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 - 9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한강맨션. 건설기간 1969년 10월 ~ 1970년 9월 출처:추억의 편린들 멀리 보이는 남산에 남산타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던 시절의 모습. 아파트의 고급화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처음 시도됐다.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에 지은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첫 호화 아파트였다. 시민아파트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 으려고 ‘아파트’ 대신 ‘맨션’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계약 1호는 27평형을 구입한 탤런트 강부자 였다. 고은아, 문정숙, 패티 김 등 연예인들이 줄지어 입주했다. 분양이 대박 나자 당시 현대건 설 정주영 사장이 장동운 주공 총재에게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 다. 결과적으로 현대를 비롯한 대형 건설업체들이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위기를 맞았지만 뚫린 물길을 막을 수 없 었다. 바야흐로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의 문턱을 막 넘어섰다.
한강 맨션 아파트는 최초로 실물크기와 똑같은 모델하우스가 이용되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주택공사가 1969년 10월부터 1970년 9월까지 용산구 동부 이촌동 한강변을 끼고 건설한 아 ?
?1971년 당시 항공촬영된 동부이촌동일대와 한강맨션아파트의 모습. 출처:추억의 편린들 ?
6-70년대는 아직 한강변은 사람이 주택으로 산다는 개념이 있던 곳이 아니라 주변의 한강
변에서 강수욕을 즐기고 배타며 물놀이 하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아파트 단지를 정비하고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란 신개념의 주택을 세웠던 것은 어찌보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출처: 추억의 편린들 http://blog.naver.com/s5we/150185619615
?
?사진에 보이는 중앙과 우측의 굴뚝은 중앙집중 난방식(나중에 지역난방으로 전환)의 아파트 로 지어진 것이라 굴뚝이 높게 보이는데 사진 중앙의 꿀뚝 왼편 아파트단지는 주택공사에서 건설한 외인아파트였는데 현재는 재건축으로 고층의 ?한강자이 아파트가 들어섰고 중앙 굴뚝 에서 오른쪽 굴뚝이 있는 곳 까지 23개동의 건물이 한강맨션으로 지금까지 그모습 그대로 남 아있다. 외인 아파트 뒤편 이촌로 건너편에 보이는 아파트는 공무원 아파트로 현재는 재건축 으로 1998년 9월에 준공한 건영 한가람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 ?1971년 당시 유엔빌리지에서 찍은 제3한강교의 모습.
멀리 보이는 곳이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강남 반포일대 5
1971년 한강 인도교와 노들섬 ?1971년 6월 8일 한강 뚝섬유원지에서 보트놀이를 즐기는 시민들 1971년 뚝섬유원지 1972년 현 동작대교 위쪽 구반포 아파트 앞 서래섬(반포섬)이 살아있을 때는 호안이 자연스럽다. 사진:서울시 제공
오른편 상류에 한강철교와 인도교 그리고 노들섬 모습이 보인다.
?
1972년 5월 25일 반포아파트 와 강남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이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설 자리다.
영동(강남)지구 개발이 한창일 때 청담동 시영주택, 그 넘어에 영동대교 공사가 진행 중.
멀리 용마신과 아차산이 모습이다.
?을 지어 강북인구의 강남분산을 재촉했다. 영동교의 준공으로 청담동과 삼성동, 그리고 대치동에
?서 말에게 죽을 먹이던 양재동(옛지명 말죽거리)까지 값비싼 땅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인 다리가
?영동교이다. 영동대교는 1970년 8월 착공해서 1973년 11월 8일에 준공하여 길이 1.065m에 너비
?25m로 3년 4개월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국군의 날 공수특전단 고공낙하 시범 1974년 청담교 공사. 멀리는 영동대교다 한강의 청담대교가 아니고 탄천하류 한강과 합수되는 곳의 올림픽대로의 교량이다. ? ?1974년 8월 12일 한강 광나루 유원지 피서인파 ?1975년 5월 27일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부근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린이 ?잠수교 건설 착공식. 1975년 9월 ?1976년 7월 15일 강북사람들의 강남고속터미널 이용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착공한지 10개월만에 완공된 잠수교. 후에 복층다리로 건설되어 반포대교로 명명된다. 1976년 국회의사당 모습 ?1976년 9월 10일 개통된 천호대교 1976년 9월 15일 잠수교. 강북에서 바라본 모습 인도교 남단의 노량진 본동일대와 흑석동 모습 1977년 제방축조가 완료된 난지도 1977년 잠실 시영아파트
1977년 6월 18일 성수대교 건설공사 197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 분열
197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 분열 동작대교는 북쪽으로 얼음을 채빙, 저장하던 서빙고가 있던 곳과 남쪽으로 나룻배를 타던 동작 진이 있었던 반포동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 1979년 5월 16일 한강의 천호제방 1979년 7월 1일 뚝섬의 피서 인파 1979년 9월 23일 서울시 발전상 촬영대회 성산대교 건설현장
1979년 10월 16일 성수대교 개통
1980년 6월 5일 금호대교(동호대교) 기공식
1980년 7월 15일 개통된 성산대교? 1980년 10월 9일 제1한강교(한강대교) 확장공사
이촌동에서 현재의 한강대교 중간 노들섬까지는 드넓은 모래밭이었다. 지금처럼 강물이 흐르지 않았
지만 잡풀과 갈대숲이 우거져 있었고 모래언덕과 물웅덩이 사이를 걸어서 노들섬으로 물구경하러 가
고 여름엔 수영을 했고, 겨울철이면 스케이트와 설매를 타기도 했고, 얼음구멍을 뚫어 고기를 낚기도
했다.? 한강이 개발되기 전까지 강북에서는 한강 인도교 중간의 노들섬(중지도)까지 다리를 통하지 않 고 걸어갈 수 있었다. 노들 섬 주변은 동서로 동부이촌동에서 서부이촌동에 이루고 남북으로는 이촌동에서 노들 섬까지 이 어진 100만 평이 넘는 모래벌판이었다고? 땅이름 학회 '배우리' 명예회장의 고증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모래밭 마을이라는 뜻의 '사촌'?이라 부르고 모래밭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사촌 모경' 이라 해 용산 8경으로 치기도 했다. 모래언덕 가운데 하나였던 노들섬이 선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 들 어서였다. 1917년 한강북단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철제인도교를 놓으면서 다리가 지나는 모
래 언덕에 흙을 돋어 다리 높이로 쌓아 올리고 이곳을 '중지도' 라고 이름을 붙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된 둑을 1934년 복구했을 때 이 타원형 인공섬의 남북 길이는 165m였다.
노들 섬은 1995년 일제지명 개선사업에 따라 바뀐 새 이름이다. 노들 섬은 일제시대 창경원, 남산공
원과 더블어 근대적 유원지로 사랑받았고, 최초로 한강에 건설된 철제 인도교도 사람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에게 철제다리를 밟고 한강을 건너는 경험은 근대를 실감 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는 노들 섬까지 전차궤도가 놓여 한강 인도교역이 생겼고, 노들 섬은 가난한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가 됐 다. 해방 뒤에도 사람들은 섬 동쪽 고운 모래밭을 '한강 백사장'이라 부르며 여름엔 물놀이,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겼다. 한여름에 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 역에? 내리면 백사장에 피서객이 넘쳐 땅이 보
이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는 매년 국군의 날 에어쇼가 열리기도 했다.
1980년대 국군의 날
∼∼∼∼∼∼∼∼∼∼ 여기까지 50개 이미지 ∼∼∼∼∼∼∼∼∼∼ ?제1한강교는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됨에 따라 1979년 1월 4일 종전의 폭 27m에서
40m로 늘리는 확장공사에 착수, 1981년 12월 준공했고, 이후 1984년 한강대교로 개칭되었다. ?한강 인도교 이후(한강철교 제외)두번째 다리였던 1936년에 놓여진 광나루 다리인 한국전쟁 때 파괴된 다리의 철제 트러스 구간을 모두 제거하고 복구되어 노후화로 철거되기 전까지 사용했던 사라지고 없어져버린 광나루 다리 모습을 여기쯤에다 배열합니다. ▼
舊광나루다리(廣津橋). 현재의 광진교는 새로 건설한 다리다. 1936년 오늘날의 서울 동부 지역, 당시로 보면 경기도 고양군이었던 광나루에 또 하나의 다리가 놓 여진다?. 이 광나루는 서울에서 경기도 동부지역으로 가거나 원주를 거쳐 강원도로, 또는 충주 방면 으로 길을 잡아 영남 지방과 부산 동래까지 가는 교통의 출발지로 한강변의 중요한 나루터 중 하나 였다. 발동 기선이 차랑을 실어 날랐으나, 1930년대쯤엔 포화상태에 이르러 다리 건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광진교다. 한강 다리로는 (한강철교 제외) 두 번째로 지어진 다리지만 그 이후로 대교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후일 제2한강교, 제3한강교로 다리에 번호가 매겨질 때 그 일족으로 인 정 받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버티게 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광진교가 대교로 사람들 머리속에 각인되기에는 좀 빈약했다고나 할까, 해방 때까지 한강을 잇는 다리는 한강철교, 그리고 한강 인도교, 광진교 세 다리뿐이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광나루 혹은 광진나루라고 불렸기 때문에 광나루다리, 한자명으로 광진교라고 이름 붙였다. 다리가 높고 길어 고층교(高層橋)라고도 했으며 일명 광장교(廣壯橋)라 고도 불렀다. 서울 동남부 지역으로의 통행량이 늘어나 1934년 착공되어 1936년 10월 완공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2년 미8군에 의해 복구공사를 하며 파괴된 철골 트러스는 제 거 되었다. 이후 교통량의 증가와 구조물 노후로 인해 1960년 교각보수공사, 1972년 상판보수공사,
1985년 교각보수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전성 문제가 대두되어 2000년 완전 해체했다.
1984년 5월 여의도에서 열렸던 천주교 200주년 기념 집회 장면. 이재경 사진
16번째 한강교량, 1986년 2월 1일 올림픽대교 공사현장
광진구 구의동과 송파구 풍납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1985년 11월 20일 착공하여 1990년 6월에 준공하였다. 1988년 3월 잠실의 어느 차가운 개울물에 빨래를 하고 있는 부녀자들 - 경향신문
(57개 이미지)
이상으로 약 460 여개의 이미지로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을 끝 맺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 - 10 으로 모아보겠습니다 |
출처: 고향을 그리며... 원문보기 글쓴이: 한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