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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 고 행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문원공 회재 이 선생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故行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文元公晦齋李先生神道碑銘 幷序]
명종 20년(1565)에 권간(權奸)들을 축출하고 정치를 대대적으로 쇄신하여, 원로(元老)와 준걸(俊傑)들을 등용하고 죄적(罪籍)에 들었던 사람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그리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로 먼 곳에 유배되었던 자들을 혹은 서용(敍用)하고 혹은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주었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복관(復官)을 명하였다.
고(故) 의정부 좌찬성 회재(晦齋) 선생 이공(李公)은 바른 도를 행하다가 배척을 당해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복관되는 대열에 들었다. 세도(世道)는 밝아지고 정치는 새로워져 수년 사이에 폐단을 깨끗이 씻어 내고 인물을 선발하여 쓰는 것이 참으로 장차 극진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듯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재앙을 내려 갑작스레 명종께서 승하하셨으니, 신민의 애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금상(今上 선조(宣祖))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아 지극한 도를 크게 넓히셨으니,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난 뒤 맨 먼저 큰 은혜를 베푸시어 아직 다 풀려나지 않은 자들을 모두 풀어 주어 관원으로 임용하고,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임어하여 힘껏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당세의 일을 더욱 부지런히 자문하였다.
이때는 사대부들이 답답해하며 품고만 있던 생각을 모두 우러러 토로할 수 있어 숨겨 둔 채 진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장도 성상에게 알려지게 되어 마침내 선생의 유문(遺文)을 찾아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얼마 후에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공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또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아, 이렇게 해서 공의 도(道)가 세상에 다소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공의 휘는 언적(彦迪)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며,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인데 중묘(中廟)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하였다. 선계(先系)는 여주(驪州)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거주지를 경주(慶州)의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증조의 휘는 숭례(崇禮)이니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수회(壽會)이니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고(先考)의 휘는 번(蕃)이니 성균관 생원으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 손씨(孫氏)로,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9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점차 자라면서 학문에 힘썼고 문장도 잘하였다.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갑술년(1514)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으로 교서관 부정자가 되었다.
전보하여 저작(著作)에 이르렀으나 참군공(參軍公)이 별세하였으므로 공이 승중(承重)하여 상을 마쳤다. 그 후 박사로 승진하였고, 홍문관 박사,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 병조와 이조의 좌랑으로 옮겨졌다.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에 제수되었다가, 겨우 2년 만에 소환되어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병조와 이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이 되었다가 장령(掌令)과 보덕(輔德)으로 옮겨졌다.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24)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거느리는 것이 모두 조리와 법도가 있었으므로 아전들은 조심하고 백성들은 덕에 감복하였다.
1년 남짓 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소환되었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김안로(金安老)를 끌어들여 동궁(東宮)의 우익(羽翼)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이는 김안로의 아들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동궁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이 말을 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는데,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등이 이에 동조하여 온 조정의 의견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공은 홀로 힘껏 그 불가함을 말하여 채무택과 의견이 합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채무택이 정언에서 체직되었으나, 곧이어 외부의 논의가 공이 이견(異見)을 세운 것을 비판하였으므로 체차되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심언광이 공에게 “이군(李君)은 어떻게 김모(金某)가 소인임을 아는가?” 하고 묻자, 공은 “김안로가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그의 마음가짐과 일 처리를 보았더니 참으로 소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뜻을 얻는다면 반드시 국가를 그르칠 것입니다.” 하였다. 혹자가 “김안로가 비록 조정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찌 그에게 권력을 쥐어 주겠소. 동궁을 위하려는 것일 뿐이오.” 하므로, 공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가 만일 들어온다면 반드시 권력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날뛸 것이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소.
또 동궁은 온 나라 신민들의 촉망을 받는 분인데, 어찌 김안로가 등용되어야 지위가 안정된다는 것이오.” 하니, 심언광이 노해서 일어나 가 버렸다. 그러고는 마침내 공을 탄핵하였으므로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7년 만에 김안로가 패사(敗死)하자 상이 공의 충직함을 생각하고 불러들여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삼았다.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겨졌으며,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승진되었다.
무술년(1538, 중종33) 겨울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년이 되지 않아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공은 비록 모친 봉양을 위해서 외직을 청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침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교지가 내려지자 수천 글자로 된 상소문을 올렸는데, 진술한 바가 모두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고 당면한 일을 시행하는 것으로, 군주를 선으로 인도하는 계책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곧았다.
상이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시며 동궁 및 조정 신하들에게 보여 주게 하고, 공의 자급을 올려 주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에 임명하였는데, 공은 “말을 채택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로 해서 외람되이 상을 받는 것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며 전(箋)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자 다시 상소하여 성학(聖學)의 본말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력 진달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36) 가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오르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으며, 곧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의정부우참찬 겸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 우참찬이 되었다.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유보하기를 청하는 바람에 그대로 참찬으로서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공은 모부인(母夫人)께서 늙고 병든 상황이라 멀리 떠나 있을 수 없다며 여러 차례 돌아가 봉양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위유(慰諭)하며 윤허하지 않았고, 또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오게 하였다. 공은 더욱 황공해하며 더욱 힘껏 외직을 청하여 마침내 경상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갑진년(1544, 중종39) 8월에 한성 판윤에 제수되고 좌부빈객을 겸임하였는데, 마침 병이 나서 사직을 청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소명(召命)을 내려 우찬성에 임명하고, 이어 좌찬성 겸 지경연사로 전직시켰다. 공은 재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교지를 내려 돈독히 유시하고 이어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공이 다시 완강히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이 차도를 보이고 나서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갈 수 있었다.
공이 양조(兩朝)의 융숭한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을 내어 한번 길에 올랐으니, 이는 큰일을 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종의 병환이 오래되어 국가의 깊은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공이 사적으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지금 주상에게 후사(後嗣)가 없고 대군은 춘추가 어리십니다. 그런데 어찌 일찍 건의하여 세제(世弟)로 책봉해서 국본(國本)을 정하지 않습니까?” 하니, 윤인경이 공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7월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보위를 계승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의례(儀禮)를 거행하게 되었다. 백관들이 모여 의논하는 자리에서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계시는데 어느 전(殿)이 수렴청정을 해야 하겠소?”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이때 공이 “옛날 송나라 철종(哲宗) 때에 태황태후(太皇太后)가 함께 청정(聽政)하였으니, 본래 고례(古例)가 있는 일이므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수렴청정하는 의제(儀制)만 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8월에 의정부에서 서계(書啓) 10조를 올렸는데,
제1조는 자전(慈殿)께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여 보양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2조는 경연관을 널리 선발하여 항상 더불어 강론하고 자문에 임하게 해서 성학(聖學)을 성취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3조는 전하께서는 대행왕(大行王)에게 아들의 도리도 있고 신하의 도리도 있으므로 상례(喪禮)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된
다는 것이고,
제4조는 궁금(宮禁)을 엄히 하고 척속(戚屬)의 왕래를 막기를 청한 것이고,
제5조는 궁인을 신중히 택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6조는 특지(特旨)를 쓰지 말기를 청한 것이고,
제7조는 판부(判付)를 내리지 말기를 청한 것이고,
제8조는 승정원의 직임은 출납을 미덥게 하는 것이니 내지(內旨)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하라는 것이고,
제9조는 궁중과 조정은 일체가 되어야 하니 사사로운 문을 열어 놓지 않음으로써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밝히라는 것이었으며,
제10조에서는 “대행왕께서 학문에 힘을 기울이신 덕분에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이 지치(至治)를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큰 변고를 당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보위를 이으셨기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대행왕에게 기대하던 바를 전하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틀이 지극히 중요하니, 바라건대 양전(兩殿)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이 서계는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에 윤원형(尹元衡)이 윤임(尹任)에게 원한이 매우 깊었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가 그의 심복이 되어 사림(士林)을 전복시켜 간사한 뜻을 이루고자 도모하였다. 윤원형이 밀지(密旨)를 칭탁해 대간(臺諫)을 유도하여 윤임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대간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이기 등이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아뢰려고 하였다. 이에 양전이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임어하니, 재추(宰樞)들을 이끌고 들어가 윤임 등에게 죄를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대왕대비가 크게 진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조금도 거역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차분히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행왕에게 마음을 다했던 자들에게 어찌 깊이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일 처리는 밝게 드러나도록 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사림이 화를 많이 입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 목을 움츠렸으나, 공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이기 등이 공(功)을 기록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날 충순당에 입시하였던 재추들을 아울러 기록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공은 “어찌 공훈도 없이 외람되이 상을 받아서 국법을 문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극력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선현(先賢)의 말에 ‘군주의 덕을 성취하는 것은 경연관에게 책임 지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경연의 직임을 맡았기에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삼가 선현 정이(程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 가운데 성덕(聖德)에 보탬이 되고 지금 시행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조목별로 기록하여 올리니, 전하께서 진실로 깊이 믿고 힘써 행하신다면 제왕의 공업(功業)에 도움이 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하였다.
얼마 후 모친을 뵈러 가면서 또 차자를 올려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히며 어진 신하를 친히 하고 간신을 멀리하기를 청했으니, 군부(君父)에게 기대하는 바가 더욱 깊고 간절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집권 세력과는 빙탄(氷炭) 같은 형세라서 실제로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귀향한 뒤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려 체차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몇 달 뒤에 이기가 아뢰기를,
“이언적은 과거에 세자(世子)에게 아부하고 중종을 배반하였으며, 10조(條)의 서계를 올려 군주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또 유인숙(柳仁淑)과 결탁하여 역적들을 구원하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언적이 신에게는 베풀어 준 은혜가 있지만, 신은 지금 국가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하고, 양사(兩司)가 뒤를 이어 논박하여 훈작(勳爵)을 삭탈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2) 9월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빌미로 을사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죄를 가하였는데, 이때 공도 강계부(江界府)에 안치(安置)되었다. 집안사람들이 유배의 명을 듣고 모두 울부짖었지만, 공은 태연하기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는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대부인을 잘 받들어 모시거라. 황천(皇天)이 위에 계시니 내가 오래지 않아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대부인이 별세하니, 공은 대부인의 유의(遺衣)로 신위(神位)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슬피 통곡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공은 유배지에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편안히 받아들이며 학문을 강론하고 저술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고,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힘을 쏟았다. 일찍이 궤안(几案) 옆에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놓기를 “나는 매일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하늘을 섬기는 데 미진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임금과 어버이를 위하는 데 정성스럽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마음가짐에 바르지 못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명을 가지고 온 관원이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일이 있자 온 고을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반듯이 앉아 책을 보았으니,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기며 평소의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1553, 명종8) 11월 을축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갑인년(1554) 봄에 경주(慶州)로 영구를 옮겼고, 11월 갑진에 흥해군(興海郡) 남쪽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처음에 공의 선부군(先府君)은 젊어서부터 선비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이 본도(本道)의 하과(夏課)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성묘(成廟)께서 그 사부(詞賦)를 좋게 여겨서 불러 보시고 옷감을 하사하신 다음 성균관에 머물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뒤에 향리로 돌아가서 날로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공이 비록 부친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 가업(家業)은 본디 유래가 있는 것이었다.
손 부인(孫夫人)은 또 현명하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사랑에 치우쳐서 가르치고 독려하는 일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숙인 사재(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고, 또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가서 공부하도록 뒷바라지를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남달리 영민하였다. 그리하여 속학(俗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추구하고자 하여, 강구하여 밝히고 체득하여 실천하면서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공부에 힘을 썼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짓고 30세에 또 ‘입잠(立箴)’을 지었는데, 그 말이 모두 옛 성현들이 가르침을 남긴 절실하고도 요긴한 뜻이었다.
대개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며 감정과 욕망을 징계하고 잘못을 고쳐 선으로 옮겨 가는 데에 실제로 종사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요 빈말이 아니었다.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에 집을 짓고, 한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좌우의 도서를 정밀히 연마하고 깊이 사색하기를 오로지 하고 오래도록 지속하니, 소견이 비로소 더욱 친절(親切)해졌다.
어버이를 섬기는 때에는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으며, 철에 따라 따뜻하고 시원하게 지내도록 보살피고 입에 맞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예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고, 아우 언괄(彦适)과는 우애와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법도가 있고 사람을 대하기를 예로써 하였으며, 종족(宗族)을 어루만지고 노복을 거느리는 데도 모두 마땅함을 얻었다. 사람됨이 차분하고 무게 있고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평소 고상한 뜻을 품고 있었으나, 종일토록 말이 없어 사람들이 그 내면을 엿볼 수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논의하고 건의하고 시행한 것들이 광명정대하였으니, 그 언론과 풍지(風旨)가 본디 권강(勸講)에 대비하고 성덕(聖德)을 돕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거나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사안을 결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려워함이 없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이 이미 스스로를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서로 《봉선잡의(奉先雜儀)》,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이 있다. 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편수하였으나 미처 책을 완성하지 못하였으며,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박씨(朴氏)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을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지금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으로 있다. 서자가 하나 있으니 전인(全仁)이요, 딸이 하나 있다. 전인은 아들을 둘 두었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들을 잘 가르쳐서 또한 모두 수립한 바가 있다고 한다.
공을 장사 지낼 때 미처 묘도(墓道)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으나, 훌륭한 덕과 업적을 자연히 가릴 수가 없어 곧바로 크게 기리는 예전(禮典)이 실로 사람들의 그만둘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 공의 도가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더욱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우리 동국(東國)은 옛날에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이 도에 뜻을 두고 세상에서도 도학(道學)으로 지칭한 호걸의 선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를 상고해 보면 대부분 명성(明誠)의 실질을 다하지 못했고, 후세에 와서 일컫는 데는 또 연원을 징험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자취를 좇아 따를 바가 없게 함으로써 지금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생의 경우에는 전수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이 학문에 분발하여, 은은하면서도 날로 드러나는 덕이 행실과 부합되고, 훌륭한 저술을 남겨 말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동방에서 찾아보더라도 거의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하셨으니, 이것은 공의 도(道)를 깊이 알고 잘 말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서자 전인이 또 비명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성덕(盛德)을 일컬어 기술하는 것이 한 사람의 손에서만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며 나에게 명하셨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내심 이 일을 매우 어렵게 여겼고, 그 사이에 또 글을 주고받으면서 자세히 수정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제 퇴계 선생은 별세하셨고 찰방이 사람을 보내와서 비석이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감히 더는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을 근거로 하고 아울러 관력(官歷)의 차례를 상고하여 그 대강을 엮어서 쓰고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帝有顯命 / 상제께서 밝게 명해
畀人以性 / 사람에게 성품을 부여했으니
性之四德 / 성품의 네 가지 덕 인의예지
實維人秉 / 실로 모든 사람이 타고났도다.
蔽氣與質 / 그러나 기질에 가려지므로
性由以失 / 타고난 성품을 잃게 되는데
學以反之 / 학문을 통해서 돌이킨다면
其性則一 / 본연의 성품과 같게 되도다.
嗟惟我公 / 아, 우리 공께서
生此一方 / 동방에서 태어나시니
氣寬而莊 / 기질은 너그럽고 엄정하시며
德渾而剛 / 덕성은 온후하고 강직했도다.
爰初知學 / 처음에 학문해야 하는 걸 알아
愼修懋履 / 삼가 닦고 힘써서 실천했으며
亹亹充養 / 부지런히 채우고 함양해 나가
善有諸己 / 자신의 몸에 선을 갖추었도다.
入則盡孝 /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出而移忠 / 조정에선 충성으로 옮기셨도다.
亦遠亦近 / 물러나 있건 나와 벼슬을 하건
道該汚隆 / 어디서건 도를 다 갖추었으니
一時之詬 / 일시적인 비방이 있었다 해도
萬世之光 / 만세토록 그 이름 빛나게 되리.
搜書褒贈 / 남긴 글을 찾아내고 추증한 다음
配廷洋洋 / 묘정에 배향하는 의식 행하니
維先王志 / 일찍이 선왕께서 뜻하셨던 일
維我后承 / 금상께서 받들어 행함이로다.
刻示無窮 / 공의 행적 돌에 새겨 길이 남기니
吾道侯興 / 우리 도가 이를 통해 흥기하리라
통정대부 전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기대승(奇大升)은 찬(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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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晦齋先生集 附錄> ‘碑銘’
有明朝鮮國故行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文元公晦齋李先生神道碑銘 幷序。
明宗之二十年。放黜權奸。大更政化。延登耆俊。宥釋罪過。自乙巳以後在擯竄之籍者。或敍或移而已死者命復官。故議政府左贊成晦齋先生李公。用直道被斥以歿。蓋十有三年而始與復官之列。道際隆平。聖治日新。數年之間。其所以滌蕩甄別者。固將無所不用其極。而天之降割。禮陟斯遽。臣民之慟。曷有窮乎。今上嗣位之初。克述先志。丕恢至道。山陵訖。首霈鴻恩。盡釋其未盡釋者。以備官使。勤御經筵。懋講聖學。益咨當世之務。于時士之鬱屈有懷者。咸得以卬首吐露。無幽隱之不達。由是。公之道德文章之懿。亦得徹聞於黈纊之下。遂有搜求遺書之命。俄用廷議。贈公領議政。諡曰文元。又命配享明宗廟廷。嗚呼。公之道亦庶乎少白於一世也。公諱彥迪。字復古。自號晦齋。初名迪。中廟命加彥字。系出驪州。後遷慶州良佐村。曾祖諱崇禮。贈兵曹參判。祖諱壽會。訓鍊院參軍。贈吏曹判書。考諱蕃。成均生員。贈左贊成。妣貞敬夫人孫氏。鷄川君昭之女。公生有異質。九歲而孤。稍長。力學能文。正德癸酉。中生員。明年甲戌。登第。權知校書館副正字。尋入爲眞。轉至著作。參軍公卒。公持重終喪。陞博士。遷弘文館博士。侍講院說書。成均館典籍。兵,吏兩曹佐郞。請外授仁。同縣監。僅二期。召爲司憲府持平。歷兵,吏正郞。改文學。遷掌令輔德。嘉靖己丑。出爲密陽府使。臨民御吏。皆有條法。吏戢而民懷之。歲餘。以司諫院司諫召還。時朝論欲引金安老。用以羽翼東宮。蓋安老子尙公主。於東宮親暱故也。倡其說者正言蔡無擇。而大司憲沈彥光等隨聲和附。擧朝靡然。公獨力言其不可。與無擇議不合。無擇褫正言。而外議旋訾公立異。遞爲司藝。彥光問公曰。李君何以知金某爲小人乎。公曰。安老尹東京時。觀其處心行事。眞小人也。此人得志。必誤國家。或曰。安老雖入。豈授以柄。第欲爲東宮地耳。公曰。不然。彼若入來。必秉國鈞。專擅用事。誰敢遏之。且東宮。一國臣民所共屬意。何待安老而後安乎。彥光怒而去。遂劾公。罷歸田里。後七年。安老敗死。上思公忠直。召爲弘文館副校理。轉校理,應敎。除議政府檢詳。遷舍人。拜直提學。陞兵曹參知。戊戌冬。出尹全州。歲中。一境大治。公雖爲養乞外。憂國之心。未嘗一日而忘。會因災異求言。乃上疏數千言。所陳無非格君心措時務。啓沃謀謨。極其忠讜。上深加奬歎。命傳示東宮及外朝。就增其秩。俄拜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公爲如蒙採言則幸矣。而遂有僭賞。非所敢當。上箋懇辭。不許。歷禮曹參判,成均館大司成,司憲府大司憲。除弘文館副提學。又上疏極陳聖學本末。時政得夫。辛丑秋。陞資憲。判漢城府。尋加正憲。爲議政府右參贊兼同知成均。轉吏,刑,禮曹判書。再爲大司憲,右參贊。求出爲安東府使。諫院請留。仍爲參贊兼弘文提學。公以母夫人老病。不可遠離。累乞歸養。上慰諭不允。又令將母來京。公益惶恐。請外愈力。遂出爲本道監司。甲辰八月。授漢城判尹兼左副賓客。會病乞辭。仁宗卽位。召拜右贊成。轉左贊成兼知經筵事。公再以病辭。下旨敦諭。仍賜藥物。公復固辭。猶不允。病間。始克造朝。公感兩朝知遇之隆。自力一行。蓋欲以有爲。而仁宗弗豫日久。國家隱憂有不可言者。公私謂領議政尹仁鏡曰。當今主上無嗣。大君年幼。何不早建白。封爲世弟以定國本乎。仁鏡然公言。而不能用。乙巳七月。仁宗昇遐。明宗承序。當擧垂簾儀。百官會議。仁鏡曰。今有大王大妃,王大妃。何殿當聽政乎。左右默然。公曰。昔宋哲宗時。太皇太后同聽政。自有古例。不須疑問。今但定垂簾儀制耳。議遂定。八月。政府書啓十條。一請慈殿善導養聖質。二請博選經筵官。恒與之講論咨問。成就聖學。三殿下於大行王。有子道有臣道。喪禮不可不盡誠孝。四請嚴宮禁防戚里。五請愼擇宮人。六請勿用特旨。七請勿用判付。八政院職出納惟允。內旨有不合。許令封還。九宮中府中當爲一體。請勿開私門。以昭平明之理。十言大行王學問之效。公道大行。人顒至治。奄至斯極。今上嗣緖。國人方以望於大行王者望於殿下。其機甚重。願兩殿留神焉。大率公所筆定也。初。尹元衡與尹任怨仇已深。而林百齡,李芑爲其心腹。謀欲傾覆士林。以濟其奸。元衡託密旨。誘臺諫使擊尹任。臺諫不從。芑等詣閤門。欲有所啓。兩殿卽同御忠順堂。引入宰樞。將加尹任等罪。時天威震赫。人莫敢少忤。公從容言曰。人臣之義。當專於所事。當彼時。專心於大行王者。豈宜深罪。且擧事當顯明。不然。恐士林多罹禍。聞者縮頸。而公色不懾。旣而芑等錄功。號曰衛社。倂錄其日入侍宰樞。公亦與焉。公力辭以爲豈可無功而濫受以紊王典。不聽。丙午春。入箚曰。先賢有言。君德成就責經筵。臣忝是職。懼無以稱塞。謹取先賢格言至論有裨於聖德而可施於今日者。條錄以獻。殿下誠能深信而力行之。則其爲聖功之助豈小哉。已而將省親。又入箚。乞講學明理。親賢遠邪。其所望於君父者益深切矣。然而氷炭之勢。實有難相容者。旣歸。三上章乞辭。遞爲判中樞。居數月。李芑啓曰。彥迪諂附世子。背叛中宗。書啓十條。縶人主手足。與柳仁淑交結。多有營捄逆賊之言。彥迪於臣有恩。臣今爲國不計私。敢以聞。兩司繼論之。乃削奪勳爵。丁未九月。因良才驛誹書。加罪乙巳諸人。公亦江界府安置。家人聞謫命。相與號泣。公怡然如平日。屬家人曰。善奉養大夫人。皇天在上。吾不久當還矣。明年。大夫人下世。公用遺衣服設位。朝夕攀號毀戚。以盡三年。公在窮厄。有以自安。講學著書。不輟其功。未明而起。乾乾夕惕。几案間。嘗書自戒之辭曰。吾日三省吾身。事天有未盡歟。爲君親有未誠歟。持心有未正歟。忽有銜命官疾驅入城。一府驚怖。謂有不善意。公不爲動。正坐看書。其一視死生。不易素操如此。癸丑十一月乙丑。以疾終。享年六十三。甲寅春。返櫬于慶州。十一月甲辰。窆于興海郡南達田里禱陰山先塋之次。始公之先府君。蚤歲以儒聞。嘗魁本道夏課。成廟嘉其詞賦。召見賜衣物。俾留國學學焉。後歸鄕里。日以訓後生爲事。公雖不逮趨庭之訓。而其家業固有所自。孫夫人又賢有識慮。不以慈愛而弛敎督。旣令就學于舅氏孫四宰仲暾。又撥貧窶。資給遠邇。公天資近道。英悟出人。乃於俗學之外。知有所謂爲己之學而欲求之。講明體履。用力於致知誠意之地。年二十七而作五箴。三十而又作立箴。其言皆古聖賢切要之旨。蓋於操存省察。懲窒遷改。實有所事。非空言也。其罷歸也。築室於紫玉山中。靜坐一室。左右圖書。硏精覃思。旣專且久。而所見始益親切焉。事親之際。愛敬兼至。溫凊滫瀡。亦無不盡。而祭先之禮。務極其誠。與弟彥适。友悌尤篤。治家有法。接人以禮。撫宗族馭僮僕。咸得其宜。爲人安重端詳。雅有高趣。默然終日。人莫能窺其際。其在朝廷。論建施爲。正大光明。其言論風旨。固足以備勸講而補衮職。至於斥姦邪定危疑。直前無畏。雖賁育莫之奪也。然公旣深自韜晦。故人未有知其爲有道者也。所著有奉先雜儀,求仁錄,進修八規,大學章句補遺,續或問。又修中庸九經衍義而未及成書。文集若干卷。公配貞敬夫人朴氏。宣務郞崇阜之女。無子。以從弟經歷通之子應仁爲後。今爲松羅道察訪。庶子一人。全仁。女一人。全仁生二子。曰浚曰淳。全仁習詩書知義方。敎誨其子。亦皆有立云。公之葬也。不及表于墓道。而德業之光。自不可掩。一時褒大之典。實出於人心之不容已。公之道愈久而彌彰者。蓋可知也。退溪李先生嘗狀公之行而曰。我東國古被仁賢之化。而其學無傳。麗氏之末。以及本朝。非無豪傑之士有志此道。而世亦以此名歸之者。然考之當時。率未盡明誠之實。稱之後世。又罔有淵源之徵。使後之學者。無所尋逐。以至于今泯泯也。若吾先生。無授受之處。而自奮於斯學。闇然日章而德符於言。炳然筆出而言垂于後者。求之東方。殆鮮有其倫矣。此其於公之道。可謂深知而善言之也。庶子全仁又欲求篆碑之辭于退溪先生。先生以稱述盛德。不當專出一人。遂以命大升。大升辭不獲命。而心竊重之。其間亦有往復詳訂而後定者。是以。久不克就。今先生旣沒。而察訪伻來。告以碑具。乃不敢更辭。謹據行狀。倂考歷官序次。剟其大者著之而系以銘。銘曰。
帝有顯命。畀人以性。性之四德。實維人秉。蔽氣與質。性由以失。學以反之。其性則一。嗟惟我公。生此一方。氣寬而莊。
德渾而剛。爰初知學。愼修懋履。亹亹充養。善有諸己。入則盡孝。出而移忠。亦遠亦近。道該汚隆。一時之詬。萬世之光。
搜書褒贈。配廷洋洋。維先王志。維我后承。刻示無窮。吾道侯興。通政大夫。前成均館大司成,知製敎奇大升。撰。<끝>
晦齋先生集附錄 / [碑銘]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는 선조 초, 추숭(追崇) 과정에서 기대승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撰)해졌고 1577년(선조 10)에 이산해의 글씨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 비신의 높이는 204㎝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 역시,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다.
이 비석은 1577년(선조 10)에 세운 옥산서원 소재 이언적 신도비와 함께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비의 전체 높이는 300㎝, 비신은 180㎝이며, 비문의 글씨는 손엽(1544~1600)이 썼다.
신도비명은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