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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DAM)
계곡 또는 하천을 가로질러 저수·취수·토사저지 등의 목적으로 축조하는 공작물.
제언(堤堰)·언제(堰堤) 등으로 쓴다. 목적에 따라 저수댐·취수댐 및 사방댐 등으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댐이라 하면 저수댐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댐의 특수한 형태로서 토사유출을 저지하는 사방댐 외 광산에서 광물을 제련한 뒤의 찌꺼기를 버리기 위한 댐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하천법」에서는 국제관례에 따라 높이 15m 이상의 것을 댐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떤 한 가지 목적에 이용되는 댐을 전용댐 또는 단일목적댐, 두 가지 이상의 목적에 이용되는 댐을 다목적댐이라 한다.
한편, 구조면에서 보면 수문이 댐의 주체를 구성하는 가동(可動)댐과 그렇지 않은 고정(固定)댐으로 나눈다. 고정댐은 댐마루에 수문을 달아 홍수를 월류(越流: 흘려 보내게 함)시키게 하는 형식의 월류댐과 그렇지 않은 형식의 비월류댐으로 구분한다.
댐을 구성하는 재료를 중심으로 콘크리트댐 및 필댐(fill dam)으로 나누고, 콘크리트댐은 설계형식에 따라 중력식 댐과 아치댐으로 구분하며 필댐은 흙댐과 록필댐(rock fill dam)으로 구분한다. 중력식 콘크리트댐은 콘크리트의 중량으로 물의 압력을 지탱하는 댐으로 콘크리트댐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세계 최고의 중력식 콘크리트댐은 스위스의 그랜드 딕선스댐(Grand Dixence Dam, 높이 285m, 1962)이며, 우리 나라에는 이 형식의 대표적인 댐으로 충주댐·화천댐·대청댐 등이 있다.
필댐은 암석·사력·흙 등의 재료를 쌓아 올려서 만드는 댐의 총칭으로 흙댐과 록필댐이 이에 속한다. 필댐은 댐의 기초 면적이 넓기 때문에 물의 압력과 댐의 중량을 분산시키므로 콘크리트댐보다 지질조건이 불리한 댐 지점에도 건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형식의 세계 최고 댐은 러시아의 로간댐(Rogun Dam, 높이 335m, 1986)이며, 우리나라에는 소양강댐·삼랑진상부댐·안동댐 등이 있다.
댐은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 중에서는 가장 큰 부류에 속하며, 만일 댐이 파괴되었을 때 하류에 전파되는 피해는 엄청나다. 따라서 댐을 건설할 때 가장 기본적 요소는 댐의 안전성·경제성 및 환경에 미치는 영향 문제이다.
1985년에 준공된 충주다목적댐의 경우 현지조사 및 예비 타당성조사에 1958∼1971년의 13년, 타당성조사에 1972∼1977년의 5년, 공사 준비에 1년, 건설공사에 1978∼1985년의 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물론, 충주댐의 경우는 특수한 예라고 할 수 있으나, 보통 댐의 계획 설계를 위한 현지조사에는 수문조사·기상조사·지형조사·지질조사·재료조사 및 환경영향조사 등에 5∼6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조사가 진척됨에 따라 조사결과를 반영하여 댐의 설계도 점차 세부적으로 옮아간다. 댐 지점의 지형·지질·재료 및 홍수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우선 댐의 형식이 선정되고 댐 전체의 모양과 내부의 구조 및 댐 기초 보강을 위한 설계를 하게 된다.
설계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방대한 기술 계산과 모형실험 등을 실시하고, 동시에 여수로 등 하류 방류를 위한 댐방류설비, 담수 후에 댐의 거동을 감시하기 위한 댐 계측설비와, 이러한 댐 관리 장치를 조작하기 위한 관리 설비 등 여러 가지 댐 부속설비의 설계와 공사용 가설비 등을 검토하는데, 현지조사 완료 후 보통 2∼3년의 시일을 거쳐 설계가 확정된다.
댐 건설공사는 먼저 댐 지점에 진입하는 도로공사부터 시작해서 댐 공사장 내의 공사용 도로공사, 공사용 가설비공사, 하천 유수전환을 위한 가배수로공사와 가물막이공사, 댐 기초굴착공사, 댐 기초의 지지력·전단력 및 차수성(遮水性: 물을 차단하는 성질) 보강을 위한 댐 기초처리공사, 댐 축조공사, 방류설비 등 댐 부속설비공사, 이설도로공사, 수몰민 이주대책공사, 저수지 청소공사, 가배수로 폐쇄공사, 시험담수 및 본담수의 순으로 이어져 드디어 댐 공사의 준공을 보게 된다.
댐 건설공사의 핵심인 댐 축조공사는 댐의 안정 강도 및 차수성을 보장하기 위한 과학적인 품질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댐 건설공사는 통상 3∼7년의 시일을 필요로 한다.
댐의 기원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인간의 문명과 같이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기원전 2900년경 이집트에서 축조된 높이 11m, 길이 106m의 석조댐이다.
근대 댐의 선구로는 1594년 스페인에서 관개용 댐으로 건설된 높이 41m의 알리칸테댐(Alicante Dam)을 들 수 있으며, 19세기 프랑스에서 댐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몬순지역 특유의 다우지대이므로 일찍부터 물을 이용하는 쌀농사가 시작되었고, 이와 더불어 관개용 수리시설이 발달하였다. 김제에 있는 벽골제(碧骨堤)는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댐으로 330년(흘해왕 21)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벽골제는 토사를 다져서 만든 흙댐으로 길이 3,240m, 높이 4.3m, 댐마루 너비 7.5m, 댐밑바닥 너비 17.5m, 사용 토량의 부피 16만 1253㎥로서 고대의 토목공사로서는 상상 이상의 대규모공사였다.
벽골제는 오늘날 높이 15m 이상으로 규정하는 댐이라고 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 댐 개발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댐이며, 평탄한 지형에 3,240m에 걸쳐 높이 4.3m의 제언을 축조하면서 적용한 정밀도 높은 수준측량(水準測量) 기법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신라가 축조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의 축조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신라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진 저수지로는 시제(矢堤)·의림지(義林池)·대제지(大堤池)·수산제(守山堤)·공검지(恭儉池) 등이 유명하며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벽골제보다 약 100년 뒤인 429년(눌지왕 13) 벽골제보다 더 규모가 큰 시제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제가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의 제언으로서 현재까지 잔존하는 것은 영천의 청제(菁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등이다. 1968년 12월 신라삼산조사단에 의하여 영천에 있는 청제(청못)가 신라시대에 축조된 제언임이 확인되었다. 청제는 530년(법흥왕 23)에서 596년(진평왕 18)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란 등으로 정치가 불안정하여 댐 건설에 특기할 만한 발전은 없었으나, 995년(성종 15) 공조 산하에 우수부(虞水部)를 설치하는 등 수리행정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일컬어 국초부터 관개를 중심으로 하는 수리행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1395년(태조 4) 권농관제도를 두어 제언수축을 독려하고, 1419년(세종 1) 제언대장(堤堰臺帳)을 2부 만들어 비치하였고,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제언사(堤堰司)라는 관청을 창설하여 댐시설의 신설·조사·수리를 관장하게 하였다.
1662년(현종 3)에는 오늘날의 하천법에 해당하는 「제언사목 (堤堰事目)」을 발표하고 제언사를 복설하여 제언의 간검제도를 부활하고, 1778년(정조 2) 「제언절목(堤堰節目)」을 공포하는 등 조선시대 댐제도면의 치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제언사목」에 따르면 “진흙만으로 물을 가로질러 막으면 비가 오면 곧 무너져 버리니, 큰 나무를 이어서 가로막은 다음 기둥으로 그 뒤를 버티어서 가옥의 간살이처럼 얽어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밑바닥에 많은 돌을 쌓고 돌이 없으면 솔가지를 많이 쌓아 물이 넘쳐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라고 댐공법을 소개하고 있어, 당시 댐기술의 일면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1395년 정분(鄭苯)이 제안하고 「제언절목」에서 전주의 영금제(嬰金堤)와 행광신제(杏光新堤)의 실례를 들어 권장하고 있는 수통공법(水桶工法)과 1798년에 『정조실록』 소개된 정시원(鄭始元)이 창안한 도수잠관공법(導水潛管工法) 등은 댐 관련기술로서 특기할 만하다.
『문헌비고』에 따르면 1782년에 조사한 전국 제언 총수는 3,378개 소에 달하고 있다. 각 도별로는 경기도 270개 소, 경상도 1,522개 소, 전라도 913개 소, 충청도 503개 소, 평안도 55개 소, 황해도 26개 소, 함경도 24개 소, 강원도 65개 소로 제언의 90% 이상이 삼남지방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댐도 삼국시대의 댐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법령에서 15m 이상으로 규정하는 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뒤 20세기 초까지 높이가 낮고 흙으로 쌓아 올린 수많은 관개용 둑을 만들어 온 것이 우리나라 댐기술의 실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댐의 기술개발사를 세계적으로 볼 때, 아시아 지역에서는 주로 흙댐이 발달하였고, 유럽에서는 석조댐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근대적 댐의 역사는 1920년대 후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댐의 시대는 1940년 후에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댐건설의 양적·질적 개화기를 맞이한 것은 1962년 이후의 일이라고 하겠다. 1910년 경술국치 이래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펼치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한반도의 댐 건설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는 북한지역의 중공업화시책으로 자연조건이 유리한 북한지역에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건설함에 따라 큰 규모의 수력발전용댐이 건설되었고, 둘째는 한반도의 식량생산기지화 시책으로 미곡증산을 위해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많은 관개용 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댐 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는 국가사업으로 1915∼1939년 사이 두 번에 걸쳐 전국 25개 주요 하천 조사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1911∼1945년 사이 세 번에 걸쳐 전국 포장수력(包藏水力) 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민족항일기에 건설된 댐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세계적 기술수준에 접근한 큰 규모의 중력식 콘크리트댐이 수력발전용으로 상당수 건설되었다.
둘째, 수력발전용댐의 대부분이 유역변경방식으로 큰 낙차를 얻기 위한 댐이었으나, 수풍댐과 같이 큰 하천 본류에 하천 유량의 연간 조절구실을 할 수 있는 큰 저수용량을 가진 댐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많은 관개용댐이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되었으나 대부분이 높이 20m 미만이고 댐형식 또한 대부분이 흙댐이었다는 것들이다. 세계적으로 댐 건설에 합리적인 설계사상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댐의 전도(顚倒)·활동(滑動) 등에 관한 설계이론이 확립되었다.
20세기 초 포틀랜드시멘트가 출현함으로써 콘크리트댐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고, 특히 미국에서 댐 건설의 신기원을 이룩한 후버댐(Hoover Dam, 높이 221m, 아치식 콘크리트댐, 1936) 등 많은 대규모 콘크리트댐이 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개용 댐으로 대아댐 및 운암댐이, 수력발전용 댐으로 청평댐 및 화천댐 등이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20세기 전반기에 건설되었고, 특히 1941년 압록강 본류에 건설된 수풍댐은 높이 106m, 콘크리트 부피 323만㎥의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근대적 기계화 시공으로 완공됨으로써 우리나라 댐 기술개발사의 전환점을 이룩하였다.
1945년까지 민족항일기에 건설된 수력발전용 주요 댐을 수계별로 살펴보면, 압록강수계에는 부전강(赴戰江)에 부전호댐, 장진강(長津江)에 갈전댐 및 메물댐, 허천강(虛川江)에 연두평댐·황수원댐·내중리댐·사초평댐, 압록강 본류에 높이 106m, 길이 900m, 부피 323만㎥, 총저수용량 112억㎥, 발전출력 70만㎾의 당시 세계 유수의 수풍댐을 1941년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건설하였다.
두만강수계에는 성천강(城川江)에 부령댐, 한강수계에는 북한강 본류에 판유리댐·청평댐 및 화천댐(높이 86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44), 섬진강수계에는 관개용 댐을 겸한 운암댐(높이 26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28) 등을 건설하였다.
한편, 민족항일기인 1920년부터 산미증식정책으로 토지개량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많은 관개용 댐이 건설되었다. 남북한을 통틀어 1945년까지 건설된 관개용댐에 관한 통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1941년도 통계에 보면 1920∼1941년에 건설된 관개용 댐으로 15m 미만의 댐이 193개(75.4%), 15m 이상의 댐이 63개(24.6%)로서 도합 256개로 되어 있다. 63개 가운데 남한에서 건설된 댐이 48개, 북한에서 건설된 댐이 15개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5년까지 남한지역에서 건설된 높이 15m 이상 관개용 댐은 대아댐(높이 33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22) 을 비롯하여 87개이다. 87개 댐 중 48개 댐이 1920∼1941년에 건설되었고 3개 댐은 1915∼1919년, 36개 댐은 1942∼1945년에 건설되었다.
이러하듯 일제는 1942∼1945년에 남한에서 높이 15m 이상의 관개용 댐을 37개나 건설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같은 기간에 북한에서도 식량증산을 위한 관개용 댐 건설에 혈안이 되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높이 15m 이상의 댐을 상당수 건설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0∼1941년 건설된 256개의 관개용 댐을 형식별로 분류하면 흙댐이 252개(98.5%), 중력식 콘크리트댐이 4개(1.5%)로 대부분이 흙댐으로 되어 있다.
8·15광복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댐 건설은 3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광복 이후 휴전 성립까지의 댐 건설과도기이고, 제2기는 6·25전쟁 후 휴전 성립에서 1961년까지의 댐 건설전진기이고, 제3기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 오늘에 이르는 댐 건설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 구분에 따라 각 시기별 댐 건설내용을 요약하면, 제1기는 광복 후의 혼란과 정부의 재정 빈약으로 광복과 더불어 중단되었던 댐 공사의 진행에 급급했던 시기이다.
관개용 댐으로 전라남도 함평의 대동댐(높이 16m, 흙댐, 1949)을 비롯하여 27개의 댐이 모두 흙댐으로 건설되었고, 생활용수 댐으로는 부산의 회동댐(높이 28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46)이 준공되었다. 제2기는 6·25전쟁 이후의 활발한 외국원조와 국고를 주축으로 하여 관개용 댐 건설에 많은 진전을 보았다.
충청남도 보령의 청천댐(높이 20m, 흙댐, 1960)을 비롯하여 169개의 관개용 댐이 모두 흙 댐으로 건설되고, 생활용수 댐으로 경기도 연천의 중리댐(높이 26m, 흙댐, 1960),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제1차 가창댐(높이 28m, 흙댐, 1959) 등의 댐이 흙댐으로 건설되었다.
또한, 1957년 수력발전용 댐으로 괴산댐(높이 28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57)이 우리 기술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제3기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기점으로 전개된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전천후 농업용수개발계획, 수출진흥을 위한 공업고도화계획, 장기 전원개발계획, 국민복지 향상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확장계획 등에서 집약되는 이수·치수·에너지면의 국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고와 외국차관을 뼈대로 수자원 종합개발이 촉진되고, 바야흐로 댐 건설이 경제개발의 기둥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댐 건설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댐 건설기술면의 질적 향상에도 많은 진전을 이룩하였다. 전천후 농업기반 조성을 위하여 장성댐(높이 36m, 록필댐, 1976)을 비롯하여 무려 358개의 관개용 댐이 건설되고, 공업생산기반 조성과 국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용수공급을 목적으로 동복댐(높이 45m, 콘크리트표면 차수형 록필댐, 1985) 등 49개의 생활·공업용수용 댐이 건설되었다.
또한, 에너지원개발을 위하여 춘천댐(높이 40m, 중력식 콘크리트댐, 1965) 등 9개의 수력개발 전용댐이 건설되었다. 그 가운데 청평양수발전소 본댐(높이 62m, 록필댐 1980) 등 4개 댐은 양수발전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 사항은 제3기에 특정다목적댐법의 제정(1963)에 따른 다목적댐의 등장이다. 1973년 록필댐으로 준공한 높이 123m, 길이 530m, 부피 960만㎥, 총저수용량 29억㎥의 소양강다목적댐을 비롯하여 10개의 다목적댐이 건설되었다. 1966년 4월 23일 특정다목적댐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서 수자원 개발체제로 정비되었다.
법제 정비에 따른 다목적댐 개념의 등장과 함께 북한강 유역의 소양강댐(1967∼1973), 낙동강 유역의 안동댐(1971∼1976), 금강 유역의 대청댐(1975∼1980), 남한강 유역의 충주댐(1978∼1985), 낙동강 유역의 합천댐(1983∼1989), 섬진강 유역의 주암댐(1983∼1991), 낙동강 유역의 임하댐(1984∼1992) 등의 대규모 댐이 건설되어 수해와 한해의 극복과 각종 용수 공급 및 수력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1985년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준공한 충주다목적댐은 높이 98m, 길이 447m, 부피 90만㎥, 총저수용량 28억㎥로서 댐 규모 및 댐 기술개발면에서 소양강다목적댐과 더불어 우리나라 댐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20세기 초반 콘크리트댐이 득세한 반면, 필댐은 소규모댐으로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높이 20m 내외의 소규모댐은 대부분이 흙댐, 즉 필댐으로 건설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필댐은 설계이론이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홍수처리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토질역학의 눈부신 발전과 시공기술의 진보, 대형 건설기계의 출현, 수문통계학의 발달로 안전한 홍수처리시설의 설계가 가능하게 됨에 따라서, 195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많은 필댐이 건설되었다.
캐나다의 마이카댐(Mica Dam, 높이 242m, 1972), 러시아의 로간댐(높이 335m, 1986)의 건설을 계기로 바야흐로 20세기 후반은 필댐의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 필댐으로 건설된 소양강다목적댐을 전환점으로 많은 대규모 필댐이 1970∼1980년에 건설되었다.
댐은 원래 하천의 물을 막아 수위가 올라가게 하여 쉽사리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오늘날도 그러한 취수를 목적으로 하는 취수댐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댐의 소임은 하천에 물이 많은 풍수기(豊水期)에 물을 저장했다가 하천에 물이 마르는 갈수기에 사용하는 하천유량 조절기능이라고 하겠다.
연중 사계절을 통하여 풍부한 유량이 흐르는 하천이라면 조절기능을 보유하는 댐을 만들 필요가 없고, 대신 소규모의 취수용 댐과 수로만 가지면 쉽게 하천수를 인수(引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천 연안에 피해를 가져오는 홍수를 댐이 보유하는 공간에 잡아 놓아 홍수량을 감소시키는 기능과 댐에 의하여 수력발전용 낙차를 조성하는 등의 기능도 댐의 중요한 소임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연간 1,274㎜의 강수로 세계의 평균치 970㎜의 약 1.3배이나 인구 1인당 강수량은 3,000㎥으로 세계 평균 3만 4000㎥의 약 11분의 1에 불과한 실정이며, 연 강수량의 3분의 2가 6∼8월에 집중되는 기후 특성과 국토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이므로 홍수가 빠른 속도로 단숨에 바다로 빠져 나가는 지형특성 때문에 하천유량의 계절적 진폭이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극심하다.
따라서, 수자원을 이용하는 면이나 홍수를 방어하는 면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하천을 다스리고 수자원의 고도이용을 위하여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댐에 의한 하천유량의 인공적 조절이 절실하며, 그것도 하천유량의 진폭이 큰 만큼 큰 규모의 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하천은 하상구배(河床勾配: 강바닥의 기울기)가 급하기 때문에, 같은 저수용량을 가진 댐을 만들기 위하여 일본보다는 덜하나, 대륙에 비하여 높은 댐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댐으로 인한 수몰 보상규모가 근래 기하급수적으로 누증하는 추세에 있어, 큰 규모의 댐 건설이 점차 어려워지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 댐 건설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좁은 국토면적에 비해 강수량이 지역적으로 고르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 고루고루 용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대규모댐을 건설하여 수계와 수계를 연계하는 광역용수 공급체계를 확립함과 동시에, 용수 수요지와 가까운 적지적소에 하천의 조절기능을 갖춘 다수의 중규모댐 건설이 절실하다.
댐 건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댐은 하천유량을 조절하여 각종 용수를 공급하고 발전을 하며 홍수를 제어하여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댐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호수면을 이용한 각종 위락시설은 국민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등, 댐 건설의 긍정적인 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연환경·생활환경 및 사회·경제 환경에 미치는 댐의 부정적인 영향이 근래 댐의 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져 호수면적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 부각되고 있다. 팔당댐·대청댐 및 영산강 하구언에서는 부영양화현상(富營養化現象)으로 인한 수질오염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환경에 미치는 댐의 부정적 요인을 줄이기 위해 대처해야 할 당면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수지 수면적 증가에 따른 기상 변화에 대한 대응책, 둘째 댐 공사에 의한 지형파괴·산림훼손지역의 조림·사방사업 등 자연환경의 복원책, 셋째 저수지 내의 정체수역 발생에 의한 탁수의 장기화와 플랑크톤(plankton)의 이상 발생에 따른 부영양화 등 호수의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댐 상류지역의 오염물질 배출 억제책, 넷째 수몰민의 생활기반 상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이주정착사업의 제도화 등이다.
1981∼2001년의 수자원 장기종합개발 기본 계획에 따르면 21세기 초의 우리나라 총용수 수요는 337억㎥로서 그 중 150억㎥는 댐에서 공급하도록 되어 있다. 1986년 말에는 댐공급량은 58억㎥이므로 부족량 92억㎥를 1987∼2001년에 신규로 건설되는 댐에서 공급해야 하는 셈이다.
수자원 장기종합계획(1997∼2011,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2011년의 총용수 수요량은 연 3667백 만㎥이고 총용수 공급량은 연34662백만㎥이므로 부족량은 댐의 건설 등을 통하여 확보해야 할 것이다. 용수 부족량을 댐 건설을 통하여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댐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댐 공사비가 저렴하고 양호한 댐지점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이므로, 지형·지질면에서 불리한 지점에도 댐을 건설하려면 필댐이 더욱 많이 건설되어야 하겠고, 중력식 콘크리트댐도 콘크리트를 진동식 로울러로 다지는 RCD공법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댐 규모면에서도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1960∼1980년의 댐 건설은 대도시·대규모공업단지·대단위농업개발 등 기간·중점 개발과 연계하여 대규모댐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지역간·산업간·소득계층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국토개발정책도 지역간 균형개발을 정책의 기조로 삼게 되어, 수자원의 개발도 대량용수 수요지역 중심에서 지방 도시 중심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므로, 2000년대는 중규모의 다목적댐 위주로 개발될 예정이며, 따라서 앞으로는 환경을 고려하는 환경친화적인 개발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주댐(忠州-dam)
충청북도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사이에 있는 남한강의 댐.
높이 97.5m, 제방길이 447m로 국내 최대규모의 콘크리트 중력댐이다. 총저수량은 27억5000만t이고 댐의 연평균유입량은 44억8200만t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은 97㎢로 우리 나라 최대의 담수호를 이룬다.
1980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완공되었는데, 댐 건설로 66.48㎢가 수몰되었으며 수몰이주민은 4만9627명으로 곳곳에 수몰이주단지 및 단양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댐의 건설로 13억t의 생활용수, 12억t의 관개용수, 8억t의 공업용수를 공급하며 홍수조절량은 6억t이다.
시설발전용량은 41만㎾로 연간 5천만달러의 유류 대체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충주호(忠州湖)에는 관광여객선이 충주∼단양간을 운항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달은 5월과 10월이며 8월의 하계 관광객도 많다.
또한, 관광객은 서울과 경기 지방의 관광객이 전체 관광객수의 약 50%를 차지한다. 그리고 송어·잉어 등의 가두리양식도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추댐.
2021-02-04 작성자 명사십리