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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은 불운한 축구 천재였다. 그러나 김경일은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낸 지 오래다.(사진 송기찬) |
1998년 초고교급 미드필더 김경일“축구를 참 잘했다. 볼을 다루거나 경기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 또래에 비해 뛰어났다. 경기장에서 뛰는 22명 가운데 가장 빛났다.” K리그 각 클럽의 스카우트들이 밝힌 김경일에 대한 평가다. 김경일의 이름 앞에는 늘 ‘초고교급’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 당장 프로무대에서 뛰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고교랭킹 1위였다. 될성부른 떡잎이었고 창창한 미래가 보였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김경일에겐 따뜻한 햇살보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크게 성장할 것 같았던 김경일은 시들시들해지더니 어느새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김경일이 남긴 기록은 보잘것없다. 국가대표 경력은 고사하고 K리그에서도 6년 동안 29경기에 뛰어 1도움을 기록한 게 전부다. 기록만 놓고 보면 지극히 평범한 선수다. 웬만한 우수 신인선수의 데뷔 성적보다 못하다.
김경일은 지독한 부상 악령에 시달렸다. 해마다 2번 이상 수술대에 올랐다. 2005년 선수생활을 마치기 직전 마지막 수술까지 15차례나 댄 칼 자국이 양쪽 무릎에 남아 있다. K리그의 한 스카우트는 “참으로 안타까운 선수였다. 부상만 없었다면 최고의 선수가 됐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제2의 이동국김경일은 1996년 광양제철고 창단 멤버다. 현재 광양제철고는 고교 최강 가운데 하나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김경일을 축으로 전술을 짠 광양제철고는 1997년과 1998년 전국고교선수권대회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김경일은 1998년 KBS배고교축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당시 광양제철고 감독이 기영옥 씨다. 이젠
기성용(서울)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지만 금호고 감독 시절 윤정환(사간 도스)과 고종수(대전)를 키운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이 김경일이었다. 그래서 김경일은 곧잘
윤정환,
고종수와 비교됐다. 넓은 시야와 센스 있는 경기 운영, 정확한 패스, 뛰어난 볼 컨트롤 등 윤정환과 고종수에 견줘 나으면 나았지 뒤지진 않는다는 게 일선 지도자들의 평가였다.
기영옥 씨는 김경일에 대해 “직접 스카우트해서 데려왔다. (윤)정환이나 (고)종수 같은 스타일의 선수를 선호하는 편인데 (김)경일이가 눈에 딱 들어왔다. 경기 상황에 맞는 플레이는 물론 어린 나이에 경기를 즐길 줄 알았다”며 “(감히 말하건대)고교 3학년 시절에는 국내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상대가 없었다. (윤)정환이, (고)종수보다 잠재력이 더 뛰어났다”고 말했다.
김경일은 축구 천재로 통했다. 김경일도 이 같은 평가를 받아 들였다. “건방질 수도 있지만 솔직히 별도로 개인훈련을 하지 않는 등 남들에 비해 노력하지 않았다. 재능을 타고 났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천재 소리 들은 모든 선수들이 그럴 것이다.” 김경일의 설명이다.
그리고 김경일은 “(감독님이)가르쳐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이해가 빨랐다. 또 공이 오기 전 경기를 보는 시야가 좋았다. 미리 앞을 보고 패스를 했기 때문에 축구를 참 쉽게 했다. 난 빠르지 않다. 그래서 동료를 활용하는 플레이를 일찍이 파악해 장점을 최대한 키웠다. 참 영리했다”고 덧붙였다.
김경일은 1999년 신인드래프트 4순위로 프로무대에 들어섰다. 당시 4순위는 우선연고지명선수로 사실상의 1순위였다. 김경일이 전남 드래곤즈에서 받은 계약금은 1억 5천만 원이었다. 연봉은 1천800만 원. 1년 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이동국(미들스브로)과 같은 신인 최고 대우였다. 축구 관계자들은 김경일이 제2의 이동국이 돼 한국축구의 르네상스를 이끌기를 희망했다
짧았던 황금기김경일은 고교 졸업 후 프로팀이 아닌 청소년대표팀에 합류했다. 청소년대표팀은 1999년 4월 나이지리아에서 열릴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다. 정예 멤버를 가리기 위한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박창선 감독을 대신해 새로 지휘봉을 잡은 조영증 감독은 1999년 2월 호주 전지훈련을 떠나면서 김경일을 불렀다.
한 살 많은 형들 사이에서도 김경일은 눈에 띄었다. 조영증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은 “일찌감치 눈여겨본 뒤 소집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미드필더의 능력을 모두 갖췄다.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경기를 풀어가는 재주가 뛰어났다. 곧바로 주전 미드필더로 낙점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대표팀 시절은 김경일이 꼽은 황금기였다. 김경일은 “지금 다시 봐도 정말 잘했다. 내가 상상했던 게 모두 현실로 이뤄졌다”고 떠올렸다. 김경일을 비롯한 청소년대표팀에 대한 기대도 컸다. 16강 진출을 넘어 1983년 이후 16년 만의 4강 진출까지 기대했다. 김경일, 이동국, 설기현(풀럼), 송종국(수원), 김용대(성남), 김은중(서울) 등 선수들 면면도 화려했다. ‘역대 최강의 대표팀’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결과는 초라했다. 포르투갈, 우루과이에게 1-3, 0-1로 연달아 져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말리와 치른 마지막 경기에서 4-2로 이겼지만 축구팬들의 실망감을 없앨 수는 없었다. 6개월 전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2-1로 꺾었던 일본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기에 실망감은 상대적으로 더 컸다. 3경기 모두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던 김경일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축구 전문가들은 김경일이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수확이라고 했다. 조영증 국장도 “국제 경험을 쌓으면서 더 큰 선수로 성장할 것으로 믿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U-20 월드컵 이후 김경일은 더 이상 날지 못했다. 김경일은 “그때부터 시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때가 가장 정상에 올랐을 때다.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부상 그리고 15번의 수술1999년 K리그에는 르네상스가 왔다. 경기마다 구름 관중이 몰렸다. 195경기에 275만 2천953명(경기당 평균 1만 4천118명)이 찾았다. 흥행 요소는 안정환(수원), 고종수, 이동국의 트로이카 체제였다. 그 가운데 김경일은 빠졌다. 신인왕 후보에도 김경일의 이름은 없었다. 3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출전시간도 118분밖에 안 됐다. 부상 때문이었다.
1999년 5월 12일 울산 현대전을 끝으로 왼쪽 새끼발가락 피로골절로 주저 앉았다. 피로골절에서 회복하기 위해선 무조건 쉬어야 했다. 보통 재활까지 5~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김경일은 2개월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와야 했다. 구단으로서는 주가가 한창 솟은 김경일을 마냥 쉬게 할 수 없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복귀했으니 부상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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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축구교실 육성반 선수들과 함께. 오른쪽 아래 사진의 인성찬, 박주호, 주휘민(왼쪽부터)은 김경일 축구교실의 주축이다.(사진 송기찬) |
부상이 재발해 1년을 그냥 보냈다. 김경일은 2000년 7월 1일 안양 LG전을 통해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다쳤다. 그리고 또 주저 앉았다. 부상은 발가락과 발목을 거쳐 무릎까지 올라왔다. 김경일은 “구단의 잘못도 있지만 내 욕심도 문제였다. 프로에 데뷔한 뒤 축구팬들의 기대에 걸맞게 많은 걸 보여야 했던 시기다. 서둘렀던 게 화근이었다”고 말했다.
왼쪽 무릎이 계속 아팠다. 한국은 물론 독일과 일본 등 무릎 수술에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의료진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낫지 않았다. 계속 무릎이 빠졌다. 점점 심해졌다. 훈련할 때는 물론 자다가도 빠졌다. 처음에는 놀랐던 동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너 이제 무릎 빠질 때 되지 않았냐”고 놀릴 정도였다. 왼쪽 무릎에 이어 오른쪽 무릎도 탈이 났다. 온전한 곳이 없었다.
김경일은 “어깨가 빠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무릎이 빠지면 숨이 탁 막히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무릎 뼈를 다시 맞춰도 1주일 동안 걸을 수가 없다. 선수가 아닌 환자였다”고 말했다.
2002년과 2003년 1경기도 못 뛴 김경일은 2003년 말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전남 유니폼을 벗었다. 축구화도 함께 벗었다. 김경일은 “내 관리 소홀도 있지만 전남 구단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포기하려 했다.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경일은 박종환 감독의 권유로 2004년 대구 FC 유니폼을 입었다. 김경일은 이에 대해 “훈련도 제대로 안 했다. 한마디로 대구에 요양간 수준이었다. 난 이미 은퇴를 마음 먹었으나 평생 내 뒷바라지만 한 어머니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김경일은 2005년 마지막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더 이상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과 함께. 15번째 수술이었다. 의사는 김경일의 지독한 무릎 부상의 원인을 알려줬다. ‘선천적 왼쪽 무릎 바깥 뼈 함몰’이었다. 뒤늦게 부상의 원인을 밝혀냈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25살 김경일은 여전히 어렸다. 의료 소송까지 하려 했다.
김경일은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지금 알아낼 수 있는 걸 왜 5,6년 전에는 밝혀내지 못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치료했던 의료진이)괘씸했다. 정말 나같이 불운한 선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억지였다. 돌이켜보면 다 내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삶더 이상 축구선수가 될 수 없었다. 당시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매일 밤을 술로 지새며 방황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때려 죽여도 절대 축구로 밥 벌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축구는 운명처럼 다시 돌아왔다.
새벽에 만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열심히 일하는 환경미화원을 보며 자신이 많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삼촌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사무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경일이 버티기엔 힘들었다. 박차고 나왔다.
지난 1월 선배의 요청이 왔다. SKK 축구교실에서 어린 선수들을 맡아보라는 것이었다. 박주호, 주휘민, 인성찬 등 3명에 대한 개인 지도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가벼운 마음에 승낙했다. 이 결정이 김경일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김경일이 가르치던 3명의 부모들이 새로운 축구교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종의 독립이었다.
지난 6월 이지스 FC라는 팀과 함께 축구교실을 열었다. 운동장 섭외 등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선수 부모들의 도움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축구교실의 선수도 점점 늘어났고 8월에 열린 서울시 프로스펙스배 풋살대회에서는 저학년부 준우승을 했다. 10월부터는 ‘김경일 축구교실’이라는 이름을 걸었다. 유소년 지도자로 확실히 뿌리를 내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김경일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유소년 지도자로서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난다. 난 이제 저물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아니다. 훌륭한 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불운한 축구 천재 소리를 많이 들었다. 축구를 그만둘 때는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아니다. 축구가 있어 난 행복하다. 축구 때문에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난 이제 축구선수가 아닌 지도자 김경일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지금 운영하는 축구교실을 어설프게 하지 않고 차범근 축구교실, 김포 이회택 축구교실에 버금가도록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재기에 대한 꿈은 버렸을까. 김경일은 웃으며 말했다. “예전엔 산에 오를 때마다 다시 한 번 해볼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무릎이 퉁퉁 부어 올라 있다. 지금도 평소 생활하는데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낀다.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런데 어머니께선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도 선수로 뛰기를 희망하신다. 특히 언론에 내 이름이 나오는 걸 보실 때마다 그러신다. 방금 어머니께 인터뷰 중이라고 했더니 다시 축구선수가 되려 하는 줄 알고 흥분하셨다. 앞으로 한동안 어머니에게 시달려야 할 것 같다”
※아버지! 아버지!김경일이 기억하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는 1996년 3월 29일 광양제철고의 창단 후 첫 경기다. 광양제철고는 1996년 3월 20일 창단했다. 그리고 9일 후 순천고와 전국체육대회 전남 대표 선발전을 가졌다. 김경일은 선발 출전해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두 팀은 2골씩 주고 받으며 비겼다. 그렇지만 김경일이 이 경기를 꼽은 데에는 고교 첫 경기의 중요성보다는 개인적인 특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지켜 본 김경일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김경일의 아버지는 간암으로 요양과 치료를 위해 서울을 떠나 광양에서 생활했다. 김경일도 함께 내려왔다. 아버지는 그동안 한 번도 아들의 훈련이나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다. 김경일은 “부모님께서 축구하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셨다. 그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 구경 한 번 안 오셨다. 그런데 병세가 악화된 뒤 내가 뛰는 걸 보고 싶다고 오셨다. 기분 좋았고 의욕이 넘쳤다. 나름대로 그 경기에서 상당히 잘했다”고 기억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잘했다”는 칭찬조차 할 수 없었다. 간암 때문에 말문이 막혀 눈만 뜨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김경일은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읽을 수 있었다. 흐뭇해 하셨다. 내가 뛰었던 경기 가운데 가장 가슴 찡한 경기였다”고 말했다.
SPORTS2.0 제 78호(발행일 11월 19일) 기사
이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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