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는 누구나 벌거숭이다. 자명한 이 말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하물며 수십 년을 물과 바람이 떠미는 대로 동가숙 서가식한 사람이라면 지나친 자국마다 무엇이 고여도 고이지 않겠는가. 기형도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누군가의 친구였고 동지였고 원수였으며 악당, 천사, 귀엽거나 끔찍한 그 무엇이었을 수 있다. 그 동안 나는 그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추억의 곳간에서 되도록이면 예쁜것을 모으려 했다. 이것을 살아남은 자의 권리라고, 상정(常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을 잡담이라고 부를 것인데 자신이 이런 잡담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런 자신의 경향을 '추억에 대한 경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사정이지 내 생각은 다른 것이다. 그의 경멸은 살아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채워넣을 수밖에 없는 위장과 같은 추억에 대한 자기 판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추억이라고 말할 때는 좋거나 나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슴이 시린, 발가락이 근지러운, 머리칼이 쭈뼛하는, 흐뭇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아예 추억하기도 싫은 추억 따위처럼 분류할 수 있는 그런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이름 붙인 추억이라는 동네, 그 동네에 존재하는 제행무상에 대한 경멸이다. 나도 어떤 추억을 경멸하긴한다. 무든 추억에 대해서 사랑한다, 경멸한다고 단언하지 않을 따름이다. 내겐 아직 더 삭여야 할 오욕과 추억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형도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빛나고 푸른,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오만과 독선의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는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다. 쉽게 말해 목욕탕에 함께 갈 수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제정신으로 여기 늘어놓을 수 있는 추억담은 아주 적다. 하얀 키보드와 바다색 모니터 화면을 앞에 두고 손을 꺾으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기형도의 수동타자기다. 우리는 대학 시절,학교 신문에서 공모하는 무슨 문학상을 받아 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기형도는 나보다 먼저 상금을 타서 수동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고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눈 딱 감고."
글쎄, 나는 상을 받기도 전, 상금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술값 으로 미리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에 내가 받은 상금은 그가 그 전해에 받은 것의 반이었다. 가작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충고를 잊지는 않았다. 청계천에서 그가 산 반 값으로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샀고 그가 산 수동타자기의 값으로 중고 전동타자기를 샀고, 어쨌든 그 타자기와 문학전집의 덕으로 나는 다음해 그보다 조금 상금이 많은 무슨 상을 받아 술값으로 마음놓고 다 써버렸다. 그때는 상금이 내 것이나 다름없다는 흰소리 따위는 하지 않고 조용히. 그와 나 둘중에 누가 장사를 잘 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이 내가 썼으면 싶은 추억담이다. 당연히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데다 시시콜콜하다.
이에 따라 나는 기형도와 가까웠고 아직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추억을 나누어달라고 부탁했다. 누나, 기애도 씨는 유년 시절과 집안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게으른 나를 위해 글로 옮기느라 몸살이 나고 말았다. 민망할 따름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상현 정대호 에게 감사한다.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신문사 후배였던 박해연이 정리해 주었다. 그 역시 글을 쓰는 동안 몸살을 앓았다고 엄살을 떨며 겁을 주었다. 대학 시절 이후의 벗들, 동료들에게도 감사한다.
사실 기형도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권리가 충분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가 참여했던 동인(同人)들, 선후배,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를 읽은 독자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를 만났던 모든이에게 추억담을 들어야 하고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에 는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것은 그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름에는 살 아 있어도 그럼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 애,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 억은 아름답다.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
60년 2월 16일(음력):------기형도, 양력으로는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에서 출생. 3남 4녀 중 막내.그의 주민등록번호는 600216으로 시작된다. 〓아버지 기우민 씨의 고향은 연평도 에서 건너다보이는 황해도 벽성군 가우면 국봉리였는데(어머니 장옥순 씨의 고향은 옹진군)6.25를 만나 당시 황해도 피난민의 주 이동로인 연평도로 건너왔다. 아버지가 인천을 거쳐 뭍으로 가지 않은 것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던 면사무소에서 근무해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피난민이섬을 떠난 것과는 달리 이곳에 정착했다. 이에 따라 형제 7남매 중아래로 4남매의 고향은 연평이 되었다.(기애도)
64년 8월 (음력):------양력으로는 그해 9월, 일가족이 연평을 떠 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재 광명시 소하동 701-6)로 이사 .
〓이사 오기 전 아버지 우민 씨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는데 영종도 간척 사업에 몰두했다가 정부보조금 단절과 여러 가지 압력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을 포기, 시흥으로 왔다가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불렀다.
장성한 3남매는 출가하고 어린 4남매는 3년쯤을 지금 마을회관이 된 곳에서 살았다.(기애도)
67년 3월:------시흥국민학교에 입학
〓안양천 뚝방을 걸어 시흥대교를 지나 지금의 시흥 본동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길은 2킬로미터 정도였는데 당시 시흥과 소하리 일대의 주민들 중 많은 사람이 기아자동차와 대한전선을 다녀 길에는 회색 또는 카키색 작업복이 넘쳤다. 그 길은 안개가 자주 끼었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와"(안개)등교를 했다.영등포로 중학을 다니는 누이를 제외한 3남매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성씨가 흔한 게 아니어서라도 유명한 존재들이었다.공부 외에 그림과 음악에도 재주를 보여 임명장과 상장으로 라면박스를 채울 만큼 많은 상을 받았다. 아무와도 싸움을 못하고 늘 책받침에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조르는 여자 아이들이 있어서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이때마다 나선 것이 성격이 활달한 두 살 위인 누이 순도였다.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누구와도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다.(기애도)
〓방학이면 아이들은 일꾼과 똑같이 일을 시킬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는 여름 저녁 남폿불 밑에서 열무단을 묶으며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는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유교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역사를 중심으로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기애도)
68년 봄:-----아버지가 평생 처음 직접 지은 집에서 가족이 살게된다.
〓건축비 25만 원으로 지은 이 집은 방 세 개에 마루를 들였고 부엌이 둘,큼직한 다락 하나가 있었다.화초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은행나무가 세 그루, 미루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답싸리 울타리에 철따라 장미,나무딸기,해당화,해바라기,겹채송화가 마당 가득 피곤 했다. 녹색 기와를 얹어 당시로서는 최고로 지었다는 이집을 두고 4남매는 L.M.몽고메리가 짓고 신지식이 옮긴 동화[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집 '그린 게이블즈'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부엌 위 다락방은 아버지와 손위 형들이 모아들인 책으로 가득했는데 기형도는 다섯 살에 한글을 깨쳐 누이들과 함께 마음에 맞는 책을 들고 호박씨나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지냈다. 남매들은 쪽수가 비슷한 책을 찾아 누가 빨리 읽는지,바꾸어서 내용 알아맞추기 따위의 놀이로 '흔해빠진 독서'를 했는데 꼼꼼한 책 간수,밑줄 긋기,책 모아들이기 등의 버릇은 이때부터 싹텄다.이 집은 그의 여러 시에 나타나듯 외풍이 심한 [바람의 집]이자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으로 [바람은 그대 쪽으로] 부는 들판이 보였으며 종내는 [빈집]-----이사를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씀-----이 된다.(기애도)
69년 정초(음력):----아버지 쓰러지다
〓정초 세배 온 동네 사람들과 모처럼 들어온 양주를 컵으로 마시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눕게 된다. 가장이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위험한 家系. 1969])쓰러지는 바람에 얼마 없던 전답은 아버지 약값으로 남의 손에 넘어간다. 어머니 장옥순 씨가 생계 일선에 나서고 누이들은 신문 배달 등으로 가계를 도왔는데 아직 어린 기형도는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는"([위험한 家系.1969]) 내성적인 생활을 해나간다. 아버지는 그 후 타계할 때(91. 8. 19.)까지 23년을 그의 여러 시에 나타나듯 [늙은 사람], [노인들],[너무 큰 등받이 의자], [병]의 모습으로 살았다. (기애도)
73년 3월:---신림중학교 입학. 3년 내내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 75년 5월 16일: 〓 바로 위 누이인 순도가 죽음. 어린 날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던 누이의 죽음에 의한 충격으로 교회를 나가지 않다. 가 해자가 같은 교인이었던 까닭이다. 형제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무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방황으로 각각 그 슬픔을 삭였다.(기애도)
76년 2월: --- 신림중학교 졸업(1회). 졸업생 대표.
76년 3월: --- 중앙고등학교 입학.
〓 안양에서 삼청동, 중앙고등학교 후문 근처까지 가는 104번 버스를 타고 통학. 삼청동 종점은 인근의 공원을 찾아온 연인들과 낡은 적산가옥을 포함한 고옥들이 많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20여 분쯤 걸렸는데 지루하고 어두운 길을 노래하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문학 서클에는 들지 않았으나 글에 재주가 있어 교내 백일장 등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정대호)
77년: 〓 교내 중창단인 '목동' 2기의 바리톤으로 활동 시작. '목동' 2기의 바리톤 자리가 비었을 때 기형도가 물망에 올랐다. 그는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내 목소리는 정통보다는 뽕 짝에 가깝다"고 사양하는 듯했으나 일단 입회한 뒤로는 교회, 문학의 밤, 축제, 결혼식 등에 누구보다 바쁘게 돌아다녔다. 베이스 김용기, 멜로디 정대호, 테너 이상현 등이 한 동아리였는데 레퍼토리는 영화 주제가 [에덴의 동쪽], 슈만이 헤세의 시에 곡을 붙인 [2인의 척탄 병], [애니 로리], [카튼 필즈], 찬송가[신자되기 원합니다] 등등. (이상형)
〓 기형도는 정규 레퍼토리 외에도 송창식, 조용필의 흉내를 잘냈 다.(정대호)
〓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기타로 노래와 작곡도 했는데 조카를 위한 자장가를 녹음해놓을 정도였다. 그의 별명은 '기타 삼촌'이었다. 집에 온 누이들, 매형과 함께 2부, 3부로 목청껏 노래하는 것은 우리 집엔 흔한 일이었다.(기애도)
〓 국사 성적으로 고민하는 나와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집에 갈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그는 국사의 전부를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모임에서도 항상 대화를 주도했다. 한번은 다른 중창팀에서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목동'에서 쓴다고 항의, 분위기가 험악하였을 때 형도가 나서서 차분히 설득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다. 논리에 강하고 토론에 적극적이었다.(이상현)
〓 신대철의 시 [처형 3]을 가사로 작곡을 한 적이 있고, 군대가기 정의 이별 분위기를 표현한 자작곡 등을 남길 정도로 노래에 심취했다. 그 이별가는 군대 가는 선후배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자주 불렀다.(원재길)
79년 2월: --- 중앙고등학교 졸업.
79년 3월: ---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 교내 문학 모임인 연세문학회 입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시합평회에 [연습] 등을 내보이다. 79학번 동기로는 같은 정법계열의 권 진희, 문과대학의 원재길, 배효룡, 이영준, 태경호, 신과대학의 변병 탁 등이 있었다. 1년 선배로는 국문과의 오봉희, 조성록, 유희문, 영 문과의 이성겸이 있었다. 2년 선배로는 철학과의 이계환, 영문과의 성원근이 자주 드나들었다. 3년 선배로는 경제학과의 이근우, 그 위 선배로는 정창헌(국문과)이 있었다. 자신의 시를 두고 하는 이야기에 민감했고 수줍음이 많았다. 기억력이 비상해 한번 만난 사람이면 첫 만남의 옷 빛깔을 기억해내는 버릇이 있었다.(권진희)
〓 그는 가디건이라고 부르는 앞단추가 내리달린 실로 짠 웃옷을 입고 다녔다. [...] 적당하게 마른 체구였다. 짙은 눈썹과 얇은 쌍꺼풀, 기다라면서 눈동자를 찌를 것처럼 안으로 둥글게 말려나오는 속눈썹, 자주 면도를 해야 하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어서 [...] 눈빛은 맑고 티가 없이 깨끗했으며, 때때로 쓸쓸해 보였다.(원재길)
〓 문학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합평회를 가졌다. 소설, 또는 시 두세 편을 낭독하고 비평하는 형식이었는데 시나 소설을 쓴 사람은 '비평의 시간' 동안 변명이나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침묵의 의무'에 대한 대가는 그 비평이 끝난 다음, '작가의 변'으로 벌충되었다. 당연히 비평은 엄혹하고 긴장되었으며 당사자는 소년들이 속없이 던진 돌에 맞는 개구리처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기형도는 이런 방식에 꽤 쉽게 적응했고 토론에도 강했다.(원재길)
〓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성적이 뛰어나 장학금을 받았다. 모임과 돌아가며 친구 집에서 자는 데는 이골이 난 벗들 덕분에 외박이 잦았다. 막상 야트막한 산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밭 위의, 돼지와 외풍 많은 그의 집에서 함께 자는 일은 드물어서 1년에 그의 방은 네사람 이상이 자려면 서로 발을 겹쳐야 했는데 다리가 긴 사람들이 구박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는 참, 숭늉을 대접에 담아 많이도 주셨다.
권진희와 나는 바둑을 두고 기형도는 관전을 하다가 심심하면 책을 읽거나 기타를 쳤다. 누구의 집에서든가, 밤이 이슥해서 우리는 시 대신 서로를 두고 합평회를 했는데 그게 상당히 아파서 한동안은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 적이 있었다.(성석제)
〓6월, 당시 교련 과목 과정에 따라 문무대에 입소,군사훈련을 받 다. 휴식 식간에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쉬겠다"는 조교의 주문에 따라 다른 사람을 쉬게 하기 위하여 양희은의 작은연못 같은 노래는 4절까지, 수십곡을 불렀다.(권진희)
〓훈련 후 문학회 회원과 대천으로 여행. 선배인 조성룡이 "친구가 대천 앞바다인 원산도에서 해변 상점을 열고 있으니 가면 모두 공짜"라고 해서 사시는 했지만 친구를 만나지 못해 기아선상에 허덕였다. 어느 밤에 술에 취한 누가 바다에 뛰어들겠다,돌아오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해변을 달렸고 기형도는 그 사람의 사지 가운데 하나를 붙드는 일을 담당했다.(원재길)
〓지하철 2호선이 생기기 전 기형도는 안양에서 중앙청을 오가는 103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버스는 나도 가끔 탔는데 어디선가 낯이 익은 녀석이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고 손잡이가 집게라도 되는 양빨래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문 무대에서 노래부르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같이 버스에서 내린 뒤 말을 붙였다. 기형도는 자신이 문학회에 있다면서 함께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거기 입회했는데 기형도는 그 사실에 대해 "누구를 문학회, 또는 문학에 끌어들인 착한 목자는 나다"라면서 두고두고 울궈먹었다. 또 기형도는 내게 몇 가지 쉬운 노래를 무슨 비파트를, 내게는 멜로디나 테너 파트를 맡겼다. 그것이 2인의 척탄병이며 에덴의 동산이나 트윈 폴리오의 곡들이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장을 거쳐 학긁광문을 통과하고 백양로를 걸어 언덕에 있는 종합관에 이르기까지 그 노래들을 불러댔다. 또는 역순으로 내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친놈인 양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 노래들은 물론 술자리에서도 제창되었다. 이런 순례는 그의 귀가길, 버스 정류장에서 들길을 지나 집까지 걷는 길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가 잘 부르던 노래의 원주인은 송창식과 조용필. 가끔 조영남도 섞었고 그때그때 유행하는 노래도 불렀다. 남들이 따라 할까봐 일부러 음정을 높게 잡았다가 공연히 핏대를 세우는 고생을 자주 했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허리를 약간 굽힌 채, 눈을 감은 그는 시키면 주저없이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했다.(성석제) 〓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인 조병준을 찾아 멀지 않은 서강대 캠퍼스를 자주 갔다. 조병준도 문학회 모임에 가끔 참석해서 준회원으로 간주되었다. 둘은 어쩌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토라진 계집애들처럼 이별을 한다고 종알거렸는데 그 덕분에 가끔 있곤 하던 이별식 석상에서 냉면은 잘 얻어먹었다. [성자를 찾아서]라는 시로 그때 우리를 감동시킨 조병준은 자신의 방에 수백 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예술의 귀족'이었다. 그의 방에서 엉덩이를 맞대고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을 들으며 시시한 연애담이나 시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 적이 많았다. 동숭동 언덕바지에 있던 그 집에서 나오는 아침이면 가까운 학림 다방에서 R.스트라우스를 듣고 나서 205번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곤 했다. 기형도가 이름을 생략하고 '조'라고 부르던, 또는 성과 이름의 첫자를 생략하고 '준'이라고 부르던 조병준은 지금 인도에 가 있다. 그는 기형도의 생전에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였고 따라서 글자로 만들 수 있는 기형도의 생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성석제)
10월 26일:--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죽음. 계엄군 진주.
〓 학교 앞에 '캠퍼스 다방'이라는 60년대식 다방이 있었다. 시간 이 날 때마다 거기 가서 뭘 끄적거리거나 거북선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를 뜯어먹었다. "넌 냉소주의자야. 그뿐이야." "넌 냉소와 냉소주의와 냉소주의자를 혼동하고 있어. 넌 바보든가 바보가 되고 싶어하든가 바보 같은 놈이야." 늘 뜨개질을 하던 중년 여인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은 화가 르느와르나 르느와르의 그림을 방불케 하는 데가 있었다. 형도는 가끔 그 여인을 노트에 크로키로 그렸다. 한 번인가 그 그림을 억지로 그 여인에게 보여주게 했다. 여인은 아름답다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느냐고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더욱 자주 출입할 수 있었고 나중 후배 중에서 그 다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용사도 생겨났다. 저녁이 되면 시장 안의 술집으로 가곤 했다. 기형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보니 알콜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술꾼 정도의 주정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재간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다.(성석제)
12월:--교내 신문인 {연세춘춘}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문학 상'에 소설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 교지 {연세}지에서 제정, 시상하는 백양문학상 시 부문에 [가을에]로 가작 입선.
30년 3월:--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 '80년의 봄'이 시 작됨.
〓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 당시 노래극으로 공연 된 [공장의 불빛]에 대해 호평. 교내 시위중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한 적이 있었는데 한쪽 귀는 권진희가, 한쪽 귀는 내가 들었다.
미적거리는 기형도를 끌어온 것이 누구인지, 나머지 한 귀를 든 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성석제)
80년 5월:--15일을 전후하여 시내 시위에 가담. 휴교령 내림. 제주 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 선포. 광주 사태.
〓 웬일인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집으로 형사가 찾아와 서적 등을 수색했다고 말했다. 그가 학회일을 보았는지, 그래서 그런일이 수색했다고 말했다. 그가 학회일을 보았는지,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성석제)
80년 9월:--개교.
〓 중이염으로 통원 치료.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게 됨. 이때의 경 험을 토대로 소설 [미로]를 씀.(기애도)
81년 3월:-- 병역 관계로 휴학.
〓 대구, 부산 등지로 여행. 나와 성석제가 동행했는데 명목은 입 대하기 전 화랑처럼 몸과 마음을 씻고 단련하기 위함. 대구의 다방을 순례하고 분산 송정리로. 그때 기형도를 마중나온 아가씨가 있었다.
그 여인은 부산까지 기차여행을 같이 했다. 거북한 중에 기형도는 그녀와의 만남을 "헤어지기 위한 첫 만남"이라고 했다. 마침 바닷가에 폭풍주의보가 내려 수영은 할 수 없었다. 슬리퍼를 신고 나선 사람들이 발을 젖지 않으려고 파도가 넘어드는 방파제 위를 펄쩍펄쩍 뛰던 기억.(권진희)
〓 부산은 형도가 가장 자주 갔던 여행지였다. 출가한 큰누이가 부 산에 살고 있어 고등학교 때도 자주 갔다.(기애도)
7월:-- 방위 소집되어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 안양의 문학 동인 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초기작 의 대부분을 이때에 쓰고 습작을 정리하다.
82년 6월:-- 전역.
83년 3월:-- 3학년 1학기로 복학.
〓 전자오락, 속칭 '뿅뿅'인 갤러그 게임에 빠졌다. 학교에서 우리 집(영등포구 신길동)까지 걸어오면서 문이 열린 전자오락실은 대부분 들어가보았다.(이성겸)
83년 12월:--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윤동주 문학상'에 시 [식목제]로 당선. 신춘문예에 관심을 돌려 최종심에 오 르내리다.
84년 10월:-- {중앙일보} 입사.
85년 1월:--{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당선.
〓 12월 어느 저녁 나와 이성겸, 그리고 다른 누군가 광화문 어딘 가의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때 이성겸 씨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성겸은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자는 기형도였다. 예전에 같이 당구를 한 번 친 적이 있다는 것을 유일한 단서로 인구 8백만의 도시에 단 하나뿐인 이성겸의 소재를 찾아낸 기형도는 의기소침을 가장하여 나타났다. 그는 큐를 집어들더니 난생 최초로 그의 사람찾기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나를 무시한 채 초크를 칠했다. 그리고 자기 순서도 아닌데 한 큐를 치고 말했다. "나 신춘문예에 됐어." 이 말을 이성겸이 최초로 알아듣고 신중히 해석한 뒤 일동에게 이렇게 번역했다. "축하한다." 내가 알아듣고 손을 내밀었다. "잘됐다." 지금 후회한다. "잘했다."로 해야 했을 것을.(성석제)
2월: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서는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
〓 편집부 수습을 할 때 그는 교정에 대해 배워온 것을 내게 가르치려 했다. 그가 낸 문제는 '뇌졸증'인가 '뇌졸중'인가, 또 '내출혈' 인가 '뇌출혈'인가였다.(성석제)
-문예지에 [專門家],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늙은 사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白夜], [밤눈], [오래된 書籍], [어느 푸른 저녁]을 발표.
86년:--문화부로 자리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 발표([위험한 家系.1969], [鳥致院], [집시의 시집], [바람은 그대 쪽으로], [포도밭 묘지.1,2], [숲으로 된 성벽] 등). 문학과 출판을 담당,관련 인사와 활발한 교유
87년:--여름에 짧은 유럽 여행. [나리 나리 개나리], [植木祭],
[오후 4시의 희망, [여행자], [장미빛 인생]발표.
〓기형도는 정치부에서 중앙청 출입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작시는 거의 쓰지 못하고 등단 이전에 써놓았던 작품에 손질을 해서 발표했다. 반응은 본인이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 않았다. 그는 갓 데뷔한 무명시인 중이 하나였고, 정치부의 숨가쁜 일상에서 시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좋은 신문지가보다는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문화부로 옮기면서 그 희망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었다.[오후 4시의 희망]이 시인으로서 재출발하는 시점에 나온 작품이다.{중앙일보} 편집국은 외부로 향한 벽면을 거대한 유리로 만들어놓았고, 그 위에 블라인드가 쳐져있었다. 오후 4시면 이미 초판 신문이 나온 상태라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다. 문화부에서 기형도의 자리는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는 블라인드를 등뒤로 한 채 얼굴을 책상에 처박고 앉아 [오후 4시의 희망]을 완성했다. 그해 6월부터 그의 후배로, 문화부에서 막내기자로 일하게 된 나는 그의 왼쪽 자리에 앉았다. 기형도는 시가 완성되면 한 장씩 복사해서 나에게 읽히는 일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내가 문화부에서 말석을 차지하자 그는 방송담당을 나에게 물려주고, 출판담당을 맡게 됐다.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에는 문인을 겸직한 기자들이 많았다. 정규웅 부장은 문학평론가였고, 문학담당인 양헌석 기자는 소설가였으니, 시인 기형도까지 합쳐서 문화부라기보다는 '문학부'였다. 정부장은 양헌석 씨로 하여금 소설을 전담케 하고, 기형도는 출판과 함께 시 분야도 맡겼다. 아마 소설과 시를 나누어서 담당기자를 배치한 경우는 한국의 신문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리라. 정부장은 기형도와 나를 데리고 인사동의 카페 '이화'에서 자주 맥주를 사주었다. 정부장은 기형도의 잔의 술을 따라주면서 "기형도는 징징 짜는 버릇만 없으면, 참 좋은 놈인데"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당시 기형도의 입에서는 "아! 절망, 절망,"이라는 탄식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절망은 밥을 먹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나, 아침인사를 나눌 때나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나왔으므로, 불행하게도 나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허공에 흩뿌려지는 그의 절망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졸은 시를 읽을 때나, 기막힌 미인을 거리에서 발견하면 "죽여준다.죽여줘"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진지하지 않게 그의 즉각적인 감정을 나타낼 때면 반복법을 구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우울해하면 "해현 씨, 절망?" 하면서 도마뱀이 꼬리를 버리듯 문장의 어미를 빼먹는 식으로 통통 튀면서 나를 달래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사에서 2백자 원고지에 세로로 기사를 썼는데, 그는 기사를 작성할 때 전혀 파지를 내지 않았다. 그가 일필휘지로 기사를 썼다는 것이 아니라, 한줄을 쓰다가 잘못되면, 다른 원고지에 깨끗하게 쓴 뒤 칼로 그 줄을 도려내서 먼저 쓰던 원고지에 풀로 붙였다. 자기가 쓴 기사는 물론이고, 일간지와 스포츠신문, 잡지 등에 실린 문학출판 관련기사들을 일일이 스크랩북에 오려 붙일 정도로, 그는 칼과 풀만 있으면 너무나 즐거워했다.(박해현)
88년:-여름 대구, 전남 등지로 홀로 여행({짧은 여행의 기록}), 문 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기다. [진눈깨비],[죽은구름],[추억에 대한 경 멸],[흔해빠진 독서],[노인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물 속의 사 막],[바람의 집-겨울 版書·1],[삼촌의 죽음-겨울 版書·4], [너무 큰 등받이 의자-겨울 版書·7], [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 비 온 다],[기억할 만한 지나침],발표.
〓이때는 정말 기형도에게 시의 폭죽이 터지던 시대였다. 김현은 이미 그때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 기형도가 바로 월평을 담당하는 기자인데, 자신의 시가 크게 다뤄지자 당황했다. 천하의 비평가 김현이 그의 시를 호평한 것이야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결벽증이 심했던 그인지라, 그 원고를 신문에 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래서 그는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선 고맙습니다, 라고 한 뒤 '그러나'로 시작되는 말을 어렵게 꺼내야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김현은 "내가 기형을 잘 봐주려고 글을 썼다고 믿을 사람은 문단에 아무도 없을 거요. 정 싣기가 어렵다면 원고를 돌려주세요" 라고 말했다. 이미 지면은 그 자리가 비워진 채 원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그는 결국 정규웅 부장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정부장은 김현의 양해를 얻어 원고에서 기형도 부분을 맨 뒤로 돌리고 양을 줄이는 선에서 월평을 신문에 내보냈다. 소설가 강석경이 {가까운 골짜기}를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기형도는 당담기자로서가 아니라, 문단의 후배로서 강석경의 원고들을 꼼꼼하게 읽고, 적절한 독후감을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항상 신문기사에 일반 원칙에 따라 무미건조한 문체로 문학기사를 쓰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문학기행}을 통한 섬세한 문체에 세계를 보여준 김훈을 부러워했고, 존경했다. [겨울 版書] 연작은 그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던 문학청년 시절에 써놓았던 것을 다듬는 작품들이다. 그때 그는 그 시들을 보여주면서 병든 아버지와, 비닐하우스 깔려 있는 들판 한가운데의 집에 대해서,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 가끔 얘기를 했다. 그는 일요일이면 집에서 돼지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때 돼지는 어떻게 잡아야 하고, 주사는 어느 순간에 놓아야 하는가 같은 양돈기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 어린 내 딸로부터 '형도 아찌'로 불렸지만, 나는 생전에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다. 내가 어쩌다 데리고 가달라고 하면, "다음에, 다음에"라고만 말했다. 나는 그를 땅에 묻은 장례식이 끝난 뒤 안양에 있는, 그가 없는, 그의 집을 가봤다.(박해현)
〓그는 자신이 쓴 시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는데 길을 걷거나 차를 마실 때 시를 하나씩 외워 보이면서 묻곤 했다. 듣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고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시가 아주 익숙한 것으로, 심지어는 듣는 사람이 자신이 쓴 구절로 착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시에 대한 완벽한 비평가, 교정자,낭독자, 창조자였다.(황경신)
〓이때 기형도는 시인 하재봉의 주도로 매주 인사동의 까페를 전전하면서 열리던 '시운동 청문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흥미 진진했던 국회의 5공 청문회가 남긴 파장으로 몇 사람이 모였다하면 청문회라고 명명하던 때였다. '시운동 청문회'는 신작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을 초대해서 '시인학교'나 '淵' '평화 만들기'등의 까페에 앉아 시인이나 시인을 좋아하는 청춘들이 청문회를 벌이던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초대 시인의 시집에 대한 독후감을 밝히고, 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면서, 술잔을 홀짝거리던 일종의 시인 야유회(夜遊會)였다. 참석자 중에 한 사람은 그 청문회의 발언 내용을 기록했고, 그것은 하재봉이 매달 만들어냈던 '시운동' 팜플렛에 실렸다.(박해현)
89년:-[聖誕木-겨울 版書·3],[그집 앞],[빈집],[질투는 나의 힘], [가수는 입을 다무네],[대학 시절],[나쁘게 말하다] 발표, 가을에 시 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