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 후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 1649~1736)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파.
흔히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양명학(陽明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경향은 중국의 양명학과 다를 뿐 아니라 단순히 양명학에 그치지 않는다. 정제두의 경우 당시 지배 교학(敎學)이었던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반발로서 양명학을 수용했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외형적으로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하는 형태를 취했다. 즉 왕양명(王陽明)의 심즉리(心卽理)와 치양지(致良知) 설을 따르면서도 이기론(理氣論)이 사상적 기초가 되고 있으며 또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체용(體用)·본말(本末)로서 이해했다. 중국에서는 왕양명이 죽은 뒤 그의 학파가 인간의 정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좌파와 이에 대한 억제를 주장하는 우파로 나누어졌다. 정욕의 적극적 긍정 여부는 주자학과 그에 입각한 중세적 지배체제에 대한 적극적 부정의 여부와 관련된다.
주자학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는 피지배층의 요구를 억제한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명학 우파의 경우는 정욕의 억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지배체제를 긍정하면서 점차 주자학과 절충적인 경향을 띠어갔다. 정제두는 인간 욕망 문제에 있어서 정욕을 이(理)의 영역 안에서 인정한다. 즉 정욕을 적극적으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상의 점들로 보면 정제두가 수용한 양명학은 우파적 경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제두는 중국의 양명학 우파와 달리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당시 신분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양반 소멸론까지 주장했다.
인간 욕망의 통제를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지배체제의 긍정은 아니며 인간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반드시 피지배층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또 이(理)의 내용에 변화가 생겼을 때, 또는 이(理)를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이고도 이성적인 실천의 주체로 생각할 때에는 이(理)를 체(體)나 본(本)으로 보는 입장이 반드시 지배체제의 옹호는 아니다. 조선의 경우 실학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기호 남인(畿湖南人) 계열은 주리학파(主理學派)이다. 정제두의 학문은 중국의 양명학 좌파와 우파 어느 한 쪽에 귀속시킬 수 없는 그 자신의 독자적 학문, 즉 '조선적 양명학'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정제두 이후, 첫째 강화학에는 새로이 우리 역사와 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치밀한 연구경향이 나타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이시원의 〈국조문헌 國朝文獻〉, 이건창의 〈당의통략 黨議通略〉은 오늘날에도 매우 자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서이며 이광사의 〈오음정서 五音正序〉, 유희의 〈언문지 言文志〉 등은 우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오늘날 한국학의 기원을 여기에 둘 수도 있다. 또 이광사는 원교체(圓嶠體 : 원교는 이광사의 호)라는 매우 조선적인 서체(書體)를 창안했다.
이것은 중국적인 것에 심취한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와 대조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둘째로 강화학 내에서는 노장(老莊)사상 및 불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충익은 〈초원담로 椒園談老〉라는 저술을 지었으며 신작에게도 노자(老子)에 대한 연구서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莊子)에 대한 연구는 강화학파에 앞서 같은 소론계인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으며 강화학파는 이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충익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진언집 眞言集〉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강화학파의 불교와 노장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이것을 통해 유교적 한계 또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셋째로 강화학파에서는 19세기초에 이르러 유교 경학(經學)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경향 및 정약용의 학문을 흡수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신작은 〈시차고 詩次故〉·〈역차고 易次故〉·〈서차고 書次故〉라는 저술을 지었다. 이것은 산일(散佚)된 유교 경전 주석을 체계적으로 집일(集佚)한 것으로 대체로 한대(漢代) 경학의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강화학이 단지 양명학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작은 정약용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했으며 이 인연을 계기로 이상학이 정약용의 학문에 대한 연구를 한다. 뒤에 이건방은 〈경세유표〉에 서문을 쓰고 정인보가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간행한 것 등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약용의 학문은 많은 부분이 강화학파에게 수용되어 이들을 통해 근대의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강화학 자체도 정약용의 학문과 결합하는 가운데 민중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결합된 학문이 바로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