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선생집 제10권 / 묘지(墓誌)
지은이 : 계곡 장유(張維)
1588년 1월 22일(음력 1587년 12월 25일) ~ 1638년 4월 30일(음력 3월 17일)
진용교위 영안남도병마평사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이공 묘지명
(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李公墓誌銘)
고 영안남도 평사 증 이조참판 이공(李公)의 휘(諱)는 목(穆)이요 자(字)는 중옹(仲雍)이다. 성묘조(成廟朝)의 명유(名儒)로서 연산(燕山) 무오년 사초(史草)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묘소가 통진(通津) 상포(霜浦)에 있는데, 1백 28년이 흐른 뒤에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그 묘표(墓表)를 썼고, 그로부터 또 7년이 지나서 공의 증손인 부사(府使) 구징(久澄)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해 왔다.
아, 공이 돌아간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공이 남긴 글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면 지금도 늠름하게 생기(生氣)가 우러나오는 듯하니, 이런 분이야말로 내가 묘지명을 써 드려야만 하리라. 공은 어려서 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의 호) 김공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면서 학문에 힘을 쏟고 문사(文詞)를 능숙하게 익혔는데, 글 중에서는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좋아하였고, 옛사람 중에서는 범 문정(范文正 중국 북송(北宋)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19세 때 기유년 진사과에 제2명으로 급제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게 되었는데, 언론이 강개하고 지기(志氣)가 준열하여 선악(善惡)을 따짐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동배들로부터 추복(推服)을 받았다. 성묘(成廟)가 언젠가 병이 들자, 대비(大妃)가 시켜 기도를 행하게 하면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 음사(淫祠)를 설치토록 한 일이 있었다.
이에 공이 제생(諸生)의 앞장을 서서 무당을 몽둥이로 때려 내쫓았는데, 무당이 이 사실을 궁중에 호소하자 대비가 대로하여 상의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이 일을 고해 바쳤다. 그러자 성묘가 겉으로 노한 척하면서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모두 기록해 올리도록 하였는데, 유생들이 크게 꾸지람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 서로 도망쳐 숨기에 바빴으나 공만은 태연히 그대로 임하였다.
그 뒤 성묘가 곧바로 대사성을 불러 하교하기를,
“그대가 제생(諸生)을 제대로 이끌어서 사습(士習)이 올바르게 되도록 하였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려 주었다.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권세를 좌지우지할 때 마침 가뭄이 들자 공이 상소하기를,
“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려 줄 것이다.”
하였는데, 필상이 공을 길에서 만나자 큰소리로 외치기를,
“자네는 이 늙은이의 고기를 꼭 먹어야만 하겠느냐?”
하였으나, 공은 고개를 쳐들고 걸어가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 필상이 암암리에 성묘를 권하여 자전(慈殿)의 뜻을 따라서 불교를 섬길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또 제생(諸生)을 이끌고 상소하면서, 필상을 간사한 인물로 논하고 간귀(奸鬼)로 지목한 뒤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성묘가 대로하여 친히 공을 신문하기를,
“네가 어째서 나의 정승을 귀신이라고 배척하느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의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한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장차 공을 형리(刑吏)에게 내리려 하였으나, 다른 정승들이 극력 변호해 준 덕분에 공주(公州)에 유배되는 정도로 그쳤는데, 이로부터 공의 직성(直聲)이 더욱 퍼지게 되었다. 그 뒤 을묘년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종학 사회(宗學司誨)를 제수받았다가 영안남도 평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급기야 무오사옥(戊午史獄)이 일어나자 공이 과연 필상의 무함을 받고서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참혹한 화를 당하고 말았다.
공은 사형장에 나가서도 신기(神氣)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며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지어 부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이때가 공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그런데 공에 대한 필상의 유감이 그래도 풀어지지 않아 갑자년 사화(士禍) 때에 이르러 다시 지하에 묻힌 공의 시신에 모욕을 가했으니, 아 참혹하다. 그러다가 중묘(中廟)께서 보위(寶位)에 오르면서 복관(復官)을 명하였고,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자 지금의 관직을 추증받게 되었다.
공의 선조는 완산(完山 전주(全州) 사람이다. 고조 백유(伯由)는 개국공신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완성이 속(粟)을 낳았는데 군기시 정에 이르렀고, 정이 손약(孫若)을 낳았는데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이르렀고, 고성이 윤생(閏生)을 낳았는데 부사과(副司果)로서 호조 참의를 증직받았다. 참의가 남양(南陽) 홍씨(洪氏)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으니 이들이 공의 고비(考妣)이다.
공의 부인 김씨(金氏)는 참판 수손(首孫)의 딸이다. 아들 세장(世璋)을 두었는데 태어난 지 1년 만에 공이 화를 당하였다. 그 뒤 장성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부인은 공보다 60년 뒤에 죽어 공주(公州) 서촌(西村) 김씨의 선영에 묻혔다.
관찰사는 5남(男)을 두었다. 맏아들 건(鍵)과 그 다음 난(鑾)과 그 다음 기(錡)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그 다음 갱(鏗)은 병조 정랑이고 철(鐵)은 좌승지인데 모두 문과를 통해 진출하였다. 딸이 셋 있는데, 맏딸은 한성 참군(漢城參軍) 정수후(鄭守厚)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종실인 화릉부정(花陵副正) 수혜(秀蕙)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현령 구운한(具雲翰)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후손들이 모두 2백여 인에 달하는데, 부사 구징은 바로 승지의 맏아들이다.
공은 높은 재질과 준열한 절조의 소유자로서 성묘(成廟) 때 북돋아 길러졌다가 혼조(昏朝)에 이르러 젊은 나이에 일찍 꺾이고 말았는데, 지금에 와서도 사람들이 무오년의 사화를 말할라 치면 그만 기가 턱턱 막히곤 한다. 그러나 겨우 한 세대를 지나는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여 면면히 그 뒤를 잇고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공이 미처 누리지 못한 복을 보답받고 있는 것으로서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의 유고(遺稿) 2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그리고 공주의 인사들이 일찍이 공이 이곳에 유배를 왔다고 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에서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아, 이쯤 되면 불후(不朽)하게 되기에 충분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이공이여 / 猗嗟李公
육신은 썩었어도 이름은 향기롭네 / 骨朽名芬
묘소 오래 되었지만 / 其墓雖故
나의 이 명 새로워라 / 其銘則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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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李公墓誌銘。
故永安南道評事贈吏曹參判李公諱穆。字仲雍。成廟朝名儒也。燕山戊午。坐史事被害。墓在通津霜浦。歷百有二十八年而金公尙憲記其表。又七年而公之曾孫府使久澄請維銘其竁。嗚呼。公之沒也久矣。然讀其書想見其人。凜凜猶有生氣。是可銘也已。公少從佔畢金公受業。力學工文詞。於書嗜左氏春秋。於古人慕范文正之爲人。年
十九。中己酉進士第二名。游太學。言論慷慨。志氣峻烈。辨覈臧否。無所回互。以此爲流輩所推服。成廟嘗有疾。大妃使女巫行禱。設淫祀於泮宮之碧松亭。公倡諸生。杖其巫而逐之。巫訴諸宮中。大妃大怒。俟上疾瘳以告。成廟陽怒。命成均館悉錄其儒生。儒生以爲必獲大譴。爭亡匿。公獨不亡匿。成廟尋召大司成敎曰。爾能導率諸生。使士習歸正。予用嘉之。特賜酒。尹弼商爲相用事。會天旱。公上疏曰。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途。呼曰。君必欲食老夫肉耶。公昂然不顧而去。後弼商
陰勸成廟請從慈殿奉佛。公聞之。又率諸生上疏。論弼商奸邪。目以奸鬼請誅之。成廟大怒。親問公曰。若何以斥吾相爲鬼。公對曰。所行如彼而人不知。所以爲鬼。上將下吏。賴他相力救。止謫公州。自是直聲益振矣。中乙卯文科狀元。授成均館典籍兼宗學司誨。出爲永安南道評事。及戊午史獄起。公果爲弼商所搆陷。與金馹孫,權五福等同被酷禍。臨刑神氣如常。自作絶命歌。時年二十八。弼商恨公猶不已。至甲子之禍。戮及泉壤。嗚呼慘矣。中廟踐阼。命復官。後以子貴贈今官。
公之先。完山人。高祖伯由。開國功臣封完城君。完城生栗。軍器寺正。正生孫若。高城郡守。高城生閏生。副司果贈戶曹參議。娶南陽洪氏。是爲公之考妣。公之配金氏。參判首孫之女。有子世璋。生一歲而公被禍。及長。擢文科官至觀察使。夫人後公六十年而卒。葬于公州西村金氏之塋。觀察有五男。長鍵次鑾次錡。皆不仕。次鏗兵曹正郞。鐵左承旨。皆以文科進。女子三人。長適漢城參軍鄭守厚。次適宗室花陵副正秀蕙。次適縣令具雲翰。內外諸孫二百餘人。府使久澄。卽承旨之胤也。公以高
才峻節。培植於成廟。而夭椓於昏朝。至今人譚戊午之禍。爲之氣塞。然甫一世而子姓昌大。綿綿未艾。此殆公未食之報。而天道之不爽可見也。公有遺稿二卷行於世。公州人士。以公嘗謫於是也。俎豆公于忠賢書院。嗚呼。足以不朽矣。銘曰。
猗嗟李公。骨朽名芬。其墓雖故。其銘則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