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들다말고-
에디슨과 같은 과학자들의 발명품 덕분에 인류가 문화생활을 앞당기고 지금처럼 생활의 간편과 즐거움을 찾고 즐길 수 있다. 이런한 발명품들의 귀중함과 함께 술도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라 믿는다. 폭음, 무절제한 음주가 아닌 한, 술이 애주가들에게 얼마나 기쁨과 위안 그리고 행복과 즐거움을 주고 있는가를 보면 그렇다. 에디슨이 발명한 은은한 전기조명 아래 축음기에서 나오는 귀에 익은 팝송을 들으며 마시는 술 한 잔. 그 술은 사람들에게 심신의 편안과 위안을 주는 보약이다. 그래서 술을 잘 마시면 약이고 잘 못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도 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아는 애주가이다. 술을 좋아하지만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여러 상황과 사연으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게 하는 사회이므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지금도 누군가는 어디서 혼자 또는 누구와 술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술 마시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모습, 자세, 사용 언어, 태도 등이 천태만상인데, 그것은 처음 누구에게서 술을 배웠는가에 따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술은 처음 잘 배워야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술을 엄격히 배웠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술자리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항상 할아버지의 음주교육내용을 상기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몇 잔을 마실 자리인가?'를 생각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추수려지고 조심스레 술을 대하게 되어 술 맛은 없지만 지금까지 그 많았던 술 자리에서 술로 인한 실수를 예방해 준 지랫대가 되었다.
내가 중 3학년일 때, 할아버지께서 가을추수 일을 도와주라는 말씀이 계서 종일 논에 쌓아 둔 쌀 볏단을 지고 집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던 중 할아버지는 나를 할아버지 밥상에서 밥을 먹도록 하신 후, 대뜸 "오늘 수고했으니 막걸리 한 잔 먹어 볼래" 하시기에 목도 마른 참에 대접 잔의 술을 단숨에 마셨다. 이 모습에 놀란 할아버지는 젓가락을 꺼꾸로 들고 내 머리를 '툭'치신 후 상에 놓인 간장을 젓가락으로 찍어 상 위에다 천천히 주(酒)자를 쓰셨다. 그러면서 "이 놈아. 이 한자를 아느냐. 삼 수변에 닭 유(酉)자가 합쳐서 술 주(酒)자가 된 것이니라. 닭이 물을 마실 적엔 세 번을, 물이 목에 잘 넘어가도록 천천히 마셔야 한다는 뜻이니, 술도 천천히 그리고 세 잔 이상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나의 술에 대한 철학이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신 한자에 담긴 의미 풀이는 내가 일찍 한자공부를 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뜻 글자인 한자가 갖는 미묘한 매력과 한자의 과학성에 빠져 들었다고나 할까? 그 덕분에 한자공부를 제법 했고 아이로니하게도 내가 가장 먼저 익힌 한자가 하늘 '天' 땅 '地'가 아니라 술 '酒'자 임을 고백한다.
사실 술을 처음 마셔본 것은 할아버지 앞에서가 아니었다. 옛날 시골에서는 어른들이 자주 애들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는데 우리 집에서는 내가 이 심부름 담당이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대부분 집에서 막걸리(밀주)를 담아 먹었지만 농번기에는 손이 모자라 도가(양조장) 술을 많이 이용했다. 술을 사 오는 길에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쪽쪽 빨아 먹는 술맛이 어찌 그리 좋았던지. 맛이 좋아 좀 많이 마셔버리면 표가 나므로 물을 부어 양을 보충시켰다. 그럴 때 어른들은 알고도 모른척 하셨는지 "오늘 막걸리 맛이 좀 싱겁네"라 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게 어릴 적 조금씩 마신 막걸리들이 내 몸에 내성을 구축했다고 선의로 자평한다. 이 내성이 그 동안 쓸모없는데 소모되지 않고 잘 축적되어 있다가 결정적으로 내 일생에서 운명과 진로를 새롭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과 건강, 술과 절제, 술과 정서, 술과 인생은 같은 바구니에 담겨 있는 동반자이자 영원체라는 마음이 오늘 따라 간절하다.
지금 밖에는 늦가을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바람도 있는지 비가 유리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옛날 시골같으면 초갓집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낙수소리에 귀기울어야 할 풍경이다. 갑자기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 냉장고 문을 열고 한 잔 따라 쭈~욱 시원하게 마신다. 또 한 잔 더 마실요랑으로 막걸리를 잔에 부어 놓고 창문가로 가 선다. 어둠이 너무 짛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면 그것에 오래 연연할 이유가 없다. 술 한 잔을 마셨는데도 오늘따라 기분좋게 술기운이 몸 전체에 돈다. 평소 좋아하는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과 박일남의 '덕수궁 돌담길'을 콧노래로 불러 본다. 坐無君子以琴酒爲友란 옛글을 생각하면서 한 잔 더 하려고 따라 놓은 술잔을 들다 말고 자리에 내려 놓는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잠자리에 들어 갈 시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