 완결과 관련된다 ― 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현실적 존재의 종속적 요 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46]
만족은 다른 현실적 존재에 의하여 객체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현실적 존재이다.[147] 그것은 완고하고 피할 수 없는, 여러 귀결을 수반하고 있는, 확정적으로 결정된, 정착된 사실로서의 현실적 존재이다.[148] 현실적 존재의 결 과는 다른 현실적 존재의 과정에 그 현실적 존재가 개입하는 것이며, 이렇게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으로 개입하는 존재는 모두 '객체'로서 기능한다. 화이트헤드의 설명의 제 4범주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존재가 객체로서 기능한 다는 것은, 존재의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성격이라고 한다. "우주의 연대성" solidarity of the universe 을 구성하 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격이다.[149] 현실적 존재의 형상적 구조는 외적으로 우주의 연대성을 구성하 기 위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있음' a being 의 본성에는 각각의 모든 '생성' every becoming 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상대성의 원리' the principle of relativity 이다.[150] 만족은 이러한 조 건을 구현하고 있다.[151] 따라서 만족은 무한한 추상가능성을 하나의 새로운 합생을 낳는 실재적 가능태로 제한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조건에 의해서 연장적 연속체는 파악의 분할로는 원자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 드의 철학이 유기체의 철학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상대론적 원리가 현실적 존재의 외적 구조를 한정하고 있음으로 해서 현실적 존재의 구체성은 그 안에서 표현된다.
이제 연장적 연속체를 현실적 존재로 분할하는 양자조건 quantum condition 이 드러난다. '상대론적 원리'는 생 성을 위한 가능성을 있음에 부과하며, 이 생성을 위한 가능성의 있음에서의 하나의 완결이 만족이다. 이 만족은 연장적 연속체를 분할하는 구체적 에포크가 된다.
여기서 '상대론적 원리'는 앞절에서 지적된 '존재론적 원리'와 더불어 연장적 연속체를 구체적 현실적 존재로 분 할하는 양자조건을 이룬다. 다시 말해, <1. 있음의 본성에는 각각의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과 2. 생성의 과정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반드시 어떤 있음이어야만 한다는 것[152]>은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면서 양 자화를 위한 조건을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론적 원리와 존재론적 원리는 연장적 결합의 도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다. 존재론적 원리는 연장 너머에 는 항상 연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장과 연장을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방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결합이 없다면, 이 우주는 단 하나의 무한한 연장만이 존재하게 된다. 상대론적 원리는 그 다음에 있는 연장을 위 한 연장의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결합을 한정한다. 상대론적 원리는 이 우주를 단 하나의 무한한 연장으로부터 구 출한다.[153] 연장이 한정됨으로써 결합이 한정되며, 결합이 한정됨으로써 연장이 한정된다. 연장은 구체화된다. 존 재론적 원리와 상대론적 원리는 각기 별개의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154] 이러한 논의는 영원적 객체와 관련하여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파악은 원자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다른 파악들로 분할될 수 있고, 또 결합하여 다른 파악이 될 수도 있다. 또 한 파악들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도 아니다.[155] 파악적 계기는 정지(epoch)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실적 존재 의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성은 연속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에포칼하지 않은 것이다. 그 시간성은 무한한 추상적 가능성을 제한하는 만족이 없음으로 해서 추상적 시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악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경험의 과정 안에 놓여 있는 파악적 계기[156]로 구성된 시간은 측정불가능하다.
필자는 잠정적으로 합생의 경험 과정 안에 놓인 시간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temporalness"(시간성)이라는 신조어(新造語)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 시간성은 앞에서 다룬 '자연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시간'에 해당하며, 측정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것은 계기로서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계기로서의 시간과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새 로운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잠정적 표현은 '추이가 시간' 이라고 생각하는 일상적 언어 습관 에 따라 주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 즉, 설명을 위한 방편인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계기로서의 시간이며, 연장의 시간화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temporalness는 계기로서의 시간이 아니며, 가분적 가능 성만을 나타낸다.[157] 앞으로 별도의 지시가 없는 한 합생의 과정 안에 놓인 시간의 특성과 관련된 '시간성'은 모 두 temporalness를 의미한다.
에포크에 의해 분할된 시간은 구체적 시간으로 측정가능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 내부에 놓여 있는 시간 성 temporalness 은, 그 외부에 놓여 있는 시간 time 과 전혀 동떨어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계속 되어 온 논의에 의하면, 1. 그 양자 모두가 동일한 연장적 결합이라는 기하학적 전망 속에 놓여 있으며, 2. 동일한 방향성 (vector)과 추이를 가진다는 점에서 시간적 제일성 temporal uniformity 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연에 있어서 연장적 연속체는 시공 연속체보다 일반적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제일성이다.
위의 개략적인 논의를 따라 만족이라는 에포크에 의하여 분할된 하나의 연장적 시간은 1. 측정가능한 구체적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2.. 연장적 결합의 기하학적 전망이 예시하는 연속체에 의해 뒷받침되며, 3. 상대 론적 의미를 구현하며, 4. 이 상대론적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에 더하여 양자조건을 결정함으로써 양자론적 시간을 실현하며, 4. 자연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한 성격을 포함하는 추상적 시간성 ― 현실적 존재가 원자화시킨 구체적 시간과 비교하여 ― 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 결합체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악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하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 togetherness 라 는 실재적인 개별적 사실이 존재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와 파악이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라는 이와 같은 개체적 사실은 모두 결합체 nexus 라 부르며, 직접적인 현실적 경험에 있어 궁극적 사실은 현실적 존재와 파악 그리고 결합체라고 한다.[158] 따라서 그 밖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경험에 있어 서 파생적인 추상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하나의 원자적인 현실태가 마치 많은 등위적 현실태인 것처럼 다루어지며,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많은 현실태로 된 결합체가 마치 하나의 현실태인 것처럼 다루어질 수 있 다고 한다.[159] 화이트헤드는 분자나, 바윗덩이나, 인체와 같은 것들의 수명을 구체적 사례로 제시한다. 조금 구체 적으로 예를 들자면, 사람이 죽었다고 할 때 무엇을 죽은 것이라고 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다. 예컨대 뇌사란, 콩 팥, 간, 안구, 심장 등의 기관이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많은 기관으로 구성된 결합체로서의 사람을 마치 하나의 현실태인 양 다루는 예이다. 기관 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로서의 사람은 공적으로 죽은 것이지만, 사적으로 자기 자신은 아직 살 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장성은 세계 내의 유기체들의 형태학적 구조가 순응하고 있는 널리 퍼진 유적 (類的) 형식이다.[160]
따라서 유기체는 1.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로 구성된 것과, 2.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로 구성된 것이 있다. 그렇 지만 이 양자는 공통의 연장성에 의하여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장성은 연장적 결합에서 도출된 '전체와 부 분'에 의해 추론된다.[161] 서로 외적으로 상관되는 현실적 존재들의 연장적 관계들은 그것이 부분이건, 전체건 똑 같이 근본적인 것이다.[162]
원자의 다수성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의 원자적 통일성은 연장적 연속체의 연대성으로 대체되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원자적인 현실적 존재는 '생성'을 위한 '있음'으로서 '우주의 연대성'을 개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는 자율적으로 다수성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반복적 통합을 통 해 팽창해 간다.[163] 세계의 다수성이 현실적 존재의 객체적 여건으로 반영됨으로 해서, 또 현실적 존재는 그 여 건을 맹목적[164]으로 받아들임으로 해서 세계에는 동일한 현실적 존재는 결코 반복될 수 없다.[165] 세계의 전 (全)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동일한 현실적 존재의 반복이 없다는 것은 세계의 팽창과 관련한 시간의 직선적 비가 역성을 표현한다.[166]
시간의 비가역성은 현실적 존재가 합생에 있어서 만족을 향한 직선적 '방향'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추론될 수 있 을 것이다. 왜냐하면, 합생은 우주와의 연대성을 그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로 하기 때문에 만족이라는 내적 방 향은 외적 방향으로 나타날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방향은 구체적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의 원자성으로 구성된 외적 분할의 측면에 있는 구체적 시간이 과연 동일한 시간적 방향을 가지는가 하는 것 은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다시 말해 외적인 물리적 시간도 직선적 방향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의 비가역성의 문제는, 거시적 시간으로 볼 때, 직선적 시간관과 순환적 시간관이라는 두 가지의 상이한 견해 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이 논의는 연장의 시간화를 통한 에포칼한 시간의 원자성이 결합체와의 관련을 통해서, 거시적인 시간도 직선적인 비가역적인 성격을 구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직선적인 시간은 그 최종적 목표는 가지고 있을지라도 '최후의 심판'과 최종적 종결점을 가질 수 없다. 우주의 연대성과 그에 따른 우주의 팽 창은 결코 종착점이 없는 시간적 비가역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연장적 결합의 기하학적 일반도식 에 있어, 현실적 존재의 내적인 시간성과 외적인 시간이 그 방향에 있어서 시간적 제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 하고 있다.
D. 영원적 객체
영원적 객체는 그에 대한 개념적 인지에 있어 시간적 세계의 어떠한 특정의 현실적 존재와도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167] 영원적 객체는 순수한 가능태이다.[168] 새로운 존재의 합생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아직 이 세계에 실현되지 않은 것이며, 이 새로움이란 '순수한 가능태'가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순수 한 가능태'인 영원적 객체는 새로움과 관련되어 있다.[169] 영원적 객체를 현존의 범주에서 다루고 있는 까닭은 신 의 원초적 본성과 관련하여 개념적 현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70]
영원적 객체에는 두가지 종이 있다. 하나는 사물의 공공성 publicity 과 관련된 객체적 종으로서 '보편자'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의 사사성 privacy 과 관련된 주체적 종으로서 '질' quality 내지 '특성' characteristic 과 관련되 어 있다. 전자는 현실적 존재의 객체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후자는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물리적 에너지의 흐름은 전자에 속하지만, 그 강도는 후자에 속한다.[171]
세계의 연대성은 객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가 가지는 불치의 객체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화이트헤드 는 말한다.[172] 또,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질서는 객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를 포함한 형태론적 도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도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객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이며, 이러한 영원적 개체들에 의해 등 위적 분할 자체의 일반적인 원리가 표현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영원적 객체는 연장의 이론을 가장 일반적인 국면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론에 의해서 현실적 존재들의 원자성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은, 그들 각각의 합생적인 사사성과 함께 전적으로 배제된다. 거기에는 연장적 결합, 전체와 부분, 점, 선, 면, 직선성과 평면성만이 남아 있다.[173]
이러한 점은 앞에서 살펴본 현실적 존재 내부에 속한 합생의 시간성 temporalness 이 어째서 우리의 직접적 인 식에 호소하는 물리적 시간과는 전혀 다른가 하는데 대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의 직접적 인식에 호소하는 물 리적 시간은 합생에 있어서 사적인 주체적 형식과 관련된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로서의 지각[174]에 호소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원자성과 관련된 합생의 사사성은, 주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와 관련되는 것 이다. 영원적 객체의 객체적 종이 '보편자'라는 사실은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형식이 강도라는 효과적인 중요성을 가지지만, 물리적 자연에서는 무기력한 부대 현상적 사실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시사한다.[175]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관련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에 대하여, 오영환이 말한 바 "[사적인] 현시적 직접 성에서 지각되는 시공의 형식적 구조와 오직 인과적 효과성에서만 지각될 수 있는 공적인 시공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도 없다. 시간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모두 현시적 직접성에서 온다. 그러나 공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간 ― 자연의 실재적인 시간 ― 은 인과적 효과성[176]에서 온다"[177]는 주장은 위의 논의와 일치 된다. 객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와 주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 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의 영원적 객체는 다른 모든 영원적 객체와 관계하고 있다.[178] 이러한 점에서 영원적 객체의 일반적 원리는 우주의 연대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객체적 종과 주체적 종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영원적 객체의 고립에 관한 원리'로서 다루고 있다.[179] 간단히 말하면, 어떤 복합적인 영 원적 객체는 그 객체의 개별적 본질에 특수하게 포함되어 있는 객체들 이외의 다른 어떤 객체와의 관련도 필요하 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의 화이트헤드의 논증은 이를 명확히 밝혀 준다.
"영원적 객체들 사이에 성립하는 유한한 내적관계라는 개념에 내재하는 난점은 다음의 두가지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 즉 1. 영원적 객체 A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A의 관계들은 다른 영원적 객체들을 관계항으로서만 포함할 뿐 이것들의 본질과 는 무관하다는 것과, 2. 그러므로 A의 일반적 관계가 A가 갖는 다수의 유한한 관계로 분할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영원적 객체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둘째의 원리는 명백히 첫째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A를 이해한다는 것은 일반적 관계 도식의 형태가 어떠 한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관계 도식은 다른 관계항의 개별적 특성에 대한 인식 없이도 이해될 수 있다. 이 도식은 또한 저마다 개별 성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능태 내에서의 관계 전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다수의 한정된 관계들로 분석 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실태와 관련해서 보자면, 먼저 여러 관계가 일반적으로 규정되고, 이것에 의해 아직 규정되지 않은 일반적 도식이 4차원 시공 도식으 로 전환된다. 이 시공적 도식은 말하자면 모든 영원적 객체에 내재하는(현실태에 의해 한정되는) 관계 도식들의 최대 공약수이다. 이것은 곧 영원적 객체 A의 선택된 관계들이 어떻게 임의의 현실적 계기에서 실현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시공 도식에 있어서의 A의 지위를 밝힘으로써, 그리고 다른 현실적 계기들에 대한 이 현실적 계기의 관계를 이 도식을 통해 밝힘으로써 언제나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일정한 영원적 객체들의 한정된 집합에 속하는 일정한 영원적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는 일정하고 유한한 관계는 그 자체가 하나 의 영원적 객체이다. 그것은 그 관계 내에 있는 여러 영원적 객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영원적 객체를 '복합적'이라 부르고 … "[180]
위의 긴 인용문을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영원적 객체의 주체적 종은 유한한 복합적 영원적 객체이다. 이 주체적 종은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형식과 관계되고 있다. 이 주체적 종과 관련되어 규정되 지 않은 일반적 도식이 '보편자'로서 의 영원적 객체인 객체적 종이며, 이 객체적 종은 모든 영원적 객체에 내재하 는 최대 공약수이다. 따라서 주체적 종은 객체적 종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 필연적인 관련이 있 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된 객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는, 자연의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로 분할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연장적 결합을 지칭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체적 현실적 존재란 그 개체성(주체적 형식)의 실현을 위해 필연적으로 주체적 종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적 종에는 현실적 존재의 원자화라 는 구체적 개념에 기인하는 시공도식은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에포크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181] 왜냐하면, 에포크를 요청하는 것은 연장적 결합에서 요청되는 것이며, 연장적 결합은 객체적 종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왜 하필이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로 원자화되어야 하느냐 하는 점은 필연적이지 않은 것일 뿐이다. 지금과 같은 4차 원의 시공 도식은 우리의 우주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일 뿐이다.[182]
따라서, 필연적인 관련이 없다는 말은, 주체적 종이 객체적 종의 보편성이 한정하는 형식을 벗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의 실현은 객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의 그 보편적 한정의 형식의 실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에 의해 현실적 존재에 부여되는 인과적 효과성으로서의 시간을 사적인 현시적 직접성의 인식 속에서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인과적 효과성으로서의 시간만이 모든 현실적 존재에 게 공적인 시간이다. 이 점에서 인과관계의 개념은 그것이 직접적 현시로서의 예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183]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1. 에포크는 객체적 종으로서의 '보편적' 영원적 객체에 속한다는 것, 2. 그 에포크는 유기체의 철학의 본질에 속하는 '우주의 연대성'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3. 시간은 에포크의 '보편성'을 전제 로 하여, 에포크로 분할된 연장적 시간을 가진다는 것. 4. 그 시간이 하필이면, 우리의 자연의 구체적인 현실적 존 재로 원자화된다는 것은 객체적 종으로서의 '보편적' 영원적 객체 뿐 아니라, 주체적 종으로서의 보편적 영원적 객 체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5. 우리의 지각과 관련하여, 인과적 효과성으로서의 인과적 시간이 현시적 직접성으 로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형식 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 6. 그러나, 그 두 가지의 관련이 필연적일 필요는 없 다는 것 등을 살펴보았다.
E. 신 God
이제까지의 논의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신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구체화의 원리' the principle of concretion[184]로 기능하는 '궁극적 한정성' ultimate limitation[185]이며, 신 자신은 '원초적 비시간적 우유성' primordial, non-temporal accident이라는 점에서 '궁극적 비합리성'[186] ultimate irrationality 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탁월한 실재' eminent reality 로서의 초월성을 가 지는 기독교의 신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 1원인'과는 달리 '탁월한 실재성'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상식적인 개념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점에서 먼저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을 간단히 살펴본 후에 신과 시간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1. 화이트헤드 의 신의 개념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는 궁극자가 신이 아니라 창조성이다. 이 창조성의 원초적 비시간적 우유성이 바로 신이다.[187] 새로움을 향한 창조성의 충동의 우연적인 표출이 최초의 사실이다.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사실이 영원 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 평가라고 하였다. 가치평가라는 하나의 현실(비록 현실적 존재와 같은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을지라도)이 신이다.[188] 이로부터 세계는 시작되었다.[189]
a. 신의 원초적 본성
"원초적으로[태초에] 창조된 사실은 영원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 평가이다. 이것 이 신의 원초적 본성 primordial nature of God 이다."[190] 간단히 말해서 태초에 신의 원초적 본성이 생겨났다 는 말이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절대적으로 풍부한 가능태의 무제한적인 개념적 실현이다.[191] 신 자신이 개념적 현실화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 before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창조와 더불어 with 있다.[192] 그러나, 그 때에는 아직 이 세계에는 물리적으로 실현된 그 어떠한 존재도 없다. 왜냐하면 신의 원초적 본성은 (물리적이 아니라) 개념적이기 때문이다.[193] 이러한 추상에 있어서의 신은 '현실성을 결하고' 있 다.[194]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자신의 직접적 과거가 없음으로 해서 과거의 방향에 대해서는 비시간적인 영원성을 끌어들인다.[195] 또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의 구체화의 원리 the principle of concretion 로서 세계의 내 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내재적 초월자이다.[196]
신의 원초적 본성 너머에 있는 것은 무제약적 창조성[197]이다. 그 자신의 성격을 갖지 않는 이 무제약적 창조 성이 우유성accidents에 힘입어 신의 원초적 본성을 현실화한다.[198] 신은 창조성의 원초적 비시간적 우유성 primordial, non-temporal accident 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이제 창조성을 자신의 현실을 통해 제약한다. 더 이 상 완전히 우연한 새로움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자신의 원초적 본성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허용 된 창조성만을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세계는 철저히 신의 원초적 본성을 향하여 새롭게 된다. 여기서 '향하여'가 미래라는 방향을 뜻하는 것은 신의 원초적 본성이 세계에 내재하여 세계의 궁극적 비전 vision 으로서 세계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를 분석하면 신의 원초적 본성을 만난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무시간적 무제약적 창조성, 영원적 객 체의 다수성, 최초의 궁극적 현실로서의 완결된 일자와 관계되어 있다. "창조성creativity, 다자many, 일자one는 동의어들인 사물thing, 있는 것being, 존재entity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궁극적인 개념이다."[199]
신의 원초적 본성이 태초에 있었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 놓여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200] 신의 원초 적 본성은 그 개념적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변화를 겪을 수 없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영원 하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201] 신의 원초적 본성은 항상 지금, 여기에 세계와 더불어 있다. 세 계는 신의 원초적 본성의 내재를 통해서 영원과 직면해 있는 것이다.
세계 속의 신의 내재는 신의 원초적 본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현재의 욕구에 따르는 미래에의 충동이며, 욕구란, 개념적으로 파악된 여건을 실현시키려는 충동과 결부되어 있는, 직접적인 물리적 느낌에 대한 개념적 가치평가이 다.[202] 따라서 신의 원초적 본성은 '느낌을 위한 유혹' lure for feeling 이며, 욕구의 영원한 충동이다.[203] 욕구 는, 그 결과 물리적 느낌을 실현한다.
"무엇 때문에 what-for 합생을 통하여 이미 자신을 충분히 실현한 현실적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면서 새로운 과정으로 돌입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 확정적인 만족에 도달한 현실적 존재를 확정되지 않은 미래로 이끌 어 내는가? 바로 이 점에 대한 대답이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이다. 신은 작용인 이며 목적인이다.[204] 신은 현실 적 존재를 미래로 밀어내며, 미래에서 끌어당긴다. 신은 현실적 존재를 미래로 이끌어 내는 유혹자 lure 이다. 현 실적 존재는 미래에 대한 욕구를 신의 완전한 비전 vision 을 통해서 부여받는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은 꿈을 꿀 것이다(행2:17)" 그리고 그 비전은 현실적 존재를 새로운 전망 속으로 유혹한다.
b. 신의 결과적 본성
원초적 본성으로부터 주어진 개념적 느낌에 대한 최초의 파악은 물리적 세계로 변환된다.[205] 신의 원초적 본 성으로부터 현실적 존재가 파생되며, 물리적 세계가 비롯된다. 이 파생적인 현실적 존재에 대한 신의 물리적 파악 에서 신의 결과적 본성이 생겨난다.[206] 따라서 이 결과적 본성은 신의 파생적 본성이라고도 부른다.[207] 신의 결과적 본성은 개별적인 자기 실현을 수반하고 있는 다수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통일성 인 것과 마찬가지로 다수성 이며,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끊임없는 전진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직접적인 사실 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완벽하게 현실적이다.[208] 신이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은 실현된 물리적 세계와 더불어서 이다. 즉, 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신은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 도식은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 사이에 최초의 물리적 세계가 놓여 있음을 나타낸다. 신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자 나중이다.[209] 세계는 신 사이에 놓 여 있다.
따라서 우주는 다음과 같은 삼중의 창조적 행위를 포함한다. 1. 하나의 무한한 개념적 실현, 2. 시간적 세계에서 의 자유로운 물리적 실현의 다양한 연대성, 3. 다양한 현실적 사실과 원초적 개념적 사실과의 궁극적 통일성.[210] 1항과 3항은 각각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며, 현실적 존재로서의 신의 양극성[211] 속에 서 통일되어 있다.
세계는 신의 결과적 본성과 관련하여 '직접성의 일치'에서 느껴진다. 창조적 전진을 직접성의 유지와 결합시키기 때문에 신의 결과적 본성은 '영속적' everlasting 이다.[212] 신은 '동시적 세계의 독립적 다수성'[213] ― 이것은 단 순한 공재 이며, 이접적 현실이다 ― 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신은 자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세계의 다수성을 파악한다. 파악된 세계의 다수성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성에서 유래하는 주체적 지향의 완전성으로 말미암는, 신의 느낌의 적절성에 의해 짜여져서 보편적 느낌이 된다.[214] 세계내의 악의 반항들은 사소한 사실들로 밀려나 며, 세계 내에서 성취된 선은 신의 결과적 본성과 관련된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 이미 구제되어 있다.[215] 모든 현 실적 존재의 객체화의 기반으로서의 신의 결과적 본성은 이 세계에 대한 심판자이며, 그 심판은 세계를 혼돈으로 부터 구원한다.[216] 그리고 이 구원의 최종목적은 신의 원초적 본성이 가진 세계에 대한 궁극적 전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다음 단계의 합생을 위한 여건을 향하여 '신'의 과정적 통일 속에서 객체화된다. 이 객체화 가 '신'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신은 물리적 느낌으로 충만하게 된다. 신은 자신의 현실세계를 모든 새로운 피조물 과 공유한다. 합생하는 피조물은 그 현실세계에 대한 신의 객체화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로서 신 속에서 객체화된 다.[217]
"어떻게 how 합생의 과정을 통해 온 우주의 다수성이 새로운 일자로 통일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신의 결과적 본성이다. 이것은 독립적 다양성 속에 놓여 있는 세계가 어떻게 양립가능한 합생의 여건이 되는가를 설명 한다. 만일 신의 결과적 본성이 신의 원초적 개념 위에 짜여져 들어가지 않는다면, 세계는 악을 방치한 채로 무한 한 부조화의 현실로 치닫게 될 것이며, 무저갱으로 추락할 것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심판이다."[218] 세계는 신의 결과적 본성 안에서 객체화됨으로써, 신의 원초적 본 성과 관련한 새로운 합생을 위한 통일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2. 신과 시간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 God 도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러나, 모든 현실적 존재가 시간적 계기와 관련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현실적 존 재중에서, 특히 시간과 관련하여 각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현실적 계기이지만, 신은 현실적 계기가 아닌 것이다.[219] 여기서는 신의 비계기성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이 현실적 존재의 실현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신의 자기 실현 과정에서 생성된다. 세 계는 신의 원초적 본성이 가진 완결성의 비전 속에서 유혹됨으로써, 다음의 계기를 향하여, 실현된 자기를 초월한 다. 세계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영원적 객체는 신의 원초적 본성에 의한 완결된 질서로서 진입한다. 세계가 자신의 주체적 형식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체적 형식은 신 속에서 객체화됨으로써 신에게 물리적으 로 느껴진다. 이 물리적 느낌이 신의 결과적 본성을 이룬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자기 안에서 세계를 느낌으로써, 원초적 본성의 완결성과 관련하여, 세계로 하여금 다음의 합생을 위한 통일성을 가지게 한다.
하나의 에포크로서의 시간적 지속은 공간화 되어 있음으로 해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은 이 지속의 켜 slab 로 이해된다. 지속은 시간적 폭에서는 유한 하지만 공간적 연장에서는 무한한 자연의 구체적인 켜가 된다. 그런데 이 구체적인 켜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동시적임으로 해서 서로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동시 적인 영역의 상호적인 효과란 존재하지 않는다.[220]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그 실현 의 다수성을 통해서 각각의 현실적 존재의 실현과 관계되어 있다면, 어떻게 그 다수성의 고립이라는 동시성을 극 복하고 우주의 연대성과 관련된 합생의 통일성을 각각의 현실적 존재에게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언뜻 생 각할 때, 신은 동시적인 영역에 공간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면서, 우리의 우주시대가 주는 4차원의 시공을 떠나 모 든 영역에 동시적으로 직접 작용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만일 세계의 모든 구성요소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신의 원초적 본성이 모든 세계를 동시에 유혹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신의 결과적 본성이 모든 세계를 동시 에 자기 안에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신과 세계의 상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현실적 존재는 각각 동일한 우주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 에서 온 우주를 포함하지 않는다.[221] 어떠한 동시적인 두 현실적 존재도 동일한 현실세계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 다.[222] 그러나 신은 온 우주를 포함한다. 세계는 하나인 신 안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모든 현실적 존재를 동시에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의 동시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의 시간과 신의 시간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신의 결과적 본성은 개별적인 자기 실현을 수반하는 다수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223] 그것은 개별적인 각 각의 현실적 존재들의 실현에 참여하는 결과적 본성의 다수성이다. 이러한 결과적 본성의 직접성으로 말미암아 다 수성에 있어서 신의 시간성은 합생 중에 있는 세계의 시간성 과 일치한다. 세계의 모든 현실적 존재은 신의 원초 적 본성을 자신의 과거로 현재에 가지고 있으며, 신의 원초적 본성과 관련한 실재적인 영원적 객체들을 자신의 직 접적 과거와 관련하여 실현함으로써 새로움을 형성해 간다. 세계의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다자이다. 신의 결 과적 본성의 실현은 이러한 다자를 직접적으로 느낌으로써 시작된다. 이 지점에서 신의 결과적 본성은 다자이다. 물리적 경험은 유한한 것이다.[224] 따라서 이 지점에서 신의 결과적 본성은 세계를 의식한다. 그 다수성 만을 떼 어놓는다면, 세계를 동시에 의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약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수성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비시간성과 개념적 완결성과 관련하여 하나의 통일된 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현실적 존재가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하나이다. 신을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는 있지만, 그것은 분리되어 있는 2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 신의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에 상응한다. 신 의 하나임은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의 관련 속에서 얻어진다. "원초적 본성은 개념적이며, 결과적 본성은 신 의 [세계에 대한] 물리적 느낌들이 신의 원초적 개념들 위에 짜여 들어간 것을 말한다."[225] 실현 과정에 놓인 결 과적 본성의 다수성이 가지는 의식의 다수성은 신의 원초적 개념 위에 짜여져 들어가면서 그 통일성을 획득한다. 우주의 연대성은 이 통일성 속에서 자신을 일자로 구체화한다. 신이 일자이며 다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다 자이며 일자이다. 다만, 대칭적인 구조를 가질 뿐이다.[226]
이제 세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은 다르겠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신은 그 원초적 본성에 있어서의 비시간 성으로 말미암아, 과거가 없다.[227] 과거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신의 원초적 본성이 모든 현실적 존재의 과 거로서 동시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세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결과적 본성이 모든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관계함으로 해서, 합생 중에 있는 하나의 연장적 시간 안에서의 파악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시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결과적 본성은 비시 간적인 신의 원초적 본성의 개념에 짜여져 들어감으로써 동시성이 주는 고립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세계를 하나의 통일로서 동시에 의식한다. 이점에서 신의 시간은 세계의 시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신은 세계 의 동시적 지속과 함께 하고 있음으로 해서 동일한 연장적 시간을 생성한다고 할 것이다. 이 연장적 시간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 시간이다.
F. 과거 현재 미래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점은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가 '지속을 가진 시간'임으 로 해서, 현재는 '비존재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만 있다는' 어거스틴의 문제 제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 이다. 현재라는 시간은 분명한 하나의 지속으로 공간과 더불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현재는 과 거와 그리고 미래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관계를 가진다면,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즉시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는 시간에 관한 앞의 논의에서 이미 그 답이 주어져 있지만,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고전적 도 식의 시간관이 우리의 상식적인 관심사로서의 시간관이라는 점에서 보다 상세히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기하학적 전망에서 본 과거 현재 미래
가장 일반적인 도식인 화이트헤드의 연장적 연속체의 기하학적 전망에 따르면, 연장은 연장의 결합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228]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연장들의 결합이 연장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결합이 없이는 연 장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연장들이 없다면 결합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연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결 합이 있어야 하며, 결합이 있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연장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연장은 결합체의 현실 태들 간의 관계가 지니는 한 형식인 것이다."[229]
현재를 구성하는 지속은 하나의 공간화 된 연장으로서의 시간이다. 연장적인 시간 ― 획기적 시간은 그것이 있 기 위해서 반드시 결합이 존재해야 하며, 결합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연장적 시간을 필 요로 한다. 한편,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에 있어서 결합을 구성하는 것은 패턴의 실현이며, 만족이다. 그리고 만족 은 실현의 최종 단계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현재적 지속의 (과거에 대한 결합이 아니라) 미 래에 대한 결합을 형성한다. 1. 하나의 연장적 시간을 위해서 두 개 이상의 연장적 시간이 요청되며, 2. 하나의 연 장적 시간의 결합이 미래를 향한 방향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시간은 미래와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는 미래를 요청한다. 또, 그 미래가 현재가 될 때 그 현재는 다시 미래를 요청할 것이다. 이것은 현 재와 미래와의 결합을 말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연장으로서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 전진한다. 이 미래를 향 한 전진은 그 실현이 미래의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우리의 우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며, 우주의 결 합체의 현실태들 간의 관계가 지니는 한 형식인 것이다. "현재 계기의 구조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 로 하고 있으며, 미래 계기의 원초적 위상에서 재연되기 위한 기여의 몫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230] 화이 트헤드는 그 궁극적인 관점으로 창조적 전진 ― 과정 ― 을 가지고 있거니와, 시간이 미래를 향하여 전진한다는 바로 이 성격은 창조적 전진의 시간적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와의 관계는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와 상응한다. 따라서 과거는 현재와의 결합을 요청하였으며, 과거 는 현재가 놓여 있는 방향으로 전진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적으로 직접적 과거가 없던 현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현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현재는 그것을 요청하는 직접적 과거 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연장의 악무한적(惡無限的) 계열이 주는 당혹감은 최초의 시간적 연장에 관한 흥미를 유발시켜 왔다. 따라서 최초의 시간적 연장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시간적 연장은 그 저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의 세계에서 흥미는 진리보다 우선적이다.[231]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시간은 사건으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최초의 현재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최초의 사 건과 더불어 생긴 것이다. 이 문제는 연장적 결합이라는 기하학적 도식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최초의 현재적 사건 을 요청했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그것은 창조성이다. 화이트 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철학이론에는 우유성에 힘입어 현실적인 것이 되는, 어떤 궁극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그 유유적인 것들의 구현을 통해서만 그 특성이 규정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우유성으로부터 단절될 때 그것은 현실성을 잃게 된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이런 궁극자를 가리켜 창조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신은 그것의 원초적인 비시간적 우유성이다."[232]
창조성은 연장적 결합의 기하학적 도식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연장을 요청하는 '결합'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 다. 결합이 연장을 다음의 연장으로 넘어서게 하는 초월적 이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창조성은 그 본성 상 항상 자신을 넘어서 전진하려는 것임을 비교할 때, 창조성과 결합의 유사성이 시사된다. 그러나 연장적 결합의 도식에 있어서 결합이 '현실'로서 이해된다는 점에서는 아니다. 한편으로는 신의 원초적 본성과 새로운 현실적 존 재의 합생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합의 유사성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원초적 본성이 단지 현실일 뿐 현실적 존재와 같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이 시사된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연장이 먼저가 아니라 결합이 먼저라는 점, 그리고 최초의 결 합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2. 현재에 내재하고 있는 과거 미래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분명히 미래는 무(無)가 아니다, 미래는 그것에 선행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 활동한 다."[233] 1초 내지 몇 분의 1초 동안의 우리의 경험을 상식적으로 고찰할 때, 그 경험은 그 각각의 순간이 직접적 과거와 직접적 미래라는 두 세계 사이의 추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식은 분명히 미래는 무가 아니라는 것을 지시하며, 이 직접적 미래는 어느 정도의 구조적 선명성을 가제고 현재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234]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과거가 현재에 들어온다는 것은 명백하다. 직접적 과거는 과거의 개체적 계기의 객체적 불멸성으로 현재에 들어온다. 그런데, 현재 속에는 미래에 속하는 그 어떤 개체적 계기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획기적 시간은 현실적 존재의 최대한의 개체적 실현으로서 종결되는 최대한의 시간적 한 계이기 때문이다.[235] 이점에서 미래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 속에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 한 방식으로 현재 속에 미래가 내재하는가?
현재 속에 내재하는 미래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려면 현재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는 하나의 만족으로부터 다음의 만족에 걸쳐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현재의 과정은 과거의 개체적 객체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여 어떤 욕구를 가지고 다음의 과정으로 자신을 객체화하여 보내는 과정이다. 현실적 존재의 형상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호응적 위상, 2.보완적 위상, 3. 만족이라는 세 단계이다.[236] 호응적 위상은 객체화된 과거의 개체를 받아들이 는 순응적 물리적 느낌의 위상이며, 이 위상에서 과거는 현재에로 들어온다. 보완적 위상은 새로움이 들어오는 위 상이며, 1. 개념적 발생의 두 종속적인 위상인 개념적 가치평가의 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2. 그 가운데서 명제적 느낌이나 지성적 느낌이 출현할 수도 있는 통합과 재통합의 위상인 개념적 분석의 위상으로 옮겨간다. 후속 위상 인 개념적 분석의 위상은 명제적 느낌을 포함한다.[237] 명제는 일정한 성질 및 관계를 통한, 어떤 가정된 현실적 존재의 객체화의 가능태이다.[238]
최종적으로 주체가 객체화하는 것은 주체의 본질에 속한다. 이 객체화는 자기 자신의 존속에서 뿐 아니라, 다른 존재의 형성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객체화된다. 이것은 설명의 제 4범주에 의한 형이상학적 보편원리이다. "우주의 연대성" solidarity of the universe 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격이다.[239] 상대론적 원리에 입각하여, 현실적 존재의 형상적 구조는 외적으로 우주의 연대성을 구성하기 위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있음' a being 의 본성에는 각각의 모든 '생성' every becoming 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를 한정하는 영원적 객체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현실적 존재의 형상적 구조를 완결하는 주 체적 형식은 영원적 객체의 주체적 종과 관계하며, 이 주체적 종은 영원적 객체의 객체적 종을 전체로 한다. 그리 고, 우주의 연대성은 객체적 종으로서의 영원적 객체가 가지는 불치(不治)의 객체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서 미래가 현재와 관련을 맺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존재의 형성과정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며, 그것을 목표로 하는 일은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목표로 하여 현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개념적 분석의 위상의 후기에 등장하는 주체의 구조에 관한 명제적 느낌이다. 그리고 현재를 종결하는 만족은 이 러한 명제적 느낌의 실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기체적 관계와 과정을 본질로 하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에 있어 서 미래는 현재에 내재하는 것이다. 비록 미래의 그 어떤 개체적 계기도 현재에 현존하지 않지만, 명제가 주체의 구조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래는 현재 사실의 본성 속에 이미 실현되어 있는 현실이다.[240] 화이드헤드의 다음의 언급은 이러한 내용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직접적 주체의 구조에 관한 명제가 출현한다. 이 주체가 객체적 불멸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그 주체의 본질에 속한다. 그래서 그 자신의 구조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자기 형성의 활동성이 타자 형성의 활동성으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현재 주체의 이러한 구 조 때문에 미래는 현재 주체를 구현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활동성의 패턴을 재연하게 될 것이다. … 예기의 최종적 위상[만족][241]은 양립가능성이 허용되는 한에서 현재의 주체가 자신을 구현하고 재연하도록 미래에 부과하는 필연성들과 관련하여, 그 주체의 본질의 명 제적 실현이다. 이러한 경험의 계기의 자기향유는, 그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대한 향유에서 시작하여 미래에 사는 것으 로서 그 자신에 대한 향유로서 종결된다. … 이런 의미에서 미래는 각각의 현재의 계기 속에 내재해 있으며, 그 현재와의 특수한 관계는 다양한 정도의 지배관계로 정착되어 있다. 그러나 어떠한 미래의 개체적 계기도 현존하지 않는다."[242]
미래와 과거가 현재 속에 내재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각각 다음과 같다. 1. 미래가 현재 속에 내재한다는 의미 는,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하여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새 로운 가능성을 그 안에 가진 명제적 느낌으로 내재하며, 현재는 그로 인해서 그 본질 속에 미래가 순응하지 않으 면 안될 모든 필연성을 포함하고 있다.[243] 2. 과거가 현재 속에 내재한다는 의미는, 과거가 이미 그 자신의 본질 속에 현재에 대하여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재가 순응하지 않으면 안될 모든 필연성을 포함하면 서 객체화되어 내재하며, 현재는 객체화된 과거에 대해 무조건적인 순응적 물리적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다. 현재에 미래와 과거가 내재하는 관계를 통해서 살펴볼 때, 미래와 과거는 결코 대칭적이 아니다.
미래와 과거가 현재에 내재하는 이 두 가지 의미는 우주의 연대성을 주장하는 유기체의 철학의 기초를 이룬다. 이때, 만족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향유하는 주체이자 자기초월체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는 미래를 요 청한다'는 연장적 결합에 의한 기하학적 전망과 일치하고 있다.
G. 에필로그 : 연속성의 생성
'날으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는 제논의 역설은 생성의 연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성 그 자체가 연속적이라는 것은 시간이 무한한 순간으로 분할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최소의 순간을 가정한다 해도 그것을 분할하는 순간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논 이후의 시간에 대한 논의의 난점은, 시간의 특성을 생성의 연속성으로 잘못 취급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생성'의 연속성은 '있음'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유동'과 '영속성'의 대립의 핵심에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생성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있음'과 '생성'모두를 구제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설명의 제 4범주가 말하는 '상대성의 원리'는 그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 "있는 것 being 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 becoming 을 위한 가능성이 있다." 이점에서 화이트헤드는 "연속성이 생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244] 연속성이 생성된다는 이론은 매 순간의 사물이 비존재화 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동'과 '영속성'의 대립 을 해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동과 영속성의 문제에 관한 더 자세한 고찰은 '객체적 불멸성' objective immortality을 다루는 다음 장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이 장에서 우리는 {과정과 실재}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의 개념들 안에서, '시간의 획기성 이론'으로 집약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개념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고찰을 통해서 화이트헤드 의 형이상학의 개념들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연장적 결합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도식이며, 우리의 우주 시대에 있 어서 그것은 '시간의 획기성 이론'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245]
[각주]
[110] PR, p. 41.
[111] PR, p. 49.
[112] 실제로 화이트헤드가 사용하는 개념적 언어는 그의 사상의 발전에 따라 변하여 왔는데, {과정}과 실재는 그러한 개념적 언어들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연의 창조적 전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초기에는 '추이' 중기에는 '순응' 후기에는 '과정'인데, {과정과 실재}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개념들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명료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164-166.)
[113] PR, p. 156.
[114] 설명의 제 18범주. 현실적 존재만이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하며, 작용인 및 목적인의 원리 principle of efficient, and final causation 로도 불린다.
[115] 화이트헤드는 사물thing, 있는 것being, 존재entity 등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다.(PR, p. 77.)
[116] PR, p. 81.
[117] PR, p. 156.
[118] '현실적' 이라는 형용사는 '생성의 작용' the act of becoming 을 나타낸 말이며, 존재하는 것을 생성과 분리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56.)
[119] PR, p. 73.
[120] PR, p. 158.
[121] PR, p. 159.
[122] 앞서 살펴보았듯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과정과 존재를 정의하는 설명의 제 1범주에서 출발하고 있다.
[123] PR, p. 155.
[124] PR, p. 154.
[125] PR, p. 387.
[126] PR, p. 387.
[127] "파악" prehension 은 칸트의 '직관적 이해' apprehension 와 관련된 화이트헤드의 신조어(新造語)이다. 화이트헤드의 "파악"은 비인식적-직관적 이해를 표현하는 말이다. 즉, 인식적일 수도 비인식적일 수도 있는 apprehension을 의미하는 말이다.(SMW, p. 111.) 화이트헤드는 실현은 사물들이 모여 파악에 의한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고, 또, 이때 실현되는 것은 사물들이 아니라 파악이라고 한다.(SMW, p. 112.) 따라서 파악이란 객체화되어 주체의 여건으로 주어진 사물들이 주체를 통하여 주체 속에 구현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8] PR, p. 81.
[129] PR, p. 74.
[130] PR, p. 81.
[131] PR, p. 79. 이 여덟 가지는 화이트헤드의 현존의 범주이다.
[132] PR, p. 499. 화이트헤드는 이 두 가지 분할을 각각 발생적 분할과 등위적 분할이라고 한다.
[133]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이다."(PR, p. 73.)
[134] PR, p. 157. 하나의 경험행위는 1. 그 자신의 전망적 관점 연장적 내용을 가지며, 2. 다른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연장적 관계를 유지한 채 객체화된다는 두 가지 사실은 경험이 가지는 연장적 관계이다.(PR, p. 157.)
[135]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 그 다자의 각 항을 새로운 일자의 구조 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PR, p. 387.)
[136] PR, p. 389.
[137] 경험의 "이러한 과정 자체가 현실적 존재의 구조이다. 그것은 현실적 존재의 '실재적인 내적 구조'이다.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그보다 낡은 어법으로 말한다면, 과정은 현실적 존재가 '형상적으로' 그 자신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형상적인' formal 이라든지, '형상적으로' formally 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PR, p. 400)
[138] 이러한 점에서 1. 현실적 존재는 객체를 순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해서 자신의 주체적 형식을 완결함으로써 끝나는 과정이며, 2. 물리적 느낌에서 시작하여 개념적 느낌의 완결로 끝나게 되는 과정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각각 물리적 극 physical pole 과 정신적 극 mental pole 이라고 부른다.(PR, p. 433.) 이 두 가지를 연관시킬 때, 물리적 느낌은 객체에 정신적 극은 주체에 해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전통적인 주―객 도식이 부정되며, 오히려 객―주 도식이 강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PR, p. 74. 오형환의 역자주 참조.)
[139] D. M. Voskuil, Whitehead's Metaphysical Aesthetic (Michigan : A Bell & Howell Company, 1969) p. 24.
[140] PR, p. 112, 128.
[141] PR, p. 74.
[142] PR, p. 74.
[143] SMW, p. 111. 이점에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에 반대하는 화이트헤드의 일원론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파악은 물질적 실체에 역점을 둔 데카르트와 정신적 실체에 역점을 둔 록크를 통합하는 유일실체 one-substance 의 우주론에 도달하려는 의도에서 "파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PR, pp. 74-75.) 현실적 존재에 있어서 최초의 위상이 객체화된 직접적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파악의 구조는 객체로부터 주체에 이르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PR, p. 74. 오영환의 역자주.)
[144] PR, p. 74.
[145] PR, p. 158.
[146] PR, p. 74.
[147] "만족은 그 객체적 존재와 관련하여 분석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이다." (PR, p. 400.)
[148] PR, p. 400.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어서 '공간화 된' spatialized 현실적 존재라고 부른다.
[149] PR, p. 400.
[150] PR, p. 80. 화이트헤드의 설명의 제 4범주. "… it belongs to the nature of a 'being' that it is a potential for every 'becoming'. This is the principle of relativity."
[151] 이러한 점에서 만족에는, 미래가 이미 현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구체화되고 있다.
[152] PR, p. 83. 존재론적 원리, 참조.
[153] "상대성의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가 극단적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는 공리이다."(PR, p. 286.)
[154] PR, p. 289.
[155] PR, p. 426.
[156] "파악은 하나의 파악적 계기이다."(SMW, p. 114.) 그러나 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합생을 지배하는 주체적 통일성은 양자 quantum 의 분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생을 지배하는 과제는 전체로서의 양자의 현실화이다.(PR, p. 500.) {과정과 실재}에서는 {과학과 근대세계}의 파악의 개념을 더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157] PR, p. 500. 참조.
[158] PR, pp. 75-76.
[159] PR, p. 505.
[160] PR, p. 505.
[161] 이러한 제일적인 연장적 연대성을 나타내는 연장성의 일반적 도식은 다음과 같다. "선행하는 현실태 A의 선택적인 객체화가 후속하는 현실태 B의 구조 속으로 간접적으로 수용되는 다양한 전달 경로의 그와 같은 질서 정연한 배열은 다양한 현실적 존재들간의 연장적 관계성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외적인 연장적 관계의 이러한 도식 자체는, 여러 현실적 존재에 있어서 내적인, 내적 분할의 도식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기본적인 연장적 결합의 도식이 있게 되는데, 이 도식은 1. 원자적 현실태들을 하나의 결합체로 통일시키는 결합이 순응하는 일반적 조건과, 2. 임의의 현실적 존재의 만족에 대한 무수한 등위적 하위 분할을 통일시키는 결합이 순응하는 일반적 조건을, 하나의 제일적인 도면 위에 표현하고 있다."(PR, p. 504.)
[162] PR, p. 505.
[163] PR, p. 503.
[164] "현실적 계기는 물리적 계기라는 성격의 측면에서 현실 세계의 다른 물리적 계기들을 맹목적으로 지각하는 행위이다."(PR, p. 506.) 만일 맹목적인 순응이 없다면, 직접적 과거의 계기에서 얻어진 새로움의 물리적 여건을 합생의 최초의 순간에서부터 제거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의 반복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65] 이는 신의 결과적 본성의 퇴락함 없는 진화와 관계되어 있으며, 느낌을 위한 유혹으로서의 신의 성공적인 활동에 기인한다. (PR, p. 65.)
[166] 팽창하는 우주와 관련된 시간의 비가역성은, 시간의 화살가운데 하나인 '팽창하는 우주'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체 물리학에 있어서 시간의 비가역성은 허블의 '팽창하는 우주'이론이다. 허블은 관측을 통해서 모든 똑같이 별이 멀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167] PR, p. 119.
[168] 현존의 제 5범주. (PR, p. 79)
[169] Ivor Leclerc, Whitehead's Metaphysics : An Introductory Exposition(Indiana Univ. Press, 1958), p. 97.
[170] PR, p. 122.
[171] PR, pp. 509-510.
[172] PR, p. 511.
[173] PR, p. 513.
[174]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로서의 지각은 세계의 명석 판명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지각의 양태로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서의 지각에 대응되는 말이다.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서의 지각은 직접적 과거의 개체적 존재가 인과적으로 객체화되는 것을 지각하는 것으로 합생의 초기위상인 호응적 위상에서의 지각으로, 무의식적고, 모호한 것인데 반하여, 현시적 직접성으로서의 지각은 지각의 보다 후기 위상인 보완적 위상에서 나타나는 지각으로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로서의 지각의 모호성을 보다 분명하게 하는 지각이다. 또 이 지각은 의식을 포함할 수 있다.(PR, p. 147-181.)
[175] PR, p. 513.
[176] 주173 참조.
[177]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190.
[178] SMW, p. 236.
[179] SMW, p. 240-244.
[180] PR, pp. 243-244.
[181] 화이트헤드가 현대물리학의 상대론이 오류로 밝혀진다 해도 에포크 이론은 여전히 옳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SMW, p. 193.)
[182] "단순한 연장적 연속체 속에는, 어떤 영역적 양자가 원자화되어야 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 원리가 없다."(PR, p. 157.) "이 가능적 도식은 현실적 존재에 의한 자신의 원자화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분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 존재들의 보다 특수한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PR, p. 158.)
[183] 인과성이 보다 근원적이라는 점은 지각의 두 가지 양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PR, pp. 331-335)
[184] SMW, p. 254.
[185] SMW, p. 260.
[186] SMW, p. 260.
[187] PR, p. 56.
[188] PR, p. 94.
[189]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대한 많은 왜곡은 있겠지만, 우선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는 각각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인과 형상인에 해당하고, 신은 작용인 이자 목적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는 신이라는 한정을 통해서만 현실세계에서 구현된다는 점에서 신은 구체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 PR, p. 94.
[191] PR, p. 591.
[192] PR, p. 591.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의 산물이며, 신은 피조물이다. "신의 이 개념적 가치평가의 질서화된 통일성은 어떠한 특수 사태와의 관련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조행위이다. 현실세계의 온갖 특수성은 신의 이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편 신의 통일성은 다만 창조적 전진이라는 일반적 형이상학적 성격 ― 신의 통일성은 이것의 원초적 예증이다 ― 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창조성에 의해 획득되는 원초적 성격이다."(PR, p. 591.) "… 가치평가라는 비시간적 행위는 창조성에 의한 피조물"이다.(PR, p. 96.)
[193]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요1:1) 과정신학의 관점은 태초의 로고스를 신의 원초적 본성에 일치시킨다. "즉,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예수 안에서 화육된 바로 그것이다."(John B. cobb, JR. and David Ray Griffin, Process Theology : An Introductory Exposition (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76), 류기종 역, 과정신학 (서울 : 도서출판 열림, 1993), p. 151.)
[194] PR, p. 591.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첫째, 신의 느낌들은 단지 개념적일 뿐이고, 그래서 충만한 현실성을 결하고 있다. 둘째, 개념적 느낌은 물리적 느낌과의 복합적인 통합을 떠나서는 그 주체적 형식에 의식을 수반하지 못한다."
[195] 영원적 객체는 비시간적 영원성을 가진 현존이다.
[196] PR, p. 199. "… 신의 개념은 현실 세계에 내재하되 유한한 모든 우주시대를 초월하는 현실적 존재의 개념이다. ― 즉 현실적이면서도 영원하고,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그런 존재자의 개념인 것이다."
[197] "창조성은 궁극적 사태를 특징 지우는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그것은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다. 다자가 복잡한 통일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다. … 창조적 전진이란 창조성의 궁극적 원리가 그 창조성이 만들어 내는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PR, p. 78.)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matter 및 근대의 '중성적 질료' neutral stuff 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는 '형상'이라든지 '외적 관계'와 같은 것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성의 관념이 없다.(PR, p. 98.)
[198] PR, p. 56.
[199] PR, p. 77.
[200] "신은 모든 구성원들의 과거 속에 있다는 의미에서 처음이 아니다.신은 모든 다른 창조적 행위와의 생성의 일치 unison of becoming 가운데 있는 개념적 작용의 전제된 현실태이다."(PR, p. 593.)
[201] "그 궁극적인 완결성 때문에, 신의 개념적 본성은 변치 않는다. … 신의 본성의 이러한 측면[원초적 측면]은 자유롭고, 완전하며, 원초적이고, 영원하며 …."(PR, p. 593.)
[202] PR, p. 97. ; "예를 들면 '갈증'은 그 갈증을 해소한다는 개념적 파악과 통합되어 있는 직접적 물리적 느낌이다."(PR, p. 97.)
[203] PR, p. 591.
[204] 신의 원초적 본성은 신의 정신적 극에 해당한다. 한편 "정신적 극은 창조성에 목적인과 작용인 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고리이다."(PR, p. 491)
[205] "신은 현실적 존재이다. 신에 의해, 영원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는 합생의 각 단계와의 등급화된 관련성을 획득하게 된다. 신이 없다면 관련성 있는 새로움이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신의 결단에 따라 현실적 존재에서 생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먼저 개념적으로 생겨나고, 이어서 물리적 세계로 변환된다."(PR, pp. 312-313.)
[206] PR, p. 95
[207] PR, p. 593. 이에 대해서 신의 원초적 본성은 개념적 본성이라고도 부른다.
[208] PR, p. 594.
[209] "신은 원초적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이기도 하다. 신은 처음이자 끝이다."(PR, p. 593.)
[210] PR, p. 595.
[211]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가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의 두 가지 극의 양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PR, p. 433.)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은 현실적 존재로서의 신의 양극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은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두 측면이다. 신은 자신 안에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가지는 하나(one)의 현실적 존재이다.
[212] PR, p. 594.
[213] PR, pp. 148-149.
[214] PR, p. 594.
[215] PR, pp. 594-595.
[216] PR, p. 595.
[217] PR, p. 593.
[218] PR, p. 595.
[219] PR, p. 191.
[220] PR, p. 550.
[221] PR, p. 80. 설명의 제 5범주.
[222] PR, p. 155.
[223] PR, p. 601.
[224] PR, p. 594.
[225] PR, p. 593.
[226] 현실적 존재에 있어서 과거는 물리적 느낌으로 파악되며, 그 물리적 느낌으로서의 과거는 현실적 존재를 제약한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의 새로움은 그 물리적 결정성으로부터 개념적 자유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다. 그 만족은 자기초월적 성격을 가진다. 이와는 반대로 신에게 있어서는 과거가 없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개념적 느낌의 완결된 실현이 먼저 이다. 신은 과거의 제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본성의 완전한 실재적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신의 새로움은 결과적 본성을 통하여, 현실적 세계의 새로움을 통해서 완전한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 속의 세계가 제공하는 요소들은 신의 원초적 본성이 제공하는 전망에 따라 부조화에 따르는 강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신 안에서 실현될 수 있게 된다. 이 실현은 모든 현실적 세계를 유혹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다. 그 만족은 갖가지 시간적 사례들 속에서 초월적 창조성을 규정한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특별한 만족을 신의 '자기초월적 본성'이라 부른다. (PR, pp. 189-190.)
[227] PR, p. 189.
[228] PR, p. 528
[229] PR, p. 528
[230] PR, p. 306.
[231] PR, p. 463.
[232] PR, p. 56.
[233] AI, p. 304.
[234] AI, p. 304.
[235] AI, p. 305.
[236] PR, p. 389.
[237] PR, p. 446.
[238] PR, p. 365. 명제란 잠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태, 또는 사태를 특수하게 규정하기 위한 불순한 가능태, 또는 이론이다.(PR, p. 79.) 여기서 불순하다는 말은 순수히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과 결합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원적 객체가 순수한 개념으로서 순수한 가능태임에 비하여 명제는 불순한 가능태이다. "명제는 영원적 객체에 비해 현실적 계기의 구체적 특수성을 분유하고 있으며, 현실적 계기에 비해 영원적 객체의 추상적 일반성을 분유하고 있다."(PR, p. 365.)
[239] PR, p. 400.
[240] AI, p. 308.
[241] 여기서 예기의 최종적 위상은 만족이다. (AI, p. 305.)
[242] PR, p. 305-306.
[243] AI, p. 307.
[244] PR, p. 103.
[245] 이러한 점에서 "과정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전략이 시간의 획기성 이론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 257.)는 오영환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Ⅰ. 서 론
Ⅱ.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
Ⅲ.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
Ⅳ. 시간의 관점에서 본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Ⅴ. 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간략한 전망
Ⅵ. 결 론
http://theology.co.kr/whitehead
V.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간략한 전망
현대의 자연과학적 시간이해의 지평이 넓어진 오늘, 기독교의 시간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 는 가능성을 넓혀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현대의 자연과학적 발견들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형이상학적 체계로 정립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었다. 이점에서, 이미 화이트헤드 의 시간이해를 살펴보았으므로 본고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여태까지의 논의를 통해 새로 운 신학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의 만족은 그 순간 소멸하고 신의 유혹 을 따라 새로움을 향한 자기 초월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여태까지의 논의가 가지는 신학적 가능성으로서의 ― 단 지 가능성으로서의 ― 전망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이미 과정신학으로 신학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능적 전망은 이미 과정신학적 논의의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간략한 전망에서는, 시간에 관한 신학적 접근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1,500년 전 사람인 어거스틴의 {고백록} 과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오늘 시간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 가능성만을 전망할 것이다.
A. 어거스틴
1. 어거스틴의 시간이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거스틴이 무작정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고 백록 제 11권에 등장하는 이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서 사물의 변화는 창조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과 모든 변화하는 것은 피조물이라는 것,[246] 그리고 시간이란 변화와 함께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는 것과,[247]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란 없었다는 것을 말했다.[248] 그리고, 이미 그는 시간을 영원과의 대비 속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시간과 영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249] 우리는 그의 시간에 관한 논의가 전적으로 자신(피조물)의 비참함에 대한 실존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음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있다"는 발견은 시간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요, 본질이다. 그것 은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있는데, 어째서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하는가?"하는 질문 을 던지기 때문이며[250], "비존재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비존재성으로부터 모든 존재를 구원하여 존재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251].
이 결론과 대비되는 것이 영원이다. 영원이란 결코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존재란 언제 나 현재적 존재이다.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다' 함은 과거도 미래도 없어야 한다.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참된 존재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현재만이 있는 그것을 어거스틴은 '영원'이라고 부른다. 이점에서 영 원은 무한한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선 초시간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참된 존재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은 영원한 하느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현재에 참여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비존재로 돌진하는 숙명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 그것은 '은총'이라는 이름 의 신비이다. 비존재로 돌진하는 피조물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께 철저히 의존함을 통해서, 존재 곧 영원한 현재 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252] 어거스틴은 이러한 시간 이해에 토대 하여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과 연결된 실존적 시간 이해이다. 어거스틴은 바로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시간과의 대비 속에서 영원의 얼굴을 본다.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은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어떻게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로 넘어간다. 어거스틴의 발견 속에서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그러나, 현재라 는 시간은 시간적 전후라는 길이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현재라는 시간이 길이를 가진다고 한다면 그 시간은 이미 '과거와 미래(전과 후)'를 가진 것이 되어 현재가 아니며, 따라서 현재가 아닌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명제에 위배된다. 그러나, 인간 경험은 시간의 길이를 측정한다.
"우리는 무슨 길이(연장)로 지나가는 시간을 재는 것입니까? 시간이 시작한 미래의 길이로 재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직 있지 않 은 것으로 시간을 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지나가고 있는 현재로 시간을 재는 것입니까? 그러나 길이가 없는 현재의 시간으로는 시 간을 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흘러 들어간 과거로 재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있지 않은 것으로 시간을 잴 수 없습니 다"[253]
어거스틴은 이 측정의 경험을 토대로 시간의 지속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측정한다는 인간의 경험'을 겸 손히 받아들인다[254]. 그는 조심스럽게 시간의 연장성을 마음의 연장으로 이해한다. 그는 마음에서 시간을 잰다고 결론짓는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직관은 지속된다"[255]고 결론 짓는다. 그는 마음이 기대하고, 직관하며, 기억한다 는 사실로부터 시간의 지속을 마음의 지속으로 변환시킨다.[256]
"미래가 길다 함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긴 것일 뿐이다. … 과거가 길다 함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긴 것 뿐이다."[257]
어거스틴은 시간의 지속을 마음의 지속으로, 즉 영혼의 팽창[258]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마음의 시간은 인간 의 시간 경험의 중심에 놓여 있다. 과거는 '기억'이라는 양태로 미래는 '기대'라는 양태로 현재의 마음 속에 실재한 다는 것이다.[259]
여기서 어거스틴의 시간이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시간은 하나님의 영원과 대비되는 것이다. 2.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3. 시간은 비존재로 흐르는 것이다. 4. 시간은 피조물의 숙명적 소멸이라는 비참함을 초래한다. 5. 영원은 시간성을 초월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6. 시간은 현재라는 마음의 지속을 가진다. 7. 현재라는 마음의 지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들어와 있다. 이에 덧붙여서 8. 어거스틴의 시간이해는 비반복적이고 직선적이 다.[260]
2. 어거스틴과 화이트헤드
앞서 논의한 화이트헤드의 시간 이해에 따라서 어거스틴의 시간이해와 비교해 보자. 다음의 각항은 앞절에서 요약한 각항에 대응된다. 1. 하나님의 영원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비시간성과 대응된다. 2. 구체적 시간이 신의 원 초적 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현실적 존재로부터 생성된다는 점에서 시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3. 현실적 존재의 객 체화와 더불어 과거는 소멸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간은 비존재로 흐른다. 4.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피조물의 소멸을 초래하지만 또한 생성을 위한 소멸일 뿐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객체적 불멸성이라 부른다. 5.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무한한 시간의 지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이다. 신은 과거가 없다. 6.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시간의 지속으로서 현재를 담고 있는 합생의 과정은 파악이라는 낱말이 가리키듯 지각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마음이 이해와 지각의 장소라 할 때, 어거스틴의 지속과 대응된다. 7. 화이트헤드는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객체적 재연 re-play 과 명제적 느낌에 포함되 어 있는 예기 anticipation 이다.[261] 심리적으로는 기억과 기대가 각각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8.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은 직선적이다.
이상의 간략한 고찰에서 살펴 보았듯이 어거스틴의 시간이해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통해 적어도 형태론적 으로는 상당한 정도로 포섭될 수 있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가 어거스틴의 시간이해와 동일하다는 것은 아 니다. 사실 양자(兩者)의 세세한 논의 과정은 일치점을 찾기 힘들다고 하겠다. 더 상세한 고찰은 본고의 범위를 넘 어간다.
여기서는 다만 4항과 관련하여 화이트헤드의 객체적 불멸성을 따로 떼어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에 관한 장에서 다루어져야 했으나, 그것이 포함하는 신학적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장으로 미루었던 것이다.
3. 객체적 불멸성 : 유동과 영속성의 문제
시간적 세계에 있어서 소멸하는 현재라는 문제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도 근본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화이트 헤드의 철학은 바로 그 시간의 소멸성 ― 사물의 유동 ― 을 해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록크의 시간관은 보다 정곡을 잘 찌르고 있다. 즉 시간은 끊임없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서 현실적 존재는 완결될 때 소멸한다. 그 정태적인 생 존을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의 실용적인 용도는 미래에 있다.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또한 불멸한다. 이 피조물 다음에 오는 현실적 존재들은 '그것(이 피조물)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소유는 그것에의 순응을 요구한다."[262] "시간적 세계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악은 그 어떤 악보다도 뿌리가 깊다. 그것은 과거가 사라진다는 사실, 시간이 '끊임없는 소멸'이라는 사실에 있다. 객체화는 제거를 수반한다."[263]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화이트헤드는 시간은 '끊임없이 소멸하는'성격 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이것은 화 이트헤드가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는 어거스틴의 문제제기가 가지는 실존적 측면에 동 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원성의 움직이는 영상'으로서 시간의 경과 속에서 쇠하지 않는 성 격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완전한 순간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쇠하지 않는다. 이때 시간은 '끊임없이 소멸한다'는 perpetual perishing 성격을 잃게 된다. 그것은 '영원성의 움직이는 영상' moving image of eternity 이 된다."[264]
세계는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의 상실이라는 두려움을 결코 떨치지 못한다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소멸해 간다'는 성격의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면서도, 새로움을 요청하고 있다. 세계 는 새로움이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 질서를 요청하는 것이다.[265]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은 성질보다 관계를 강조하며, 모든 관계성의 기초를 현실태의 관계성에 두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전유하는 것' appropriation of the dead by the living, 다시 말해 '객체적 불 멸성' objective immortality 에 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자신의 '살아 있는 직접성'을 상실한 존재자는 다른 '생성 의 살아 있는 직접성' living immediacy of becoming 의 실재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세계의 창조적 전진이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공동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또한 객체적으로 불멸한다는 것을 말한다.[266] 소멸하는 현재의 문제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생성과 객체적 불멸성을 통해서 해명되고 있다. 소멸된 현재는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생성의 실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성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합생이고 다른 하나는 이행이다. 합생은 개별적 존 재자의 구조에 내재하는 유동성이다. 이행은 개별적 존재자의 완결에 따르는 과정의 소멸이 그 개별적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시원적 요소로 만들어 가는 유동성이다. 합생은 그것의 주체적 지향인 어떤 목적인을 향해서 나아가고, 이행은 불멸하는 과거인 작용인의 매개체이다.[267]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멸은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이행 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의 현실적 존재는 그 만족에 도달 할 때 자신을 객체화시킴으로써 유동에 참여한다. 이 객 체화는 자기 자신의 직접적 미래에 놓인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의 이행함으로써 새로운 합생의 최초의 위상을 시 작하며, 새로운 합생의 작용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족은 자기초월체인 것이다. 소멸된 현실적 존재는 객체화를 통해서 새로운 생성의 직접 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소멸은 생성의 시작이다. 소멸이 없이는 생성도 없다.
'있음'에는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한다는, 설명의 제 4범주에서 말하고 있는 생성을 위한 가능성에는, 연속성 의 생성뿐 아니라 '우주의 연대성'을 위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유동하는 세계가 혼돈으로 빠져들지 않는 까닭 이 거기에 있다. 만일 우주의 연대성을 위한 가능성이 배제된다면, 세계는 온통 양립불가능한 존재들의 대립과, 점 점 더 거세어 지는 끊임없는 악의 출현에 빠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신의 결과적 본성과 관련하여 '직접성의 일치'에서 느껴진다. 창조적 전진을 직접성의 유지와 결합시키기 때문에 신의 결과적 본성은 '영속적' everlasting 이다.[268] 신은 '동시적 세계의 독립적 다수성'[269] ― 이것은 단 순한 공재이며, 이접적 현실이다 ― 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신은 자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세계의 다수성을 파악한다. 파악된 세계의 다수성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성에서 유래하는 주체적 지향의 완전성으로 말미암는, 신의 느낌의 적절성에 의해 짜여져서 보편적 느낌이 된다.[270] 세계내의 악의 반항들은 사소한 사실들로 밀려나 며, 세계 내에서 성취된 선은 신의 결과적 본성과 관련된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 이미 구제되어 있다.[271] 모든 현 실적 존재의 객체화는 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신의 원초적 본성과 관련된다.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된 통일 성으로 인해서 모든 현실적 존재의 객체화는 '우주의 연대성'을 위한 조건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모든 합생하는 피조물은 그 현실세계에 대한 신의 객체화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로서 신 속에서 객체화 된다.[272] 이 새로운 요소는 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그 영속성을 부여받는다. 이 영속성이 바로 객체적 불멸 성이다. 객체화된 모든 현실적 존재의 영속성은 신의 결과적 본성의 영속성과 함께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 한 점에서 객체적 불멸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이다. 객체화에는 신이 개입한다. 신의 개입으로 말미 암아 객체화는 객체적 불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유동성과 영속성의 문제는 그 둘을 단순히 분리시킴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분리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비참한 세계와, 완전하고 영원한 탁월한 실재성을 가진 신이라는 이원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단순한 유동과 영속성의 문제란 없다. 1. 영속성을 수반한 세계가 유동성을 자신의 완결로서 요구하고, 2. 유동성을 수반 한 세계가 영속성을 자신의 완결로서 요구하는 이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1항은 신의 결과적 본성이 시간적 세계로부터 파생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과 관련된다. 2항은 객체적인 불멸성을 가진 각각의 유동적인 현실적 계기의 완결과 관련된다.[273] 신은 유한한 사실들이 가지는 개개의 유동하는 만족에 의해 완결 되고, 시간적 계기는 궁극적인 절대적 지혜의 영원적 질서에 순응하게 되는 변형된 자기와의 영속적인 합일에 의 해서 완결됨으로써 유동과 영속성의 대립은 양립 불가능성에서 대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화이트헤드의 유동하는 계기를 소멸로부터 구원하는 원리가 객체적 불멸성이며, 이러한 구원 은 세계와 함께 하는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소멸하는 존재의 구원은 신의 영원성에의 직시라고 할 때, 부분적으로는 옳았던 것이다.
B. 몰트만
1. 몰트만의 시간이해
몰트만의 시간 이해는 다소 복잡한 시간의 그물로 표현된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쓴다. 1. 시간의 방향을 따라 ; 과거적 미래, 현재적 미래, 미래적 미래, 2. 시간의 방향을 거슬러 ; 과거적 과거, 현재적 과거, 미래 적 과거. 2. 현재 그 자체를 표현하는 ; 현재적 현재.[274] 이러한 일곱 가지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설 명하는 것은 여기서는 불필요하다. 다만, 몰트만이 이러한 시간들을 구별하려는 이유는 과거-현재-미래로 단순히 도식화된 시간관이 가지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심각성이 초래하는 인간성의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275] 몰트만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이러한 목표로서의 시간구도 속에 가장 중요한 시간관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의 과거와 그의 미래를 가진 시간적 현재이다. 그러나 이 시간적 현재는 무엇을 움직이는가? 그때 그때의 현재가 과거적인 현재의 미래를 성취하게 하지 않는 동안 단지 시간의 지연이 계속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구상으로서의 미래'는 언제나 경험으로서의 미래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회상되었고 경험되었으며 아직도 회상할 수 있는 모든 현재들 을 초월하는 이 미래를 우리는 '종말론적 미래'라고 부른다. 그것은 '미래적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역 사의 미래로서 과거의 미래인 동시에 미래의 현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근원이요 원천이다.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현상은 미래이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현상으로서의 미래'는 신의 원초적 본 성에 해당한다. 몰트만의 미래는 종말론적인 미래이며 그 미래는 현재의 목적인으로써 작용한다. 신의 원초적 본 성으로서의 미래는 현재로 하여금 현재를 넘어서서 완결된 신의 원초적 본성의 실현을 향하여 초월하게 하는 힘 이며,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사랑의 힘이다.
몰트만은 이 종말론적 미래를 통하여 과거와 미래는 시간의 동일선 상에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차이는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한다.[276]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세계는 완결된 신의 원초적 본성의 실현을 향하여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그것은 그 실현에 있어서 결코 반복됨이 없다. 따라서 현재에 내재하는 과거와 미래는 결코 그 질에 있 어서 동일할 수 없다. 현재에 내재하는 과거는 옛것이며, 현재에 내재하는 미래는 새것이다. 현재에 내재하는 미래 는 미래를 그 가능성에 있어서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현재적 미래'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역사적 시간들의 동시화이며, 분리하는 사유로부 터 에큐메니칼한 사유로의 전환이다. 이 둘은 모두 지구 파멸의 위기 ― 특히 핵무기에 의한 ― 에 직면하여 평화 의 공동체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이다.[277]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미래가 현재에 내재하 는 까닭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통일성에 의한 온 '우주의 연대성' 때문이다. '있음'이 '생성'을 위한 조건을 구비해 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신을 포함한 온 우주의 연대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임은 이미 고찰한 바 있다. 화이트헤 드에게 있어서 현재에 내재하는 미래는 근본적으로 위의 두 가지 조건을 목표로 한다. 이에 더 나아가서 이 미래 는 몰트만이 주장하는 바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의 동시화'를 지향하고 있 다.[278] 왜냐하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온 우주의 연대성은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자연의 역사도 포괄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궁극적 미래가 안식일의 평화 안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의 평화를 지향하는[279] 것과 마찬 가지로 화이트헤드의 궁극적 미래는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성 속에 예시된 온 우주의 최종적인 평화의 실현인 것이다.
이 간략한 논의를 통해서 몰트만의 시간이해와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유사성을 살펴보았다. 그 유사성은 시 간이해의 목표와 관련한 유사성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유사성은 각각의 구체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다만 신 학적 전망을 간략히 제시하는 이 글에서 차이를 지적하는 것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2. 성서적 시간이해
몰트만은 자신의 성서적 시간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올바른 순간의 시간'은 사건을 통하여 결정 된다. 각 사건은 그의 시간을 가진다. 2. '역사적 시간'은 약속의 발생과 하느님의 성실하심의 사건들을 통하여 결 정된다. 3. '메시야적인 시간'은 메시야의 오심을 통하여, 그리고 지나가는 이 시대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새 창조 의 시작을 통하여 결정된다. 4. '종말론적 시간'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일어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 운 다른 미래에 대한 그들의 선포를 통하여 결정된다. 5. 끝으로 '영원한 시간'은 신적인 영광의 나라에서 이루어 지는 새롭고 영원한 창조의 시간일 것이다.[280]
이와 관련한 화이트헤드의 시간 이해는 위의 각항에 대응하면, 각각 다음과 같다. 1. 몰트만은 이것을 '카이로스' 와 관련하여 고찰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현실적 존재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생성된다. 각각의 계기 는 그 최초의 전망을 최종적 만족에서 실현함으로써 종결되며, 이것은 하나의 시간적 연장으로 이해된다. '카이로 스'적 시간만이 참된 시간이다. 2. 시간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비전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신의 결과적 본성의 끝없는 인내와 사랑의 심판을 통한 구원으로 종결된다. 이것은 신의 성실하심을 이 세계에 나타낸다. 3. 메시야적 시간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시간이며, 그것은 그 개념적 완결성이 아직 '보편적'으로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 도를 통해서 결정되었으며, 지나가는 이 세대 속에서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4. 예언자 들은 신의 원초적 본성의 개념적 완결성의 비전을 이 세계에 선포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요청하고 종말론적 시간을 예시한다. 5. 신의 원초적 본성의 시간은 그 개념적 완결성과 비시간성으로 인해 영원하다. 그것은 신적인 영광의 나라이며, 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실현될 나라이다.
C. 가능성으로서의 전망과 오류
이 장에서의 논의는 전적으로 신학적 시간이해의 가능성의 단초를 지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화이 트헤드의 객체적 불멸성을 다루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징적[281] symbolic 유사성만을 살펴보았을 뿐이며 구체적인 논리적 맥락에서의 유사성은 아니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논리적 맥락에서 보면 많은 오류가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상징적 유사성을 통해서 신학적 시간이해의 가능성의 단초는 예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논 리성과 구체성과 차이들을 무시한 이러한 논의의 방식은 어거스틴도, 화이트헤드도, 몰트만도 모두 받아들이기 힘 들 것이다. 물론 필자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에서 제시된 전망은 독자의 몫이어야 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 로운 시간이해가 요청되는 오늘의 현실은 몰트만이 이미 지적한 바[282] 있거니와, 신학하는 필자의 실존은 구원 을 갈구하며 이러한 요청에 응답해야 하는 신앙의 실존이다.
여기서 제시된 여러 전망들은 단지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능적인 정서적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단순한 상징적 연관을 통해 예시된 이러한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길고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그 어려운 몫은, 독자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실현 과정에서 상당수는 배제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하느님의 사랑에 힘 입어 그 실현인 만족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필자의 무리한 전망을 용서하기를 바라며 간략한 전망을 마친다. "오 류는 새로움을 낳으며,[283] 진리는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284]"
[각주]
[246] 고백록, p. 384.
[247] 고백록, p. 394.
[248] 고백록, p. 394.
[249] 고백록, pp. 390-392.
[250] 이 질문은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난제 중에 하나이다. 열역학 제2법칙인 무질서 증가의 법칙은 시간과 관련한 어거스틴의 선언을 과학적으로 반복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는 증가한다'는 말로 정식화 할 수 있는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존재는 비존재(무형)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학의 발견은 잇따른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왜 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251] 이 질문에 매달리는 것은 진화론이다. 바로 이 질문이 진화론을 매우 난감하게 만든다. 아주 쉽게, 무엇이 존재케 된 것은 확률적 '우연'의 소산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확률이 낮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필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며, 더욱이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적기에 그것은 신비적인 설명으로 치우치게 된다.
[252] 어거스틴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존하고 관상하는 존재요, 다른 하나는 아직 형상을 받지 못한 무형의 질료이다. 전자는 비록 시간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현재만을 의존함으로써 시간성으로부터 구원되고 있으며, 후자는 더 이상 비존재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없기에 시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존재가 비존재보다 더 '좋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이 갈망하는 시간성으로부터의 구원이 전자의 경우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고백록, pp. 434-437)
[253] 고백록, p. 405.
[254] 여기에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움이 있다. 그는 분명히 논리적인 맥락으로는 제논의 역설을 택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비록 비논리적인 추론이라 하더라도 일단 '경험'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의 겸손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신앙의 힘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255] 고백록, p. 417.
[256] 고백록, p. 416.
[257] 고백록, p. 417.
[258] 고백록, p. 412.
[259] 고백록, p. 404.
[260] 선한용, 시간과 영원(서울 : 성광 문화사, 1986), p. 17.
[261AI, p. 305.
[262] PR, p. 180.
[263] PR, pp. 585.
[264] PR, p. 581.
[265] PR, pp. 584-585.
[266] PR, pp. 43-44.
[267] PR, p. 386.
[268] PR, p. 594.
[269] PR, pp. 148-149.
[270] PR, p. 594.
[271] PR, pp. 594-595.
[272] PR, p. 593.
[273] PR, p. 597.
[274] Jurgen Moltmann, Gott in der Schoepfung ― Oekologische Schoepfungslehre(Munchen : Chr. Kaiser Verlag, 1985),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62.
[275] Ibid., p. 157. 특히 다음의 인용문 "오늘날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현대의 이 세계 상징이 가진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역사'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보다 더 큰 개념 속에 통합하는 일이 필요하다. 첫째의 것을 나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들을 여러 모양으로 세분함으로써 시도하고자 하며, 그 다음에 안간의 시간과 '땅'이라고 하는 생태계의 자연적인 시간을 공시화 시킴으로써 역사의 한계가 무엇인지 지적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관점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서로 질적으로 침투하며 양적으로 간단히 서로 나누어 질 수 없는 '시간들의 순환적 이해'이다."
[276] Ibid., p. 167.
[277] Ibid., pp. 169-171.
[278] Ibid., pp. 171-174.
[279] Ibid., p. 174.
[280] Ibid., pp. 155-156.
[281] PR, p. 320.
[282] Jurgen Moltmann, op. cit., pp. 156-174.
[283] "사실 오류란 보다 고등한 유기체의 징표이며, 상승적 진화를 촉진하는 교사이기도 하다."(PR, p. 320.)
[284] "진리의 중요성은 그것이 흥미를 증가시킨다는 데에 있다."(PR, p. 463.)
Ⅰ. 서 론
Ⅱ.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
Ⅲ.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
Ⅳ. 시간의 관점에서 본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Ⅴ. 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간략한 전망
Ⅵ. 결 론
http://theology.co.kr/whitehead
VI. 결 론
이 논문에서는 20세기의 데카르트라 불린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살펴보았던 본 논문에서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을 살펴본 2장에서, 화이트헤드가 배격하고 있는 단순 정위의 오류, 그의 시간이 해의 두 개의 축을 이루는 과정과 존재, 그의 실존적 시간개념을 보여주는 유동과 영속성의 문제들을 논하였다.
과학적 유물론은 '서로 독립적이며, 관련되지 않은 물질의 배치구조'를 통해서 존재를 해명하고 있다. 화이트헤 드는 이것을 단순 정위의 오류라고 부르며, 새로운 과학적 개념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는 단순 정 위에 관한 반박을 통해서 1. 시간은 물질의 본질에 속하며, 2. 시간은 점이 아니라 지속이며, 3. 사물이란 단순 정 위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의 변용이라고 하였다.
우주의 창조적 전진인 과정과 그것을 담아 내는 존재라는 두 개의 축은, 한편으로는 우주의 연대성을 구현하는 생성으로서의 존재와, 시간적 소멸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존재의 문제를 해명하는 시간을 요청하고 있다. 화이트 헤드는 인간 실존의 비극은 유동하는 시간성이라는 숙명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물은 흐른다'는 엄연한 숙명적 현실 위에 철학이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요청하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시간'과 '영원'사이의 조화를 이 루어 내는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소멸하는 성격의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며, 화이트헤드는 새로움이 상실 을 의미하지 않는 그런 질서를 가진 시간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을 살펴본 제 3장에서, '시간의 획기성이론'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하였다.
화이트헤드의 시공의 기하학적 구조는 단순 정위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배격하기 위하여 점과 지속에서 출발하 고 있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대신, 연장과 결합에서 출발하는 기하학을 전개된다. 또, 화이트헤드는 정신-물질의 이 원론을 답습하는 관념론을 배격하기 위하여 시공의 구조 분석을 통해서 사건이 실재하는 것이며, 시공은 사건으로 부터 파생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시공은 사건과 더불어 사건을 성립시키는 체계로만 실재하는 것이다. 시공 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형상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는 기하학적 연장적 연속체의 도식이 구체적인 사건을 통 해서 시공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건은 그 객체성을 우주의 연대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 속 의 사건은 개체성을 위하여 정신적 주체성을 도입하는 시간이 요청된다. 이점에서 시간은 자연을 넘어선다.
화이트헤드의 이와 같은 고찰에 따라 등장한 시간 이론이 '시간의 획기성 이론'이다. 시간의 획기성 이론은 1. 연장적 결합의 기하학적 전망이 예시하는 4차원의 물리적 연장적 연속체에 의해 뒷받침되며, 2. 사건의 실재성으 로부터 생성되는 시간이며, 3. 패턴의 지속으로부터 공간과 분화된 시간이며, 4. 자연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한 시 간적 성격을 그 안에 포함하는 시간이며, 5. 다양한 상대론적 시공계를 가지는 시간이며, 6. 측정가능한 시간이며, 7. 양자론적인 함의를 가지는 원자적 시간이며, 8. 방향을 가지는 비가역적 시간이다.
제 4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들이 그의 형이상학적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펴봄 으로써 시간의 이해를 그의 우주론 속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폭을 넓히고 그 충분한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하 였다. 그 결과 그의 시간이해는 아주 미세한 현실적 존재로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기초개념으로써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시간이해는 모든 존재의 우주적 연대성을 신과 더불어 신을 통하여 구체화하고 있 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 놓인 존재만이 참된 실재임을 밝혀 준다.
제 5장에서는 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가능성을 간략히 전망하고자 하였다. 어거스틴의 논의와 관련하여서는 유동성과 영속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어서 고찰하였다. 화이트헤드에게 유동하는 피조물 특히 인간 실존을 소멸로 부터 구원하는 원리는 객체적 불멸성이며, 이러한 구원은 세계와 함께 하는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몰트만의 논의와 관련하여서는, 과거-현재-미래로 단순히 도식화된 시간관이 가지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심 각성이 초래하는 인간성의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그의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본고의 맥락을 고려할 때,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충분히 그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를 쓰게 된 목표를 새롭게 회상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 동 안, 신앙의 실존으로서의 필자를 이곳까지 이끌어 낸 '오늘이라는 위기 상황'이 요청한 목표였다.
기독교의 우주론은 '무로부터의 창조' 라는 도식에 기초한다. 바로 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도식은 어거스틴이 정교한 신학적 체계로 정식화하였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시간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에 뉴턴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기초하여,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이론을 정초하였다. 뉴턴의 시공간 이론은 이후 자연과학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기계론적 자연관, 과학적 유물 론 등으로 불리는 세계관을 생산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카프라는 이러한 세계관들을 총칭하여 뉴톤-데카 르트적 세계관이라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21세기를 앞두는 현대에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 일반인들의 상식적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신'이 점차로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고 있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경향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의 자연과학이 발견한 새로운 관념들은, 20세기 초반을 뒤흔든 현대 물리학의 발견 ― 상대론과 양자론 ― 으로 이어졌다. 상대론은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물체들의 시공계가 다르다는 점과, 시-공이 하나의 체계 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입증하였다. 양자론은 파동과 입자가 얽혀 있음을 보여주었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상호 관련성을 극적으로 입증하였다. 세계는 서로 독립적인 존재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존재들의 우주적 연대성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뉴톤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개념은 이제 설자리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의 세계관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경쟁원리에 입각한 세계적 갈등이 양차(兩次) 세계대전으로 나타났고 인류는 핵에 의한 절멸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류는 지구적 차원의 생태적 위기에 노출 되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을 소망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세계관을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떠한 세계관을 세우 든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저 뉴톤-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뉴톤-데카르트적 전제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전제가 되고 있는 뉴톤적 시공의 개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는 어떠한 방법으로 20세기의 상대론과 양자론을 포섭하 는 새로운 시간관을 정립할 것인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에는 우리가 찾는 그러한 시간관이 들어 있다. 그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서 20세 기의 새로운 자연이해를 포괄하는 형이상학의 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세계관이 정신-물질의 이원론 을 극복하며, 생명으로서의 자연관을 회복하고, 과학적 유물론을 배격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더욱이 그의 세 계관 속에서 인류에게 점차 잊혀져 가고 있던 '신'이 그 참다운 사랑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고 에서 살펴보았듯이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는 그의 형이상학 전반에 걸쳐 기초가 되고 있는 유기체적 세계관의 핵 심이다. 우리는 매우 훌륭한 도구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속에서 신의 사랑을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Ⅰ. 서 론
Ⅱ.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배경
Ⅲ.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의 근본 개념
Ⅳ. 시간의 관점에서 본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Ⅴ. 기독교의 시간이해를 위한 간략한 전망
Ⅵ. 결 론
http://theology.co.kr/whitehe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