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위 휘(諱)는 유정(惟精)이요. 자(字)는 중상(中常)이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고, 삼중대관(三重大匡)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의 9代孫이라, 고조(高祖)는 참봉(參奉) 호(豪)요. 할아버지는 현령(縣令) 세량(世良)이며, 증조는 목사(牧師) 영(聆)이요. 고조(高祖)는 현감(縣監) 길상(吉祥)이다.
공이 가정(嘉靖) 경신(庚申)에 출생하여 계유년(癸酉年)에 별세하니 수(壽)는 74歲이다. 젊었을때부터 학행(學行)이 있어,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과거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맞지 못하고, 장단(長湍) 백연동(白蓮洞) 선영(先塋) 아래와서 살다. 집은 법도 있게 다스리고, 제사는 정성껏 모시고, 자제는 예(禮)로 가르치다.
공(公)의 성품이 원래 엄격하고 국건하여 평상시에도 의관을 벗지 않으시니 향중(鄕中)에서 사대부(士大夫) 표본이라 일컬었더니 만년(晩年)에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배수(拜受) 받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 임금의 행차를 따라 용만(龍灣) 까지 갈새 온갖 간난(艱難)을 감수 하였으니 호성훈(扈聖勳: 임금을 호종한 공훈)으로 특별히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을 제수 받았으니 얼마 후 임금님이 서울에 환도할 때, 불행하게도 공은 병환에 걸려 봉산(鳳山) 땅에 떨어졌다가 곧 서호방(西湖坊) 탑가촌(塔街村)에 우거(寓居) 했으니 수년을 병환으로 고생하다가 별세하니, 봉산군(鳳山郡) 북쪽산에 안장하다.
슬프다! 나의 선조께서 휘는 발(發)이요. 자는 중화(仲華)요. 호는 초헌(楚軒)이시니, 문장(文章)과 재예(才藝)로 이름이 도내에 자자하더니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감당(甘棠) 아래 이곡정사(梨穀精舍)에 은거(隱居)하면서 가승(家乘) 한 권을 만드시니 이 책이 곧 판관공(判官公) 사적(事跡)이다.
그 글에 보면 봉산서호(鳳山西湖) 방한곡(坊閒谷)에 광산김씨(光山金氏)에 원(瑗)이란 분이 나의 5대도 휘(諱) 태응(台應)과 함께 계축년(癸丑年) 동방진사(同榜進士)를 하신 분이다. 김공(金公)이 장차 항상 말씀이 내가 어릴 때 판관공(判官公)응 뵈니 비록 병석에 누었어도 당당한 모습이 장자(長者)의 풍토가 있었고, 강개(慷慨)한 기절(氣節)과 격앙(激昻)한 충렬(忠烈)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용만(龍灣) 일을 말씀하실 때, 눈물을 흘리시니 옆에서 듣고 보는 자 자연 송구한 마음이 발생했다 하니, 이것이 선조(先祖)께서 전한 말씀이요.
김공(金公)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남긴 공훈(功勳)이 큰 것만 조정의 포양(褒揚)과 증직(贈職)을 받지 못하엿으니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배(配)는 무안박씨(務安朴氏)니 장사랑(將仕郞) 승춘(承春)의 따님이다. 아들 질(晊)은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벼슬을 증직(贈職) 받았고, 손자 태응(台應)은 진사(進士)다.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줄줄이 이었으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수(理數)가 있는 증거다. 공의 충열(忠烈)이 후손에게 모범이 될 일이 많으나 모든 책이 불타버려 외짝 글자도 남지 않았으니 무엇으로 문헌(文獻)을 징험(徵驗) 할 수 있으랴. 불초(不肖)한 손(孫)이 외람되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들은바 약간 기억하여 이루어 놓으니 오는 이[後孫]들은 만에 하나라도 고증(考證)이 되리라.
8世孫 창우(昌雨) 술(述)
출처 : 경주이씨 월성군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