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들은 매일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있는 승지-승정원일기-들과 사관-실록-들, 그리고 성균관의 유생들로 인하여 학자생활을 강요받았다. 가끔 대권이라하여 왕의 권한으로 맘대로 한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평생에 한번 쓸까말까한 권한이었다.-그것을 계속하면 폭군이라 낙인이 찍히니까.-그래서 왕이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의 유생들이고 대신들이 대전앞에 꿇어앉아 밤새도록 몇일이고 아니되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면 왕도 어쩔수 없었다.
조선을 개국한 신흥무인세력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정도전, 그리고 이방원. 고려는 개국초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토의 통일만을 가져왔을뿐 완전한 왕권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왕권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였다. 하지만 왕이라고 무조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정도전이 이성계의 어린아들을 왕으로 내세우려 한 것도 자신이 어린왕을 보좌하면서,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개국초 왕권의 기초를 다진후 후대에 그것을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정도전을 죽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모든 정치방향을 따랐다. 그리고 급기야는 왕세자 제(양녕)을 폐위하기까지 이른다. 이방원이 봤을 때 양녕은 자기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그래서는 정치보다는 서로 죽이기 밖에 더 하겠냐는 판단에, 책에만 빠져있는 셋째아들 도(충녕, 세종)에게 선위를 하고 그 뒤에 상왕으로 물러앉아 보좌를 한것이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세종과 그 뒤를 보좌한 황희 맹사성 등의 명신들이 문치를 잘 이루었지만 아예 무가 사라지는 듯 했다. 세종 초년 위화도 정벌을 끝으로 작은 전투하나 없었다는 것이 그 결과이다. 그리고 세종과 문종은 소갈로 몸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문종은 내관 정치에 빠졌고 왕권은 더욱 약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어린 홍위가 잇자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왕족들의 세력이 비대할 만치 커졌다. 초반에는 수양, 안평, 김종서의 삼대축으로 약하나마 왕권이 유지되었지만,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그 축을 깨어버렸다. 그럼으로 해서 김종서가 무너지고 안평은 자기혼자만의 힘으로는 수양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마침내 수양이 왕위를 찬탈하고 안평과 금성 사육신등의 반대파를 죽이고 왕권강화를 하고 나섰다. 그의 뒤에는 명황실이 받침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맏며느리 수빈 한씨는 고모가 명황제의 후궁이었으며, 수양이 명나라 사신을 자청한것도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강화된 왕권은 다시 성종대에 이르러 큰 뒷받침이 되었고 그 결과 경국대전이라는 그 결과물을 낳게되는 배경이 되었다. 성종은 한명회와 인수대비의 정치적 결탁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군이었다. 하지만 닥하나의 실수가 있으니 그게 바로 폐비였다. 그 일로 해서 연산이 우울증 등의 정신병에 걸리게 되고 심지어는 박원종-월산대군부부인의 남동생-, 성희안 등의 중종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중종의 반정공신등에게 눌리어 왕권을 제대로 못누렸다. 조광조란 역수를 펼쳤으나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싫증을 내는 바람에 실패를 하고 말년에는 외척들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어야했다. 대윤, 소윤의 싸움에서 소윤이 승리를 거두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 왕권은 한층더 약해져만 갔다. 그리고 문효세자가 죽고 직계혈통이 단절되자, 방계승통이란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가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선조도 자신이 방계라는 컴플렉스와 유약한 성격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도 하지않았으며 전후 공신책봉문제에서도 공이많은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충신들의 공을 폄하하고 원균으로 대표되는 간신들의 공을 높이 올림으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말년에 태어난 어린 영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실리외교등으로 무너진 국가의 모든것을 되살리려 노력했지만 어이없는 인조반정으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그것은 국가 최대의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지고 조선은 이치만 따지는 문치주의로 빠지고 말았다. 효종, 현종년간의 복상문제도 왕권을 위협하는 커다란 논제였다. 그리고 숙종 즉위 후, 남인과 서인의 세력다툼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의 대결로 나타나고 경종 즉위 후, 연잉군(영조)의 세제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경종 독살설 등으로 왕과 왕위 계승자간의 혈투(?)가 시작 된다. 그 결과 최악의 사태가 친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영조는 말년의 자신의 정치스타일을 반성하고 환국등의 초급수를 자제하고 탕평정치를 내세우고 정조 선황제를 학문정치스타일로 키운다. 그리고 정조는 그것을 잘 받들어 초기에는 홍국영을 중심으로 왕권을 키운 후 홍국영을 내침으로 시작하여 노론,소론, 시파, 벽파들의 세력을 누르고 규장각과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만듦으로 왕권강화에 힘썼다. 그리고 융릉 이장과 화성천도-천도라기보다는 제2의 수도로 화성을 건축했다는게 타당하다.-를 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탕평파, 북학파를 중심으로 신분제 폐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함.- 하지만 오회연교-정조독살설(승정원일기)- 이후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그 모든것은 정순왕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또 한가지는 정조가 상왕으로 물러앉아 순조에게 장조의황제를 ??효대왕이라고 추존사업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채 죽고 말았다. 순조숙황제대에는 외척정치가 시작되므로 해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전인 문조익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 대까지 왕은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고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