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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송년답사
일시: 2016. 11. 12(토)
장소: 단촌면
답사의 목적과 의의
1)의성의병기념관 개관을 앞두고 424년 전 임진왜란시 격전지인 건마산성을 다시 답사하고 김치중의사를 비롯하여 가신님들의 순국정신을 기린다.
2)비댓골 공룡발자국의 상태를 확인한다.
3)후평리 사익재 갸묘 감실을 답사하고,
4)가마터로 추정되는 장림리를 돌아보고,
5)본회에서 탁본하여 밝혀 길가에 세운 도금동효자비를 둘러본다.
참가자: (사)의성향토사연구회원, 관심 있는 분
준비물: 등산복장 일체, 나침반, 줄자, 휴대용 톱, 낫, 전정가위, 로프 등
(답사 코스와 일정)
일시) 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08:30~17:00
일정) 의성군청(08:30)집결 - 병방리 갈방실회관(09:00)도착- 건마산성 답사 4시간후 하산(13:00) - 중식(사촌2리 대성정) - 중리 병암서당(14:00)- 새다릿골 의열각(14:10) - 비댓골 공룡발자국14:40 - 후평리 사익재 가묘 감실15:00 - 장림리 도요지 확인(15:30 )- 방하리 도금동효자비(16:30) - 군청(17:00)도착 해산
단촌면 개황
연혁
• 고려 태조 7년(925년) 안동지방의 옛 이름 고창군의 영속이던 고순현(단촌지방)이 의성부에 편입
• 1600년 붉은 돌이 많은 곳이라 단촌면(丹村面)으로 명명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단촌면 5개리와 구산면 4개리를 병합
지역특성
위치 및 지형: 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지대이며 중앙선 철도와 대구-안동간 4차선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여 교통이 편리함. 평균 강우량과 기온이 군 평균보다 낮으며 한서의 차가 심해 고추, 마늘, 양파, 사과 등 특용작물 재배 적지임
특이사항: 고추의 집산지이며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의성군의 북쪽 관문으로 새벽 고추시장이 열리고 있음
명칭유래는 붉은 돌이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의성군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74.22㎢이다. 인구 2,083명 9개동으로 구성되며 동쪽으로 점곡면, 서쪽으로 안평면, 남쪽으로 의성읍, 북쪽으로 안동시 일직면, 남선면을 각각 접한다. 본래 의성군 지역으로 단촌면이라 하여, 9개리로 관할하였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11개리와 점곡면의 일부, 안동시 일직면의 일부, 남선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단촌면이라 하였다. 면의 대부분이 높이 100∼35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중앙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미천을 따라 넓고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1 건마산성
여기서는 2010년 4월에 본회에서 1차 답사한 내용을 참고 한다.
병방리를 지나 과수원 사이에 있는 외딴 집을 끼고 돌아 들어가면 나오는 성재로 올라간다. 산성 올라가는 초입에 특이하게 서있는 나무가 있다. 올라가는 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오솔길의 포근함이 서정적이다. 이곳 분들은 건마산성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고 성산 또는 성재라고 부른다.
산성 전체 중에서 가장 원형이 잘 남아있는 곳의 모습. 대부분은 허물어진 상태이거나 석축 형태만 남아 있다. 높이는 약 4~5m 정도.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축성에 쓰인 돌은 의성읍 여시개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축성법을 자세히 보면 가로로 쌓은 것이 아니라 세로로 쌓았다. 아마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한축성법이 아닌가 한다. (견치법)
많은 돌들은 흩어져 내렸다. 경사가 급한 정상 바로 밑 부분(9부 능선 정도)에 쌓은 것이라 그동안의 풍상을 겪으면서 많이 흩어져 버린 것 같다.
다른 봉우리와 연결되는 능선 상에 있는 곳은 높이 약 25m 정도(경사진 면을 그대로 실측한 길이)로 높이 쌓았다.
이는 방어에 용이하게 위한 조처일 것이다.
성산 제일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점곡면 소재지와 멀리 사촌 가로 숲이 보이고 미천이 뱀처럼 기어간다.
저 고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치중 선생을 비롯한 100여 명의 의병들은 저 산하를 내려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회원들은 각 자 흩어져 산성 안에 있었다는 우물터를 찾아보았다. 안내자 이원호 씨는 옛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이 성재에 있던 우물은 명주실 한 뭉치를 다 풀어도 그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우물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다른 곳보다 축기(물기)가 많은 곳은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산정에 우물을 만들기가 어디 그리 쉬웠을까?
성 안에는 모두 5기의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은 앞 축대를 돌로 쌓았는데 아마 성곽 축조에 쓰인 돌을 이용해 쌓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하산 길은 더욱 가뿐하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 길을 따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내려왔다.
2. 병암서당(屛岩書堂)
병암서당(屛岩書堂)은 조선시대 단종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킨 김한동의 증손이자 전적(典籍)을 지낸 김응하(金應夏)가 동생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와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나아가 후손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병암서당 중수기에 의하면 이 서당은 선조 임금 대에 부사직공 파조 휘(諱) 한동부군(漢仝府君)의 증손 참봉공 3형제(휘: 김응하 · 김응상 · 김응주)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나아가 후손을 교육하기 위해 건마산 병암 아래에 창건했다.
1797년(정조 21)에 김응하의 7대손 김정신이 김정조와 더불어 지역 유림의 도움을 받아 교동(橋洞) 근처에 다시 서당을 세웠다. 1931년에는 후손들이 협의하여 현재의 위치인 중사촌(中沙村)으로 옮겨 중수했다. 그리고 2004년 다시 후손들이 관청의 지원을 받아 서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뒤편 산록의 급경사에 위치하기 때문에 2층 누각 형태로 정자가 지어졌으며, 주변 경관의 조망을 위해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둔 것이 특징이다.주위로는 토석담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서당으로 출입하게 했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글 출처 임진왜란의 흔적 | 저자김현우 | cp명한국학술정보
3. 김치중의열각
위치: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228-5
1. 평산 신씨의 순절 : 김치중 의열각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응봉(鷹峰) 김치중(金致中)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김치중은 의성 김씨 시조 김석(金錫)의 19대 손이며 참봉공 김응상(金應商)과 모친 영양 남씨 사이에 태어났다.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던 그는 왜란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비분강개하여 책을 덮고 궐기했다.먼저 김치중의 숙부 김응주가 의병으로 일어나 조국을 구하고 임금에 충성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렸다. 김치중 또한 그해 7월에 격문을 돌리고는 부친에게 자신의 뜻을 아뢰니 부친은 머뭇거리지 말고 나서라고 격려했다. 문중에서 동지들과 힘을 합쳐 의병을 모으니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김치중은 아우 김치화·김치윤, 종제 김치홍·김치강 및 숙부 김응주를 비롯한 의병들과 함께 건마산(乾馬山)에 진을 치고 일본군에 맞섰으며, 100여 명의 일본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1592년 7월 1일 의성읍에 주둔하던 일본군 조총부대가 산성으로 진격해옴에 따라 의병군 진용을 정비하고 혈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고 수비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병들은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 언덕에서 투신하기도 했다. 김치중은 아우 등 친족들과 많은 병사가 차례로 전사하자 호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스스로 절벽에서 투신하여 순국했다.
의사 김치중 순국기적비: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치중의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도 투신 자결했으며, 주인을 잃은 종 서석(徐石)과 복분(福分)도 신씨 부인을 따라 투신했다.의성 김씨 문중의 하인 10여 명도 주인들과 함께 죽었고, 한 하인의 처인 옥금(玉金)은 일본군이 물러간 뒤 남편이 전사했음을 확인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夫死於國 婦死於夫 婢死於主(부사어국 부사어부 비사어주)남편은 나라를 위해 순국하고 아내는 남편 따라 순절하며노비 또한 주인을 받들어 목숨을 버렸다
조정에서는 김씨 일문의 이러한 삼강(三綱) 정신을 추앙하여 1609년(광해군 1)에 정려를 내려 비각을 건립했다. 1767년에는 의성현령 서명민이 나라의 명으로 묘지를 개수하고 정려각의 현판을 중수한 후 제사를 모셨다.1903년(광무 7)에 김필만, 김사건, 김서화 등 후손들이 정려각을 다시 세웠으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본인 관헌들이 정려각을 훼손하고 비석을 땅에 묻었다.해방 후인 1956년 점곡초등학교의 교장과 700여 명의 학생들의 손으로 땅에 묻힌 비석을 찾아냈다. 관련 인사들과 당국의 협찬을 받아 세 번째로 비석을 재건하고 비각을 중수하니 이것이 지금 서 있는 의열각이다. 2개의 비석이 들어 있다.
새로 제작된 비석: 1984년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당초의 위치보다 약간 북쪽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2007년 의성군청에서 정려각 단청, 기적비 건립, 주변정비 등 경역 정화사업을 전개했다
의사 김치중 선생 순국 기적비: (앞부분 생략)왜(倭)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권력을 틀어잡고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병을 동원하여 조선 정벌을 감행하였다. 임진년(1592)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왕경(王京)을 향하여 북상 5월 2일에 한성을 점령하였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황급히 의주로 피난하였다.공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에 비분강개하여 책을 덮고 붓을 들던 손에 창검을 쥐고 구국성전에 궐기하였다. 충절과 의리로 투철히 교양된 공은 구국충절과 보향수족의 성전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계부(季父) 응주공(應周公)을 모시고 아우 치화·치윤, 종제 치홍·치강 등 일족과 주민 일백 여명을 모아 의병을 편성하여 총궐기를 선포하였다. 선비 권희순, 김덕기, 장춘우, 손대효 제공(諸公)도 참여하였다. 천연의 요새 건마산에 집결하여 성벽을 쌓고 식량 등을 비축해두고 결전에 임했다. 단을 만들어 하늘에 고하기를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라 국왕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었으니 하루아침에 섬나라 왜놈이 강산을 피로 물들였는데 어찌 나라에 보답지 않으리오.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되지는 않겠노라’ 하고 맹세하니 모든 의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 공을 따랐다. 7월에 들어 1일에 왜적의 선봉 400여 명이 샛길을 따라 후평(後坪)들에 돌입하였다. 쇠북을 요란히 치고 창칼을 번득이며 마을로 들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분탕을 쳤다.이를 목격한 공은 성중에 군령을 내려 일제히 왜적을 공격하니 왜적은 혼비백산하여 깃발과 병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우리의 의병군은 많은 무기와 갑옷 등을 노획했다. 도망갔던 왜적은 그 후에도 줄기찬 공격을 해왔다. 아군은 사기충천하여 견적필살의 공방전이 처절히 전개되었다. 첫날 전투에서 선봉장 안철수(安鐵壽)가 용감히 싸우다 왜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다음 날 또 다시 적들이 공격해 왔고 3일째 계속 적들을 격파하였다. 빛나는 승리였다. 4일 새벽에 왜적은 부근의 부대에서 원군을 얻어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아군은 중과부적이요, 고립무원이라 사력을 다하여 분전했으나 화살이 다하고 창칼이 모두 부러지자 적수공권 맨주먹과 돌로 대항하여 싸웠다. 치열한 전투는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여 왜적은 1백여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아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성문을 열고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해나갔다. 그때 계곡에 숨어 있던 왜적 복병이 졸지에 일어나 공격하니 아군은 혈전을 벌였지만 힘이 다 되어 쓰러져갔다. 아우 치화·치윤, 계부 응주, 종제 치홍·치강 등이 차례로 장렬히 전사했다.공께서 의병들의 시체를 둘러보고 싸움은 이길 수 없지만 의(義)는 욕되게 할 수 없노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재배한 후 깎아지른 천척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노(奴) 서석(徐石)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씨 부인도 부부의 도를 지켜 남편과 생사를 같이한다 하고 같은 곳에 올라 투신자살하였다. 몸종 복분(福分)과 노 서석도 통곡하며 상전을 따라 같이 죽었다.부사어국(夫死於國)하고 처사어부(妻死於夫)하며 비사어주(婢死於主)로다. 백부 응하(應夏) 공도 ‘마땅히 죽을 자리에 삶을 구함은 애오라지 대의를 그르칠 뿐이노라’ 하고 자결하였으며 치강의 처 권씨 부인도 계곡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날 당내 건강한 종 십여 명과 여종 6명도 주인의 비보에 놀라 통곡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종 노의 처 옥금(玉今)도 물에 투신하였다.향리의 선비 김덕기, 손대효, 박종연, 이장춘, 신광도 그리고 마을 사람 안철수, 조정원, 장춘우 계우(桂友) 형제 그리고 따르는 자 일백 여명도 끝까지 대항하다 옥쇄하였다. 장춘우의 어머니 유씨(柳氏)도 두 아들의 비보를 듣고 목숨을 끊었으니 진실로 애석하도다. 그러나 권희순 공은 성 수성장을 거쳐 장기현감을 역임하였다. 공의 이러한 의병활동과 그 일문의 삼강정신이 조정에 알려져 1609년(광해군 1)에 정려를 내렸으니 비명에 ‘남자의 뜻 굽히지 않고 의로써 마치니 죽음이 아니로다’라고 하였다.(뒷부분 생략)
평산 신씨의 순절: 신구정(申九鼎)의 딸 평산 신씨는 김치중과 혼인했다. 김치중은 건마산(지금의 단촌면 병방리 일대)의 전투에서 있은 전투에서 많은 의병과 의성 김씨 가문 사람들이 일시에 순국하게 되자 쌓여 있는 의병들의 시체를 둘러보고 통곡한 후 하인 서석(徐石)에게 부인 신씨에 보내는 서찰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쪽을 향해 재배한 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순국했다.
의사 김치중 처 신씨지려(정려)와 의열각 이건기(정려 아래 편액)
남편의 서찰을 받은 부인 신씨는 아들에게 주는 글을 써 서석에게 전하고 남편이 죽은 그곳에 올라가 투신했다. 이에 몸종인 복분(福分)과 서석도 통곡하며 상전을 따라 그곳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당시 병암서당을 중심으로 하는 의성 김씨 문중의 하인 10여 명도 주인들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은 1609년(광해군 1) 3월에 순국 순절한 일문 모두를 정려했다.
참고문헌 의성문화원, 『의성유적지』(의성, 1996), 191~193, 559~560쪽.
출처임진왜란의 흔적 | 저자김현우 | cp명한국학술정보
경북 의성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연합뉴스 | 입력 2004.06.10. 11:43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에서 중생대 백악기 조각류와 용각류의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 발자국 100여개가 발견됐다. /문성규/지방/2004.6.10./ (의성=연합뉴스)
의성군 점곡면 송내2리(비대골)의 공룡발자국화석지가 무분별한 조사·발굴·채취로 수난을 겪고 있다.
약 1억 년 전 전기백악기로 추정되는 송내 2리「공룡발자국 화석지」는 의성군이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 지정 신청한 구역으로 의성군수의 경고판이 버젓이 붙어있으나 일부몰지각한 사람들이 구들장으로 사용키 위해 불법체취 하는가하며 지식층들은 조사·연구를 한답시고 마구잡이 훼손시키고 있어 이의 대책이 시급하다.
「점곡 송내2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에는, 산 계곡 1KM 에 약300여개의 공룡 발자국과 트라이아스기에 살았던 날아다니는 파충류 「익룡」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10여개가 일직선으로 1M 간격으로 보행렬을 이루고 있는 등 굉장히 희귀한 것들이다.
또한, 이곳은 1KM나 되는 산 계곡 전체에 육·초식 공룡발자국, 대형과 중형 두 가지 유형으로 혼재 하며 이와 함께「익룡」발자국 과 모래의 퇴적물·호수의 퇴적물이 말라서 갈라지며 책꽂이에 책을 가지런히 꽂아 놓은 듯 하게 생긴, 퇴적층구조가 잘되어 있는 의성의 자연보물이다.
천연기념물 제373호로 지정된 제오리 공룡화석지 보다 광범위하고, 높은 학술적 가치와 고운사와 연계한 관광가치가 높은「점곡 송내2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에 경고문(“경고문.(생략) 관계기관의 허가 없이 발굴·도굴·채취·훼손·반출 등 불법행위를 할 경우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의성군수-)하나로 지켜질 수 있을까?
의성군은 한시바삐 대책을 세워 천연기념물 지정 을 앞둔「점곡 송내2리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불법 조사 등으로부터 보호, 훼손·반출 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감시·감독을 해야할 것이다. 민충실기자
4. 후평리 사익재
후평리 의성김씨종택 사랑채 사익재의 가묘 감실
화재로 인하여 문화재 가치를 상실함. 2016년 의성군 문화유산에 지정됨.
5. 장림리 도요가마 추정지
6. 도금동 효자비
의성군 단촌면이 최근 도수로 공사 중 도금동효자비를 발견해 단촌면 방하리에 이전하고, 효자비에 고유제를 올렸다.도금동효자비의 주인공은 성주 도씨 효자공파의 선친으로 고유제는 효자공파 후손들과 방하리 마을주민, 의성향토사연구회원, 단촌면 직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참석한 효자공파 후손들은 “땅속에 묻힐 뻔한 선친들의 효자비가 다시 복원돼 마음이 훈훈하다”며 “후손들도 하지 못한 일을 이렇게 행정에서 앞장서주니 너무나 고맙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손철규 단촌면장은 “도금동효자비의 효를 본받아 실천하는 면민이 많이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호운 기자 kimhw@idaegu.com
도금동[ 都今同 ]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효자로 본관은 성주(星州)다.
활동 사항: 도금동(都今同)[?~?]은 어느 해 날씨가 무척이나 더운 여름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재워두고 아내와 함께 김을 매러 논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있던 병들고 늙은 아버지가 더운 날씨 탓인지 정신이 혼미하여 아기를 닭으로 잘못 알고 솥에 넣고 삶아버렸다. 먼저 집으로 돌아온 그의 아내는 아이를 찾다 솥에 넣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놀랐다.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져서 되돌릴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침착하게 죽은 아이를 광 속에 감추고 대신 닭을 고아 시아버지에게 드렸다. 이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늙고 병약한 시아버지가 충격에 그만 죽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얼마 후 그가 오자 아내는 지금까지의 일을 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시아버지를 먼저 생각하는 아내의 속 깊은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내는 남편의 그 마음을 알고 맞절로서 응답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기를 잃은 슬픔까지는 지울 수가 없어 서로 부둥켜안고 말없이 흐느꼈다. 그런데 때마침 고을의 원님이 그의 집 앞을 지나다 부부가 맞절을 하고는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모습이 너무도 이상하여 그 연고를 물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알게 된 원님은 모두에게 알리고, 사람들은 그 마을을 도효곡(都孝谷)이라 불렀다.
상훈과 추모: 고을의 원님은 도금동에게 즉각 포상을 하고,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정효각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사부 1리 입구 언덕에 있다.
참고문헌
• 『의성지집록』(의성 문화원, 1994)
• 『의성 군지』(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네이버지식백과]도금동 [都今同](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