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1절 -32절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구세주여'
바벨탑 그리고 셈과 데라의 족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대홍수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같은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의사소통이 매우 편합니다. 그러기에 외국에 사는 한국교민들 뿐 아니라 타국에 사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부담과 애로사항은 언어입니다. 말이 부자유하기에 충분한 표현이 안 되고, 표현이 다르기에 위축감과 충족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참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고, 특히 언어와 음식에는 한 나라의 문화가 농축되어 있어서 같은 언어 사용에서 오는 정서적인 교감과 내적인 만족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글로 성경이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 말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언어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 언어를 개발하며, 모국어의 기반 위에 다른 나라 언어 습득을 통해 인생을 확장시켜 가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5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2절의 ‘시날 평지’는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바벨론평지로 봅니다. 한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높은 탑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닿고자 한 것입니다.
6절에서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자 그 광경을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탑 공사 현장에 개입하셔서 하나였던 언어를 여러 언어로 나누셨고 마침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 인간들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곳곳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성읍을 건설하고 함께 모여 살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 것은 사람의 경향인 것 같습니다, 때론 높은 곳에 올라가면 몸이 잘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람은 전반적으로는 높은 곳을 지향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도 전망 좋은 높은 층이 더 비싸기도 하고, 고급 레스토랑도 전망 좋은 높은 층에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높은 탑에는 거의 고급 레스토랑이 있고, 전망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속성이 높은 곳을 지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 하는 것입니다. 곧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인간 스스로 가장 높은 정점에 서서 추앙과 경배를 받고 지배하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이 될 수 없고 그것은 곧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고 범죄 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교만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여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 되어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착각하고, 사람들을 낮게 보고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자기가 받으며 영화를 누리려 합니다. 교만은 실로 타락하고 범죄 한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러기에 교만할 작은 것 하나만 있어도 금세 교만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 한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늘 교만을 조심하고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겸손으로 초대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 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언3:3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4:10) 그러므로 매일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살피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복된 지혜이며 순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 말씀을 인정하고 말씀에 우선권을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부터 26절은 노아의 장남 셈의 족보에 대한 말씀이고, 27절에서 32절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5장 아담의 족보에서부터 오늘 본문의 족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에 이르기까지 많은 족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에는 그 이유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알려주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 셈의 족보의 특징은 대홍수 이후 모든 인간이 죽은 뒤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과 창세기 5장의 족보와는 달리 낳았다는 말만 있지 죽었다는 말씀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홍수로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이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등장을 통해 여전히 인간을 구원해 가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900년을 살건 400년을 살건 유한과 영생은 비교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의 복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과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일깨우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받은 자로 겸손으로 오늘도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격 없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 주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겸손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 언어의 소중함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2. 타락한 인간의 두드러진 속성은 무엇입니까?
3. 겸손이 무엇입니까?
4. 겸손한 자를 귀히 여기시고 겸손한 자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작성: 이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