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02. 15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저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정조 12) 서울~?
이성(李姓)에 대한 변증설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이성(李姓)은 농서(隴西)가 근본으로 치음성『徵音姓, 치음은 오음(五音)중에 화음(火音)에 해당함』에 속하는데, 《자서(字書)》에 "오얏나무[李]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이다."하였고 자음(字音)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별이 있다.
즉 중국음은 '레' 우리나라 음은 '리' 속음(俗音)은 '니'이다. 전욱(顓頊)의 증손(曾孫)인 고요(咎繇) 곧 고요(皐陶)이다.
《정자통(正字通)》에 "도(陶,질그릇도 )의 자음(字音)은 도(挑,돋울도)이니, 오지그릇을 말한다." 하였다.
또 고도(皐陶)는 북통[고광(鼓匡)]으로도 보인다. 즉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운인(韠人)이 북통을 만든다." 하였는데 운(韠)자는 본래 도(陶)자이다. 또《정자통(正字通)》에 "도(陶)의 자음(字音)은 요(遙)이다." 하였다.
고요(皐陶)는 순(舜)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다른 데는 고요(咎繇)로 되어 있다가 요(堯) 임금때, 이관『理官, 옥송(獄訟)을 맡은 관원』이
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관직(官職)을 따서 이(理)로써 씨(氏)를 삼았고, 은(殷) 나라 말기에 그 후손 이이정(理利貞)이 난리를 피하여 이후(伊侯)의 옛집터로 가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다가 이(李)로써 성(姓)을 바꾸었다.
그 뒤 11대손은 곧 노군『老君, 노자(老子)』인데 노군의 자손 중에 일파(一派)는 조군(趙郡)에 살았고, 일파는 농서(隴西)에 살면서 광(廣 한(漢) 나라 때 전장군(前將軍)을 낳았고 광의 후손은 연『淵, 당 고조(唐高祖)』을 낳았다."하였는데, 당 현종(唐玄綜) 천보(天寶) 2년(743)에 고요(皐陶)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追尊)하였다.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시집 주(詩集注)에, "천보 원년에 황제가 친히 신묘(新廟)에 임(臨)하여 현원황제에게 제향(祭享)하고 나서,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를 통현지인(通玄眞人)으로,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으로, 경상자(庚桑子, 주대(周代) 사람으로 이름은 초(楚)를 통허진인(洞虛眞人)으로 추존 배향(追尊配享)하게 했다."하였고, 또,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준공된자, 공인(工人)을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내어 백석(白石)을 채취,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南向)으로 모시고,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시립(侍立)하게 했다."하였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에,
"씨족(氏族)에 관한 글에서, 씨족은 진(秦)ㆍ한(漢)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즉《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 상(宗室世系上)에 이씨(李氏)에 대해 서술하기를 '주왕(紂王) 시대에 이징(理徵)의 자는 덕령(德靈)으로 익예중오백(翼隸中吳伯)이 되었다.' 본시 이연수(李延壽)의 《북사 서전(北史序傳)》에 있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삼대『 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에는 이같은 명자(名字)도 관작(官爵)도 없었다."하였고, 또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編)》에 보면,
"이씨는 본시 영성(嬴姓)에서 나왔다.
전욱(顓頊)의 후손 백예『柏翳, 백익(柏益)』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 《시보(詩譜)》에, 고요(皐陶)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그는 우(禹) 임금을 도와서 물과 토지[水土]를 잘 다스린 공로로 영성(嬴姓)을 받았고, 그의 19세손 비자(非子)는 나라의 말[馬]을 잘 기른 공로로 주 효왕(周孝王) 갑자년에 진(秦)으로부터 수봉(受封), 부용국『附庸國, 따로 독립되지 못한 나라』이 되어 진영(秦嬴)으로 불렸다.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는 '전욱의 후손 여수(女脩, 여자임)가 대업(大業)을 낳았고, 대업이 대비(大費)를 낳았으니, 이가 곧 백익(伯益)이다. 그 뒤 백익의 10세손 비렴(蜚廉)이 악래(惡來)를 낳았는데, 이들 부자(父子)가 뛰어난 재주와 힘으로 주왕(紂王)을 섬겼고 악래의 5세손은 비자(非子)이다.' 했다."하였다.
진강(陳剛)이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주(周)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 그의 출생지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백성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자집에 고용살이하면서 나이 70이 넘도록 아내가 없었고, 그 어머니 역시 시골의 어리석은 여자로 나이 40이 넘도록 남편이 없다가 어느날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서 만나 야합(野合)한바, 천지(天地)의 영기(靈氣)을 받아 그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어도 출산하지 않았다.
이에 주인이 상서롭지 않게 여기고 집에서 내쫓으므로 하는 수 없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밑을 헤매다가 미발(眉髮)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광(廣)의 성(姓)이 무엇임을 알지 못하므로 오얏나무를 가리켜 그의 성을 삼고, 그의 귀[耳]가 크다 하여 이름을 이(耳)라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하얀 것을 보고 노자라 불렀다.
그는 장성하여 주 천자(周天子)의 장서각(藏書閣)을 맡아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례(古禮)와 고사(古事)를 많이 알았으므로 공자가 그에게 예제(禮制)와 관명(官名)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그 뒤 연로(年老)하여서는 주(周) 나라의 왕실(王室)이 장차 어려워질 것을 보고 청우(靑牛)을 몰아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다가 관(關)을 지키는 윤희(尹喜)를 만나 그 스승이 되어 《도덕경(道德經)》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사망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무덤이 있다."하였다.
이상은 중국 이씨의 득성(得姓)하게 된 사적인데, 그 설(說)들이 여러 가지여서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군망(郡望)에 대하여는, 조군(趙郡)ㆍ택저(澤底)ㆍ농서(隴西)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철령(鐵嶺)의 이성(李姓) 이성량(李成樑)의 조상은 본시 조선(朝鮮) 이산(理山) 사람인데, 영(英)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갔었다. 고려(高麗)의 이성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 《신당서(新唐書》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이회옥이 평로절도사(平虜節度使)로 보인다. 외에도 몇 개의 군망(郡望)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씨의 관향(貫鄕)이 거의 1백 개나 되어서, 그 근본을 상고하기 어렵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초기에 6부(部)의 성(姓)이 주어졌는데, 성을 받은 조상들, 즉 6부의 우두머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각기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위에 모여 회의하다가……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양산촌장(楊山村長) 이(李)씨는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峯)으로,
고허촌장(高墟村長) 정(鄭)씨는 형산(兄山)으로,
대수촌장(大樹村長) 손(孫)씨는 이산(伊山)으로,
진지촌장(珍支村長) 일본(一本)에는, 우진촌(于珍村)으로 되어 있다. 최(崔)씨는 화산(花山)으로
가리촌장(加利村長) 배(裵)씨는 명활산(明活山)으로,
고야촌장(高耶村長) 설(薛)씨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내려왔다."하였고,
또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 임진에 6부(部)의 명칭을 설정하고 성(姓)을 주었다.
즉
양산촌을 양부(梁部) 일본(一本)에는 급량부(及梁部)로 되어 있다. 이(李)씨 성을,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崔)씨 성을,
대수촌을 점량부(漸粱部) 일본에는 모량부(牟粱部)로 되어 있다. 손(孫)씨 성을,
우진촌(于珍村) 일본에는 진지촌(珍支村)으로 되어 있다.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鄭)씨 성을,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 일본에는 한기부(漢岐部)로 되어 있다. 배(裵)씨 성을,
명활촌 일본에는 고야촌(高耶村)으로 되어 있다. 습비부(習比部) 일본에는 습화부(習化部)로 되어 있다. 설(薛)씨 성을 주었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보면, 일본(日本)의 이장행(李長行)은 본시 신라 사람으로 차아 위황『嵯峨僞皇, 위황은 소위 '천황(天皇)'을 폄(貶)해서 지칭한 말』 시대에 왜국(倭國)에 들어가 거위[鵝]와 양[羊]을 기증하였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이문진(李文眞)은 고려 영양왕(嬰陽王)때의 박사(博士)로, 고사(古史)를 간추려서 《신집(新集》5권을 만들었고, 《발해고(渤海攷)》에 보면, 이광록(李匡祿)은 흥료현(興遼縣) 사람으로 영주자사(郢州刺史)였는데, 고려 현종(顯宗) 21년(1030) 9월 병진에 발해국(渤海國) 대연림(大延琳)이 이광록을 고려로 급파시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거란(契丹)이 뒤를 이어 천우장(千牛將) 나한노(羅漢奴)를 고려로 보내어 보고하기를, 대연림이 거란 군사에게 포위되었다가 투항(投降)했다 하므로, 이광록이 본국의 멸망을 듣고 드디어 고려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이상 세 이씨는 그 관향(貫鄕)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자손이 과연 유전되어 온다면 그 관향은 지금 어떻게 되는지, 한 가지 궁금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허다한 이성(李姓)들은 혹 기자(箕子)를 따라왔거나 위만(衛滿)을 따라왔거나, 사군(四郡) 시대에 흘러들어왔거나, 혹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공벌(攻伐)할 때 따라들어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혹 농서(隴西)의 유파(流波)나, 6부(部)의 사성(賜姓)이 아닌지. 고가 대족(古家大族)을 제외한 평민으로서 이성(李姓)을 가진 자는 참으로 그 선계(先系)를 상고하기 어렵다.
이씨 성(姓)도 이와 같은 실정이니, 다른 성은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고『王考, 죽은 조부(祖父)로 이덕무(李德懋)를 말함』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소개된 이씨 성의 씨망(氏望)이 60여 가지나 되는데, 다른 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내가 보건대,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족망(族望)이 수십여 관향(貫鄕)이나 되는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다 경주에서 나왔다.
김성(金姓) 또한 한 근원에서 이처럼 분파(分派)되었으니, 본시 하나의 성(姓)으로 많은 관향(貫鄕)이 분파된 성들은 그 원류(源流)를 구별하기 어렵다.
더욱이 사대부(士大夫)나 잠영 세족(簪纓世族,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겨레붙이)에게는 보첩(譜牒)이 갖춰져 있지만, 서민들의 성관(姓貫) 분파에 대하여는 신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떻게 그 근원을 소급해서 알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경우는 그만 논하는 것이 옳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