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 100卷 25年 6月 22日 (乙巳) 003 / 행수의 법을 세울 것에 대해 논의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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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立循資之法, 又立行守之法, 所以重官爵防猥濫, 誠爲美典。 然京外官吏滿三十月而考三居上者, 方許加資, 則自九品將仕郞歷至四十餘年最居上第者, 乃得至三四品。 以故東班京外五品以下官吏, 總千餘人, 而陞爲四品者, 一年不過數人。 西班則當番內禁別侍衛忠義衛甲士, 未滿三千, 而陞爲四品者, 一年至四十餘人。 東班四品以上鮮小, 每當守令除授, 率以軍士出身者授之, 至使不識治體者久典大邑, 豈能知民事之艱難, 決庶務之煩劇乎? 且文武, 一致也。 其除授之法, 偏重於東班, 過輕於西班, 不均之嘆, 姑置不論, 至於銓選任用之際, 頗有防礙。 請東西四品以下正從二級, 各減一資, 或箇月之數, 減半加資, 參酌施行, 以均東西, 以便銓選。 |
下議政府議之。 黃喜、申槪、權踶等議曰: “《源流至論》云: ‘令二百石以上一切滿秩如眞。’ 釋者謂: ‘諸官吏初除, 皆試守一歲, 乃爲眞食全俸。’ 又云: ‘刺史擧茂才, 移名丞相府, 考召取三科, 皆試守滿歲爲眞。’ 又云: ‘凡守官滿歲稱職者爲眞, 不稱者遣歸故官。 東都太守韓延壽守左馮翊, 滿歲稱職爲眞。 穎川太守黃覇守京兆尹坐事, 詔歸穎川太守官。’ 然則漢之守官, 一則官吏初除官者授之, 一則人有可當重任而資淺者, 難以驟擢, 故姑試其稱否而授之也, 非以官資高下例授之也。 臣等竊謂古今異宜, 凡於制度, 師古而行, 尙亦防礙, 終不得行者, 容或有之, 況欲師古而不依古制, 亦似爲未便。 且本朝之制, 年滿二十者, 乃許筮仕, 其文武出身者, 率皆年近三十以上也。 以今行守箇月陞資之法觀之, 凡入仕者, 自權務必須無故, 待滿四五十年, 乃得陞三四品之資。 其仕宦無故, 至五十餘年者, 絶無而僅有, 況四十始衰, 至五十餘年, 則其不衰憊而堪職者鮮矣。 如此則有用之才, 志氣方銳, 而沈於下流, 幸至高爵, 志氣鹵莽而難用矣。 古人有言: ‘循資之法, 可畜常調, 不可以待賢才。’ 然世道日降, 冒濫之風日滋, 循資之法, 亦不全廢。 臣等願行職依已行格例, 不得已敍用者授之, 其中臺諫六曹郞廳議政府舍人, 必擇人而授之。 苟拘於行守之法則賢愚同滯, 似乖治體。 今佐郞以正資考滿者則陞眞五品, 以從資考滿者則授守五品, 歲滿爲眞。 正郞舍人, 亦依此例。 其外方守令, 滿十考十上, 而當京職除授時, 正資則同上, 從資則加一資, 臺諫遷轉, 亦依舊例。 參外本無箇月者, 依舊遷轉, 其餘各品及守令, 殿少最多, 殿多最少者, 依舊循資施行。 凡從守官而當爲眞者, 不復降品, 又於同品, 不許稱行稱守。 如此則行守之法, 庶合於古, 亦宜於今, 而賢才無沈滯之嘆, 常調無冒濫之弊, 實爲便益。” 河演議曰: “四品以下正從, 各減一資及箇月減半之請, 係是成憲, 不可輕變。 但臣於行守之法, 竊有獻焉。 東班四品以下、六品以上各品首資奉正通德承議者, 旣經三考九年之績, 餘一考, 雖未盡月數, 値有窠(關)〔闕〕, 許令對品陞遷。 守令考滿當遷, 十考皆上者, 特異之才也。 依議政府舍人六曹郞廳去官例, 亦許陞遷。 守令除授之際, 資品相當者罕少, 果如吏曹所言, 頗有防礙。 於大都護府牧官資四品可當者, 則稱副使副牧使, 於都護府五品則稱同副府使, 或稱判官知官, 六品則稱副知事, 稽古詳定。 如京中守法, 隨宜上下, 庶幾人品相當, 而無防礙之弊矣。 至若東班參外除授之法, 臣意亦與僉議同。” |
李叔畤議曰: “舊例, 議政府舍人六曹正郞, 職掌國家庶務, 其任匪輕。 舍人則奉列以上, 正郞則通善以上, 佐郞則承訓以上, 改品去官。 其從資以下守品去官, 各陞正資, 而後亦令改品就眞。 臺諫內獻納持平正言則陞遷正佐郞, 若掌令執義知司諫, 固無陞遷之路, 有違言官重選之意, 例當遷轉加資, 以示寵異之人。 外方守令十考居上者, 特加資級, 其他各品行守, 一從已成之典施行。 如此則東西班及京外敍用, 大略相均, 而人材選用之路, 庶不壅滯, 且無乘時冒濫之弊。 唯參外秩卑, 非參上之比, 滿十五月加資何如?” 上命東宮, 引見權踶、趙瑞康、李承孫, 議行守之法, 仍傳旨曰: |
初立行守之法之時, 予非不知有是弊也, 但行守之法立, 則執政者無擅便升降之權, 見用之人, 亦無僥倖冒受之望。 以是予立此法。 今政府引《源流至論》, 欲更立新法, 未知政府明見後日之無弊而有是言乎? 且《源流至論》, 何足取法哉? 唯贊成河演所議守令除授之法, 似有變通之宜, 庶爲便益, 欲從此議, 何如? |
權踶啓曰: “昔在太宗朝, 臺諫自相報復, 數見罷黜。 雖云報復, 然不以官爵爲念, 今也循資之法一立, 而士夫患失, 至於加資之月則雖經臺諫者, 公然呈單子, 以求爵秩, 廉恥之風掃地, 而士風不美, 一至於此矣。 《源流至論》, 雖不盡合於今, 但取其守職之節目耳。” 趙瑞康、李承孫啓曰: “河演所論外敍之法, 似爲便易, 然今吏曹以爲三四品少, 故有闕難補, 從河演之策, 雖以四五六品, 充三四品外方之闕, 是一二年之事矣。 若過數年, 帶四五六品者, 亦且少矣, 其可久行乎?” 東宮將是議以啓, 上曰: “高麗時有若李穡、鄭夢周, 國初趙浚、李叔蕃、河崙、閔霽等各立朋黨, 互相報復。 且河崙之家, 朝士昏聚曉散, 太宗深以爲患, 漸使解之而後已也。 今循資之法立, 而士風還爲不美, 予所不意也。 高麗之季, 或以金銀馬匹臧獲土田, 納賂受職者有之。 今之朝士待箇滿呈單子, 雖未免求爵之誚, 不有愈於納賂而受職者乎? 是則可謂之公, 而不可謂之私也。 卿又聞不得其志者之言而有是說也。 姑從河演之議施行, 若有防礙, 則隨後更議。 然今日所啓之言, 予當熟思之。” 因謂承政院曰: “初立行守之法, 所以杜奔競正風俗也。 高麗之季, 賂賄公行, 有如前項執政之臣受賂而得謗者或有之, 不受而謬遭謗毁者亦有之。 行守之法立, 則人無僥倖之心, 執政者亦免毁謗矣。 以是立此法耳, 非惡其速遷高秩而然也。 若此法之行, 或有防礙, 則參外十五月、五六品二十月、三四品三十月例, 一加資以通之如何? 此法非祖宗之成憲, 乃予創立也, 變而通之, 亦在我耳。 今以行守之法而致士風之不美, 予所未知也。” 又謂承政院曰: “前者承旨兼知吏兵曹者, 得參銓注, 故人以謂獨專政柄。 以是立六承旨臨時命參注擬之法, 人又謂人之參銓注, 各行所欲, 互相請托, 何以處之而可乎? 君上所問之事, 不必引嫌, 各言所志。” 左副承旨柳義孫、右副承旨黃守身、同副承旨朴以昌啓曰: “銓注當任之以專, 不可若是其紛紛也。 況吏曹判書參判, 每政入參, 獨有六承旨臨時迭入, 固爲未便。” 趙瑞康啓曰: “臣欲達者有日矣, 但嫌於臣身, 未敢發也。 大抵任人之道, 任則勿疑, 疑則勿任。 今日之承旨, 乃後日之參判, 正不正在人耳, 何獨正於參判之日, 而不正於承旨之時乎? 臣以爲專任爲便。” 上曰: “爾等之言然矣。 立行守之法, 乃欲興廉恥杜奔競也。 此法立則人無僥倖求爵之心, 執政者亦免其譏謗矣。 前者趙末生久掌政柄, 終得大謗, 是以有吏曹判書不過三年之議也。 爾瑞康, 其與大臣同議以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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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00권 25년 6월 22일 (을사) 003 / 행수의 법을 세울 것에 대해 논의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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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 박안신(朴安臣)·참의 이변(李邊)이 상언하기를, |
“이미 순자(循資)의 법을 세웠고, 또 행수(行守)의 법을 세워 시행하는 것은 관작(官爵)을 중하게 여기고 외람(猥濫)을 막으려는 것이니, 진실로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서울과 지방 모든 관리는 30개월이 되어야 만기가 되고, 세 차례 고적(考績)에 세 번 상위(上位)에 거(居)해야 가자(加資)가 허가됩니다. 9품 장사랑(將仕郞)에서 40여년을 벼슬하여서 성적이 가장 상등(上等)인 자가 이에 3, 4품(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동반(東班)에는 서울과 외방의 5품 이하 관원이 모두 1천여 명이나 되는데, 4품으로 승진되는 자는 일년 동안에 두어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반에는 번(番)을 당한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충의위(忠義衛)·갑사(甲士)가 3천 명이 못되는데 4품에 승진되는 자가 1년 동안에 40여 명이나 됩니다. 동반에 4품 이상이 아주 적으므로 매양 수령(守令)을 제수할 때에는 대개 군사(軍士)에서 출신한 자를 제수하게 되어서 정치(政治)의 체통(體統)도 모르는 사람에게 오랫동안 큰 고을을 맡겨 두게 되니, 어찌 능히 백성의 곤란함을 알겠으며, 여러가지 번잡(煩雜)한 사무를 결단하겠습니까. 또 문무(文武)는 일치(一致)인데, 제수하는 법이 동반에는 지나치게 엄중하고 서반에는 지나치게 경이(輕易)하니, 고르지 못하다는 탄식은 우선 두고서라도, 전선(銓選)하여 임용할 즈음에도 자못 구애되는 바가 있습니다. 동서반(東西班) 4품 이하에서 정(正)·종(從) 두 급(級)은 각각 한 계자씩 줄이거나 혹은 개월의 수를 반으로 줄여 가자(加資)하거나를 침작하여 시행하여서, 동서반을 고르게 하고 전선(銓選)을 편리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
하니, 의정부에 내려 주어 논의하게 하다. 황희·신개·권개 등이 논의하기를, |
“원류지론(源流至論)에 이르기를, ‘수령으로서 2백 석 이상 녹(綠)을 받는 자는 일체 과만이 되어야 실직(實職)에 제수된다.’고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모든 관리는 처음 제수될 때에는 모두 한 해 동안 수(守)로 시험당하고 이에 실직에 제수되어서 온전한 녹봉을 타게 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사(刺史)가 무재(武才)로 추천하여 승상부(丞相府)에 이름이 등록(登錄)되면 소시(召試)한 옛 과목(科目)을 상고하고 모두 수(守)로 시험하여 만 1년이 되어야 실직에 제수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릇 수관(守官)으로서 만기(滿期)가 되도록 그 직임에 알맞게 하자는 실직에 제수되고 알맞게 하지 못한 자는 그 전 관직으로 되돌려보낸다.’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동도 태수(東都太守) 한연수(韓延壽)는 수좌풍익(守左馮翊)으로 만기가 되도록 그 직에 알맞게 하여서 실직에 제수되었고, 영천 태수(穎川太守) 황패(黃霸)는 수경조윤(守京兆尹)으로 있다가 사건에 연과되어 영천 태수로 되돌려졌습니다. 그런즉, 한(漢) 나라 때의 수관(守官)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처음 관직에 제수되는 자에게 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인재는 중임(重任)을 감당할 만하나 계자(階資)가 낮은 자를 갑자기 발탁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알맞은가 않은가를 우선 시험하여서 제수하는 것이며, 관직 자급의 높고 낮은 것으로서 으레 제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달라서 모든 제도에 옛 것만 본받아서 시행하더라도 오히려 구애되는 것이 있어, 마침내 시행할 수 없는 것이 가끔 있습니다. 더군다나 옛 것을 본받고자 하면서 옛 제도대로 하지 않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또 본조(本朝)의 제도는 연령이 만 2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하는 것을 허가하므로 문과나 무과에 출신한 자는 모두 30세 이상입니다. 이제 행수(行守)로서 개월(箇月)을 따져 승자(陞資)하는 법을 보면, 무릇 벼슬길에 들어온 자가 임시 권무(權務)로부터 반드시 사고 없이 만 4, 50년의 임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3, 4품의 자급에 오르게 되는데, 벼슬하는 동안에 사고 없이 50여 년을 넘기는 자는 거의 없거나, 겨우 있은 정도입니다. 하물며 나이 40이면 노쇠(老衰)하기 시작하는데, 50여 년을 지난다면 쇠하거나 병들지 않고 직무를 감당할 만한 자는 드물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쓸 만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의지와 가개가 한창 날카로운 때는 하층(下層)에서 허우적거리고, 요행으로 높은 관직에 이르더라도 의지와 기개가 무디어져서 쓰기가 어렵게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순자(循資)의 법은 범상한 자에게 녹봉을 주는 데에는 가하거니와 어진 인재를 대우하기에는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의가 나날이 떨어지고 모람(冒濫)한 풍습이 나날이 더해가니, 순자(循資)의 법도 또한 전적으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은 원하건대, 〈행직(行職)에 대해서는〉 이미 시행하는 격례(格例)에 의거하여, 할 수 없이 서용할 자에게만 제수하고, 그 중에도 대간·육조 낭청(六曹郞廳)·의정부 사인(舍人)은 반드시 사람을 가려서 제수할 것입니다. 진실로 행수의 법에만 얽매이게 되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함께 침체(沈滯)하게 되어서 다스림이 체통에 어긋날 듯합니다. |
지금 좌랑(佐郞)은 정(正) 자급이 고만(考滿)된 자는 실직 5품으로 승진하고, 종(從) 자급이 고만된 자는 수(守) 5품으로 제수하였다가, 만 1년이 된 다음에 실직 정랑(正郞)으로 삼을 것이며, 사인(舍人)도 또한 이 예대로 할 것입니다. 그 외방 수령도 열 번 고적에 열 번 상(上)이 된 자로서 경직(京職)을 제수할 때에는 정 자급을 위와 같이 하고, 종(從) 자급은 한 자급을 올릴 것입니다. 대간(臺諫)을 천전(遷轉)시키는 데에도 또한 구례(舊禮)대로 하고 참외(參外)로서 본래 개월(箇月)이 없는 자는 예전대로 천전시키며, 그 외 각 품과 수령은 전(殿)이 적고 최(最)가 많거나, 전(殿)이 많고 최(最)가 적은 자는 예전대로 자급에 따라 시행할 것입니다. 무릇 종 자품인 수관(守官)으로서 당연히 실직으로 될 자는 다시 품계를 강등(降等)시키지 말고, 또 같은 자품에는 행(行)·수(守)라는 칭호를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행수의 법이 거의 옛 제도에 합치하고 지금에도 마땅하여, 어진 인재가 침체되는 탄식이 없고 범상한 사람이 모람(冒濫)하는 폐단이 없어, 진실로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
“4품 이하의 정·종 품계를 각각 한 품계를 감하고, 또 개월(箇月)을 반으로 줄이자는 청은 성헌(成憲)에 관계되니 경솔하게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다만 행수의 법에 대해서 신이 간절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동반 4품 이하, 6품 이상 각품의 첫 계자로서 봉덕랑(奉德郞)·통덕랑(通德郞)·승의랑(承議郞)은 9년 동안에 세 번 고적(考績)을 겪었으면 나머지 차례의 고적은 비록 달 수가 차지 않더라도 궐원(闕員)이 있을 때에 그 품에 맞게 올려서 천전시킬 것을 허락할 것이며, 수령은 고만이 되어 옮기게 되는데, 열 번 고적에 모두 상(上)이 된 자는 특이한 인재이니, 의정부 사인과 6조 낭청의 거관하는 예에 따라서 승진시키기를 허락할 것입니다. 수령을 제수할 즈음에 자품이 알맞은 자가 적은 것은, 과연 이조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상당히 구애를 받고 있습니다. 대도호부 목사(大都護府牧使)에 4품 자급으로서 가당(可當)한 자는 부사(副使) 또는 부목사(副牧使)라고 부르고, 도호부 5품에는 동부 부사(同副府使) 또는 판관(判官)이라 부르며, 지관(知官) 6품에는 부지사(副知事)라 부르도록 할 것입니다. 옛 제도를 상고하여 자세히 정하고, 경중(京中)에서 시행하는 수법(守法)과 같이 하여 형편에 따라 올리고 내리면 거의 사람과 품계가 서로 알맞아서 구애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동반의 참외(參外)를 제수하는 법은 신의 의견도 또한 여러 사람의 논의가 같습니다.” |
“구례(舊例)에 의정부 사인·육조 정랑은 국가의 여러가지 사무를 맡아서, 그 임무가 가볍지 않으므로, 사인은 봉열 대부(奉列大夫) 이상으로, 정랑은 통선 대부(通善大夫) 이상으로 좌랑은 승훈 대부(承訓大夫) 이상으로 품계를 고쳐서 거관시켰던 것입니다. 그 종자(從資) 이하는 수품(守品)으로 거관시키는데, 각각 정자(正資)로 승진된 뒤에 또 품자를 고쳐서 실직에 나아가게 합니다. 대간 내에 헌납(獻納)·지평(持平)·정언(正言)은 정랑·좌랑으로 승진되나, 장령(掌令)·집의(執義)·지사간(知司諫) 같은 관직은 승진하는 길이 없어 언관(言官)을 선택하는 것을 중시(重視)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예대로 승진시키고 가자(加資)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외방 수령으로서 열 번 고적에 상(上)이 된 자는 자급을 특별히 올리고 기타 각품의 행수는 일체 정해진 법에 따라서 시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동반·서반과 서울·외방에 서용하는 것이 대략 서로 고르게 되고 인재를 뽑는 길도 거의 막힘이 없을 것이며, 또 틈을 노려서 모람(冒濫)하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참외는 직질(職秩)이 낮아서 참상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15개월이 만기된 다음에 가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므로, 임금이 동궁에게 권제·조서강·이승손(李承孫)을 인견(引見)하여 행수에 대한 법을 논의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
“당초에 행수의 법을 세울 때에 이런 폐단이 있을 줄을 내가 몰랐던 것은 아니나, 다만 행수의 법을 세우면 집정자(執政者)가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고 하는 권한이 없어지고, 등용되는 사람도 또한 요행으로 모람되게 진출하려는 야망(野望)이 없어질 것이기에 내가 이 법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 정부에서는 원류지론까지 인용하여서 다시 새 법을 세우고자 하니, 정부에서는 후일에 폐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고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거니와, 원류지론인들 어찌 족히 취할 만한 것이겠는가. 오직 찬성 하연이 의논한 수령을 제수하는 법은 변통성이 있어서 거의 편익할 듯하니, 이 논의에 따르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
“옛날 태종조에 대간들이 스스로 서로 보복(報復)하여 자주 파출되었는데, 비록 보복이라고는 하나 관작(官爵)을 염려에 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순자(循資)의 법을 한번 세우자, 사대부들이 벼슬을 잃게 될까 근심하여, 심지어 가자하는 달 수가 되면, 비록 대간(臺諫)을 지낸 자라도 공공연하게 단자(單子)를 올려 관작을 구하니, 염치는 땅을 쓸어버린 듯하고 선비의 풍습도 아름답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원류지론이 비록 오늘날에 다 적합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그 수직(守職)하는 필목만 취하자는 것입니다.” |
“하연이 논한 외직에 서용하는 법이 편리할 듯하나, 이제 이조에서는 3, 4품 관원이 적은 까닭에 궐원이 있더라도 보임하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하연의 계책을 따라서 비록 4, 5, 6품으로서 외방의 3, 4품 궐원(闕員)을 보임한다 하더라도 1, 2년 동안에만 될 수 있는 일이며, 만약 수년(數年)을 지나면 4, 5, 6품을 가진 자도 또한 적을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
하니, 동궁이 이 논의를 가지고 계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고려 때에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같은 이와 국초에 조준(趙浚)·이숙번(李叔蕃)·하윤(河崙)·민제(閔霽) 등이 각각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서로 보복하였고, 또 하윤의 집에는 조사(朝士)들이 날이 저물 때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기도 하였는데, 태종께서 깊이 걱정하시고 점차 화해시킨 다음에 그만두었다. 이제 순자(循資)의 법을 세웠는데 선비의 풍습이 도리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고려 말엽에 혹 금은(金銀)·말 노비[臧獲]·전지 따위를 뇌물로 바치고 관직에 제수 받은 자가 있었는데, 지금 조사(朝士)들이 개만(箇滿)을 기다려서 단자를 올리는 것은 비록 관작을 구한다는 비방은 면할 수 없더라도, 뇌물을 바치고 관작을 받은 자보다는 낫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공정하다고 이를지언정 사정이라고는 할 수은 없는 것이다. 경은 또 제뜻대로 되지 못한 자의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우선 하연의 논의에 따라 시행하려니와, 만약 구애되는 일이 있으면 뒤에 다시 의논하겠다, 그리고 오늘 계달한 말도 내가 마땅히 익히 생각해 보겠다.” |
“당초에 행수의 법을 세운 것은 분경(奔競)하는 것을 막아서 풍속을 바르게 하려던 것이었다. 고려 말엽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진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데, 집정(執政) 신하로서 뇌물을 받고 비방을 듣는 자가 간혹 있었으나, 받지 않고도 그릇되게 비방을 받는 자도 또한 있었다. 행수의 법을 세우면 사람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지고, 집정자도 또한 비방을 면하게 되겠기에 이 법을 세웠던 것이지, 높은 직질(職秩)에 빨리 승진되는 것을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하여서 구애되는 것이 있으면 참외는 15개월, 5, 6품은 20개월, 3, 4품은 30개월만에 예대로 한 계급씩 가자시켜서 통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법은 조종의 성법(成法)이 아니고 내가 처음 세운 것이니, 변경하여 통행하게 하는 것도 또한 나에게 달린 것이다. 이제 행수의 법을 시행하므로써 조사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
“지난번에 승지로서 이조와 병조를 맡은 자만이 전주(銓注)에 참예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이 정권(政權)을 독단한다고 말하므로 여섯 승지에게 임시해서, 주의(注擬)에 참예하는 법을 명하였더니, 사람들은 또 여러 사람이 전주에 참예하고 각자 욕심을 부려서 서로 청탁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조처하여야 옳은가. 임금의 묻는 일에 반드시 혐의스러워하지 말고 각자 뜻대로 말하라.” |
하니, 좌부승지 유의손(柳義孫)·우부승지 황수신(黃守身)·동부승지 박이창(朴以昌)이 아뢰기를, |
“전주(銓注)는 마땅히 전담해야 할 것이고, 이와 같이 어지럽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조 판서와 참판은 매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마다 들어와서 참예하는데, 오로지 6승지만이 임시해서 번갈아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
“신이 아뢰고자 한 지가 며칠이 되었으나, 다만 신 자신의 몸이 혐의스러워서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대저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는 임용하였으면 의심하지 말 것이며, 의심한다면 임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승지는 이에 후일 참판으로 될 사람이며, 바르고 바르지 못함은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어찌 오로지 참판(參判)이 된 날에는 바르고 승지가 된 날에는 바르지 않다는 것입니까. 신은 전담시키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
“너희들의 말이 그럴 듯하다. 행수의 법을 세운 것은 이에 염치를 일으키고 분경(奔競)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 법이 서게 되면 사람마다 요행으로 벼슬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게 되고, 집정자도 또한 비방을 면하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조말생(趙末生)이 오랫동안 인사권을 맡았다가 마침내 큰 비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이조 판서는 3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너 서강은 대신과 함께 의논하여서 아뢰도록 하라.”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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