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구성원으로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에는 각종 모임, 집회가 너무 많아서 참 부담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연중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흥회, 각종 사업, 각종 행사, 각종 교육, 각종 직분과 사역 때문에 정신이 없다. 모임에 빠지면 보이지 않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 같아 그것도 은근히 부담스럽다. 내 경우, 직장생활에 쫓기면서 교회가 강요하는 각종 모임에 다 참석한다는 게 참 무리다. 원만한 사회생활과 자기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시간관리에 지장이 많은 게 솔직한 고백이다.
찐빵의 생각;
아무리 교회에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에는 가끔씩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귀찮아 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우리 인간의 인간적인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지켜야 하는 것은 교회가 본래부터 지닌 사명을 어느 경우에도 외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예배, 전도, 친교, 봉사라는 네 가지 일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일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즐겁게 신명을 내서 하는 경우가 있고,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누군가가 만일 타인의 눈치를 의식하여 후자 쪽에 서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의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힘들게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비교해 본다면 너무나도 미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일을 할 때의 마음 자세는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하고 싶군요. 은혜의 옷을 입고 교회의 일도 즐겁게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얻는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사회생활도 열심히 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겠지요. 한 가지 일을 하자니 또 다른 하나의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능히 두 가지 일을 모두 즐겁게 잘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41. 기업화된 교회, 웅장한 교회가 주는 위화감이 싫어!
외국의 교회는 아음이 참 편하고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귀국해서는 교회에 다닐 마음이 나지 않는다. 치밀 주도한 각종 헌금체계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교회! 일반 대기업과 무엇이 다른가?
찐빵의 생각;
교회가 기업화되어 있다고 한 말은 아마 오늘날의 교회 재정 운영 체계가 그만큼 조직화, 능률화,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실제로 큰 교회들에서는 이미 컴퓨터 전산망을 통해 재정관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살림 규모도 커지고 살림 규모도 커지다 보니 또 그 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재무 관리 기법이 도입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특히 신도를 하나하나가 귀히 바친 헌금을 낭비 없이 제대로 관리하여 옳은 곳에 정확히 사용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헌금 받기를 즐겨 원한다기보다는 신도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제 가진 물질의 일부를 돌려드릴 줄 알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해야 더 옳은 답이 됩니다. 교회는 하니님의 말씀과 신도들의 믿음을 이어주는 항구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밖에서 외형만 쳐다보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좋은 일들에 직접 동참해 보시기를 먼저 권합니다. 이 세상에는 규모가 작아서 좋을 일도 있겠지만, 규모가 커서 좋을 일들도 더 많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군요.
42. 빈민구제 외면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말하는 빈민구제는 교회의 임무 중 아마 ‘봉사’ 영역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갖가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참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압니다. 물론 사회 구석구석에서의 구제사업도 포함됩니다. 먹지 못하는 이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일차적인 일 말고도 예컨대 빈민촌에서 탁아소 봉사를 한다든가, 낙후된 농촌지역에서 영농선교와 함께 부업지도를 한다든가, 식수난으로 고생하는 외딴섬들을 찾아다니며 우물을 파준다든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준다든가, 불우노인들을 돕는다든가, 무의탁 장애인들을 맡아 거둔다든가, 윤락여성들을 돕는다든가, 교도소를 찾아 다니며 수형자들을 돕는다는가, 무료 의료봉사를 한다든가, 극빈계층의 법률상담을 해준다든가, 학용품 책 의류들을 수집하여 저들을 돕는다든가 하는 일들을 가지의 개교회 목회 사역자들과 크고 작은 선교단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땀흘리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43. 교회에는 쓸 만한 총각이 없다.
찐빵의 생각;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잘 리드’ 한다는 게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젊음이의 기분대로 ‘박력’이나 ‘재미’만으로 ‘괜찮은 남자’의 자격 기준을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렇게 단세포동물일 까닭이 없습니다. 인간의 품성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기준 요건들이 따라야 하는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남자라면 우선 온유한 가운데 스스로 겸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남자라면 자기를 반성하면서 상대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되고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인생의 지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기필코 실현해 낼 수 있는 신념도 갖춰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무엇이고, 소망이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남자, 그런 남자가 정말 남자다운 남자 입니다. 말을 바로 하자면,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춘 훌륭한 젊음이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사회 입니다. 정말로 괜찮은 젊은 남자를 찾는 것이 교회에 다니는 솔직한 목적 중의 하나라면 교회야 말로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할 장소일 것입니다. 이제 남자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추는 일만 젊은이에게 남았습니다.
44.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의 메카니즘 . . . . . . 싫어!
내가 아는 한에서 교회라는 곳은 늘상 입으로는 ‘범사에 감사할 것’을 신도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신앙기업’에 다름이 아니다. 모처럼 큰맘 먹고 주일예배에 참석해 볼라치면 그 끝없는 탐욕의 메카니즘에 기가 질리고 만다. 얼른 들으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좋은 말 같지만 기실 그 내용과 행간을 잘 뜯어 보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를 계속 헌납하라는 탐욕의 연속이다. 교회에 헌금 더하라, 교회에 봉사 더하라, 교회에 순종 더 하라가 결국 그 내용의 본질인 것이다.
찐빵의 생각;
우리는 흔히 우리가 아까운 소유물을 떼어 교회에 공짜로 바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베풂과 허락 없이 어떻게 내가 나의 재물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젊은이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과 다른 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하나님 말씀의 귀한 사업장이며,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잘과 정신과 섭리를 하나님의 영역권 내 소유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결론을 내지요, 헌금은 스스로 즐겁게 바칠 때만 은혜가 된다는 점 잊지 말기로 합시다. 내가 스스로 즐겁게 헌금하게 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도 그중 한 방법입니다. 절대로 헌금에 대해 불필요한 부담감을 갖지 않기를 권합니다.
45.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을 보지 못해 실망했다.
말로는 전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옹졸할 뿐만 아니라 계산적, 타산적, 이기적인 편협한 사람들 일색이었다. 부흥사 등 더로 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도 보았는데 내 눈에는 순 그 방면의 직업적인 사람들로 보였다. 진심으로 올려볼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찐빵의 생각;
인간이면 누구나 신처럼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미흡함과 부적함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가운데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변모시키여 부단히 노력하는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 사회입니다. 사족처럼 또 하나 곁들이자면 이런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는 그야말로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우리 눈에 그렇게 잘 안 띄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거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해답이 나옵니다. 내 관찰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의 존재를, 자기의 선행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사회를 세심히 들여다 보년 크든 작든 나름대로 엄청난 눈물과 피와 땀의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복음전도를 위해 성자 못지않은 지성으로 오직 묵묵히 실천 헌신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면 위, 빙산의 일각만 보고서 깊고도 거대한 빙하의 규모 전체를 속단한다는 아마 그것은 ‘젊음의 특권’ 밖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46.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
예수님은 항상 만인을 평등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을 낮추고 낮은 곳으로 임하라 명령하셨는데 오는날 우리네 교회의 낮은 곳에는 언제나 나와 같은 끗발 없는 평신도들밖에 없다. 보이게 안 보이게 귀족 따로, 평민 따로의 계급이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형편없는 인간들도 각종 헌금을 왕창 많이 내기만 하면 교회의 귀족이 된다.
찐빵의 생각;
세상적인 필요목적에 의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시는 심정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밖으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 때가 많고, 보고서도 못 본 척 외면해야 할 때가 목사님들한테는 참 많답니다. 그러면서 혼자서 남몰래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지요. 맑지 못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 언젠가는 맑은 심성으로 돌아오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지요. 맑지 못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 언젠가는 맑은 심성으로 돌아오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지요. 말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온유한 마음으로 참으면서 기다리는 목사님의 모습, 장로님들의 모습은 평소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이의 경우와 같은 부정적 시각에는 잘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언의 실체를 헤아리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신실한 자기 신앙을 쌓아 가는 것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코앞의 산도 볼 수가 없답니다.
47. 교회는 고리타분해서 싫어!
친구 따라서 교회에 몇 번 가봤다. 교회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고 해서 간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을 꾹 참았는데도 갈 때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목사님은 만날 고리타분한 얘기만 하고, 교인들도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고리타분했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 재미도 없는데 귀한 시간만 허비하고, 게다가 사람들 눈치 때문에 헌금까지 해야 하니 솔직히 말해서 이중, 삼중고를 사서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다른 교회는 혹 어떨지 약간은 궁금하지만 결국 교회는 다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 하고 있다.
찐빵의 생각;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난 다음, 나는 나이 쉰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을 심중에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을 나는 꿈에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두터웠던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그렇게도 괴롭고 거칠기 짝이 없던 사나운 풍랑도 한 순간에 걷히고, 그야말로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내 인생의 항로에 비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물가물 암담했던 시야가 맑은 눈으로 또렷이 트이고, 그렇게 힘들어하던 하루하루의 삶은 한 순간에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닫힌 문이 열리고, 꼬인 것은 바로 펴지니 불면증까지 없어졌습니다. ‘아, 지금껏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가 절로 내 입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지금 당장 교회에 나가기가 싫다면, 이것 하나만은 염두에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괴롭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누군가가 내 곁에서 내 운명을 긍휼과 사랑과 전지전능한 힘으로 찌켜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입니다. 그냥 손을 뻗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놀라우신 그분이 젊은이의 손을 굳게 잡아줄 것입니다. 손만 뻗으십시오.
48 양보 없는 일등주의 세속성 환멸
누구나 대부분 처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착한 일 해서 착한 사람’, ‘좋은 일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보람을 누렵보고자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가보기 시작했는데 정작 들어가서 보니까 많이 달랐다. 교회 주변에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이 참 많은데 그들을 돕는 데는 너무 소극적이었다. 교회로 들어오는 그 많은 헌금은 구제 사업보다 ‘일류교회 만들기 운동’에 우선적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앞세운 그런 식의 일등주의 추구라면 허구헌날 일류, 일등, 최고, 최대를 외쳐대는 시정(시정)의 장삿속 기업형태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낮은 곳으로 임해야 된다고 맨날 설교는 하면서도 생생나는 높은 자 리나 명예를 딸 기회라면 죽어도 양보할 줄 모르는 집단이 교회 아닌가도 묻고 싶다. 나는 늘 양보하면서 낮은 곳에서 소리없이 착한 일하는 희생정신을 배우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느낌이다.
찐빵의 생각;
교회활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겉모양만 보면 ‘일부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눈에 띄어 거슬릴지 모르지만 그 속을 오래토록 찬찬히 제대로 관찰하다 보면 그 세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위안 속에서 구원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교회도 패배하는 교회보다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나름의 합리적인 경영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누구나가 머리로는 높은 이상을 추구하되 두 발로는 현실의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산혜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의 기근을 앓는 모양이 참 안타깝습니다. 처방은 하나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우선 마음을 비우고 말씀을 정독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음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49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적 설교-속보여
정의감이나 시대의식이 결여된 소위 해바라기성 속물 목사들이 싫다.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현실 안주형의 설교를 하는가 하면, 집권 정당의 안보논리나 안정논리를 신도들에게 강요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상가 타협하기만을 일삼는 기회주의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목사뿐만이 아니라 장로들도 한통속이다. 무식해서 그런지 정말 저질 속물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설교를 듣노라면 은혜를 받는게 속에서 마구 열불이 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지성, 신념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선거 때는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은근히 지지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 다음부터 교회에 가기가 싫어졌다. 어디에 좀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며 진취적인 ‘열린 교회’가 있는지 지금 나는 알아보는 중이다.
찐빵의 생각;
정말로 설교 중에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보아도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신성한 곳이어야지 세 속의 정치 따위에 관여하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과격하거나 성급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일면도 함께 있습니다. 연세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자기의 주관적인 속마음을 쉽사리 열어놓기보다는 주위 여론과 환경 추이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적당한 타협선을 찾아 온건심의 형태로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중용지덕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급히 단정하여 어떤 일방의 값으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통해 오래도록 수양을 많이 한 분들 가운데는 가급적 과격한 급진주의를 피하고 대신 온유와 자비와 인내로써 때를 기다리는 경우가 흔한데 젊은이가 지적하는 경우도 혹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인생을 100미터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사는 쪽보다 42.195킬로미터를 꾸준히 달리는 그런 쪽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삶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50 교인들은 인간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찐빵의 생각;
‘인간적으로 화끈하게 소주 한 잔’이라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왕년에 참 많이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얘기인데 술자리 대화에서 ‘화끈함’이라는 것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한 번 따져볼 만합니다. 술기운을 빌어 나누는 대화라는 게 대개는 과격한 말로 누구를 헐뜯거나 정치체제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직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거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심중에 쌓인 감정의 찌거기들을 쏟아내버리는데는 다소 효과가 있겠지요. 실제로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남의 욕이나 잔뜩하고 난 다음에 부산물로 따라 오는 공허감이나 좌괴감은 그냥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구관계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벽을 허물고 속마음을 털어 놓는게 좋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반드시 휴유증과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친교나 교우에서도 성경말씀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방식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최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지요. 그냥 조금 더 깊이 교회식 친교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피와 목숨까지도 바칠 만한 헌신의 아름다움과 생명 긴 인간미의 진정한 관계를 그 안에서 기필코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세속적인 재미는 못 구할지 모르지만 대신 젊은이는 사랑의 참된 의를 그 안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51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겁주는 곳은 싫어
친구 따라 교회엘 몇 번 가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가만 보자니까 교회 목사는 우리 인간의 여러 가지 약점을 꼬투리로 삼아 마구 신도들을 야단치거나 또는 인간의 완벽하지 못한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곳은 합리적, 논리적이거나 인간적인 대화나 공감의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야단칠 수 있단 말인가. 속직히 포켓볼을 하거나 볼링을 치면서 재미있게 놀 수도 있는 그런 시간에 교회까지 가준 것만도 내딴에는 큰맘 먹고 간 터인데 처음보는 사람으로부터 도매금으로 야단을 맞고 나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음은 물론 만정이 다 떨어졌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뒤로부터 나는 교회라는 곳에 대해 흥미도 관심도 갖지 않고 살기로 했다.
찐빵의 생각;
재미로만 따지자면 교회는 당구장보다 확실히 부족함이 많은 곳입니다. 또 목사님들 나름으로는 성격이나 설교 습관에 따라 그 모양이 각기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찾는 목적이 설탕이나 만화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금, 충고, 또는 자기성찰을 구하는 데 있다는 생각도 한 번 쯤 아울러 해보시기를 권유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교회의 재미없음’에 있다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즉물적 쾌락 지상주의에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보다 본질적인 면까지를 함께 반성하게 되는 군요.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하는가, 그 숙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우선 교회라는 ‘재미없는 곳’에 가서 한 번쯤이라도 자신을 낮춰보기 연습을 해보는 것이 필요한 듯 싶은데........, 글쎄요. 지금 이 얘기가 고리타분하다 싶거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쓴 약을 마시게 될 때, 왜 약은 설탕처럼 달지 않고 써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지금 이 얘기를 꼭 한 번만 다시 떠올려주시기를 당부하고 싶군요.
52. 헌금 명단 공표, 속보인다
찐빵의 생각;
할 말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건하고 순수해야 할 주일예배시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좋은 일일수록 남로르게 하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의 본분을 다소 벗어난 세속적인 행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양면의 진실이 있듯이 교회를 새로 개척하여 모든 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목회자의 처지도 우리가 한 번쯤은 이해의 눈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헌금은 어떤 경우에도 억지로 무리해서 바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도 결코 반겨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기꺼이 되돌려 드리는 것이 평신도들의 헌금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날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젊은이는 아마 알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의 의미를 아버님께 자연스럽게 설명해 드리고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는 가급적 옮겨 버릇하지 않는 쪽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의 좋은 점만 골라보려고 노력하세요.
53. 일요일에 늦잠을 잘 수가 없다
늦잠도 실컷 잘 수 있고, 목욕탕에도 갈 수 있고, 모처럼 자동차도 손볼 수 있는 날이 바로 일요일 하루 아닌가. 그런 여러 가지 것을 포기하고 무리하고 교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자면 자연히 예배시간에는 피로와 졸음을 못 이겨 잠을 자게 된다. 잠을 자다 깨서 보면 남들한테 미안하고, 또 죄의식과 좌괴감도 느껴지는 게 싫어서 아예 교회를 빼먹는 경우가 있다. 나라는 이런 존재가 과연 구제불능으로 많이 나쁜 사람일까?
찐빵의 생각;
결론부터 말하자면 젊은이는 절대로 구제불능이거나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와 꼭 같은 생각을 나도 가끔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계산으로는 모처럼 일을 떠나서 쉴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주일 하루야말로 일주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주일은 세상에서 찌든 영혼과 육신을 편히 쉬게 하는 안식의 날입니다.
교회 예배 때문에 육신을 쉴 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육신은 육신만으로 제 감당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혼에 의해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안식을 취하게 되면 육신도 따라서 자연스런 안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육신이 피곤하다는 것은 곧 영혼이 피곤해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돌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우선 영혼의 안식부터 도모함이 순서일 것입니다. 영혼의 안식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수고롭고도 무거운 영혼의 짐을 우선 주님께 맡겨 내려놓은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입니다. 주일예배의 뜻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주님 닮게 가꾸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교회에서의 주일예배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로부터 얻는 기쁨과 감사를 함께 찬양하고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주일예배인 것입니다.
54. 자유로운 사고와 모험정신 억압해서 싫어
교회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조금만 튀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 곧 찍힌다.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진취적인 모험정신이야말로 젊은의 특권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기계에서 제조된 모형 공작물이나 인형처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만을 요구한다. 우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간이다. 답답해서 교회에 못 다니겠다. 교회에서 젊음을 발산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놀란 말인가? 답답한 교회에서는 형식적인 질서와 균형, 화석처럼 굳어진 율범, 그리고 정죄와 회개라는 이름의 감상주의만이 허락되는 것 같다. 교회는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 미치겠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지금 한창 나이의 청년으로서 자기 개성과 자기 인격의 독립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 여겨집니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자기 환경에 대해 다소 반항적이 되고 현실로부터 일탈을 꿈꾸기도 합니다. 교회가 따분해져서 교회를 벗어날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전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싶기도 하고 생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 가보고도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머니의 치마폭과 같은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공식이 눈에 선히 보입니다. 그냥 돌아오면 다행이겠는데 사실 많은 상처와 후회를 안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럴 바에야 그런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아야 현명한 처신이 됩니다. 열차가 레일에서 탈선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로 인해 큰 불행을 겪게 되겠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만일 어떤 생각을 잘못 먹은 열차가 하나 있어서 “아, 맨날 똑같은 레일 위를 달리다 보니 따분하고 답답하구나.”하고 이제 제 궤도를 이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하지요? 교회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인생 운행을 약속할 수 있는 탄탄한 레일과 같습니다.
요란하게 기적을 몇 번 울려서 스트레스를 해소한 다음, 그런 다음에는 심기일전해 자기에게 주어진 레일을 감사하게 달리는 것이 현명한 열차의 선택일 것입니다. 전사의 갑옷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갑옷은 화살과 독침을 막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의 갑옷이요 레일입니다. 둘의 몇 가지 공통점을 안전, 감사, 그리고 은혜입니다.
55. 교회에 안 가도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나?
나는 하나님의 존재름 믿는 사람이다. 한때 교회 청년부 생활도 했다. 그래서 내게는 하나님이 확실하다. 그러나 교회에 가기는 싫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 혼자 내 방에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면 기분이 좋은데 교회에 가기만 하면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스트레스란 주로 교회의 제도나 형식주의에서 오는 것, 그리고 사람들끼리 부딪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가깝게 모시기 위해 작년부터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참고 교회에 계속 나간다면 자칫 하나님조차 멀어질까봐 겁난다. 반명, 궤변 같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내 생활도 옛날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진실하고 건실하다.
찐빵의 생각;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갈 때 나를 전도한 친구 윤형주 장로가 그러더군요. “교회에서 상처받는 사람도 더러 있다오. 교회도 역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이지요. 3년 동안 찾아다녀도 찾지 못하던 악질 빚쟁이를 어느 날 교회에서 마주쳤다는 사람도 있답디다. 그러니 교회에 갈 때는 사람들을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만나로 간다고 생각하시오.”
믿음이 깊은 윤형주 장로는 교회를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일단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결함 투성이의 인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사회를 모든 면에서 완전한 조직집단으로 보려 하는 기대심리를 갖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면들 가운데 그 기대심리가 하나라도 적중하지 않을 경우, 크나큰 실망감에 휩싸이거나 심지어는 허망감과 배신감에까지 이르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부터 부족한 인간, 또는 인간사회가 완전할 까닭이 없습니다. 교히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인하고 스스로의 죄를 회개하려는 이들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한계를 비춰보기 위해 모인 집단입니다. 미국의 종교가 매카나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실천’이라는 말이 여기 등장합니다. 실천 가운데는 회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어 있고, 용서도 포함되어 있고, 구제와 교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와 선교가, 봉사와 헌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공동체생활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실천’들은 방안에 앉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자폐증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방구석의 자기한계로부터 탈출하여 우선 밖으로 나오기를 젊은이에게 권합니다. 말씀의 성전을 다시금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56 목사의 지적 수준이 낮은 것 같다
내가 겪어본 목사님의 설교는 이 복잡다난한 현대사회를 너무나 단순하고 고루한 흑백논리로만 판별하고 있었다. 문학이니 예술이니 심리학이니 또는 인류의 정신사조니 사상적 변천이니 따위를 이 목사님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있는지 의심이 갔다. 지적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막무가내식의 그런 설교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할머니 신도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답답하고 공허한 생각이 들어서 교회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나는 종교에 대해 지금도 관심이 있기는 있는 편이다.
찐빵의 생각;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참된 신자가 교회에 가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만 보인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 속담에도 그 비슷한 “글 못쓰는 녀석이 붓타령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목사님의 설교 수준을 탓하기 전에 먼저 복음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신의 마음 자세에 혹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를 먼저 반성해보라는 조언도 한마디 해주고 싶군요. 적어도 교인들 앞에 나선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우리 평신도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명을 받은 전문직으로서의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평신도 입장에서 목자의 자질을 의심해야 하는 경우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터이지만, 그러나 이단 사이비 종파가 아닌 다음에야 목자가 어린 양들한테 옳지 못한 길을 가라고 인도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 대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도하는 방법과 기술이 다소 정교하지 못하다거나 또 설교의 매너가 젊은 신세대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는 혹 있을지 몰라도 그 말씀의 ‘수준’을 의심해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원래 배부른 사람은 산해진미도 성에 차지 않는 법이지요. 젊은이 스스로가 하루 빨리 복음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57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 대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찐빵의 생각;
하나님은 영겁 저쪽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안에 가득 차서 살아계십니다. 하나니은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부터 백까지를 다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부터 백까지를 다 일일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은 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뜻의 동작’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잡혀 보이지 않을 따름입니다. 차원의 단위가 한시적인 우리 인간과는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 뱃 속의 태아가 제 어머니를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탯줄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뱃 속의 태아가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만일 제 어머니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의 자장이나 인력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체의 유전인자나 모든 동식물에 해당되는 생명세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 생명세포의 성장체계나 소멸과정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주의 은하계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홀몬 분비나 엔돌핀, 비타민 성분들, 각종 영양소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고 하면 이쯤해서 우리는 항복을 해야 합니다.
‘있다’와 ‘없다’를 가름짓는 기준은 눈에 ‘보인다’와 ‘보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안다’와 ‘모른다’가 되어야 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보다는 볼 수 없는 사물의 존재가 훨씬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엄존하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우리 인간이, 대자연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세상만사에서 왜 악은 반드시 패하고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까? 왜 선한자에는 반드시 축복이 내려지는 것입니까? 이 엄연한 섭리 앞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58 교회 분쟁, 종파간 힘겨루기 이해 못해
찐빵의 생각;
분쟁이나 파벌의 발생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인 ‘순종’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갖고 그 내막을 잘 들여다보노라면 그것들이 대부분 저마다 발전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몸짓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또 분쟁이 정말 실제 분쟁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개신교의 언로가 그만큼 열려 있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지요. 상호 의견 제시가 자유롭고 불만의 표출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 열린 언로가 아직은 음지에 있지 않고 양지에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좋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다소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썩어서 곰팡이가 필 염려는 없는 것이겠지요? 교회의 내분들도 그런 주된 내용은 서로가 다투어 보다 발전적이고 상향적인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이지 결코 세상의 풍속처럼 자리다툼이나 이권다툼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어느 경우, 그 방법들이 다소 세련되지 못하여 보는 이들을 은혜롭지 못하게 만드는 수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방법이나 모양새만 보려 하지 말고 그 속에 흐르는 참 뜻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런 종파의 다양성이 바로 우리 개신교 발전의 활력소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함께 헤아려야 합니다. 당연히 나는 그것조차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확일로 인한 침체나 딜레마보다는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며 공존 발전하는 이쪽이 오히려 역동적 소지가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59 이중인격자들 많아 교회가 싫어져!
교회의 중책을 가진 사람들이 도덕적인 면은 물론, 각종 비양심적인 사회적인 비리까지 저지르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좋은 말을 앞세워 근로자들을 착취한다는가, 탈세를 밥먹듯이 한다든가, 경찰 등 공무원과 결탁하여 토착비리로 지탄을 받는다는가, 부도를 내고 달아난다든가, 뇌물을 먹고 시침뗀다든가...., 이 모두가 이중인격자들 아닌가.
찐빵의 생각;
교회에 이중인격자가 많다고 했는데, 그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앞의 ‘교회에’를 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원래가 이중, 삼중, 사중인격자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가변적 심성을 36국면으로까지 나눈 적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누구나 순간적으로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 가운데서도 선한 감정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오 헨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직립보행 상태로 머리가 좋고 혀가 좋아 일견 만물의 영장인 듯이 여겨지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간교하고 악랄하며 가장 비열할 수도 있고 추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어찌 비단 이중인격뿐이겠습니까. 일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인간의 근원적 죄악의 소지를 다 알아차리시고, 그 모든 죄를 한 몸에 다 뒤집어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중인격, 삼중인격의 원죄적 숙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여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완벽한 인간이라고 치부하는 데는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는 미천한 우리 인간에 대해 한 번도 ‘환멸’을 느끼시는 적이 없으시답니다.
60 헌금따라 사람대접 달라
찐빵의 생각;
목사님들은 머리가 좋은 분들입니다. 신앙심이 범인들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분들입니다. 세상의 고난의 인내로써 감내하며 예수의 형상처럼 살고자 늘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자신이 그 길을 선택했고, 그로써 또 하나님에 의해 당신의 종으로 선택받은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물질 확보에 눈이 어두워 자신이 선택한 귀한 길에 스스로 세속의 흙탕물을 끼얹을 까닭이 없습니다.
성직자의 시련 제1조가 바로 물질 기준에 의한 세상 평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그분들입니다. 물질로부터 초월해 있지 못하다면 결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신도 입장에서 목회자를 왜곡되이 의심하거나 폄하하거나 하는 것으 믿은 이의 신분상 상당한 죄악에 속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보는 시각이 비뚤린 사람의 눈에는 비뚤린 사물만 보인다지요? 먼 발치에서 사시로 목사님을 보려 하지 말고 아무때나 가까이 다가가서 스스로 목사님의 따뜻한 손을 잡아보시기 권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얼굴을 바로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관계의 첫출발입니다.
61 교회의 단순논리에 내 지적 사고력이 퇴행?
미안한 얘기지만,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서 하는 얘기들은 너무 단순하다. 선 아니면 악, 건전 아니면, 퇴폐, 열심 아니면 나태, 사랑 아니면 저주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뿐인 것이다. 이러다가는 이 젊은 나이에 내 왕성하고 분방해야 할 지적 사고력이 노인네들처럼 단순화되고 퇴행하는 것은 혹 아닌지 은근히 걱정될 때가 많다.
찐빵의 생각;
‘인간적’으로나 정서적, 감정적, 사상적으로나 성경 안에는 우리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느낌의 예범들이 넘쳐나리 만큼 많이 담겨 있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경 얘기를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들이나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노라면 참으로 다양한 갖가지 형식과 종류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배신과 비리와 부도덕, 패륜이 등장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인간군상들이 삶의 양태와 갖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놀라우리 만치 세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울삼지 않을 수 없는 무수한 얘기의 사례들이 엄청나게 등장합니다. 그 다양한 얘기의 재미와 스케일에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비단 젊은이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등장하는 얘기나 논리들을 ‘단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필경 성경을 제대로 탐독해보지 않은 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젊은이가 ‘지적 사고력의 퇴행’을 걱정하고 있는데 인간의 지적 사고력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어디로부터 왔는가, 또 그것이 애초 누구로부터 주어진 능력인가를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권합니다. 우리 인간을 애초에 누가 지으셨는가를 떠올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능력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해 본다면 젊은이의 너무나도 철없는 그 기우가 우습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슴은 ‘퇴행’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이 올바르도록 밝게 비취 인도해 주는 매우 전진적이고도 발전적인 거대한 횃불입니다. 단언하건대, 성경말씀이 비추는 대로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그 길은 지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가장 완벽한 궁극의 길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희망과 용기와 지혜와 지식을 얻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기 권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좇아 학문적으로 성공해 왔는지를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위인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제 정치적, 사상, 예술적 업적을 쌓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우리가 추구했거나 추구하고 있거나 추구해 나가야 할 모든 가치와 질문과 해답들이 우주적 차원으로 가득 담긴, 진정한 지혜의 보물창고가 바로 성경이랍니다.
62 마음의 터놓을 깊은 친구가 교회에는 없다
행복이 있으면 번민도 있듯이 인생이라는 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버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미소띤 얼굴로 양지 흉내만 내면서 교제하자니 속직히 깊은 맛이 없어 답답하다. 그래서 내 진자 친한 친구 몇몇은 교회 바깥에 있다. 가끔 친구들 마나서 소주 한잔 탁 멀고 속마음 다 털어내놓고 꽥꽥거리고 나면 교회생활에서 은근히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기분이 참 좋아진다. 인생이라는 게 그래야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나? 모르겠다.
찐빵의 생각;
지금껏 교회생활을 ‘슬슬’했다고 했지요? 거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깊은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지금껏 젊은이가 교회의 사람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깊이 들아가 보세요. 그 안에 오히려 인생이 온갖 희비애락이 다 있습니다.
번민도 있고, 눈물도 있고, 차마 말이나 글로 다 형용하지 못할 엄청난 사연들이 너무나 많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주 한 잔 먹고’ 사람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깊고고 깊은 참회의 심정을 여한없이 다 토로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젊은이가 하나님의 말씀 능력 가운데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의 인정 속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답답함’이 그렇게 스트레스로 쌓이는 것입니다. ‘깊은 친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까 깊은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지 내가 만일 먼저 허심탄회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면 어느 환경에서도 의기 투합하는 친구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교회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한테 혹 있지 않나를 반성해 보기를 권합니다. 나도 괄호로 맺지요.(그렇다고 해서 ‘족발에 소주 한 잔’의 긍정적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님).
63 진화론을 전면 부인하는 교리 못 미더워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빨이 안 맞으니까 다른 교리도 미덥지 못하다.
찐빵의 생각;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범하고 있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학교에서 진화론만 가르치게 하고 창조론을 가르치게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무려 1세기 가까이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지요. 실제로 다윈은 젊은 시절에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원시적 생활을 하는 부족을 찾아내어 저들이 바로 유인원의 한 족속이라고 공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그가 다시 섬을 방문했을 때 놀랍게도 그 부족은 그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다니며 문명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다윈의 진화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들이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왕년에 진화론을 숭배하던 학자들도 지금은 “종에서 종으로 변화하는 대진화의 증거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간이 라미테쿠스와 같은 작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배운 지식을 잠시 소개하지요. 유명한 해부학자 주커만 경이 진화론자들이 유인원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그것은 원숭이의 뼈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소위 자바인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골의 경우, 조사 결과 머리뼈는 원숭이의 것이었고, 대퇴골은 인간의 뼈로 나타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들의 발견장소가 15미터가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바인의 뼈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듀보아 같은 학자로 죽기 직전, 자신이 발견한 것이 꼭 유인원의 뼈는 아닐 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화석으로 남아 있는 유골들도 사실은 원숭이 뼈 아니면 인간의 뼈였던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의 뼈도 유인원의 뼈가 아니라 인간의 뼈입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종교재판을 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 종교인들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고 지성인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성경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당시의 과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과학적인 주장이 당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세기나 지배해 온 진화론을 우리시대의 지식계급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유전인자 연구의 권위자인 칼 박사, 윌슨 박사 등이 북미주, 아프리카, 유럽, 중동, 아시아, 뉴기니아, 호주 등지의 원주민 147명의 태반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모두 한 여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우리 인류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 즉 노아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64 교회에서 연애하는 것 많이 봤다
찐빵의 생각;
같은 교회생활을 하니까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많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말씀의 축복 속에서 좋은 생각으로 좋은 삶을 살 확률’이 훨씬 높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가능만 하다면 나는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세계 안에서 연애를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이 바깥세상에서 노는 것보다는 교회 안에서 노는 것이 훨씬 건전하고 안전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서 청춘남녀가 서로 아름다운 사랑을 키우다가 그러다가 뒷날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내가 무엇보다도 부러워해 마지 않는 ‘모태신앙’의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문을 활짝 열고, 일단 교회세계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관찰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고, 나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는 능동적인 젊은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는 주연 따로 조연 따로가 없습니다.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가 다 주연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도 교회세계안에서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누군가를 마음놓고 사랑하십시오.
65 엉터리 목사 많이 있다
헌금도 말고, 매매도 말고, 그냥 돈과는 일절 상관이 없는 그런 교회는 혹 어디 없을까?
찐빵의 생각;
어느 종교나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어서 일까요? 성직자의 비리에 대한 기사들, 소문들은 나도 더러 알고 있습니다. 고해성사 때 애정고백을 듣고 파계해버렸다는 신부 얘기도 들었고, 밤이면 가발 쓰고 유흥가를 출입한다는 중 얘기도 들었고, 남의 재산을 탐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며 사리사욕을 꾀했다는 목사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지 아무튼 세상이 그렇게 돼가고 있네요. 그러나 세상에는 오로지 말씀이 명하는 바에 따라 누구보다도 가장 낮은 곳에서 오롯한 희생과 헌신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훌륭한 성직자들이 백 배 천 배나 더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부 지방의 어떤 생선에 일시적으로 비오브라 균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평생 생선을 먹지 않고 사는 바보가 되어야 옳습니까?
사과 상자 안에 가끔씩 썩은 사과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평생 과일을 먹지 않고 살아야 옳습니까? 서울 시내 어느 지역의 공기가 특히 탁하다고 해서 평생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수많은 훌륭한 교회들과 수많은 훌륭한 성직자들이 헌신 사역하고 있는 사회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답니다. 그냥 단순한 시각 차이일까요?
66 뭔가 달라야 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기독교인이면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시선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인이고 싶은데, 그리고 인간의 감정은 가변적인데 어떻게 맨날 똑같은 교과서적 모범생 노릇만 꾸며 다닐 수 있나? 서양사람들은 종교를 믿어도 늘 누구나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우리나라만 유별만 것 같다. 으......지겨워!
찐빵의 생각;
사실 처음 한때는 나도 젊은이와 모습이 비숫했습니다. ‘지겹다’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냥 무언가 몸에 잘 맞이 않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다소 불편했지요. 그러다가 차차 익숙해지니까 지금은 참 편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몸과 마음이 자유롭긴 했지만 불안했지요. 마치 어두운 밤에 낯선 비포장도로를 뒤뚱거리며 달릴 때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밝은 대낮에 잘 놓아진 레일 위를 안전하게 달리는 듯한 기분입니다. 실수할 염려가 없어 좋고, 충돌한 염려가 없어 좋고, 구렁텅이에 빠질 염려가 없어 좋고, 방향을 잘못 잡아 헷갈릴 염려가 없어 언제나 마음이 놓이니 그것이 참 좋습니다. 마음이 마냥 편하니까 남의 시선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젊은이의 경우처럼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 자기의 생활이 무언가 믿음의 양심에 비추어 약간씩 잘못되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자유분방한 젊은 나이의 사람들한테는 기독교적 삶이라는 게 더러 하나의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족쇄를 바로 보는 일입니다. 언뜻 그 족쇄라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인생의 안정행로를 약속하는 레일이자 자기를 사탄으로부터 온전하게 지켜주는 갑옷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얽매여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마시고, 스스로 조금씩 마음을 크게 키워가면서 그 형식을 하나씩 마음의 우리 안에 거두어 길들여가는 젊은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남의 시선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다짐이자 소망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습니다.
67 교회비판 절대 함구는 불문율인가?
어릴 때는 잘 모르고 그냥 교회에 다녔는데 철이 들면서 보니까 문제점들이 눈에 하나씩 띄기 시작했다. 교회는 한마디로 매우 보수적, 폐쇄적, 이기적, 권위적 집단이다. 대표적인 것이 누구도 교회제도를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비판을 하는 즉시 사탄으로 매도된다. 건전한 발전적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중세의 로마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 교회도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내 이대로라면 나는 교회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찐빵의 생각;
내가 알기로는 교회에서 금기가 되어 있는 것은 교회비판이 아니라 그 비판이 왜곡 비약하여 자칫 하나님 비판으로 이어질까봐 그것을 금기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의 비판, 또는 그에 준한 비판적 태도가 현실로 나타나거나 그럴 우려가 발생한다면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될일이지요.
하나님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오롯이 엎드려 순종하고 복종할 절대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 인간에게는 그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을 비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첨삭 수정하거나 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속 교회에서 근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아무튼 만의 하나라도 교회 내에서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교회가 어떤 특수한 인맥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이기 때문에 가령 연령이 높은 계층과 젊고 진취적인 계층간의 의견차이가 능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혹 개선 노력에 접근하는 이들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가능한 일일까요? 개혁도 하나님이 필요하신 때를 골라 하나님이 하신일이 아닐까요? 교회의 부분적인 나무에 지나치게 민감해 하는 대신 교회의 큰 숲을 보고자 하는 온유의 태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8. 사기꾼 목사를 봤다.
우리가족은 모두 교회에 나가다가 지금은 천주교 성당에 다닌다. 어차피 나는 그 어느쪽도 별로 열심인 편이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이 천주교로 돌아선 데는 사연이 있다. 우리교회의 목사가 신도들의 돈(교회 돈을 포함)을 떼먹고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해외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며칠 전만 해도 하나님을 소리 높여 부르며 눈물로 기도하던 목사가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 얘기를 LA에 있는 친척한테 했더니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서, 또는 다른 핑계로 들어와 주저앉아버린 사기꾼 비슷한 불법 체류 목사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 한테 말하고 싶으실테지만, 그 사건은 내 평생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찐빵의 생각;
사실 이 항목을 싣지 말고 그냥 빼버릴까 생각하면서 이 글쓰는 작업 자체를 며칠 동안 덮어놓았다가 지금 마음을 굳게 다져먹고 다시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게 실로 얼마나 교활한 영물인가 싶고, 또 가끔씩 종교나 신앙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이들의 도구로도 쓰이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을 잃지 말고 사안의 본질을 가려서 생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줄 압니다. 만의 하나라도 젊은이는 문제의 핵심을 기독교냐 천주교냐의 이분법으로 비교하지 말기를 우선 바랍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 충실하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배신한 자가 끼어 있었지요? 나라의 대통령 중에도 더러는 비리 인물이 있을 수 있고, 훌륭한 학교 선생님이나 뛰어난 예술가들 가운데도그릇된 사람은 끼어 있을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남의 얘기를 끌어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말을 서로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도 알게 모르게 나쁜 죄악을 얼마나 많이 짓고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까? 열 번 회개하고 반성하고 기도하고 하는 가운데서 잠시나마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다시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매달려서 조금이라도 죄를 덜 짓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든 성당에 나가든 아무튼 젊은이가 좀 더 신앙의 깊이를 쌓는다면 언젠가는 그 목사도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그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지요? 이 사실 하나를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9.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
중학교 때 한동안, 그리고 고교 때도 1학년까지는 가끔 교회에 다녀봤다. 그런데 대학에 올라온 이후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 ‘어쩐지’ 에 대해서 지금 곰곰 생각해 보고 있는데 결론은 이런 것이다. 교회의 각종 제도가, 각종 불문율이, 교회 사람들이 각종 형태나 눈치나 수준이 싫은 것이다. 교회가 지능적으로 교묘히 돈을 밝히는 것도 물론 매우 싫다. 이런 생각을 무례하게 써서 미안하다. 그러나 솔직히 예수님은 좋다. 교회에 나가서 그냥 혼자서 예수님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아무 교회에나 기꺼이 나가겠다. 당장 오늘이라도!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언젠가 반드시 신실한 신앙인으로 제 모습을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지금 내게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훌륭하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도 얼마나 반가운 가능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은 누구누구처럼 멋진 사람이 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수준 높은 사람으로 고고히 살겠다는 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수준’에 맞지 않는 세리와 창녀와 장사치와 좀도둑들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멀리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거짓말이 됩니다. 에수님을 사랑하려면 우선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하지 못한 그 문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예수님 근처에 접근할 자격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오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70 내 능력 이상의 교회직분을 강요한다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내게 성가대원이 되라 하고 또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야 된다고 은근히 강요한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야 가르치고 말고 할 게 아닌가. 교회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보통 아니다. 그래서 요새 갈등이 심하다.
찐빵의 생각;
믿음이 돈독한 이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 않고 교회를 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문을 모두 활짝 여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보는 곳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생활과 활동반경의 중심부로 생각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릴 것이지만 그 일이 말처럼
하루아침에 쉽게 되기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선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고 당분간 시간을 버십시오. 그 다음에 따르는 문제가 소위 능력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완벽한 능력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젊은이에게 완벽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것을 드리면 그것이 바로 교회를 잘 섬기는 자세가 됩니다.
71 꼴보기 싫은 사람 많아 교회에 못 가겠다
교회생활 가운데 제일 지겨운 것이 저 혼자 잘난 척, 저 혼자 경건한 척하는 꼴 보기 싫은 사람들과 대하는 것이다. 이중인격자로 내 눈에 보이는 그런 사람들한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지도자인척하는 태도도들이다. 겉으론 겸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과시욕에 젖어 있다. 나서기 좋아하고 생색내기를 좋아한다.
찐빵의 생각;
세상을 살면서 남과 자신을 함께 돌아볼 줄 알면 어른이고, 남의 행동만 탓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면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아이지요.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자기와 행동반응이 다르다고 해서 미워하고 꼴보기좋차 싫어하자면 굳이 교회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교회는 바로 ‘예수님 공부방’과 마찬가지니가요. ‘예수님 공부방’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정반대의 생각을 얻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의 마음속에 혹 교만이라는 조그만 마귀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고놈만 제거해 버리고 나면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뻐 보일텐데요.
72. 이성교제에 제약을 받는다
찐빵의 생각;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기의 중심’을 갖고 산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길만이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이요.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올바로 헤아려 아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남자가 만일 젊은이 곁에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남편감입니다. 그런 남자가 가는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면 젊은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사랑과 결혼을 약속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의 ‘매력’이 있습니까? 똑바로 깨인 눈으로 세상과 자신의 미래와 그리고 남자의 참된 값어치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73 음치 열등감 때문에 찬양 재미없다
찐빵의 생각;
찬송이나 찬양은 ‘멜로디를 붙인 기도’입니다. 그 멜로디를 소화하는 기술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 원래부터 개인차가 심한 법이지요. 훈련된 음악 전공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조금씩은 음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숲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새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까? 만일 숲 속의 새들이 모두 하나 같은 목소리밖에 내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노래 부르는데 음치라고 해서 그 노래 듣기 싫다 하실 부모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음치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잇습니다. 멜로디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대신 남조다 더 열심껏 찬송할 줄 아는 귀한 심성을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성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74 지옥 협박, 고립주의 이해 안 가
찐빵의 생각;
이미 오래 전 얘기지만 나는 잠시 동안의 교회생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의 교회생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의 교회시절을 떠올리면 언뜻 기억나는 게 무시무시한 지옥 불구덩이 협박이고, 그 뒤에는 항상 겁을 주는 징벌협박(채찍)이 따른다. 속 보이는 당근과 채찍......., 사람을 뭘로 보는가. 나는 교회식으로 세상과 고립된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화목하고 친근하게 잘 지내려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는 섭리라고 부릅니다. 우연과 섭리를 구분해서 볼 줄 아는 혜안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말로는 왜 그렇게 처참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늘아래 최강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왜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오늘의 우리 인류 위에 덮여온 에이즈의 공포나 환경재해의 공포는 애초 어디서부터 그 사단이 비롯되었는가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의 교리를 당근과 채찍과 술수쯤으로 허술히 여기는 젊은이의 비뚤린 시각이 심히 염려됩니다. 또 젊은이는 세상의 가치를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해석의 오류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악투성이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사랑과 봉사와 희생으로 껴안아야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75 나 자신의 이중생활이 가책스러워
찐빵의 생각;
동물들은 성욕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성욕 표출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만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성욕과 관련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삽니다. 사회적 동물이자 생각하는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표출의 자유 못지 않게 규범과 상식에 따른 절제의 의무가 함께 지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젊은이는 절대로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조율의 의지가 다소 약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신실한 믿음의 생활훈련을 통해 육을 압도할 수 있는 영의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