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문학도 시대를 반영한다. 그때그때 직각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고, 획을 그을 만한 한 시대가 충분히 흡수 정리된 후에 반영되기도 한다.
언론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 오던 대선 정국은 지난 주 한 후보의 전격적인 사퇴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주의 시 읽기는 이런 정국을 맞은 우리나라 정치 사회상을 풍자 은유했다고 생각되는 두 편의 시를 골라 보았다.
백락(伯樂)의 죄*
김 일 곤
말은 풀과 물을 먹고
흥이 나면 저희들끼리 목을 비비고
노여우면 발길질을 한다
그들의 생각은 기껏해야 여기까지
그런 그들에게 굴레 씌우고 재갈 물리고
이마치레까지 하고는 의심하니
갖은 꾀를 내는 것
가로대를 부수고 멍에를 벗어던지고
재갈을 물어뜯고, 고삐를 끊어버리는 짓을 한다
모두 백락의 죄다
옹기장이나 목수가 다루는
찰흙과 나무의 성질이 어찌 그림쇠며 곱자이고
갈고랑쇠며 먹줄이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백락을 말의 명인이라 하고
옹기장이와 목수를 장인이라 칭찬한다
하지만 착각일 뿐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북돋아주는 일,
추우면 길쌈을 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배가 고프면 농사를 지어 배부르게 먹도록 기 살려주는 일
각자가 타고난 성품을 쫓아
의심할 나위 없이 자유를 키워주는 일
세상을 경영한다 해 놓고
사람들로 애써 꾀를 생각하고 앞 다투어 이익을 쫓으니
이것 또한 죄, 백락의 죄다.
* 장자의 외편에서 소재를 가져옴.
**위의 글은 제목부터가 독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것 같다. ‘백락(佰樂)은 사람 이름인가, 사람이면 누구일까?’ 하고 본문을 읽어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한 답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글의 소재가 된 ‘장자(莊子)’를 읽은 적이 있는 독자는 금방 기억을 떠올려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위의 글은 ‘장자(莊子)’ ‘마제편(馬蹄篇)’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을뿐더러 그 내용도 거의 원문과 같기에, 먼저 ‘마제편’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에 송나라 사람으로서 노자(老子)의 ‘無爲自然’ 사상을 기초로 하여 더 발전시킨 사상가이다.
‘莊子’(莊子書)는 內篇 7편, 外篇 15편, 雜編 11편 모두 33편으로 되어 있는데, 外篇에 속해 있는 馬蹄篇의 내용은, 말(馬)을 잘 다루었던 ‘伯樂’이란 사람의 이야기와 陶工과 木手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禮樂과 仁義를 세운 聖人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역자(譯者)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가 있겠지만, 漢文을 직역해서 비교적 원문에 충실한 글 중 ‘伯樂’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릇 말은 땅에서 살면서 풀을 먹고 물을 마신다.(夫馬 陸居則食草飮水)
기쁘면 목을 맞대고 비비며 성이 나면 등을 돌려 서소 뒷발로 찬다. 말의 지혜는 이 정도 일 뿐이다.(喜則交頸相靡 怒 則分背相제 馬知已此矣)
그런데, 가로대와 멍에를 씌우고 재갈을 물려 조련하려고 하면(夫加之以衡扼 齊之月題)
말은 꾀를 내게 된다.(而馬知介倪)
가로대를 부수고 멍에를 벗는가 하면 재갈을 물어뜯고 고삐를 끊는다.(인扼摯曼詭銜竊비)
그러므로 말의 지혜가 마치 도둑과 같은 행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故馬之知而態至盜者)
백락(伯樂)의 죄(罪)라 할 수 있다.(伯樂之罪也)
이 원문과 해석을 보면 김일곤 시인이 1연에 쓴 글과 내용이 같다. 그래서 시인이 말미의 *주에서 밝혔듯이 ‘백락의 죄’란 제목의 글은 새로 창작한 것이 아니고 ‘馬蹄篇’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연도 마찬가지로 ‘馬蹄篇’의 ‘陶工과 木手’의 이야기를 원문의 내용과 뜻에 맞추어 썼고, 3연과 4연에서도 ‘성인(聖人)’에 관한 馬蹄篇의 이야기를 받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끝행에서 ’성인의 죄다‘라고 해야 할 곳에 ’백락의 죄다‘라고 바꾸어 쓴 의미는 잘 모르겠으나 제목과 맞추어 쓰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작자는 왜 장자의 마제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고 있을까? 직역이 아닌 馬蹄篇의 해석을 더 살펴보면 그 뜻에 짐작이 갈 듯하다.
말을 잘 다스린다는 ‘伯樂’이라는 사람은 결국 말을 자연 그대로 잘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꾸미고 훈련시키면서 오히려 그 본성을 그르치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陶工이나 木手 또한 흙과 나무를 둥글거나 네모난 것으로 변형시키고, 굽은 자나 곧은 먹줄에 억지로 따르게 하는 일이 모두 그 본질을 깎아버리는 것이듯이 사람 또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소박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聖人’의 禮樂이나 仁義가 되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훼손하고 있으니 罪가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저간의 우리의 사회 정치 현상, 특히 18대 대선을 앞둔 정국을 보면서 2000년도 넘게 지난 중국 전국시대 장자의 ‘馬蹄編’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시로 변경되는 교육정책, 무상 보유정책, 쏟아내는 대선 공약 등이 진짜 국민의 복지와 민생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 방향성과 허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이 ‘馬蹄篇’을 풍자의 자료로 대치해서 성토하고 있다고 본다. 거기에 이 글의 목적이 있고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패러디나 비유의 어떤 詩的 장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을 詩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장르도 무너트리고 문장을 해체하는 경향이 있는 현 시점에서 독자의 생각에 따라 각자가 판단하면 되리라고 본다.
승부차기(페널티킥)
노 창 재 (맹순)
가령, 가장 얍삽한 승부를 가리는 방식을
장깽보라 부른다 치면
그 얍삽에 소금을 뿌리고 그 얍삽에 간장을 치고
또 그 얍삽에 후추를 치는 것 쯤이 승부차기 아니겠는가고
저어짝 어드메에선 그걸일러 페널티킥이라 한다는
아슬한, 찰라, 순간, 이런 어감들이
정지하는 그 순간, 혹은 멈춤의 서늘한 칼날에서
절망, 환호를 가장 가까이서 재단하는 확인의 영역까지
우리의 벼림은 대체로 숨가쁘다
역동과 정지 그것을 그 만큼 기막히게 연출 해 준 배우는 없었다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다. 왜냐고?
그들은 최후의 전사들이니까
그들은 반칙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승부차기의 선상에 혹은,
전선의 마지막, 백병의 보루를 지나, 전우도 떨치고, 오로지 혼자서 외로우니
그래서 만약, 그들을 위해,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프란시스코 고야
고야의 가면쯤을 빌릴 수 있으리라는
**승부나 선택을 가릴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흔히 간단한 ‘가위바위보’(장깽보-일본말)로 정하게 된다. 시인은 이 방법을 ‘얍삽’하다고 봤다. 이 방법이 어떤 기준에 의해 당당하게 겨루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동작이나 눈치를 봐서 얕은 꾀 같은 것으로 이겨내는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얍삽에 간장을 치고 후추를’ 쳐서 말하자면 방법을 좀 개선 발전시킨 것이 ‘승부차기’라고 하였고 물 건너 ‘저어짝 어디메선 그걸 일러 페널티킥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승부차기’와 ‘페널티킥’은 사실은 그 위치와 차는 모습은 겉보기로 같지만 근본적으론 다른 것으로, 페널티킥은 파울을 범한 팀에 벌칙으로 주는 것이고, 승부차기는 경기에서 0 대 0으로 경기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그야말로 승부를 가리기 위해서 차는 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시한 정의(定議)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이번 대선에서의 어떤 후보들의 경선방법을 두고 ‘승부차기’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승부차기에서 키커와 골키퍼가 맞서는 그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 ‘찰나’, ‘순간’, ‘혹은 멈춤의 서늘한 칼날’과 같은 언어들이 우리의 가슴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영겁’ 같기도 한 숨막히는 그 시간을 집중하는 키커나 골키퍼의 심장은 떨림이었을까, 멈춤이었을까? 성공이냐, 실패냐?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확인하는 절망과 환호는 엇갈린다.
‘전선의 마지막, 백병의 보루를 지나, 전우도 떨치고, 오로지 혼자서 외로우니’ 그들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최후의 전사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고야의 가면’도 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의 시선과 가슴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시인의 필력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방법을 개선했다 하더라도 승부차기보다는 물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본경기를 선호하는 듯하고 독자 또한 그러하다.
이제 숨가쁘게 치달았던 경선 정국도 허탈하게 끝나고 말았다.
제목의 (패널티킥)은 없애는 것이 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