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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무성영화시대 꽃-변사
“억울하게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렸으니…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해방 전후 및 19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변사의 구성진 신파조의 목소리가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한 장면이다
한국에서의 변사의 본격적 등장은 극장가가 형성된 1910년부터인데 서울의 우미관(優美館)·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상설영화관은 대개 5∼6명의 변사를 전속으로 두고, 해설은 2∼3명이 교대로 한 영화를 담당하였는데, 영화가 상영될 즈음 악대의 전주와 함께 무대에 올라, 먼저 전술(前述)에서 인사말과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알리고, 이어서 본편을 해설하였다.
각 극장에서는 명성 있는 변사를 확보하고자 금전 공세를 서슴지 않았다. 변사의 월급이 70원 내지 80원은 보통이었는데, 당시의 일류 배우가 고작 40∼50원, 고급 관리들의 월급이 30∼40원이었던 것을 보면 변사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기를 누리던 변사는 발성영화시대가 되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한국에서는 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된 이후 활동이 점점 줄어들다가
《검사와 여선생(1948)》을 마지막으로 무성영화와 함께 사라졌다.
당시 변사는 무성영화의 주역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제는 신출(77)씨 이외에 옛 시절 변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마지막 무성영화 변사로 알려진 신씨의 존재는 남다른 애틋함을 자아내고 있다.
그는 “변사는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영화에 생기를 넣어주는 사람”이라며 “요즘 영화에서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1940년대 후반 14살 나이로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으로 데뷔한 그는 무성영화와 변사 역사의 산증인이다. ‘검사와 여선생’을 비롯, ‘홍도야 울지마라’ ‘며느리 설움’ ‘임자 없는 나룻배’ 등 대부분의 무성영화는 모두 그의 목소리를 거쳐갔다.
해방 전후 변사는 무성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사는 화술과 목소리, 흡입력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개봉 첫날 변사가 맛깔스럽고 구성지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영화는 장기 흥행에 돌입하지만 변사가 변변치 않으면 다음날 관객이 떨어져 상영이 중단돼버리곤 했다. 변사가 열심히 대사를 하다 간혹 필름이 끊기면 ‘아, 이리하야 무정한 필름조차 끊어지고 말았구나’ 하고 슬쩍 넘어가는 애드리브(ad lib)도 필수 조건이었다. 따라서 변사는 당대 인기스타였다.
영화만 끝나면 서울 종로 명월관 기생들이나 고관대작이 목소리를 들으려고 변사를 인력거로 납치해갈 정도. “당시 변사의 인기는 지금 가수나 탤런트에 비할 바가 아녜요. 저도 여러 번 납치됐죠. 그만큼 기분도 좋고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변사가 되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물들의 대사와 상황설명은 물론 배경음악까지 담당하는 감독 같은 존재였기 때문. 상황에 따라 다른 색깔의 목소리를 내고 관객들의 분위기도 파악해야 했다. 그는 수많은 연습을 했고 구성진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말 그대로 ‘피를 토할’ 정도로 소리도 질렀다고 했다. 그 덕분에 평생 목이 쉰 적도 없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그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게 해주는 것이 변사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영화의 흐름에 따라 강약을 조절해 관객들이 영화에 빠져들게 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아리랑 마지막 부분에서 영진이 잡혀가는 장면을 애절하게 들려주면 모든 관객이 울기 시작했어요.
-글-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