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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地境里)
이 마을 북쪽은 영덕군(盈德郡)과 경계를 이루는 버드내(지경천-(地境川))가 흐르며, 1리(里)에는 지경(地境), 2리(里)에는 어사터와 염전(鹽田)이란 자연부락이 있는데, 1914년 지경리(地境里)로 통폐합 되었다.
두마리(斗麻里)
보현산(普賢山:1,124m)과 베틀봉(862m)이 이루는 고원분지에 형성된 산촌이다. 동편 마을어귀 협곡(峽谷)에는 두마(斗麻)폭포와 무학대(舞鶴臺)가 있어 경관(景觀)이 수려하다.
높은 지대의 때묻지않은 오지(奧地)인지라 마고선녀(麻姑仙女)가 살며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하여 두마(斗摩)라 이름하였다 한다. 한편으로는 현내리(顯內里) 쪽에서 볼 때 뒷산고개 너머에 이 마을이 위치하므로 뒤미재(뒷매지)라고도 불리어지던 마을이다.
한때 삼(麻)의 재배가 많던 곳이라고도 하며, 두들마을의 발음이 변천하여 두둘마, 두마라 부르게되었다는 설도 있다. 1914년 죽북면(竹北面)의 현내리(縣內里)일부를 병합하여 두마리라 통칭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보현리(普賢里)로 넘어가는 죽현(竹峴)에 대태라는 작은 마을과 베틀봉 산기슭에 양지마을, 베틀고개 길목에 두들마을(邱平), 그 서편에 큰마을, 면봉산(眠峰山)쪽으로 트인 골짜기에 위치한 윗마을(上村)등이 있다. 이 지역을 일명 이산두매(二山杜梅)라 칭하였는데, 이는 두 개의 큰 산 사이에 있는 두메산골이란 뜻이라 한다.
예부터 피란지처(避亂之處)로 소문난 곳이며, 약 500년전 밀양박씨와 영양천씨, 김해김씨, 오천정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한다.
번성기의 183호 정도에서 현재는 80여호가 살고 있다. 보현산(普賢山) 중턱에 200여 년생 벚나무 아래에 천제단(天祭檀)이 있어 정월보름과 유월유둣날 천신과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정월보름에만 지낸후 자연부락으로 돌아가면서 동제사를 지낸다.
대태·죽현동(竹峴洞)
대나무가 많은 죽현(竹峴)으로 가는 길에 형성된 마을이다. 서낭당이 있다.
양지마을
면봉산(眠峰山)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월성이씨가 터를 닦은 마을이다.
두들마을
두툼히 높은 두들에 형성된 마을이다. 월성최씨 재사(齋舍) 만귀정(晩歸亭)이 있다. 다리목에 있는숲에 제당과 당산목(300년생 느티나무와 벚나무)이 있고, 오천정씨(烏川鄭氏) 가문의 월성손씨 효행비각(孝行碑閣)이 있다.
큰마을
깨밭골, 굼돔, 평지마을이란 세 개의 작은 자연부락이 합하여 큰 마을을 형성했다 한다.
웃마을
두 마리의 가장 서쪽편 높은 위치에 있다하여 그렇게 불리운다.
현내리(縣內里)
옛날 대홍수 때 수면 위에 남은 산머리의 모습이 광주리 같았다 하여 광주리산이라 불리는 광재산(光才山) 남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창(倉)마을을 중심으로 나대(羅代)에 현기가 있었으므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현내리라 이름하였으며, 창(倉)마을, 지통(紙通), 양지마을, 대송(大松)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창마을
현내리 들머리에 위치하며 창리(倉里)라고도 한다. 현기가 되어 있을때 관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전한다. 마을어귀 성황(城隍)들에는 200-400여년생 느티나무와 음나무등 노거수림(老巨樹林)이 100여평 남아 있으며 그 중 최고령수(最高齡樹)인 느티나무(가슴둘레:5.8m) 당산목에서 단오날 중마을, 지동, 양지마을 합동으로 당제(堂祭)를 지낸다. 원래는 이 지역 모두를 창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이 숲에서 부윤(府尹) 권상공만고불망비(權相公萬古不忘碑)와 부윤유상공장환애민선정비(府尹兪相公章煥愛民善政碑)가 있다. 성황(城隍)들에는 옥(獄)터가 있었는데 농지로 변하였고 돌담의 흔적이 도로변에남아있다. 산남의 진에 참여한 이한구 의사(李韓久 義士)의 출생지이며 마을어귀 묘소에 비(碑)가 있다.
중마을[中村]
창마을 서편 양지마을 사이에 위치하며 중간에 있다는 뜻의 지명이다. 동회관이 이 마을에 있다 원래는 동쪽으로 길게 창마을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동·지통(紙通)·지등(只等)
종이를 만들던 곳이라 지통(紙通)이라 고쳐 불렀다 한다. 한때 원(院)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양지마을
두마리(斗麻里)와 봉계리(鳳溪里)의 갈림길 양지바른 산록에 형성된 마을로 밀양박씨가 개척한 마을이라 전한다.
대송리(大松里)
큰 소나무숲이 있었던 마을이라 한다. 지금은 전답(田沓)으로 개간되고 그 흔적이 없다. 구읍지(舊邑誌)에 의하면 고려 때 향교(鄕校)가 있던 터에 건립되었던 죽장초등학교 현내 분교장(1970.10.12-1996.3.1)은 폐교되었다. 현기(顯基)건물의 북쪽마을이란 뜻으로 북관촌(北館村)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서편에 대각사(大覺寺,1965년 설립)가 그 안골 무학대(舞鶴臺)에 무학사(舞鶴寺:1957년 설립)가있다. 흥해배씨(興海裵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가 이 마을을 개척 세거(世居)하여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 단오날 동제사를 지내고 있다.
방흥리(方興里)
1914년 일저동(日低洞), 등너미, 장터, 방계(方溪=골안)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흥왕하는 마을이란 뜻을 방자(方字)에 붙여 방흥리(方興里)라 하였다.
날밑[日底洞]
명산(名山) 서편 산록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서 해가 중천에 떠야 볼 수 있는지라 날밑이라 부른다. 현내리와의 갈림길에 자리하여 있다.
등너미
날밑 마을 북쪽 300여m 지점 얕은 언덕배기에 형성된 마을이며, 6.25때 심은 느티나무 당산목이 두그루 남아있어 정월보름에 당제(堂祭)를 지낸다.
정터
등너머에서 큰길을 따라 북쪽으로 100여m 들어가면 옛날 장이 섰던 작은 마을이 있다. 주위엔 고인돌로 보이는 바위가 논들에 있다.
골안·뱅갱이·방계(方溪)
명산(名山) 뒷골에 형성된 마을로서 개천이 모가 났다 하여 뱅갱이라 부르기도 한다. 260여 년전밀양박씨(密陽朴氏)가 개척 세거한 마을이라 한다.
골밖
골안마을 바깥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시대에 국도가 개설되자 교통의 편의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 전한다. 골안에 있는 4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삼짇날 골안마을과 합동으로 당제(堂祭)를 지낸다.
월평리(月坪里)
갈뫼봉(438m) 서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청송군(靑松郡)과 경계를 이루는 꼭두방재(415m)에 이르기까지 밖골, 안골, 우마동, 살마골, 꼭두방과 같은 작은 자연부락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1914년 소월, 고평, 현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평리(月坪里)라 하였다.
골밖·바드내·외평(外坪)·하평(下坪)
첫 을로 당제(堂祭)는 안골에서 지낸다.
안골·안바드내·소월리(所月里)
하평(下坪) 입구에서 북쪽 골짜기로 접어들어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월성이씨(月城李氏)가 200여 년전 개척한 마을이라 전한다.
양지마을·가나무지이·우마(牛馬)동
큰 가중나무가 있었다 하여 가나무지이라 불렀다 하며, 또는 세금을 잘 내지 않는다고 관리들이 우마동(牛馬洞)이라 비하하여 불렀다고도 한다.
꼭두방·복두방(福頭房)·고평(高坪)
청송군과의 경계인 꼭두방재가 이 마을에 위치한다. 200여 년전 해주오씨(海州吳氏)가 개척하여 복두(福頭)마을이라 했으며, 고지대 마을이라 하여 고평(高坪)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이 마을 서쪽장자메기라는 골에 아산장씨(牙山將氏) 몇 집이 개척하여 살다가 떠난후 절강편씨(浙江片氏)들이 살았으며 그들이 떠난 후에 현 지역에 해주오씨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동제사는 단오날, 꼭 두방마을에서는 5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골안은 골밖마을과 합동으로 200여 년생 상수리 나무당산목에서 지낸다.
합덕리(合德里)
1914년 덕상리(德上里)와 덕하리(德下里)를 합(合)하여 합덕(合德)이라 하고 황정(黃亭), 머릿골, 양지마을을 통합하여 1,2리로 분할, 오늘에 이른다. 한 때 죽북면(竹北面) 소재지(所在地)였다. 1930년 죽장면에서 처음 설립된 죽장초등학교 죽북분교장이 닥상리에 있다.
너배
깊은 산골에서는 비교적 넓은 터에 덕상(德上)과 덕하(德下)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하여 넓다는 뜻으로너배라 하였으며, 느티나무 당산목(堂山木)에서 정월보름에 양지마을과 덕상마을 합동으로 당제(堂祭)를 지낸다. 합덕교회가 있다. 북서쪽에 갈씨묘(葛氏墓)가 많은 갈뫼봉(483m)이 있다.
머릿골·수곡(首谷)
머리모습의 깊은 골짝 마을로서 안머리골, 밖머리골, 중머리골이 있다.
양지마을
석계리쪽 양지바른 곳에 형성되었던 마을이다.
황정(黃亭)
황씨성을 가진 이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라 한다. 한때엔 큰마을이라 부르기도하였으며, 수령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堂山木)이 남아 있고 정월보름에 당제(堂祭)를 지낸다. 마을 북쪽으로 옻재를 넘으면 상사리(上舍里)로 통한다.
점마을
옹기점이 있던 골짝마을이며 마을 뒤 유현(柳峴)을 넘으면 청송군(靑松郡)에 닿는다.
석계리(石溪里)
구월산(九月山:808m) 남서 골짜기 마을로서 바걸이, 당마을, 갈근(葛根)이, 소똥마을, 은산이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돌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에 연유하여 석계(石溪)라고 칭하였다.
바걸이
소똥골 어귀에 와우형국(臥牛形局)의 언덕이 있어 그 등점에 바를 거는 위치쯤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불리운 이름이다.
당마을
400여년생 느티나무(밑둘레:4.6m) 당산목에 정월보름날 당제(堂祭)를 지낸다.
갈근(葛根)
주위 산에서 칡뿌리를 많이 캤다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소똥마을·송동(松洞)
와우형국(臥牛形局)의 언덕 엉덩이 아래 위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소똥마을이라 부르며, 그 이름이 천하다 하여 소나무 많은 마을이란 뜻으로 송동(松洞)이라고도 했다. 마을어귀 노송(老松)을 당산목(堂山木)으로 하여 동제를 지낸다.
음산이·음산(陰山)
산이 깊고 음산하여 마을이름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달리방·닭입이·닭이봉·계전(鷄田)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 있는 묘한 봉우리 아래에 있었던 마을이다. 동편 달의현(達義峴)을 넘으면 청송군(靑松郡) 중기리(中基里)의 옻밭골에 통한다.
하사리(下舍里)
1914년 청송군의 병보동(竝甫洞)일부를 병합하여 하사리(下舍里)라 하였다. 구음(九音)마을, 간지동월경, 아랫월경, 갈비골, 홈골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굼마을·구음마을
마을이 위치한 지형이 움푹 구멍이 패인 듯한 곳인지라 굽은마을, 혹은 굼마을이라 부른다고도 하며, 마을 앞에 구멍 뚫린 큰 바위가 있어서 아홉 가지의 소리가 난다하여 구음(九音)마을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터주는 월성이씨다. 산남의진에 가담했던 최익문(崔益文)의사의 성장지이다. 정월보름에 소나무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간지동(干支洞)
구음마을과 월경 중간에 위치하며 주위에 접시골, 반두들, 절골과 같은 지명들이 있어 마치 밥상을 차린 듯한 형국인지라 이에 마을 이름도 옛날 숫가락의 이명인 '간지술'이란 것에서 택하여 간지동이라 불렀다 전한다. 간대목(간짓대목)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월경(月景, 越景)
청송과의 경계지역이었기에 월경(越景)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마을의 모습이 달같다 하여 월경(月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상월경에는 하사교회(1921년 건립)가 있다.
갈비골·병보(竝甫)·대기동(大岐洞)
청송군과의 경계선이 자초산(紫草山:해발763m) 능선을 따라 이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실개천(너비:4m)을 지난다. 이에 50여 호 살던 마을이 두 개의 군으로 나뉘어져 갈비짝 같은 형태를 갖는지라 마을 이름을 병보동, 갈비골, 대기동이라 하였다 한다.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단오날 동제사를 지내다가 해방 후 폐지하였다. 이 산정에서 시문리(柴門里)에 이르는 능선을 역룡등(逆龍嶝)이라 부른다.
상사리(上舍里)
1914년 통폐힙 때 오사리, 공수골, 평지동, 점마을, 절골, 송이골을 합하여 상사리라 했다. 예부터 대추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오사리(五舍里)·시문리(柴門里)
역룡등(逆龍嶝)이 멎는 곳에 위치하며 신라대에 유배되어 온 다섯 명의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사립문을 달고 살았다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라 한다. 1957년 개교한 죽장초등학교 상사분 교장과 그 앞 언덕에 1986년 건립하여 1989년 신축 이건한 상사교회가 있다. 동제사는 정월보름에 지냈는데 근년에 폐지되었다. 터주는 보성 선씨다.
점(店)마을
평지동 동쪽 산골짜기에 위치하며 사기그릇을 구워 팔던 곳이다. 당산목인 상수리나무(가슴둘레:약3m)에서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낸다.
평지동
산골짜기에서 비교적 넓은 평지가 전개된 곳이다. 대추가 특산물이고, 정월보름에 느티나무 당산숲에서 동제를 지낸다. 1983년에 세운 재일동포 정연수공적비(鄭淵秀功績碑) 있다.
절골
신라대에 개운사(開雲寺)란 절이 있었는데 빈대로 망했다 한다. 당산목은 상수리나무(가슴둘레:약3m)다.
송이골
구암산(九岩山) 골짝 깊은 곳에 위치하는 산촌으로서 예부터 송이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느티나무 당산목(가슴둘레:4.2m)에서 정월보름에 당제를 지냈는데 근년에 폐지했다. 이 마을 남쪽에 석계리(石溪里)로 넘어가는 백 번이나 굽이진 백고개가 있다.
공수(空守)골
상사리의 남단, 옻재 높은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감곡리(甘谷里)
한티재를 넘어 정자리에 들면서 북쪽으로 틔어진 골짜기에 못안, 중리(中里), 큰마을, 서리골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감나무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감실, 감골이라고도 불러왔는데, 1914년 감곡리라 통칭하였다.
서리골
감곡지(甘谷池) 안쪽에 남효온(南孝溫)선생의 후손들이 숨어 들어와 마을을 설립하였다 하여 설립골이라 불렀는데 발음이 변천되었다 한다. 서리골을 거슬러 오르면 침곡산이 있고, 서낭골재를 넘으면 기북면 용전(龍田)에 이른다.
큰마을
중심되는 마을이라 하여 큰마을이라 부른다. 난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과 화전민이 일군 마을이다. 마을 안 골짜기에 감곡지(甘谷池)란 작은 못이 있다. 중리에 있는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삼짇날 동제사를 지내 오다가 근년에 폐지되었다.
중마을[中里]
못안마을과 큰마을 중간에 위치하는 20여호 살고 있는 마을이다.
못안[池內]
감곡 어귀에 옛날엔 못이 있었고, 그 안쪽에 위치한 4호 사는 마을이다. 남효온 선생의 후손이 이 마을에 1호 살고 있으며 그 뒷마당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근년에 허물어졌다. 동북쪽 절골에는 약수터가 있다.
정자리(亭子里)
한티재(大峴)와 핑구재(坪丘峴) 사이에 형성된 마을로서 북서쪽에는 봉화봉이 솟아 있다.
1914년 송림, 양지, 음지, 정자(큰마을), 점말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정자나무가 있는 큰마을의 이름을 따서 정자라 하였다. 죽장지역에서 처음 과수원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과수 집단지로 탈바꿈하여 있다. 큰마을의 정자초등학교(1949.4.15-1995.3.1: 1,227명 졸업)는 폐교 되고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포항시지회 수련장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1945년 건립된 정자교회가 있다.
지동리(芝洞里)
아랫지들·웃지들, 강건너엔 음지마을, 논골이라는 자연부락을 1914년 영천군의 신당동(神堂洞) 일부와병합하여 지동(芝洞)이라 하였다.
지들 ·지동(芝洞)·지평(芝坪)
마을 주변 자호천변에 잔디가 무성하여, 혹은 지치과에 속하는 다년생 약초인 지치가 무성하였다하여 지들이라 불렀다 전한다. 임란 때 피난을 와서 살게 된 낙지(樂芝) 최팽수(崔彭壽)를 추모하는 낙지정(樂芝亭)과 경주최씨 재실인 백암재(栢菴齋), 최진복(崔進福) 효자비가 있으며 그 후손들이 세거한다.
윗지동과 아랫지동에 4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이 각각 있어 내외당으로 하여 9월 중순에 제사를 지낸다. 하천 건너 평구현(坪丘峴) 아래 음달진 곳에 음지마을이란 작은 자연부락이 있고, 산중턱에는 대우사(1982년 설립)란 작은 절이 있다. 지동의 최씨 집안에는 낙지공 5세손의 묘지에 관련한 용마바위 전설이 전해온다.
논골[畓谷]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며 옛날에 논이 많지 않던 시절에 비교적 논이 많은편이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뱃고개 쪽 도로변에 느티나무 2그루가 남아 있다. 평구현 산록에는 영양이씨 열녀각이있다.
일광리(日光里)
입암리 남서편에 위치하며 1914년 개일(開日), 광천(廣川), 답동(沓洞) 일부를 병합하여 일광리(日光里)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른다.
광치 . 광천(廣川)
하천이 넓게 펼쳐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광천이라 불렸다. 아랫 광천 마을에는 선산 김씨와 월성김씨가 터전을 닦았다 하며 정월보름날 상수리 나무 당산목에서 당제를 지낸다.
도덕골
신라대에 도덕사(道德寺)란 절이 있었다 하여 도덕골이라 부른다.
개일(開日)
높은 지대에 동향으로 자리한 마을이라 해가 뜨면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비쳤다 하여 개일이라 불렀다한다. 배씨와 이씨가 터주라 전한다. 신라 성덕왕 18년 창건된 서운사지(瑞雲寺址)터에 서운사가 있고,문정대사(文晶大師)와 설송당대사(雪松堂大師)의 부도가 있다.
입압리(立岩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솔안, 큰마을, 골안을 1리로, 장터, 구장터, 명미마을을 2리로 나누어 입암리라 통칭하였다. 면소재지이다.
솔안마을[松內洞]
마을 앞에 200여 년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가사천변에 남아 있고 물가에 20m 높이의 선바위가 하나있어 입암(立岩)이라 부른다. 송림 울창한 언덕에 여헌 장현광 선생을 주향하고 있는 지방기념물 70호 입암서원(立岩書院)과 400여 년생 향나무(높이:15m,가슴둘레:3m)와 300여 년생 은행나무(높이:13m, 가슴둘레:4.2m)가 있으며, 입암 바로 옆에 일제당이 있고, 서원 우측에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선생의 처소였던 만활당(萬活堂)이 있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선생이 지은 시조 입암이십구곡(立岩二十九曲)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뢔란 때 권극립(權克立) 선생이 피난차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그 증손 자대에서 평지(平地)마을(큰마을)을 일구었고, 같은 시기에 이천서씨(利川徐氏)가 골안에 정착, 골안마을을 일구었다 전한다. 솔안마을에는 지통(紙通;종이공장)이 있었으며, 1960년대 초까지 만해도 정병환(鄭柄煥)씨가 황모(黃毛)와 장액(獐腋)의 고운 털로 만든 붓이 유명하였다. 서원 뒷마을을 별도로 서원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월보름에 4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제사를 지낸다.
큰마을
장터, 구장터마을과 합동으로 단오날 외당(外堂:큰마을 어귀 400여 년생 느티나무)과 내당(內堂:400여년생 느티나무)에서 동제를 지낸다. 1907년 산남의진의 입암전투 때 일본수비대의 만행으로 많은가옥과 고서들이 소실되었다 한다. 동와권공유덕추모처(東窩權公遺德追慕處)인 오로정(吾老亭)과 참판동봉권공숭봉지처(參判東峯權公峯之處)인 영모당(永慕堂)이 있으며 관공서로는 면사무소, 죽장파출소가 있다.
장터
큰마을 들머리에 구장터가 있고 이곳에는 죽장초등학교(1931년 설립)와 입암교회, 면민복지회관, 우체국이 있다. 면소재지가 확장됨에 따라 시장이 협소하므로 1940년경 합류대(合流台)라는 거대한 바위를 제거하고 하천을 정리하여 새로운 장터를 마련하여 생긴 마을이다. 죽장중·고등학교 뒤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山南義陳發祥記念碑:1985년 건립)가 있다.
명미마을 . 명뫼마을 . 명리(鳴里)
서편 산록에 형성된 산촌이다. 이름난 묘터가 있다는 뜻으로, 혹은 부근 공동묘지에서 우는 소리를 많이 들어 지어진 지명이라 전한다.
침곡리(針谷里)
입암리(立岩里) 동쪽 침곡산(針谷山;726m)을 향해 뚫린 좁고 긴 바늘같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점마을, 안바느실, 중마을, 밖바느실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점마을 . 점촌(店村)
300여 년 전 능성구씨(綾城具氏)들이 들어와 솥을 만들며 살아 구점마을(舊店村)이라 부른다. 정월보름에 상수리나무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내오다가 폐지하였다.
안바느실 . 내침곡(內針谷)
3월 삼짇날이나 오월 단오날 중에서 택하여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동제를 지낸다.
중바느실 . 중마을
밖바느실 마을과 인접하며 동제사는 밖바느실과 합동으로 지낸다.
밖바느실 . 아래바느실 . 외침곡(外針谷)
진주강씨와 월성손씨가 터주라 전한다. 동제사는 정월보름과 7월 보름에 중바느실과 합동으로 느티나무(300여 년생) 당산목에서 지낸다. 산남의진에 출전한 손영술(孫永述) 의사의 출생지이다.
매현리(梅峴里)
병암산(屛岩山) 머리에 노거수림이 있고 그 건너편 양지바른 언덕에 매현1리인 아랫뫼재마을이 있다. 여기서 가사천을 따라 중마을, 돌다리, 딱밭골(楮田)과 같은 2리 구역의 산촌이 자리하고 있다. 욕학담(浴鶴潭) 북쪽 산기슭에 산남의진 정용기 대장의 무덤이 있었다.
아랫뫼재(山峴. 梅峴. 美峴. 下山里)
3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월성손씨 세거지로서 노잠 손여두(魯岑孫汝斗), 일휴제 손여규(逸休齊孫汝奎) 두 형제분을 추모하여 세운 체악당(堂)이 있고 서당이던 소로정(小魯亭)이 있다. 마을 앞 병암산(屛岩山)은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요. 마을은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이라 하여 산현(山峴)을 매현(梅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임란 때 왜병이 이 마을 뒷산 곳곳에 혈(穴)을 잘랐다 한다. 병풍게숲의 500여 년생 느티나무를 당산목으로 하여 정월보름과 백중(百中)날에 동제를 지내며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은 여기 참배를 한 후 한 바퀴를 돌고 나서 떠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중마을
매현동(梅峴洞)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마을[中里·上山里·上峴·윗뫼재)에는 한양조씨(漢陽趙氏) 세거지로서, 서당으로 쓰던 월성손씨 재실 연옥암(練玉庵)이 있고, 동제를 지내던 옛 숲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마을동편 들녘에는 고인돌 1기가 있다.
딱밭골(楮田里)
돌다리가 있던 돌다리마을을 지나 북동쪽 계곡을 더 들어가면 닥나무가 많던 딱밭골이 있으며, 이 마을어귀에 무당소(沼)가 있고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어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1974년 설립된 매현교회가 이 마을에 있다.
가사리(佳士里)
입암(立岩)에서 상옥으로 넘어가는 가사령(佳士領) 골짜기에 큰마을, 중마을, 윗각단, 갈밭, 독골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가사리(佳士里)라 하였다.
큰마을
죽장초등학교 가사분교(1965.3.1-1992.3.1)는 폐교되었으며, 현재 표고버섯 재배지로 활용되고 있다. 출입구좌측 숲에 교사 박대하 기념비(1969)가 서있다. 정월보름에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동제를 지낸다. 마을 중간 진입로에 월성손씨 뇌고 여제(雷皐 汝濟)선생이 글을 읽던 고반정적지비(考槃亭蹟地碑)가 서있다. 일제시대 백탄을 공급하던 숯의 명산지였으며, '어사룡'이라는 나무꾼 노래를 비롯한 풀베기, 김매기의 농요와 초동(樵童)들의 놀이였던 지게상여놀이가 잘 보존되고 있다.
웃각단
12호 정도가 살고 있으며, 다리목에서 5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수고:20m,가슴둘레:5.6m)이 있는데 정월보름에 중(中)마을과 합동하여 당제를 지낸다. 이 부근에는 250년 전 능성구씨(綾成具氏)가 입향하여 당대에 유명한 '가시내 솥'을 만들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시내한 지명은 이곳에서 생산되던 솥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장안의 기방(妓房)에서까지 소문이 자자한지라 이에 빈정댄 뜻으로 가시내골이라 부른 것에 연유한다고 한다. 산남의진에 가담했던 구한서(具漢書)의사, 김석하(金奭河)의사 출신지이다.
갈밭(葛田)
웃갈밭, 아랫갈밭으로 나뉘어 있다. 이 곳에도 큰가매골, 작은가매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어 농기구와 무기의 주생산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독골 . 독곡(陶谷)
큰마을에서 남동으로 벼슬재를 넘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옛날 도요지(陶窯址)가 있던 곳이다 마을의 모습 또한 항아리 형국이라 하여 예부터 샘을 파지 못하는 마을이라 한다.
하옥리(下玉里)
둔세동(遁世洞), 윗마두(上馬頭), 아랫마두, 덕골의 뒷터와 황정, 윗배지미(上陽岑), 아랫배지미 등을 합해 1914년 하옥(下玉)이라 하여 죽남면으로 있다가 1934년에 죽장면에 편입됐다.
둔세동(遁世洞)
흔히 돈세동이라 부르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곳이란 뜻으로 신라시대에는 4백여 가구가 세속을 떠나 살던 곳이다.
마두전(馬頭田)
돈세동에 이어지는 산촌 마을로 건너편 산의 모습이 말머리 같은 모습인데서 연유한다. 윗마두와 아랫마두가 하천변 산록에 위치해 있으며 두 마을 각각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어 정월보름(윗마두)과 칠석(아랫마두)에 제사를 지낸다.
배지미 . 양잠(陽岑)
상옥은 배의 형국이고 하옥은 노(지미) 혹은 키에 해당된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며, 양지바른 곳 고산지대의 터전이란 뜻으로 양잠(陽岑)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래배지미의 하옥초등학교(1970.12.29 - 1992.3.11)는 폐교되고 경상북도포항학생야영장이 들어서 있다. 그 동편 숲 속에 300-400여 년생 전나무(가슴둘레:4.3m, 수고:40-50m) 당산목(삼짇날 동제)이 있는데, 1998년 돌풍에 의해 중허리가 부러졌다.
새터 양지마을
400여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 삼월 삼짇날 동제를 지낸다. 여기서 옥여암(玉女岩)을 지나 옥계마을로 이어지는데, 이 지역은 생활권의 편의에 따라 영덕군달산면(達山面)에 이속되었다.
덕골
아랫마두밭에서 붉은지미산을 돌아 내연산(內延山)쪽으로 접어드는 큰 골짜기인데 뒷골에 뒤터란 화전민촌이 있었고 앞골엔 황정이란 마을이 있었다. 황정에서는 아흔아홉 간 건물이 있었고 석문교(石門橋)를 막아 놓고 엽전을 찍었다 전한다. 가까이 온천수가 흐르고 계곡에는 주황색 암반이 드러나 있다.
상옥리(上玉里)
고산분지에 형성된 마을로서 신라 때부터 숨어 살게된 사람들,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 화전민들이 정착함으로써 커지게 되었다. 흔히들 이곳을 '오강지두 팔령지하(五江之頭 八嶺之下)'라 할만큼 산간오지이다. 예부터 피란지처(避亂之處)로 '첫째는 고래요. 둘째는 두마(斗麻)'라 할때, 첫째에 해당하는 곳이다. 옥같이 맑은 냇물이 흘러 오십천(五十川)의 상류 한 지류가 되니 세칭하기를 옥계(玉溪)라 했으며, 고래 또는 고내라고도 부르던 상옥은 높은 곳에 냇물이 흐른다는 뜻 <고천(高川)>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지형이 마치 거대한 고래로 각(刻)을 떠낸 듯한 행주형국(行舟形局)인지라 이에 연유하여 고래(鯨)라 부른다 한다. 한편으로는 동편 산의 모습 또한 암수 두 마리의 고래를 닮았다는데 연유한다고도 전한다. 윗고래인 1리에는 거릿마을(거렁미), 솔안마을(松內), 못둑모치, 무쇳골(수철골)이 있고, 아랫고래인 2리에는 상윗골(사잇골, 샛모치), 배빗재마을, 당모치(堂坪), 먹방골(墨房里), 넘은절골(城寺洞), 장터, 쑥밭과 같은 마을이 있다. 신라말기 서라벌에서 난을 피해 들어온 고관대작들의 고급주택이 즐비하였으며, 한때 1000여 호가 넘게 살았다 전한다. 먹방골은 그 당시부터 먹을 만드는 고을로 소문이 났고, 무쇳골은 병기와 농기를 만드는 마을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다.
성지비결(性智秘訣)에 이재칠전중(利在七田中)이라 했고, 정감록(鄭鑑錄) 비결에도 구인종 칠전중(求人種 七田中)이라 했다 하여 칠전(鯨田, 葛田, 坪中田, 馬頭田, 艾田, 大中田, 角田(火田))의 중앙에 위치한 이 마을을 피난처로나 군사기지로 이용하였다 한다. 산남의진에 가담한 강대근(姜大根) 의사의 출생지라고도 한다. 송내동 느티나무(300여년생, 흉위:3.3m)를 남당(男堂)으로, 당평마을 이팝나무(250여 년생, 흉위:3.1m)를 여당(女堂)으로 하여 삼짇날 산신과 동신에 제사를 지낸다. 1938년에 상옥간이학교(上玉簡易學校)로 설립된 상옥초등학교와 1972년에 설립된 기계중학교 상옥분교장이 있으며, 죽장면사무소 상옥출장소(1957년 설립), 보건진료소, 상옥우편취급소 포항북부경찰서 상옥파견대가 있다. 못안마을에 1919년 설립된 상옥교회와 1971년에 설립된 중앙교회가 있다.
쑥밭
상옥리 도유림내 평균해발 63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경상북도
수목원은 미래산업의 자산이 될 산림식물 종의 다양성 확보 및 산림유전자원의 보존 증식과 산림식물 체험의 학습장으로 희귀한 고산식물을 비롯한 갖가지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 . 3,222ha의 수목원은 면적단위 동양 최대, 세계 2번째의 면적이다. 멸종위기의 희귀식물, 특산산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야생화 등 1,510종 179,226본을 식재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수목들의 특성에 따라 분류한 고산식물원, 창포원 등 24개의 소원은 자연체험 학습과 학술연구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첫댓글 고향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형님도 주님의 은총 아래 늘 행복과 건강 안에 머무르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