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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산행일자:2008. 4. 13일(일)
*소재지 :경북경주
*산높이 :고위산498m, 금오산435m
*산행코스:삼릉입구정류장-상암사-금오산-문바위-고위산
-천룡사지-틈수골정류장
*산행시간:8시25분-14시40분(6시간15분)
*동행 :나홀로
수많은 석불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석불이 새겨진 바위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청마 유치환님이 그의 시 “바위”에서 노래한 대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는 메시지의 생산자가 아니고 오로지 부처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단단한 그릇이어서 바위만의 독자적인 메시지가 따로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천년세월을 길다 않고 부처님의 메시지를 간직해온 것이 바로 바위이기에 바위가 담아오다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서 여러 기의 석불들을 만나보고 석불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비(慈悲)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에 자비를 베푸시는 희열이 바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것이 바로 미소를 머금은 존안입니다. 남산 삼릉계곡의 여러 석불들이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도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짓는 자비의 미소인 것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께서 오랜 세월 자비로움을 잃지 않은 것은 바로 바위의 견고함 덕분일 것입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가긍히 여겨 이들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사랑을 주시는 것이 자비라면 자비는 부처님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오늘 날 동양의 지혜가 석가모니와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면 서양의 정신문화는 예수의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자비를 베푸셨고, 카톨릭신자인 저도 매주 주말 미사를 올리며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빌어 왔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 분들의 가장 큰 덕목은 자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래서 들었습니다.
비슬산을 오르고자 대구로 내려간 김에 불교문화의 보고인 남산을 들러볼 생각에서 일행들과 헤어져 저 혼자서 경주로 이동했습니다. 경주시내에 하나 밖에 없다는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역전으로 나갔습니다. 역전 건너 우체국 앞에서 내남행 버스에 올라 삼릉(三陵)입구에서 하차하기까지 차창 밖으로 꽤 큰 규모의 고분 몇 기를 보고나자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의 새 이름임이 새삼 되새겨졌습니다. 1976년 수학여행인솔 차 제가 가르쳐온 중학생들과 함께 경주를 다녀간 후, 딱 한차례 회사 일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은 있어도 30년이 넘도록 신라의 유적지탐방에 나선 적은 이제껏 없었기에 이번에 큰 맘 먹고 자연박물관인 남산을 오르고자 경주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아침8시25분 삼릉입구에서 역사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천년고도 서라벌과 벗해왔을 소나무 밭을 지나 신라왕조 세분의 왕을 모시는 배리삼릉(拜理三陵)에 다다랐습니다.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및 54대 경덕왕을 모시는 삼릉은 각각의 밑 둘레가 60m가 채 안되고, 높이는 5m 내외이며, 지름이 18m 정도로 규모면에서 조선조 왕릉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같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신라 시대의 왕권이 국가체제가 확립된 조선조 때보다 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 소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난 길을 따라 올라가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에 인사를 올렸습니다. 옷 주름이 섬세하고 유려해 복식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석조여래좌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된 채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1964년 8월에 발굴한 것이라는데 목이 떨어져나간 사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80년 LA올림픽 때 목이 없는 기념물을 세웠던 것은 인종차별을 없앤다는 올림픽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여기 석조여래좌상은 있던 목이 잘려나간 것이기에 그 경우와는 다릅니다.
9시35분 큰 냉골을 지나 상선암에 다다랐습니다.
냉골과 그 상류인 큰 냉골은 신라 석불의 야외전시장 같았습니다. 냉골을 따라 상선암으로 올라가다 왼쪽으로 비껴서있는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 磨崖觀音菩薩像)을 들렀습니다. 높다란 암벽에 양각한 관음보살상의 투박하면서도 온후한 얼굴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곧추선 두 개의 넓적한 바위에 선으로 새긴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이 여기 삼릉계곡에 자리한 석불의 압권으로 느껴진 것은 마치 스케취북에 그린 듯 선이 섬세한데다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의 여섯 분의 부처님을 한 곳에서 모두 만나 뵐 수 있어서였습니다. 상선암에 오르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경주삼릉계 석불좌상(慶州三陵溪石佛坐像)은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만, 가림 막을 쳐놓고 보수공사중이어서 부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왕릉과 석불에 정신을 뺏겨 자칫 삼릉계곡의 봄소식을 빼놓을 뻔 했습니다. 한 여름에도 시원해 냉골로 알려진 삼릉계곡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져 봄의 교향악을 듣는 듯 했습니다. 여기 냉골의 봄꽃들은 다양한 모습의 석불보다 훨씬 초라해 진달래와 벚꽃 몇 그루만 겨우 보였을 뿐인데 상선암에 올라서자 벚꽃이 만발했고 노란 풀꽃과 매화(?)꽃이 곁들여 한껏 화사했습니다. 지나온 골짜기가 시원스레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선암이 초파일을 맞고자 걸어놓은 연등도 벚꽃 못지않게 화사했으며, 이 암자에서 올려다 본 냉골 상단의 깎아지른 암벽도 볼만했습니다.
10시28분 해발435m의 금오산을 올랐습니다.
상선암에서 잠시 쉬며 물 한 모금을 떠 마신 후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 磨崖石加如來坐像)을 들러보았습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이 삼릉계곡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또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계신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크기도 가장 큰데다 자비로운 얼굴과 선의 섬세함이 이제껏 보아온 불상들의 퓨전(Fusion)을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조금만 돌아앉으셨다면 서쪽 멀리 비슬산을 벗 삼을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밧줄이 늘여진 능선삼거리로 올라서자 오른쪽으로 “금오봉840m/삼불사2160m"의 표지목이 길안내를 해주어 오른쪽으로 꺾어 금오산으로 향했습니다. 냉골의 진달래를 몽땅 이 능선에 옮겨 심은 듯 떼를 이룬 연분홍 진달래꽃이 절절에 이르러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카메라에 옮겨 담느라 산행이 더뎠습니다. 넓은 공터에 자리한 정상석을 어루만지며 새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선생께서 편안한 능선 길에 화사한 진달래꽃 그리고 저 아래 냉골의 석불들과 벗할 수 있었기에 이 산에 머무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시35분 오른쪽으로 용장마을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인 이형재에 도착했습니다.
금오산에서 남쪽으로 22분을 걸어 다다른 암봉에서 10분여 쉬면서 한 분에게 물어 동쪽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높은 산이 토함산임을 확인했습니다. 언제고 경주에 다시 내려오면 신라의 유적지를 마저 탐방하고 여기 남산보다 훨씬 높은 토함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은 후 암봉을 출발했습니다. 얼마 후 큰 길로 내려서 길을 찾다가 매년 삼월삼지 날 충담스님이 삼화령부처님께 차를 올린 것을 기념하는 “한산 차에 안민을 노래하고 ”라는 목판을 보았습니다. 큰 길로 얼마고 걷다가 오른 쪽 산길로 다시 들어선지 6-7분 후 이형재를 지났습니다.
안민가(安民歌)는 충담스님이 경덕왕으로부터 “짐을 위하여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올린 10구체의 향가(鄕歌) 로 충담스님은 이 시를 통해 안민의 요체는 임금과 신하와 백성 모두 자기 직분을 다하는 데 있음을 아래와 같이 역설했는데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시구는 지난 5년에도 또 앞으로 5년에도 꼭 들어맞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민가(安民歌)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로다!’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이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시렵니까?’ 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 알리이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늘 태평할 것입니다.
13시5분 해발 498m의 고위산에 올라섰습니다.
남산은 금오산과 고위산 일대를 묶어 부르는 통칭으로 남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고위산이 바로 남산의 정상입니다. 이형재에서 415봉으로 오르는 길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가팔랐습니다. 415봉에서 문바위를 지나 바로 만난 445봉과 고위산 사이에 봉호골이 자리 잡고 있어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건너지 않고 능선으로 이어가고자 깊숙한 안부인 봉호재로 내려섰다가 435봉으로 올라섰습니다. 동쪽 아래로 380m 떨어진 칠불암까지 내려가지는 못하고 중간의 신선암을 들러보고 다시 435봉으로 되올라와 점심을 들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본 석불은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磨崖菩薩半跏像)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반가상은 칠불암 곧바로 위 절벽 면에 새겨졌는데 독특한 유희좌(遊戲坐)와 볼륨감이 느껴지는 얼굴과 몸매가 이제껏 보아온 석불들보다 훨씬 여유롭게 보였습니다. 435봉을 출발해 남진하다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봉화대를 에돌아 백운재에 다다랐습니다. 백운재에서 고위산까지는 오름길이 계속됐습니다. 천룡사지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오른 쪽의 고위산 길로 들어선지 16분 만에 삼각점이 세워진 고위산에 다다랐습니다. 일행 두 분과 함께 오른 아주머니 한분이 제 사진을 찍어주고 하산 길을 안내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묘지 한 기가 들어선 고위산 또한 전망이 별로여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틈수골을 향해 하산했습니다.
14시40분 35번 국도가 지나는 틈수골 정류장에서 역사탐방을 마쳤습니다.
고위산에서 오른 길로 조금 내려가 오른 쪽으로 뻗어나가는 암릉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저보다 한발 늦게 고위산을 출발해 다른 길로 내려온 아주머니 일행 분들이 저보다 몇 발 앞서 능선삼거리에 도착해 산나물을 따고 있었습니다.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벚꽃이 활짝 핀 천룡사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아래 6만평의 옛 절터가 천룡사가 대찰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현존하는 초라한 청룡사는 그 옛날의 영화가 부질없음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7세기 후반 이전에 일찍이 해발 300m 대의 산속에서 이런 넓은 터를 찾아 대찰을 세운 스님이 어는 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터에 다시 세운 삼층석탑과 석조, 부도와 맷돌 등이 이 절의 옛 영화를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와룡사 옆길을 지나는 중 산책길에 나서신 스님을 만나 뵙고 몇 말씀을 들은 후 조금 더 내려가 탁족을 했습니다. 자그마한 저수지 아래 틈수골마을을 지나 35번 국도에 다다라 하루 산행을 접은 후 10분을 채 못 기다려 양산 쪽에서 달려오는 경주행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시50분에 출발하는 안양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주마간산으로 들러본 경주 남산이 주마등처럼 제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는 역사서를 쓴 김성호님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신라에서 찾아야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설 논리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입니다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그 후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내달아 중국이나 고구려 중 한 나라는 철저하게 망해 민족국가를 이어가기 어려웠을지 모를 일입니다. 불행히도 그 한나라가 고구려였다면 우리 민족은 신라에 이은 고려와 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기에 고구려보다 훨씬 유연하게 생존전략을 구사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크게 다행이었으며 그래서 오늘 날 우리가 지구상에 경제적 강국으로 자리한 대한민국에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한갓 허황된 이야기로 몰아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과 백제의 문화적 안목이 같이 하지 못하는데 신라의 유연성만으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부국으로 발돋움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의 선조 신라인들이 석불을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가 오늘날의 중생에도 고루 미친다면 얼마 남지 않은 석가탄신일이 신라의 자손들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후예들 모두에 축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 키웠음을 기록하며 남산 산행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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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인마뇽님 비슬산 산행을 하시고 내친김에 경주로 가시어 천년고도이며 불교문화이 산지인 경주 남산 일대를 산행겸 역사 탐방을 하고 오셨네요 그런데 카돌릭 신자이시라며 어쩌면 그리도 우리나라 불교문화에 대한 해박한 상식을 가지고 계신지요 난 늘 산행후 사찰을 돌아 보시며 써내려가신 사찰들에 대한 글을 볼때마다 아마도 시인마뇽님께서 신심이 깊으신 불자이신줄 생각을 할 정도로 불교문화에 대하여 전문가 수준이십니다 후배님 글을 읽을때마다 그 높은 학문의 아름다운 표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힘들지 않은 산행길에 후배님 곁에 사모님이 함게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텐데...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