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기 위화도 회군관련에 언급하신 부분에 대해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읽으니 위화도 회군 전까지 고려는 요동에 대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고 상당히 북벌준비로 발달된 상태라 하셨는데 그 구절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1. 이미 원의 간섭기를 거쳤고 이를 벋어난 때가 얼마되지 않아서 그동안 국력을 제대로 상승시키기 불가능했스며
2. 요동이 고려의 영향력아래 놓여있었다라고 할 경우 위화도 회군이전에 공민왕때 이미 요동공략을 감행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요동을 아예 흡수해야 정상일것입니다.
3. 구체적으로 요동의 군사력상황을 언급하셨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쉽게 요동을 접수할수 있다고 볼경우 피한방울 안흘리고 요동을 먹을 것이라면야 위화도 회군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일전에도 주장한바 있지만 위화도 회군의 이유에 대해서는 최영이 이성계세력을 견제키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한바가 있습니다.
즉 이말의 의미는 요동정벌을 감행할 경우 고려의 국력상황으로써는 상당한 출혈과 모험을 걸어야 하고 비록 명의 요동에서 세력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첫댓글흠,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원이 1360~1370년 사이에 북원으로 쫓겨난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원의 간섭기는 위화도 회군이 1388년에 일어낫으니 약 20년 정도 나 지났는데, 원의 간섭기로 인해서 국력이 제대로 상승 못했다기는 좀 해석이 불가능한것 같습니다.
첫댓글 흠,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원이 1360~1370년 사이에 북원으로 쫓겨난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원의 간섭기는 위화도 회군이 1388년에 일어낫으니 약 20년 정도 나 지났는데, 원의 간섭기로 인해서 국력이 제대로 상승 못했다기는 좀 해석이 불가능한것 같습니다.
흠 물론 공민왕때 요동공략을 감행한적이 있었죠. 그때 요동까지도 들어갓다고 하나 고려의 본국 원의 뒷세력을 받침하는 권문세족들이 이성계의 원군에 도와주지 않았기때문에 이성계도 하는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왔죠. 그때는 권문세족때문에 요동을 못차지 한것이라고도 볼수잇죠.
그리고 또한 그 시기에 명이 북원의 세력을 소탕하고자 북원에 한창 신경쓸 무렵이고 또한 통일도 한지도 얼마 안되지 않아 미미했습니다. 고려가 국력상황으로 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반면 명도역시 약했을것으로 에상됩니다! 꼭 못할싸움만은 아니었죠.
아무리 고려군이 정예라 할지라도 본국의 군수의 10배 20배로 떼거지로 밀고오는 중국넘들과 싸우긴 역부족이었을 거라 봅니다 쉽게말하면 탄알부족,지구력부족으로 도리어 밀리었을지도...
문제는 고려의 10~20배 되는 국력을 총동원할 여력이 당시 명에도 없었으며 이후 수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국력을 완비하지 못 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주원장이 이성계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었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